두꺼비 단상
제비보다 먼저, 수선화보다 먼저, 아네모네보다 조금 늦게, 두꺼비는봄이 다시 찾아온 것에 대해 나름의 경의를 표한다. 지난가을부터 들어가 누워 있던 땅속 구멍에서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적당한 물웅덩이 쪽으로 최대한 빨리 기어가는 것이다. 무언가가(땅속의 어떤 떨림인지 아니면그냥 온도가 몇 도 올라서인지 잘은 모르지만) 두꺼비에게 깨어날 때가 되었다고 말해준 것이다. 그런가 하면 몇 마리는 내내 잠만 자다 한 해를 아예 빼먹기도 하는 것 같다. 한여름에 땅을 파다가 멀쩡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두꺼비를 몇 번이고 본 적이 있으니 말이다. 이 무렵 두꺼비는 오래 굶주린 뒤라 대단히 영적인 모습인 것이 흡사사순절 막바지에 다다른 엄격한 가톨릭 신자 같다. 동작은 늘어진 듯하면서도 목표가 뚜렷해 보이며, 몸이 오그라들어 눈은 유난히 커 보인다. 때문에 우리는 다른 때엔 느낄 수 없을지 모르지만, 두꺼비가 다른 어떤동물보다도 아름다운 눈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 P277
물에 들어간 뒤 며칠 동안 두꺼비는 작은 벌레들을 잡아먹으며 원기를 회복한다. 그러면서 곧 본래의 몸집도 되찾게 되며, 이윽고 강렬한성생활 단계를 거치게 된다. 그가 아는 것이란(아무튼 수컷이라고 할 때)무언가를 얼싸안고 싶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녀석에게 막대기나 손가락이라도 내밀어보면, 높은 놀라운 힘으로 그것에 단단히 들러붙어 그것이 암컷 두꺼비라도 되는지 한참을 살펴본다. 두꺼비 열 마리 스무 마리가 물에서 한 덩어리로 아무렇게나 뒤엉켜 있는, 그것도 성별 구분 없이아무하고나 붙어 있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다 그것들은 점차서로를 가려내어 이성과 하나씩 짝을 지으며, 결국 수컷이 암컷의 등에맞춤하게 올라탄다. 그때부터 보는 사람은 암수를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수컷이 더 작고 짙으며, 암컷의 목에 팔을 단단히 휘감고서 올라타 있기때문이다. 하루나 이틀 뒤면 암컷은 기다란 줄 모양으로 알을 낳으며, 그것은 갈대 안팎으로 감겨들어 이내 자취를 감춰버린다. 그러고서 몇주가 더 지나면, 물에 조그만 올챙이들이 와글와글해진다. - P278
봄에 관해서라면 영국은행 주변의 좁고 음침한 길들도 빼놓을 수 없다. 봄은 어디나 스며들어 찾아오는 것이다. 어떠한 필터라도 통과할 수있는 신형 독가스처럼 말이다. 봄을 흔히들 ‘기적‘이라 부르곤 하는데, 이 닳고 닳은 비유는 지난 5~6년 동안 새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최근에 우리가 견뎌야만 했던 겨울들 때문에 봄이 다시 기적처럼 여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겨울을 몇 해 동안 보내면서 우리는 봄이 다시 찾아올 거라고 믿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게 되었다. 1940년부터 나는2월이면 항상 이번엔 겨울이 영영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하지만 하계의 여왕인 페르세포네는 두꺼비처럼 거의 같은때만 되면 죽은 것들 가운데서 일어난다. 그리하여 3월 말쯤이면 느닷없이 기적이 벌어지며, 내가 사는 형편없는 빈민가도 변모한다. - P279
권투 시합을 벌이는 광경을 보고 서 있으면서, 할 수만 있다면 그런 나의 즐거움을 막고자 할 중요한 사람들 생각을 얼마나 많이 해보았던가. 하지만 그들은 그럴 수가 없다. 우리가 딱히 아프거나, 배고프거나, 공포에 떨고 있거나, 감옥 또는 행락지에 갇혀 있지 않은 한, 봄은 여전히봄인 것이다. 공장엔 원자탄이 쌓여가고, 도시엔 경찰이 어슬렁거리고, 확성기엔 거짓말이 넘쳐흐른다 해도, 지구는 여전히 태양 주변을 돌고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이 아무리 못마땅한들, 독재자도 관료도 그것을막을 수는 없다. - P282
어느 서평자의 고백
추우면서도 공기는 탁한 침실 겸 거실. 담배꽁초와 반쯤 비운 찻잔이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좀먹은 가운을 입은 남자가 쓰러질 듯한 탁자 앞이 앉아 먼지 쌓인 종이 더미 속에서 타자기 놓을 자리를 찾아내려고 한다. 그렇다고 종이들을 버릴 수는 없다. 쓰레기통이 벌써 넘쳐날뿐더러, 답장 못한 편지들과 아직 못낸 공과금 고지서들 사이에 현금으로 바꾸지 못한 게 거의 확실한 기니짜리 수표가 끼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주소록에 주소를 옮겨 적어야 하는 편지들도 있다. 하지만 그는주소록을 잃어버렸고, 그걸 찾을 생각을 하면 그뿐 아니라 무엇이든 찾을생각을 하면 극심한 자살 충동에 시달리게 된다. - P283
이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작가다. 그는 시인일 수도, 소설가일 수도, 시나리오 작가일 수도, 라디오 방송작가일 수도 있다. 글 써서 먹고사는사람들이 대개 다 비슷하니 말이다. 하지만 여기선 서평자라고 하자. 종이 더미 속에는 묵직한 소포 꾸러미가 반쯤 감춰져 있고, 그 안에는 편집자의 쪽지 왈, ‘일맥상통‘ 할 거라는 다섯 권의 책이 들어 있다. 그게도착한 것은 나흘 전이었지만, 서평자는 48시간 동안 도덕성이 마비되었던 탓에 소포를 열어볼 수 없었다. 그리고 어제서야 굳게 마음먹은 일순간, 소포 끈을 확 풀어버리고 다섯 권의 책을 확인한 것이었다. 교차로의 팔레스타인』, 『과학적인 낙농업』, 『유럽 민주주의의 짧은 역사』(이책은 680 페이지에 무게가 4파운드였다),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의 부족 관습, 그리고 아마 실수로 포함됐을 드러눕는 게 더 좋아』라는 소설이었다. 그의 서평 (800단어 분량이었다)은 다음 날 정오까지 입고 되어야만 했다. - P284
나는 왜 쓰는가
아주 어릴 때부터, 아마도 대여섯 살 때부터 나는 내가 커서 작가가되리란 걸 알고 있었다. 열일곱살 때부터 스물네 살 때까지는 그 생각을 포기하려고 했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그게 내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며 조만간 차분히 앉아 책 쓰는 일을 해야 하리란 의식을 갖고 있었다. 나는 삼남매의 둘째였고 아래위로 다섯 살씩 차이가 났으며, 아버지는 여덟 살이 될 때까지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난 좀 외로웠고, 이내 남들이 싫어할 만한 버릇을 들이는 바람에 학창 시절 내내인기가 없었다. 나는 외로운 아이들이 흔히 그렇듯 이야기를 지어내고상상 속의 인물들과 대화를 나누는 습관을 갖게 됐는데, 애초부터 나의문학적 야심은 고립됐고 과소평가됐다는 느낌이 뒤섞여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에게 낱말을 다루는 재주와 불쾌한 사실을 직시하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알았고, 그것이 나날이 겪는 실패를 앙갚음할 수 있게 해 - P289
주는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내가 어린 시절과 소년 시절을 통틀어 써낸 심각한(즉 심각한 의도로 쓴글은 대여섯 페이지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네댓 살 때 처음으로 시를썼는데, 내가 하는 말을 어머니가 기록한 것이었다. 지금으로선 그게 호랑이에 대한 시였고, 그 호랑이가 ‘의자 같은 이빨을 가졌다는 것 말고는 기억나는 게 없다(꽤 훌륭한 표현 같지만 아마 블레이크의 시 호랑이, 호랑이」를 표절한 것이지 싶다). 1914~1918년 전쟁이 터진 열한 살 때에는 애국시를 써서 지역신문에 실리게 되었고, 2년 뒤 키치너‘의 죽음에 부쳐다른 애국시를 써서 역시 신문에 실렸다. 좀더 나이가 들어서는 서투르고 대개는 완성하지 못한 조지 시대 풍‘의 ‘자연시‘를 이따금 쓰곤 했다. 두 번쯤은 단편소설을 시도했다가 엄청난 실패를 맛보기도 했다. 그시절을 통틀어 내가 심각한 의도를 갖고서 실제로 종이에다 쓴 작품은그 정도가 전부였다. - P290
지금은 별로 대단해 보이지도 않지만 당시엔 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구절이고, "he" 대신 "hee"를 쓴 것도 즐거움을 더해주었다. 묘사의 필요성에 대해서라면 나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만일그 시절 내가 책을 쓰고 싶어 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게 어떤 유의 책이었는지는 분명하다. 나는 결말이 불행하고, 섬세한 묘사와 빼어난 비유가 가득하며, 어느 정도 소리 위주로 단어를 구사한 현란한 구절 또한가득한 아주 묵직한 자연주의 소설을 쓰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처음으로 완성한 소설로, 서른 살 때 썼지만 훨씬 전부터 구상했었던 ‘버마 시절이 실은 다소 그런 유형의 책이다. - P292
‘내가 이런 배경 설명을 일일이 하는 것은, 어릴 때 어떤 식으로 성장했는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한 작가의 동기를 헤아리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글의 주제는 그가 사는 시대에 따라 결정되겠지만(적어도 우리 시대처럼 격동적이고 혁명적인 시대에는 그렇다) 그는 작가 생활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이미 나름의 정서적 태도를 갖게 되며, 그것은 그가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무엇이다. 물론 그는 마땅히 자신의기질을 다스려야 하고, 미성숙한 단계에 고착되거나 비뚤어진 심기에매몰되는 경우를 피해야 한다. 하지만 일찍이 받은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버린다면, 글을 쓰고자 하는 충동 자체가 없어져버릴 것이다. 나는 생계 때문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글을 쓰는 동기는 크게 네 가지라 - P292
고 생각한다(적어도 산문을 쓰는 데 있어서는 말이다). 이 동기들은 작가들다 다른 정도로 존재하며, 한 작가의 경우에도 시기별로나 시대 분위기별로나 그 정도가 다를 것이다.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순전한 이기심. 똑똑해 보이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싶은,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어린 시절 자신을 푸대접한 어른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등등의 욕구를 말한다. 이게 동기가 아닌 척, 그것도강력한 동기가 아닌 척하는 건 허위다. 작가의 이런 특성은 과학자, 예술가, 정치인, 법조인, 군인, 성공한 사업가 등, 요컨대 최상층에 있는모든 인간에게 공통되는 특성이다. 사람들 절대다수는 그다지 이기적이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 서른 남짓이 되면 개인적인 야심을 버리고(많은 경우 자신이 한 개인이라는 자각조차 거의 버리는 게 보통이다) 주로남을 위해 살거나 고역에 시달리며 겨우겨우 살 뿐이다. 그런가하면 소수지만 끝까지 자기 삶을 살아보겠다는 재능 있고 고집 있는 사람들도있으니, 작가는 이 부류에 속한다. 나는 진지한 작가들이 대체로 언론인에 비해 돈에는 관심이 적어도 더 허영심이 많고 자기중심적이라고 생각한다. - P293
2. 미학적 열정.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또는 낱말과 그것의적절한 배열이 갖는 묘미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어떤 소리가 다른 소리에 끼치는 영향, 훌륭한 산문의 견고함, 훌륭한 이야기의 리듬에서 찾는기쁨이기도 하다. 자신이 체감한 바를 나누고자 하는 욕구는 소중하여차마 놓치고 싶지가 않다. 미학적인 동기가 상당히 약한 작가들도 많긴하지만, 팜플렛이나 교과서를 쓰는 저자라 해도 비실용적이지만 매력과애정을 느끼는 낱말들과 문구들이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어도 글꼴이 - P293
나 여백 같은 것들에 상당한 매력을 느끼는 수가 있다. 철도 안내책자수준을 넘어선다면, 어떤 책도 미학적인 고려로부터 딱히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3. 역사적 충동.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후세를 위해 보존해두려는 욕구를 말한다. 4. 정치적 목적. 여기서 정치적‘ 이라는 말은 가장 광범위한 의미로사용되었다. 이 동기는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를 말한다. 다시 말하지만,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것이다. - P294
이런 충동들이 서로 얼마나 충돌할지, 사람과 때에 따라 얼마나 오락가락할지는 알 만한 일이다. 나는 천성적으로(여기서 말하는 ‘천성‘ 이란 막어른이 되었을 때의 성격이라고 하자) 앞의 세 가지 동기가 네 번째 동기를능가하는 사람이다. 평화로운 시대 같았으면 나는 화려하거나 묘사에치중하는 책을 썼을지 모르며, 내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서 지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실제로는 일종의 팜플렛 저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먼저 나는 안 맞는 직업을 택하여 5년을 지냈고(버마에서 ‘인도 제국경찰 노릇을 했다) 그뒤로 빈곤과 좌절을 겪었다. 그로 인해 권위에 대한 나의 타고난 반감이 커져갔고, 처음으로 노동계급의 존재를 충분히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버마에서 일해본 덕분에 제국주의본질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경험들만으로는정확한 정치적 지향을 갖기에 부족했다. 그러다 히틀러가 등장하고, 스페인내전이 발발하는 등등의 사태가 벌어졌다. - P294
스페인내전과 1936~1937년에 있었던 그 밖의 사건들은 저울을 한쪽으로 기울게 했고, 그뒤부터 나는 내가 어디 서 있는지 알게 되었다. 1936년부터 내가 쓴 심각한 작품은 어느 한 줄이든 직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맞서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들이다. 우리 시대 같은 때에 그런 주제를 피해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내가 보기엔 난센스다. 누구든 어떤 식으로든 그런 주제에 대해 쓰고있는 것이다. 그저 어느 쪽을 편들고 어떤 접근법을 따르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 편향을 의식하면 할수록, 자신의 미학적·지적 진정성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정치적으로 행동할 기회가 많아지게 된다. - P297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당파성을, 곧 불의를 감지하는 데서부터다. 나는 앉아서 책을 쓸 때 스스로에게 예술 작품을만들어내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쓰는 건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이나 주목을 끌어내고 싶은 어떤 사실이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나의우선적인 관심사는 남들이 들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미학적인 경험과 무관한 글쓰기라면, 책을 쓰는 작업도 잡지에 긴 글을 쓰는 일도할 수 없을 것이다. 내 작품을 꼼꼼히 읽어보는 사람이라면, 노골적인선전 글이라 해도 전업 정치인이 보면 엉뚱하다 싶은 부분이 꽤 많다는걸 알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에 갖게 된 세계관을 완전히 버릴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계속 살아 있는 한, 그리고 정신이 멀쩡 - P297
한 한, 나는 계속해서 산문 형식에 애착을 가질 것이고, 이 지상地上을사랑할 것이며, 구체적인 대상과 쓸모없는 정보 조각에서 즐거움을 맛볼것이다. 나 자신의 그러한 면모를 억누르려고 해봤자 소용없다. 내가할 일은 내 안의 뿌리 깊은 호오, 이 시대가 우리 모두에게 강요하는 본질적으로 공적이고 비개인적인 활동을 화해시키는 작업이다. 그런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자면 문장의 구성과 표현에 있어서의 문제가 발생하며, 충실성의 문제가 새롭게 개입된다. 보다 투박한유형의 어려움이 있는 예를 하나 들어보자. 내가 스페인내전에 대해 쓴카탈로니아 찬가』는 물론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책이다. 하지만 대체로어느 정도 초연한 마음으로 형식을 고려하며 쓴 작품이다. 나는 이 책에서 나의 문학적인 본능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모든 진실을 말하기 위해상당히 애를 썼다. - P299
그런데 다른 무엇보다 이 책엔 프랑코와 내통한다는혐의를 받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변호하는 신문 인용문 따위가 가득한긴장이 있다. 이와 같은 장은 1~2년 뒤면 일반 독자의 관심에서 멀어질, 말하자면 책을 망칠 게 뻔한 부분이었다. 내가 존경하는 한 평론가는 그 부분에 대해 내게 훈계를 했다. "그런 걸 뭐하러 다 집어넣어요? 좋은 책이 될 만한 걸 보도물로 만들어버렸잖아요." 그의 말은 옳았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영국에선 극소수의 사람들만 알수 있었던, 무고한 사람들이 억울한 혐의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사실을어쩌다 알게 되었다. 그 사실에 분노하지 않았다면 나는 책을 쓸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문제는 어떤 식으로든 다시 제기된다. 표현의 문제는 더 미묘한것이라 거론하자면 너무 길어질 것이다. 일단 내가 근년에는 기발하게쓰기보다는 정확하게 쓰려고 노력해왔다는 점만 밝히기로 하자. 아무튼 - P299
내가 보기엔 어떤 스타일을 완성하고 나면 언제나 그 스타일을 벗어나게 되는 것 같다. ‘동물농장』은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십분 자각하면서) 정치적 목적과 예술적 목적을 하나로 융합해보려고 한 최초의 책이었다. 나는 7년 동안 소설을 쓰지 않았는데, 이제는 조만간 또 하나의 소설을쓰고 싶다. 그것은 실패작이 될 게 뻔하고, 사실 모든 책은 실패작이다. 단, 나는 내가 어떤 종류의 책을 쓰고 싶어 하는지 꽤 분명히 알고 있다. 마지막 한두 페이지를 돌이켜보니 내가 글을 쓰는 동기가 오로지 공공의식의 발현이라는 인상을 심어준 듯하다. 나는 그것이 마지막 인상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모든 작가는 허영심이 많고 이기적이고 게으르며, 글 쓰는 동기의 맨 밑바닥은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 P300
책을 쓴다는건 고통스러운 병을 오래 앓는 것처럼 끔찍하고 힘겨운 싸움이다. 거역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어떤 귀신에게 끌려다니지 않는 한 절대 할수 없는 작업이다. 아마 그 귀신은 아기가 관심을 가져달라고 마구 울어대는 것과 다를바 없는 본능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자기만의 개별성을지우려는 노력을 부단히 하지 않는다면 읽을만한 글을 절대 쓸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동기들 중에 어떤 게 가장 강한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게 가장 따를 만한 것인지는 안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 P300
정치 대 문학: 『걸리버여행기』에 대하여
걸리버 여행기」에서 인간은 적어도 세 가지 각도에서 공격 또는 비판을 당하는데,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걸리버의 성격 자체가 조금씩변한다. 1부에서 그는 전형적인 18세기 항해자로서, 대담하고 실용적이며 비낭만적이다. 그의 수수한 면모는 교묘하게 독자들의 인상에 남는데, 그 장치는 도입부의 자세한 전기적 설명, 그의 나이(모험을 떠날 무렵마흔의 나이에 두 자녀를 두었다), 그의 주머니에 든 이런저런 물건들 특히여러 차례 등장하는 안경이다. 2부에서는 대체로 비슷한 성격을 보이나, 이야기가 요구하는 바에 따라 순간순간 ‘예술과 군사력의 여왕이자프랑스의 재앙인 고귀한 우리 조국‘이니 뭐니 하는 자랑을 늘어놓는 동시에 자신이 사랑한다고 공언한 조국에 관한 온갖 수치스러운 사실을누설하는 백치 같은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3부에서는 1부에서와 상당 - P301
스위프트가 이상으로 삼는 존재인 휴이넘인은 기계적인 감각에서도9뒤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아직 금속의 존재를 모르고, 배라는 것이 있다는걸 들어본 적이 없고, 딱히 농사를 짓는다고도 할 수 없으며 그들의 주식인 귀리가 절로 자란다"는 말이 나온다), 아직 수레바퀴를 발명하지 못한것으로 보인다. 그들에겐 문자가 없으며, 물리적인 세계에 대하여 아무래도 별 호기심이 없는 듯하다. 그들은 자기네 말고는 사람이 사는 나라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며, 해와 달의 운행과 일식·월식의 본질을 이해하긴 하지만, "그게 그들이 가진 천문학의 최고 수준"일 뿐이다. 그에 반해 날아다니는 섬 라퓨타의 학자들은 언제나 수학적인 사색에 골몰해 있어서 그들에게 말을 걸려면 풍선으로 귀를 찰싹 때려줘야만 주목을 끌 수 있다. 그들은 1만 개의 항성을 분류했고, 93개 혜성의 주기를 산출했으며, 화성에 2개의 위성이 있다는 것을 유럽의 천문 - P309
학자들보다 먼저 알아냈다. 그런데 이 모든 정보를 스위프트는 우스꽝스럽고 무익하고 시시한 것으로 여기는 게 분명하다. 예상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는 과학자의 본분은(본분이라는 게 있기는 하다면) 실험실에 있는 것이며 과학 지식은 정치 문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것이다.
내가 ……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뉴스와 정치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갖는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쉴 새 없이 사회문제에 대해 알려고 하고, 나랏일에 대해 왈가왈부하며, 정당의 견해에 대해 조목조목 논쟁을 하는것이었다. 나는 내가 아는 ‘유럽의 수학자들 대부분에게서도 같은 성향을관찰한 바 있다. 나로서는 두 분야 사이에서 아무런 유사성도 발견할 수 없었는데도 말이다. 그것은 그들이 아무리 작은 원도 아주 큰 원과 각도가 같다는점에서, 세계를 단속하고 관리하는 일이 지구의를 만지고 돌리는 것보다 더한 능력을 요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P310
우리는 그가 걸리버 여행기』의 3부를 쓰지 않았다 하더라도,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그가 톨스토이나 블레이크처럼 자연의 이런저런 작용을 연구한다는 생각 자체를 혐오한다는 추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휴이넘인의 속성으로서 그토록‘찬미하는 ‘이성‘의 우선적인 뜻은 관찰되는 사실로부터 논리적 추론을 이끌어내는 힘이 아니다. 그보다는 딱히 말은 안 해도, 대부분의 문맥에서 상식(즉 명백한 것은 받아들이고 억지나 추상을 경멸하는 것)을, 또는걱정이나 미신이 없는 것을 뜻한다. 대체로 그의 견해는, 우리는 알아야할 것들을 이미 다 알고 있으며 우리의 지식을 오용하고 있을 뿐이라는것이다. 이를테면 의학이 무용한 학문인 것은, 우리가 보다 자연적인 생활을 하면 병이 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위프트는 생활을간소하게 하자거나 ‘고결한 야만인‘이 되자고 하는 게 아니다. 그는 문명에도, 그 산물인 온갖 기술에도 찬성한다. 그는 훌륭한 예의범절과 대화법의 가치를, 심지어 문학이나 역사 같은 공부의 가치를 인정할 뿐만아니라, 농업이나 항해나 건축을 연구할 필요가 있으며 유리하게 발전시킬 수 있다는 점도 알고 있다. - P311
먼저, 스위프트는 건설적‘ 이면서 ‘진보적‘ 이기까지 한 면모를 이따금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유토피아 문학에서 종종 일관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것은 활력이 있다는 증거라고 해도 좋으며, 스위프트는 풍자적이기만 해야 할 부분에 때때로 찬사를 끼워넣곤 한다. 그래서 아동교육에 관한 그의 견해는 릴리푸트인의 그것과 같으며, 릴리푸트인은그 문제에 관해 휴이넘인과 같은 견해를 갖고 있는 것이다. 또한 릴리푸트인은 스위프트가 자기 조국에도 보급되길 바라는 다양한 사회제도와법률제도를 갖추고 있다(이를테면 노령연금 제도가 있으며, 법을 어기면 벌을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키면 보상을 받는 제도가 있다). 스위프트는 이 구절한가운데서 자신의 풍자적 의도를 기억하고는 이렇게 덧붙이기도 한다. "이상과 이하의 각종 법률들에 관하여, 내가 말하는 건 본래의 제도이지 인간의 퇴폐적 본성 때문에 이 사람들이 빠져든 더없이 추악한 부패상을 가리키는 건 아니라고 해야 말뜻이 이해될 것이다." - P313
스위프트는 톨스토이, 즉 행복의 가능성을 불신했던 또 한 사람과 상당히 비슷하다(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더 그렇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선 두 사람 다 무정부주의적 관점을 지녔고, 그것은 권위주의적 기질을 감추는 노릇을 했다. 또한 과학에 적대감을 느끼고, 반대자의 견해를 참지 못하며, 자신이 흥미를 못 느끼는 문제의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같다. 그리고 톨스토이의 경우엔더 늦게 다른 경로로 찾아왔지만, 둘 다 인생살이 자체에 일종의 혐오감을 느꼈다. 두 사람의 성적인 불행은 같은 종류의 문제가 아니었으나, 둘다 혐오의 본질이 병적인 집착과 뒤섞여 있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톨스토이는 개심한 방탕자로서 만년엔 완전한 성적 금욕 생활을 설교했으나, 자신은 고령이 되도록 계속해서 정반대의 생활을 했다. 스위프트는성불구였던 것으로 보이며, 사람 똥을 지나치게 혐오했는데, 그러면서도 그의 작품들 도처에 분명히 드러나듯 끊임없이 똥 생각을 했다. - P319
그런가 하면 시에 대한 취미가 그들의 자질 중에 두드러지는 것은, 시가 스위프트의 관점에서 가장 무익한 추구인 과학에 대립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일 수 있다. 3부에서 그는 라퓨타의수학자들에게 전적으로 결여된 바람직한 능력으로 "상상, 공상, 창의" 를 지목한다(그들은 음악을 아주 좋아하긴 한다). 여기서 우리는 스위프트가해학시의 명수이긴 해도 그가 가치 있다고 생각한 시는 아마도 교훈시에 더 가까웠으리란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는 휴이넘의 시에 대해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에 관해서라면 다른 어떤 존재보다 뛰어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비유의적절함, 묘사의 정확함과 세밀함은 도무지 흉내낼 수 없을 정도다. 그들의 시는 이 두 가지 점에서 아주 뛰어나며, 대개 우정과 박애의 관념을 고양하거나경주 등 운동의 우승자를 찬미하는 내용이다. - P322
지적으로 공평무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과 입장이 전혀 다른작가의 장점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즐기는 건 다른 문제다. 좋거나 나쁜 예술이란 게 있다고 한다면, 좋거나 나쁜 속성이 예술작품 자체에 (그것도 보는 사람보다는 보는 사람의 기분과 전혀 무관하게 존재해야 한다. 때문에 어느 시에 대해 월요일에는 좋고 화요일에는 나쁘다고 평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옳을 리 없는 말이다. 그러나 그 시가 불러일으키는 감상感想에 따라 판단한다면, 그 말은 분명 옳을 수 있다. 왜냐하면 감상이나 향유는 주관적인 상태이며, 남이 강요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교양있는 사람이라도 깨어 있는 시간의 상당 부 - P324
분을 아무런 미적 감정 없이 보내며, 감정을 느끼는 능력은 너무나 간단히 훼손될 수 있다. 공포나 허기에 시달리거나 치통이나 뱃멀미를 앓을때, ‘리어왕』은 『피터 팬보다 하등 나을 게 없을 수 있다. 지적으로는더 낫다는 걸 알 수 있을지 몰라도, 그야 기억하는 사실일 뿐이다. 『리어왕의 장점을 ‘느끼게 되려면 정상 상태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미적인 판단은 정치적이거나 도덕적인 의견 차이 때문에 마찬가지로 극심하게(이 경우 원인을 알아차리기가 더 어려우므로 더 심할 수 있다) 뒤바뀔 수 있다. 어떤 책 때문에 노하거나 마음의 상처를 받거나 놀랄 경우, 책의 장점이 무엇이든 즐기지 못할 수 있다. 책이 자신에게 대단히 해롭거나 남들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방식으로 영향을 끼칠 것 같아 보인다면, 그 책에 아무런 장점도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미학 이론을 세울 수도 있다. 오늘날의 문예비평이란 주로 그런 두 가지 기준 사이를 교묘히 오가는 식이다. 그런가 하면 정반대의 경우도 발생한다. - P325
우리 마음의 일부는(정상인의 경우 가장 우세한 부분이다) 인간이 고귀한 동물이며 삶은 살 만한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에 비해적어도 이따금씩은 존재의 끔찍스러움에 아연실색하는 일종의 내적 자아 같은 게 있는 것이다. 참으로 묘하게도, 쾌락과 혐오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인간의 신체는 아름답다. 그런가 하면 인체는 역겹고 우스꽝스럽기도 한데, 이는 아무 수영장에나 가보면 확실히 검증할 수 있는 사실이다. 인간의 성기는 갈망의 대상이기도 하고 혐오의 대상이기도 한데, 예컨대 다는 아니어도 많은 언어에서 성기의 명칭 자체가 욕설로 쓰인다. 고기는 맛있지만 푸줏간에 가면 속이 메스꺼워진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은 궁극적으론 다른 무엇보다 우리가 끔찍스러워하는 똥과 시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유아기를 지나도 세상을 여전히 새로운 눈으로 보며, 경이로움 못지않게 혐오스러움에도 마음이 움직인다. 이를테면 코딱지와 침, 인도에 싸놓은 개똥, 구더기가가득한 채로 죽어가는 두꺼비, 어른의 땀 냄새, 대머리에 주먹코인 노인의 흉한 몰골이 주는 혐오감에도 크게 끌리는 것이다. - P327
흔히들 어떤 책이 명백히 그릇된 인생관을 표방한다면 ‘좋은 책이라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곤 한다(적어도 주제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은그렇게 주장한다). 예컨대 우리는 우리 시대에 진정한 문학적 장점을 지닌책은 어느 정도 ‘진보적‘ 성향을 보인다는 말을 듣곤 한다. 그런데 이는사실을 무시하는 말이다. 역사를 통틀어 지금과 같은 진보 대 반동의 투쟁은 언제나 있어왔으며, 어느 시대든 최고의 양서들은 항상 다양한 관점을(다른 것들에 비해 명백히 잘못된 관점들까지도) 반영해왔던 것이다. 어느 작가가 선전원 노릇을 하는 한, 우리가 그에게 요구할 수 있는 최선은 그가 자신이 하는 말을 진정으로 믿을 것, 그리고 심하게 어리석은말은 하지 않을 것 정도다. 오늘날에는 이를테면 가톨릭 신자나 공산주의자, 파시스트, 평화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또는 옛날 스타일의 자유주 - P328
14의자나 일반 보수주의자가 좋은 책을 쓸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심령술사나 부크먼 추종자, KKK 단원이 좋은 책을 쓸 거라는 생각은할 수 없을 것이다. 작가의 관점은 정신건강 차원의 온전함, 그리고 자기 생각을 밀어붙이는 힘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 이상으로 우리가요구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재능일 것이며, 그것은 확신의 다른 이름이라할 수 있을 것이다. 스위프트는 정상적인 의미의 지혜를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서울 정도로 강렬한 비전은 확실히 갖고 있었으며, 그것은 숨겨진 진실 하나를 골라내어 확대하고 비틀어서 볼 줄 아는 능력이기도 했다. ‘걸리버 여행기』가 오랜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을 보면, 작가의 세계관이 온전함이라는 기준을 겨우 만족시키는 수준일지라도, 작가의 확신이 뒷받침해준다면 위대한 예술 작품을 충분히 낳을 수 있음을 알게 된다. - P329
가난한자들은 어떻게 죽는가
1929년, 나는 파리 15구에 있는 병원‘ ‘에서 몇 주를 보낸 적이 있다. 병원 창구 직원들은 접수처에서 내게 통상적인 고문 코스를 거치게했다. 한 20분 내내 질문에 답하게 만들고 나서야 나를 받아주었던 것이다. 라틴계 국가에서 서식을 작성해본 사람이라면 내가 말하는 질문이란 게 어떤 것인지 알 것이다. 그때까지 며칠 동안 나는 열씨를 화씨로 환산할 줄 몰랐지만 내 체온은 화씨 103도 정도였고, 면담이 끝날무렵에는 내 발로 서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내 뒤로는 체념한 환자들무리가 색색의 보따리를 들고서 질문 받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질문 다음은 목욕이었다. 감옥이나 구빈원의 경우처럼 새로 온 사람이면 누구나 거쳐야 하는 과정인 듯했다. 옷을 다 벗어서 내놓은 다음, 나는 깊이가 5인치밖에 안 되는 미지근한 온탕에 앉아 몇 분을 덜덜 떨다가 리넨 잠옷과 짧은 파란색 플란넬 가운을 지급받은 뒤(슬리퍼는 내 - P331
그것은 운 좋은 사람들, 즉 늙을 때까지 사는 사람들이 맞이하는 죽음이었다. 사람은 물론 살고 싶어 하며,죽음에 대한 두려움 덕분에 계속 살아가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때이후로 나는 험하게, 그리고 너무 늙지 않았을 때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을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전쟁의 참상에 대해 얘기하곤 하는데, 인간이 만들어낸 무기치고 서민이 병으로 죽어가는 참혹함에 근접이라도 하는 게있을까? ‘자연사 란 정의상 더디고 냄새나고 고통스러운 무엇이어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연사를 하더라도 공공시설이 아니라자기 집에서 죽음을 맞을 수 있다면 질적으로 다른 일이다. 거의 다타버린 초처럼 깜빡깜빡하다 꺼져버린 그 가련한 노인은 임종하는 사람하나 없을 정도로 하찮았다. 그는 숫자 하나에 불과했으며, 의대생들의해부 ‘교재 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장소에서, 아무나 다 보는 데서죽어가는 비참함이란! - P338
나는 옷을 되찾고 걸어다닐 정도가 되자마자, 때가 되어 정식으로 퇴원을 하기 전에 X병원을 탈출해버렸다. 그곳이 내가 탈출한 유일한 병원인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음침함과 삭막함, 불쾌한 냄새,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병원 특유의 묘한 정서적 분위기는 내 기억 속에 예외적인것으로 남아 있다. 내가 그 병원에 간 것은 그곳이 내가 거주하는 지구에 있었기 때문이며, 나는 입원한 뒤에야 그곳 평판이 좋지 않다는 걸알 수 있었다. 내가 나오고서 1~2년쯤 뒤에는 저명한 사기꾼인 아노Hanaud 부인이 수감 중에 병이 들어 X병원으로 실려갔다가, 며칠 뒤 간수들을 용케 따돌리고 택시를 타고서 교도소로 돌아가서는 감옥이 더편하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X병원은 그 시절에도 프랑스에서 꽤 별난병원이었던 게 분명하다. 거의 대부분이 노동자인 그곳 환자들은 놀라울 정도로 체념적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그만하면 지낼 만하다고까지여기는 것 같았다. 적어도 두 사람은 겨울을 나기 좋겠다는 생각으로 입원한 가난한 꾀병 환자였던 것이다. 간호사들은 알면서도 모르는 체했는데, 꾀병 환자들이 허드렛일을 자청함으로써 도움이 되었던 까닭이다. - P340
하지만 대다수의 태도는 이런 것이었다. 물론 여긴 형편없는 곳이다. 하지만 더 이상 뭘 기대하겠는가?‘ 그들에게는 새벽 5시에 깨워져3시간을 기다린 후에 멀건 수프를 먹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해야 하는것도 아무도 곁에 있어주지 않는 가운데 사람이 죽어야 하는 것도, 심지어 치료받을 기회조차 의사가 지나칠 때 얼마나 눈길을 잘 끄느냐에달려 있다는 것도 별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살아온 바에 따르면 병원이란 으레 그런 곳이었다. 심각하게 아프면 그리고 자기 집에서 치료를받을 만한 형편이 못 되면 병원에 가야 하는 것이고, 일단 병원에 가면군대에 간 기분으로 거칠고 불편한 환경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건, 지금 영국인의 기억에선 거의 사라져버린 옛이야기들, 이를테면 순전히 호기심 때문에 메스를 들이대거나 마땅한 권한을 위임받기도 전에 수술부터 해버리는 걸 즐겁게 여기는 의사에 대한 이야기들 - P341
극빈자들 사이에선 아직도 남아 있을 터이며, 일반인들의 경우에도 최근에 와서야 사라졌다. 그것은 우리 의식의 표피 속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발견되는 어두운 일면이다. 앞에서 나는 X병원의 병동에 들어가면서 묘한 익숙함을 의식했다는 말을 했다. 그 풍경에서 내가 떠올린 것은 물론 악취가 진동하고 고통이 가득한 19세기의병원이었고, 그것은 내가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사람들 사이에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로 알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무언가가, 아마도 너저분한 검은 가방을 든 검은 옷 차림의 의사가 아니면 단지 그 지독한 악취가 내 기억 속에서 20년 동안 잠들어 있었던 테니스의 시 「아동병원」을들추어내는 요술을 부린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어릴 때 간호사에게 그시를 소리내어 읽어달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 간호사는 테니슨이 그시를 쓴 당시에도 간호사 노릇을 했을지 모를 정도로 나이가 많았다. 그녀에겐 그 옛날 병원의 공포와 고통이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우리는 그 시를 함께 읽고 들으며 몸서리쳤고, 그뒤로 나는 그 시를 잊고살았다. 시 제목을 들었다 해도 아무 기억도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 P345
리어, 톨스토이 그리고 어릿광대
톨스토이의 팜플렛 글들은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덜 알려져 있으며, 그중에 셰익스피어에 대한 공격‘은 적어도 영어 번역본으로는 구하기조차 쉽지 않은 문헌이다. 그러니 이 팜플렛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그 내용을 요약해보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톨스토이는 셰익스피어가 자신에게 평생 "어찌할 수 없는 반감과 따분함"을 불러일으켰다는 말부터 시작한다. 문명 세계의 평가가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걸 의식한 그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러시아어와 영어와 독일어로 읽고 또 읽기를 거듭했으나 "매번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말한다. 그것은 "반감과 지루함과 당혹감‘이었다. 그러던 그는 75세가된 마당에 셰익스피어의 전작을 역사극까지 포함하여 전부 다시 읽어보고는 이렇게 소감을 밝히고 있다. - P347
셰익스피어의 명성이 ‘시작‘ 된 정황에 대하여, 톨스토이는 18세기 말독일 교수들의 "자극"이 있었다는 설명을 단다. 그의 명성은 "독일에서발원한 다음 영국으로 전이됐다"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말로는 독일인들이 셰익스피어를 띄우기로 한 것은 이렇다 할 독일 드라마는 없고 프랑스 고전문학은 딱딱하고 인공적인 느낌을 주기 시작하던 무렵, 셰익스피어의 "기발한 장면 전개에 사로잡히고 그에게서 자신들의 인생관이 표현되고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괴테가 셰익스피어를 위대한시인이라 칭송하자, 다른 모든 비평가들이 앵무새 군단처럼 떼를 지어그를 따랐고, 그뒤로 다같이 셰익스피어에게 홀리는 현상이 지속됐다는것이다. 그 결과 드라마는 질이 더욱 떨어졌고(톨스토이는 당대의 연극판을힐난하면서 자신의 희곡들도 포함시키는 세심함을 발휘한다) 보편화된 도덕관은 더욱 타락하게 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이어서 톨스토이는 "셰익스피어에 대한 그릇된 찬미" 가 그 자신이 싸울 의무를 느끼는 중요한 해악이라고 말한다. - P352
톨스토이의 팜플렛을 읽은 영어권 독자의 눈에 제일 먼저 띄는 점 하나는 글이 셰익스피어를 시인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책자에서 셰익스피어는 극작가로 다뤄지며, 그의 인기가 위조된 게 아니라면 그 인기의 비결은 영리한 배우들에게 좋은 기회를 주는 연출에 있다는게 톨스토이의 주장이다. 그런데 적어도 영어권 나라들만 놓고 볼 때그런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셰익스피어 애호가들이 가장 높이 사는 희곡들(이를테면 ‘아테네의 타이먼)은 좀처럼 또는 아예 상연되지 않으며, 반면에 제일 공연하기 좋은 한여름 밤의 꿈』같은 작품은 제일 추앙을덜 받는 까닭이다. 셰익스피어를 제일 좋아하는 사람들이 으뜸으로 꼽는 그의 장점은 언어 구사력이다. 이는 또 한 명의 혹독한 비판자인 버나드 쇼 같은 사람도 "저항할 수 없는" "언어 음악으로 인정하는 바이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그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며, 시가 해당 언어를구사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모르는 듯하다. 그런가 하면 톨스토이의 입장이 되어 셰익스피어를 외국 시인으로생각하려 해도 톨스토이가 빠뜨린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해 보인다. - P355
톨스토이는 성인은 아니었지만 성인이 되기 위해 몹시 노력했으며, 그가 문학에 적용한 기준은 탈속적인 것이었다. 성인과 범인의 차이는 정도가 아닌 부류의 차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달리 말해범인을 성인의 불완전한 형태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튼 톨스토이가 생각하는 유의 성인은 속세의 삶을 개선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그런 삶을 끝내고 그 대신에 다른 걸 갖다놓으려고 한다. 그런 태도를 확실히 표현해주는 것이 결혼보다는 금욕적 독신 생활이 더 ‘고매‘ 하다는 주장이다. 톨스토이는 사실상 우리가 번식과 싸움과 투쟁과 향유를 그만둘 수만 있다면,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우리를 지상에 묶어두는 다른 모든 것들(한 인간을 다른 인간보다 편애한다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사랑을 포함해서)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모든 고통스러운 과정끝나버리고 하늘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 P364
톨스토이가 팜플렛에서 말한 대로라면, 톨스토이는 셰익스피어에게선 아무 장점도 발견할 수 없었으며, 동료 작가인 투르게네프나 페트‘등과 같은 이들의 생각이 자신과 다른 것을 보고 언제나 몹시 놀라곤 했다. 우리는 거듭나지 않았던 시절의 톨스토이였다면 이런 결론을 내렸으리라 확신해도 좋을 것이다. "당신은 셰익스피어를 좋아하고, 나는안 좋아할 뿐. 그쯤만 해두자." 그러다 나중에 세상엔 온갖 일이 다 있기마련이라는 인식이 그를 떠나버리자, 그는 셰익스피어의 글이 자신에게위험한 무엇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셰익스피어에게서 더많은 즐거움을 발견할수록 톨스토이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니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걸 누구에게도 허용해선 안 되듯이, 셰익스피어를 즐기는 걸 누구에게도 허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물론톨스토이는 강제로 막으려 하지는 않았다. 그는 경찰이 셰익스피어의책들을 전부 압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에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셰익스피어에 대해 심술을 부리려고 한다. 그는 모든 셰익스피어 애호가의 마음속에 들어가 생각할 수 있는 온갖 수법(그의 팜플렛을요약하며 언급한 바와 같이 자기모순적이거나 정직성이 의심되는 주장들을 포함한다)을 동원해 그들의 기쁨을 말살하려 한다. - P370
그런 시험이 타당하다면,나는 셰익스피어 건에 대한 판결은 ‘무죄‘ 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모든 작가들처럼, 셰익스피어 역시 조만간 잊혀질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는 더 호된 고발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톨스토이는아마도 당대에 가장 존경받은 문인이었을 것이며, 팜플렛 작가로서의실력도 떨어지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셰익스피어를 향해 전함의모든 포문을 한꺼번에 열듯이 온 힘을 다해 비난을 퍼부었다. 결과는 어찌 됐는가? 40년이 지난 지금, 셰익스피어는 아무 영향도 받지 않은 채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그리고 그를 쓰러뜨리려는 시도는, 누렇게 바랜팜플렛 종잇장들 외에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 거의 아무도 읽지 않는, 만약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의 작가마저도 아니었다면, 완전히 잊혀졌을 팜플렛 말이다. - P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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