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비밀을 누설한다
스페인내전은 아마도 1914~1918년의 대전 이후 그 어떤 사건보다 풍성한 거짓을 낳았을 것이다. <데일리 메일>지 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수녀들이 대대적으로 강간당하고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고도 하지만, 제일 큰 해악을 끼친 게 과연 파시스트 신문들인지는 의심스러운일이다. 영국 대중이 투쟁의 진상을 파악하지 못하도록 훨씬 더 교묘한왜곡 수법으로 방해를 한 건 <뉴스 크로니클>이나 <데일리 워커> 같은좌파신문들이기 때문이다. - P51
이들 신문이 그토록 주도면밀하게 흐려버린 사실은 스페인 정부가(준2자치적인 카탈로니아 정부도 포함해서) 파시스트보다는 혁명을 훨씬 더 두려워한다는 점이었다. 이제는 전쟁이 모종의 타협으로 끝날 게 거의 확실하다. 게다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빌바오 를 내줘버린 정부가과연 꼭 이기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기나 한 건지 의심할 만한 근거도 있다. 그런가 하면 정부가 자체 혁명 세력을 분쇄하는 데는 너무 철저하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얼마 전부터는 공포정치가 자행되어왔다. 정당에 대한 탄압, 언론에 대한 숨 막힐 듯한 검열, 끊임없는 첩보활동, 재판 없는 대량 투옥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6월 말에 바르셀로나를 떠나올 때 감옥은 그야말로 미어터졌다. 일반 감옥은 수용인원을 초과한 지 오래여서 수감자들은 빈 가게를 비롯해 임시 감옥으로 쓰일 만한 곳 어디로든 마구 처넣어졌다. 그런데 특히 주목할 점은지금 투옥되어 있는 사람들이 파시스트가 아니라 혁명운동가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식견이 너무 오른쪽 이어서가 아니라 너무 ‘왼쪽‘ 이어서갇혀 있다. 그리고 그들을 그곳에 가둔 데 책임이 있는 이들은 가빈‘이덧신을 신고도 이름만 들어도 부르르 떠는 무시무시한 혁명가들, 바로공산주의자들인 것이다. - P52
그 와중에도 프랑코와의 전쟁은 계속됐다. 그러나 최전선의 참호에서싸우는 불쌍한사람들이 아닌 이상, 이 전쟁을 진짜 전쟁으로 여기는 이는 공화국 정부 내에선 아무도 없었다. 진짜 싸움은 혁명과 반혁명 세력간의 대결인 것이다. 다시 말해 1936년에 쟁취했던 작은 것에 헛되이매달리는 노동자들, 그리고 그것을 그들에게서 너무나 성공적으로 탈환하고 있는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연합 세력 사이의 싸움인 것이다. 공산주의가 이제는 반혁명 세력이 되었다는 사실을 따라잡은 사람이 아직도영국에 거의 없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 공산주의자들은 어디서나 부르주아 개량주의 세력과 동맹을 맺고 있으며, 혁명적 성향을 보이는 정당이 있으면 강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분쇄하거나 비방하고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우파 지식인들로부터 악랄한 ‘빨갱이‘ 라며 맹공을 당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실은 그들과 이해가 맞아떨어지는 어이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윈덤 루이스 씨 같은 사람들은 적어도 당분간은 공산주의자들을 사랑해야만 한다. 스페인에서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연합 세력은 거의 완벽한 승리를 거두고 있다. - P53
심각한 비상사태가 벌어질 경우, 대중전선에 내재된 모순은 절로 모습을 내보이게 되어 있다. 노동자도 부르주아도 파시즘에 맞서 싸우긴하되, 둘이 같은 것을 위해 싸우는 건 아닌 까닭이다. 다시 말해 부르주아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즉 자본주의를 위해 싸우며, 노동자는 문제를이해하는 한 사회주의를 위해 싸우는 것이다. 혁명 초기에 스페인 노동자들은 문제를 아주 잘 인식하고 있었다. 파시즘이 패하는 지역에서 그들은 저항 병력을 몰아내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지역위원회, 노동자 민병대, 경찰력 등등을 이용하여 땅과 공장을 장악하고 투박하나마 노동자 정부의 기초를 세우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들은 공화국 정부를 명목상으로만 통제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 P55
이 글의 전반부에서, 나는 스페인 정부 입장에서 볼 때 진짜 싸움은혁명과 반혁명 세력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정부가 프랑코에게 지지 않으려고 몹시 애를 쓰긴 하되, 전쟁이 터지면서 일어난혁명적인 변화를 돌이키기 위해 훨씬 더 애를 태웠다고 했다. 이런 말을 하면 어떤 공산주의자는 오해거나 악의적인 거짓말이라며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혁명이 일어난 적이 없기 때문에 스페인 정부가 혁명을 분쇄한다는 말은 난센스이며, 지금 우리가 할 일은 파시즘을 꺾고 민주주의를 방어하는 것이라 말할 것이다. 바로 이 맥락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반혁명 선전이 과연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알아보는 게 대단히 중요하다. 공산당 세력이 아직 작고 비교적 약한 영국에서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우리는 영국이 소련과 동맹을 맺는다면 그게 어떤 상관이 있는 일인지 당장 알게 될 것이다. 아니면 더 이를 수도 있으니, 자본가들도 언젠가부터 공산주의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점점 깨달아감에 따라 공산당의 영향력은커지게 마련인 까닭이다. - P58
그렇다면 트로츠키주의자란 무엇인가? 이 끔찍한 명칭은 영국에서는이제 막 쓰이기 시작하고 있다(지금 이 순간 스페인에선 트로츠키주의자란 소문만 나도 재판 없이 감방으로 끌려들어가 무한정 갇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더 자주 듣게 될 말이다. ‘트로츠키주의자‘ (또는 트로츠키 파시스트 )란 말은 대체로 좌파 세력을 분열시키기 위해 매우 혁명적인 자세로위장한 파시스트를 지칭한다. 그런데 이 말이 지닌 독특한 힘은 그것이세 가지 뜻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즉 트로츠키주의자는, 트로츠키처럼 세계혁명을 바라는 사람일 수도, 트로츠키가 우두머리인실제 조직의 일원일 수도(정확한 용례는 이 경우 하나뿐이다), 이미 언급한위장 파시스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멋대로 어느 하나를다른 하나에 겹쳐놓을 수가 있다. 달리 말해 첫 번째 뜻의 경우 두 번째뜻을 포함할 수도 포함하지 않을 수도 있고, 두 번째 뜻의 경우엔 거의항상 세 번째 뜻을 동반하게 된다. - P59
그건 그렇고, 전쟁에서 이길 수는 있을까?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이혁명적 혼란을 막는 쪽으로 행사됨에 따라, 러시아의 원조와는 별개로군사적인 역량이 커진 감은 있다. 1936년 8월부터 10월까지는 무정부주의자들이 정부를 구했다면, 10월 이후로는 공산주의자들이 구했다. 그런가 하면 그들은 방어를 조직화하는 과정에서 스페인 내부의 열정을죽이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징병제를 가능케 하는가 하면 필수적인 것으로 만들기도 했다. 이미 금년 1월 초에 자발적인 모병이 사실상 없어졌다는 건 의미심장한 일이다. 혁명군은 때로는 열정으로 이기기도 하지만, 징집군은 무기로만 이길 수 있다. 그리고 프랑스가 개입하지 않는한, 아니면 독일과 이탈리아가 스페인의 식민지들을 낚아채고 곤경에처한 프랑코를 내버려두기로 하지 않는 한, 정부군이 군사력에서 우위를 점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전반적으로 정부가 궁지에 몰릴 가능성이 다분해 보인다. 그렇다면 정부는 꼭 이겨야겠다는 의지가 있는가? 지려고 하지 않는다는 건 확실하다. 그런가 하면 확실한 승리, 즉 프랑코가 망명하고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이 바다로 내몰리는 상황이 올 경우 곤란한 문제들이생긴다. - P61
내가 이 글에서 말한 모든 것은 스페인에서, 심지어는 프랑스에서도쉽게 들을 수 있는 소리다. 그런데 영국에선 스페인내전에 대한 관심이그토록 대단함에도 스페인 정부 막후에서 벌어지고 있는 엄청난 갈등에대해 들어본 사람이 너무 없다. 물론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스페인의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엄연히 고의적인 음모가 있기 때문이다(구체적인 사례들을 들 수도 있다). 양식 있게 행동해야 할 사람들이, 스페인의 진실을 이야기하면 파시스트 선전에 이용될 것이라는 이유로모르는 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비겁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스페인내전의 진상 보도를 접할 수 있었다면, 영국 대중은 진짜 파시즘이 무엇이며 그것에 어떻게 맞서 싸울지 알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뉴스 크로니클>에서 그리는 파시즘은 경제공황 속에 블림프대령‘ 스타일의 살인들이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설쳐대는 식이고 그것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단단히 굳어져버렸다. 이렇게 우리는 파시즘에 맞서는 대전에(1914년 전쟁은 ‘군국주의에 맞서는 것이었다) 한발 더 다가서게 되었으며, 그 덕분에 파시즘의 영국식 변종은 당장이라도 우리의 목을 스치고 지나가버릴 수 있게 되었다. - P62
나는 왜 독립노동당에 가입했는가
먼저 개인적인 입장에서 접근하는 게 아마도 가장 솔직한 일일 것이다. 나는 작가다. 모든 작가는 ‘정치에 거리를 두려는 충동을 느낀다. 평화롭게 책을 쓸 수 있도록 내버려두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런 이상은 기업형 슈퍼마켓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기를 바라는 구멍가게 주인들의 꿈보다도 실현 불가능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 우선 언론 자유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다. 영국에서 언론의 자유는언제나 일종의 사기였다. 마지막 순간에는 언제나 돈이 의견을 지배한다. 그런가 하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할 법적 권리가 있는 한 별난 작가가 빠져나갈 구멍은 언제나 있기도 하다. 지난 몇 해 동안 나는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책들을 쓰면서도 자본가계급으로 하여금 매주 및 파운드의 대가를 지불하도록 하는 생활을 어찌어찌 할 수 있었다. - P63
나는 그런 상황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것은 내가 아주까리기름이나 고무 곤봉이나 강제수용소에 맞서 싸우는 것과 매한가지 일이다. 그리고 길게 볼 때 언론의 자유를 감히 허용할 체제는 사회주의 체제밖에 없다. 파시즘이 승리한다면 나는 작가로서는 끝이다. 즉, 내가 가진 유일하게 쓸 만한 능력이 끝이라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내가 사회주의 정당에 가입할 이유는 충분할 것이다. 개인적인 입장을 먼저 얘기했는데, 그런 사정만 있는 건 물론 아니다.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금 우리 사회와 같은 곳에 살면서 변화를 바라지 않을 수 없다. 지난 10년 동안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본성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버마에서 영국 제국주의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목격했고, 영국에 와서는 빈곤과 실업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나로서는 그런시스템에 맞서 싸운다는 게, 주로 독서 대중에게 영향을 끼쳤으면 하는책들을 쓰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계속해서 그렇게 하겠지만, 지금 같은시기에는 책을 쓰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 P64
그렇다고 내가 노동당에 대한 신뢰를 전부 잃었다는 건 아니다. 내가가장 열렬히 바라는 바는 노동당이 다음 총선거에서 확실한 다수 의석을 차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노동당의 역사가 어떠했는지를 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끔찍한 유혹, 즉 제국주의 전쟁을 준비하기위해 모든 원칙을 배 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은 유혹이 어떤 것인지 안다. 지금은 박해를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사회주의 원칙을 타협하지 않을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일군의 사람들이 꼭 필요한 때다. 나는 독립노동당이 제국주의 전쟁이나 영국적 형태로 나타날 파시즘에 맞서 바른 노선을 견지할 수 있는 유일한 정당이라 믿는다. 지금 독립노동당은 어떤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른 지지를 받는 것도 아니고, 여러 방면으로부터 체계적인 비방을 받고 있다. 그러니 받을 수 있는 도움은 다 받을 필요가 있으며, 거기엔 내가 줄 수 있는 어떠한 도움도 포함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스페인에서 독립노동당 파견대와 함께 행동했다. 나는 그때나 그 이후로나 통일노동자당POUM이 내세우고 독립노동당이 지지한 방침에 전부 동조할 수는 없었지만, 사태의 전반적 진전을 보면 그들이 정당했음을 알 수 있다. - P65
마라케시
시신이 지나갈 때 레스토랑 테이블의 파리들은 구름처럼 몰려가더니몇 분 뒤에 돌아왔다. 운구 행렬 한 무리가 (모두 성인 남자들과 소년들뿐이고 여자는 없었다) 곡소리를 내며, 석류 무더기와 택시와 낙타가 붐비는 장터 사이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고 있었다. 파리들의 입장에서 정말 끌리는 것은, 이곳에서는 시신을 관에 넣는 법 없이 그냥 넝마에 싸서 투박한 나무들것에싣고는 친구 넷이서 어깨에 져 나른다는 점이다. 친구들은 장지에가면 기다란 구멍을 1~2 피트 깊이로 파고는 시신을 부려놓고서, 깨진벽돌 같은 말라빠지고 덩어리진 약간의 흙으로 덮어버린다. 묘석도 이름표도, 아무 식별 표지도 없다. 장지는 버려진 집터처럼 황량한 흙무더기 언덕일 뿐이다. - P67
이런 도시에서 (인구 20만 중에 적어도 2만은 말 그대로 가진 게 걸치고 있는누더기뿐이다) 걸어다니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또 얼마나 쉽게 죽는지를 보면, 과연 내가 인간들 사이를 걷고 있는 게 맞는가 하는 느낌을 항상 갖게 된다. 모든 식민제국은 실제로 그런 사실의 기반 위에서있다. 사람들 얼굴색이 짙으며, 그 숫자가 워낙 많다는 것이다! 그들도과연 우리와 같은 인간인가? 그들에게도 이름이란 게 있는가? 아니면벌이나 산호충만큼만 개별적인, 서로 구별되지 않는 갈색의 존재에 불과한가? 그들은 흙에서 나서 몇 년 동안 땀 흘리고 굶주리다 폐기장의이름 없는 흙더미 속으로 돌아가 묻히며, 그들이 왔다 갔다는 것을 알아주는 사람도 없다. 더구나 무덤 자체도 얼마 뒤면 금세 보통 흙으로 돌아가버린다. 산책을 하며 선인장 사이를 빠져나가다가 좀 울퉁불퉁한데가 있을 경우, 튀어나온 부분들이 어느 정도 규칙적이면 발밑에 해골이 있다는 뜻이다. - P68
노동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대체로 눈에 잘 안 띄며, 중요한일을 할수록 눈에 덜 띄는 경향이 있다. 그래도 피부색 하얀 사람들은훨씬 나은 편이다. 북유럽에서는 밭 가는 사람을 보면 한 번 더 눈길을주기가 쉽다. 그에 비해 더운 나라에서는, 예컨대 지브롤터 해협 남쪽이나 수에즈 운하 동쪽의 더운 나라에서는 그런 사람이 아예 눈에 안들어 - P71
올 가능성이 많다. 나는 그런 현상에 몇 번이나 주목한 바 있다. 열대의풍경에선 이상하게 사람만 빼놓고 모든 게 눈에 잘 들어온다. 말라붙은땅도, 석류도, 야자수도, 먼 산도 눈에 잘 뜨인다. 그러나 밭에서 괭이질하고 있는 농부만은 꼭 놓치게 된다. 그것은 그의 피부색이 흙색과 같으며, 그래서 보는 재미가 훨씬 덜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굶주리는 나라들이 관광휴양지가 되어가는 건바로 그래서다. 아무리 싸도 불황이 횡행하는 곳에 놀러갈 사람은 없을것이다. 하지만 사람들 피부가 갈색인 곳에서는 빈곤이 눈에 들어오지않는 것이다. 프랑스인에게 모로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렌지나무숲이나 식민기구의 일자리다. 영국인에겐? 낙타, 성곽, 야자수, 프랑스외인부대, 놋쇠 쟁반, 도적떼다. 그러니 여기서 몇 년을 살아도 인구의9할은 다 침식된 토양에서 얼마 안 되는 먹을거리를 짜내느라 늘 허리가 부러지도록 노동에 시달려야 하는 게 현실이란 걸 전혀 모를수도 있는 것이다. - P72
모로코의 당나귀는 세인트버나드 종의 개보다 클까 말까 한 정도이면서 영국 군대 같으면 성인정도 키의 노새한테도 지나치다고 싶을 만큼의 짐을 지며, 무거운 길마 자체를 몇 주씩이나 아예 벗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런데 특히나 가여운건 당나귀가 이 세상에서 제일 순종적인 짐승이어서 주인을 개처럼잘 따라다니며 굴레나 고삐가 필요하지도 않다는 점이다. 십여 년을헌신하다 갑자기 털썩 쓰러져 죽으면 주인은 당장 당나귀를 고랑에 밀어넣어버리고, 마을 개들은 당나귀의 체온이 채 식기도 전에 내장까지다 발라버린다. 그런 생각을 하면 피가 끓을 듯하건만, 인간의 곤경 때문에 그러는 경우는 잘 없다. 나는 지금 사실에 대한 논평을 하는 게 아니라 사실을 지적하는 것일 뿐이다. 옆집에 사는 피부색 짙은 사람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등이 다 벗겨진 당나귀를 보고서 안쓰러워할 수 있지만, 장작더미 밑에 웅크린 노파가 눈에 띄기라도 하는 건 우발적인 사고에 가까운 것이다. - P74
행렬이 지나갈 때 아주 어린 흑인 하나가 돌아보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그가 내게 던진 표정은 익히 예상할 만한 그런 표정이 전혀아니었다. 적대적이지도, 경멸적이지도, 부루퉁하지도, 탐색적이지도않았다. 그것은 수줍어하며 눈이 휘둥그레지는, 기실 깊은 존경심이 드러나는 흑인의 표정이었다. 나는 그게 어떤 것인지 알았다. 프랑스 시민이며 그래서 숲에서 끌려와 바닥 청소나 하고 기지촌에서 매독에나 걸리게 될 이 불우한 소년은 정작 하얀 피부 앞에서 존경의 감정을 내보였다. 그는 백인종이 자신의 주인이라 배웠으며 아직도 그렇게 믿고 있는것이다. 그러나 흑인 군대의 행군을 보면 어떤 백인이든 품게 되는 생각이 하나 있다(그리고 이 점에 있어선 자칭 사회주의자도 전혀 다를 바 없다). "우리가언제까지 저들을 골려먹을 수 있을까? 얼마나 있으면 저들이 총구를 다른 방향으로 돌릴까?" - P75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곳에 있는 백인이라면 누구나 마음 한구석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그랬고, 다른 구경꾼들이 그랬고, 땀흘리는 말에 올라탄 장교들이 그랬고, 그들과 함께 행군하는 백인 하사관들이 그랬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알지만 약아서 말은 안 하는 그런유의 비밀이었다. 모르는 건 흑인들뿐이었다. 무장한 자들이 1~2마일줄을 지어 평화롭게 흐르듯 걸어가는 모습이 마치 소떼가 긴 행렬을 이루어 가는 광경 같았다. 그리고 그들 위에 반대 방향으로 유유히 떠가는크고 하얀 새들은 종잇조각처럼 반짝였다. - P76
좌든 우든 나의 조국
일반적인 믿음과는 반대로, 과거는 현재보다 특별히 대단한 게 아니다. 과거가 더 극적으로 보일 수 있는 건, 여러 해에 걸쳐 따로 일어난일들이 돌이켜 볼 때 하나로 압축되며, 우리의 기억 중에 원래 그대로의진정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은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1914~1918년의 전쟁이 지금의 전쟁에 부족한 웅장하고 대서사시적인 분위기를 띠는것은 주로 그뒤에 있었던 책이나 영화나 회상 때문이다. 그런데 그 전쟁 당시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그리고 나중에 덧붙은 것과 진짜 기억을 분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시에 자신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게 대개는 큰 사건이 아니었다는 점을 알게 된다. 나는 예컨대 ‘마른 강 전투‘‘가 당대의 일반 대중에게, 나중에 덧붙은 멜로드라마적분위기를 드리웠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나로서는 몇 해가 지나도록 ‘마른 강 전투‘라는 말 자체를 들어본 기억이 없는 것이다. - P77
내 기억을 정직하게 가려내고 나중에 알게 된 것을 무시한다면, 전쟁 내내 그 무엇보다나의 심금을 절절히 울린 일은 몇 해 이전에 있었던 타이타닉호 침몰 사건이었다. 전쟁에 비한다면야 사소한 참사일 뿐이겠지만, 이 사건은 온세계에 충격을 주었고, 그 충격이 전쟁 당시까지도 가시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아침 식탁에서 그 끔찍한 사건의 기사를 낱낱이 읽던 소리를지금도 기억하고 있다(그 시절엔 신문을 큰 소리로 읽는 관습이 있었다). 내기억에 그 무시무시한 이야기들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마지막 순간에 타이타닉호가 갑자기 곧추서서 뱃머리부터 가라앉기 시작했고, 그래서 사람들이 300피트 이상 공중에 뜬 채 배꼬리에 매달려 있다 심연으로 곤두박질했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어디서 뚝떨어질 때의 서늘한 느낌이 뱃속에 밀려오는 듯하다. 하지만 전쟁에선어떤 사건도 내게 그런 느낌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던 것이다. - P78
전쟁 중기의 일로 주로 기억나는 것은 포병들의 딱 벌어진 어깨와 불룩한 종아리와 짤랑거리는 박차다(나는 보병보다는 포병의 군복을 훨씬 더좋아했다). 전쟁 말기의 일로는 무엇이 제일 기억에 남는지 솔직히 말해보라고 한다면, 나는 간단히 ‘마린‘ 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는 위를 통하지 않고는 전쟁의 영향을 거의 느끼지 못했던 1917년 무렵 어린아이들의 고약한 이기심이 어떤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학교 도서관에는 거대한 서부전선 지도가 이젤에 붙어 있었고, 지그재그로 꽂혀 있는 압정들 사이로 빨간 비단실이 이어져 있었다. 이따금 그실은 반 인치쯤 이쪽저쪽으로 옮겨지곤 했는데, 한번 옮겨질 때마다 시체가 피라미드처럼 쌓인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나는 지능이 평균 이상인 아이들이 모인 학교에 있었지만, 어떤 큰사건도 중대한 의미를 띠고 우리에게 다가온 적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예를 들어 러시아혁명은 어쩌다가 러시아에 투자를 한 부모를 둔몇몇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우리에게 아무런 인상도 남기지 못했다. - P79
하나는 오랫동안 두려워하던 전쟁이 결국 시작되면 오히려 마음을 놓게 될 것이라는 점이었고, 또 하나는 내가애국심이 있어 우리 편에 반기를 들지 않고 전쟁을 지지할 것이며 가능하면 참전하여 싸우기까지 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잠에서 깨어나 아래층에 내려가보니 리벤트로프가 모스크바로 날아갔음을 알리는 신문이와 있었다. 바야흐로 전쟁이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체임벌린 정부라할지라도 충성을 바칠 수밖에 없을 터였다. 물론 그런 충성이야 제스처에 불과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럴 뿐임은 말할 것도 없다.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랬듯, 정부는 내게 어떤 자리도, 일개 사무원이나이등병의 자리조차도 주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내 마음이 바뀌는 건 아니다. 더구나 그런 마음은 조만간 어떤 식으로든 이용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전쟁을 지지하는 이유를 스스로 옹호해야만 한다면, 나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히틀러에게 저항하느냐 아니면 굴복하느냐의 선택에선 딱히 다른 대안이 없는 것이다. 아울러 사회주의자 입장에서 나는 저항하는 게 낫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 P83
공화파가 저항하는 것, 중국인이 일본에 저항하는 것 등등에 대하여 굴복하는 게 낫다는 주장 중에 말이 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실들이 내 행동의 감성적 바탕인 척하고 싶지 않다. 그날 밤꿈을 통해 내가 알게 된 것은, 중산층에게 주입되어온 애국주의가 마침내 효과를 본다는 것이었으며, 영국이 심각한 궁지에 빠지면 나로서는애국주의에 반기를 드는 게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단, 여기서 오해는없도록 하자. 애국주의는 보수주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애국주의는변하고 있되 신비롭게도 똑같이 느껴지는 무엇에 대한 헌신이다. 이를테면 백군 출신으로 볼셰비키가 된 사람의 러시아에 대한 헌신 같은 것이다. 체임벌린의 영국에 충성하는 동시에 내일의 영국에 충성한다는건, 그것이 일상적인 현상임을 모른다면 불가능해 보일지 모른다. - P84
그런데 혁명은 지금 시작됐으며, 우리가 히틀러를 막아낼 수만 있다면 꽤 빠르게 진전될 수 있을지 모른다. 계속 버틸 수만 있다면, 우리는 2년, 잘하면 1년 안에 앞일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백치라도 깜짝 놀랄 변화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나는 런던의 도랑에 핏물이 흘러야 할 것이라고감히 말하겠다. 좋다. 필요하다면 그러라고 하자. 하지만 리츠 호텔이시민 혁명군의 숙소로 이용된다 하더라도, 나는 그 오래전부터 온갖 이유로 사랑하라고 배워온 영국이 어떻게든 존속하리라 생각할 것이다. 나는 군국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자랐고, 그뒤로는 날마다 나팔 소리를 들으며 따분한 5년을 보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도 국가가 울려퍼질 때 일어서서 부동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왠지 신성모독이라도 범하는기분이다. 물론 유치하긴 하지만, 나는 너무 ‘계몽‘ 되어서 가장 일상적인 정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좌파 지식인처럼 되느니 그런 식의 훈육을 - P84
받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정작 혁명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움찔하며 물10러서는 이들은 국기를 보고 ‘한 번도 가슴이 두근거려본 적이 없는 바로 그 사람들인 것이다. 존 포드가 죽기 얼마 전에 쓴 시 (「우에스카의폭풍전야」)와 헨리 뉴볼트 경의 "오늘밤 클로즈에 숨가쁜 침묵 있으리"" 를 비교해보라. 기술적인 차이야 시대의 문제일 뿐이니 무시해버린다면, 두시의 정서가 거의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국제여단의 일원으로 영웅적인 죽음을 맞이한 젊은 공산주의자는 뼛속까지 어쩔 수없는 사립학교 출신이었다. 그에게 있어 충성의 대상은 바뀌었을지언정정서만은 그대로였다. 이로써 입증할 수 있는 바는 무엇일까? 블림프대령의 뼈에 살을 붙여 사회주의자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점, 어떤 유의 충성심이 다른 유의 것으로 변모할 수도 있다는 점, 어수룩한 좌파들이 아무리 싫어한다 해도 애국주의와 군사적 가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것을 대체할 만한 것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 P85
영국, 당신의 영국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대단히 문명화된 인간들이 내 머리 위로날아다니며 나를 죽이려 하고 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나에게 무슨 원한이 있는 게 아니며, 나 또한마찬가지다. 그들은 흔히 말하듯 "자기 임무를 수행할 뿐인 것이다. 나는그들 대부분이 사생활에서는 살인을 저지른다는 건 꿈도 못 꿀 선량하고 준법정신 투철한 시민임을 의심치 않는다. 반면에 그들 중 하나가 폭탄을 잘 떨어뜨려 나를 산산조각 내는 데 성공하더라도 그가 그 때문에특별히 잠을 못 이룰 리도 없을 것이다. - P87
그리고 국가와 국가의 차이가 관점의 실질적인 차이에서 비롯된다는1점을 인정해야 한다. 최근까지만해도 모든 인류를 서로 아주 비슷한 존재로 보는 게 마땅하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실제로는 사람들의 평균적인 행동 방식이 나라별로 엄청나게 다르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한 나라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다른 나라에서는 일어날 리 없는 것일 수 있다. 예컨대 히틀러의 6월 숙청‘ 같은 일은 영국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 그리고 서구 민족들 기준으로 볼 때, 영국인은대단히 차별점이 많은 민족이다. 이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외국인들이우리만의 생활 방식에 대해 느끼는 혐오감으로 보건대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다. 유럽인들 중에 영국에서의 생활을 견딜 수 있는 이는 얼마 없으며, 미국인들조차도 영국보다는 유럽 대륙을 더 편하게 느끼는 경우가 많다. - P88
대도시의 군중은 얼굴이 조금씩 읽었고 치아가 부실하고 거동이 점잖은 게 유럽 대륙의 군중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윽고 영국의 방대함에 빠져들고 나면, 나라 전체가 단일하고 차별적인성격을 갖는다는 느낌을 한동안 잊어버리게 된다. 민족이란 게 정말 있기나 한가? 우리는 4600만이라는 제각기 다른 개인이 아닌가? 그리고우리들 각자는 얼마나 다양하고 복잡한가! 그런데 랭커셔 지역 공업지대의 나막신 달가닥거리는 소리, ‘그레이트노스 도로‘를 오가는 화물차들, 직업소개소 앞에 줄지어 있는 사람들, 소호에 있는 주점들의 핀볼기계, 가을 아침 자전거를 타고 안개를 가르며 성찬례에 참석하러 가는노부인들이 모든 것들이 유일하지는 않으나 영국적 풍모를 보여주는 ‘고유한‘ 단편들이다. 그렇다면 복잡하게 뒤섞인 것들 중에서 패턴을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까? ㅁㅁㅇ 이시비 - P89
하지만 외국인들과 이야기를 해보거나 외국의 책 혹은 신문을 읽어보라. 당장 같은 생각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렇다. 영국 문명에는 차별적이고 알아보기 쉬운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 그것은 스페인의 그것못지않게 개성적인 문화다. 그것은 물기 없는 아침식사와 음울한 일요일, 매연 자욱한 도시와 구불구불한 길, 초록빛 들판과 빨간우체통 같은 것들과 어떻게든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것에는 나름의 정취도 있다. 더욱이 그것은 연속적이고, 미래와 과거까지 이어져 있으며, 생명체의 경우처럼 변함없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1940년의 영국은 1840년의 영국과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 어머니가 벽난로 선반에 둔 사진 속 다섯 살 때의 당신과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동일인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은 ‘당신‘의 문명이요, 당신 ‘자신‘ 이다. 당신 - P89
이 아무리 혐오하거나 조롱해도, 그것을 떠나서 결코 오랫동안 행복하지는 못할 것이다. 선하든 악하든 그것은 당신의 것이며 당신은 그것에속한다. 그리고 이승에 있는 한 당신은 그것이 당신에게 남긴 흔적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한편 영국은 세계의 다른 어느 곳과도 마찬가지로 변하고 있다. 또한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특정 방향으로만 변할 수 있으며, 그 방향은어느 정도까지 예견할 수 있다. 그렇다고 미래가 확정적이라는 것은 아니며, 어떤 대안은 가능하고 또 어떤 건 그렇지 않다는 뜻일 뿐이다. 씨앗 한 알은 자랄 수도 있고 자라지 않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순무 씨앗이 당근으로 자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전개되고 있는 엄청난 사건들에 대해 영국이 어떤 ‘역할‘을 할 수있는지를 추측하기 전에, 영국이란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일일 것이다. - P90
하지만 어떤 사회는 서민들은 어느 정도 기존 질서를 거스르며 살아야 한다. 영국의 진정한 대중문화는 표면 바로 밑에서 진행되고 비공식적이며 당국의 눈살을 좀 찌푸리게 하는 무엇이다. 서민들, 특히 대도시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을 볼 때 바로 눈에 띄는 것 하나는 청교도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그들은 고질적인 도박꾼이고, 벌이가 허락하는 선까지 한껏 맥주를 마시고, 음담패설을 너무 좋아하며, 아마도 이 세상에서상스러운 말을 가장 잘할 것이다. 그들은 황당하고 위선적인 법이 있어도(주류 판매 허가법이니 복권법이니 하는 것들이 특히 그렇다) 그런 취향을 충족시키며 살아야 하는데, 그런 법이란 온갖 사람을 다 간섭하려고 고안되지만 실은 온갖 일이 다 일어날 수 있게 해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또한 서민들은 분명한 종교적 신념 없이 살며, 여러 세기 동안 그래왔다. - P93
영국에서는 모든 애국주의적 과시와 허세를, 이를테면 애국가요인대영제국이여 지배하라같은 것들을 나서서 하는 사람이 극소수다. 서민들의 애국주의는 요란하지 않으며, 그런 의식 자체가 없기까지 하다. 그들이 기억하는 역사적 사건들 중에는 군대가 거둔 승전의 이름 하나조차 없다. 영국 문학에는 다른 나라 문학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시가아주 많지만, 그중에 인기 있다 할 만한 것들이 언제나 참사나 후퇴를다루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트라팔가 해전이나워털루 전투에 대한 인기 시는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존 무어 경의 부대가 코루나에서 해상으로 탈출하기 직전에 벌인 필사적인 후방 지연작전이(던커크에서처럼 말이다!) 눈부신 승전보다 더 끌리는 것이다. 영국에서 가장 감동적인 전쟁시는 엉뚱한 방향으로 돌격한 기병 여단을 다룬 것이다. 그리고 지난번 전쟁의 경우, 일반 대중의 기억 속에는 몽스Mons, 이프르ypres, 갈리폴리Gallipoli, 파스샹달Passchendaele이라는4개의 이름이 각인되었는데 하나같이 대참사가 일어난 곳이다. 독일군을 마침내 격파한 큰 전투들의 이름은 일반 대중에게 아예 알려져 있지않다. - P95
법이 정당한 것인 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부자를 위한 법과 빈자를 위한 법이 따로 있다는 건 누구나 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이 함축하는 바는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모두가 법이 그 자체로 존중되는 것을 당연시하며, 그렇지 않으면 흥분한다. "날 잡아넣을 순 없어, 내가 잘못한게 있어야지"라거나 "나한텐 못그럴걸, 그건 불법이니까"라는 태도가 영국 사회의 한 분위기인 것이다. 사회의 공공연한 적들에게도 이런 정서는 다른 누구 못지않게 강하다. 우리는 그런 현상을 윌프레드 매카트니의 벽에도 입이 있다나 짐펠런의 『교도소 여행』 같은 감옥 관련 책에서 볼 수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 재판에서 벌어지는 엄숙한 백치행위에서도, 저명한 마르크스주의자 교수들이 이런저런 것을 "영국 사법제도의 과실"이라 지적하며 신문에 투고하는 글에서도 볼 수 있다. 누구나 내심으로는 법이 불공정하게 집행될 수 있고, 그럴 수밖에 없으며, 대체로 그렇게 되리라 믿고 있다. 하지만 법 같은 건 없고 힘만이 존재할 뿐이라 믿는 전체주의적 발상은 아직 뿌리를 내린 바 없다. 그런 생각은 지식인들도 이론으로만 받아들일 뿐이다. - P98
모든 허상은 절반의 진실이 될 수 있으며, 가면 때문에 얼굴 표정이바뀔 수도 있다. 민주주의가 전체주의와 똑같다‘거나 똑같이 나쁘다‘ 고 하는 익숙한 주장들은 그런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런 주장들은 전부 결국엔 빵 반 덩어리는 빵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이다. 영국에선 정의니 자유니 객관적 진실이니 하는 개념들을 아직도 믿고있다. 그것들은 허상일지 모르나 대단히 강력한 힘을 지닌 허상이다. 그 - P98
런 것들에 대한 믿음이 행동에 영향을 끼치며, 그 때문에 국민 생활이달라지는 것이다. 증거가 필요하다면 주변을 둘러보면 된다. 경찰봉이어디 있고, 아주까리기름이 어디 있는가? 칼은 여전히 칼집 안에 있으며, 그러는 동안은 부패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예컨대 영국의선거제도는 거의 대놓고 벌이는 사기다. 너무 빤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선거구는 돈 가진 계급의 이익을 위해 마음대로 변경된다. 하지만 대중의 마음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선거제도가 완전히 부패하는 법은 없다. 투표소에서 권총 든 사람들이 어디다 표를 찍으라고 말하는 경우도 표 집계를 엉뚱하게 하는 일도, 공공연한 뇌물수수도 없다. 심지어는 위선도 강력한 안전장치가 된다. 교수형을 좋아하는 가혹한판사는 주홍빛 법복을 입고 말털 가발을 쓴 악독한 늙은이에, 다이너마이트가 아니고선 지금 몇 세기를 살고 있는지 깨우쳐줄 수 없는 사람이지만, 적어도 책에 있는 대로 법을 해석할 수 있고 어떤 경우에도 뇌물을 받지 않는 영국의 상징적 인간상 중 하나인 것이다. 그는 현실과 허상을, 민주주의와 특권을, 협잡과 품위를, 미묘한 타협의 연결고리를 묘하게 섞어놓은 하나의 상징이다. 그리고 국가는 그런 상징으로써 익숙한 모양새를 유지한다. - P99
영국인이 상당한 재능을 보인 예술이 하나 있으며, 문학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학은 국경을 넘어갈 수 없는 유일한 예술이기도 하다. 문학, 특히 시는, 또 그중에서도서정시는 일종의 가족끼리만 통하는 농담 같은 것이다. 말이 통하는사람들끼리가 아니면 거의 무가치하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를 제외한다면, 영국 최고의 시인들이 유럽에서는 이름조차도 알려지지 않은경우가 많다. 널리 읽히는 시인이라 해봐야 바이런과 오스카 와일드정도인데, 전자는 엉뚱한 이유로 동경의 대상이 되고 후자는 영국인의위선에 희생됐다는 이유로 연민의 대상이 되었다."이와 더불어 거론되는 것은, 그다지 분명치는 않으나 철학적인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즉, 거의 모든 영국인들이 체계적인 사고의 필요성을, 심지어 논리를 사용하는 것 자체에 대한 필요성을 별로 못 느낀다는 것이다. 국민적 결속은 ‘세계관을 어느 정도 대신하는 것이기도 하다. 애국주의는 거의 보편적이며 부자들도 그 영향을 어느 정도는 받기 때문에,늑대 만난 소떼처럼 갑자기 온 나라가 한꺼번에 이리저리 휘둘릴 수 있다. 프랑스는 재앙을 만나 확실히 그런 때가 있었다. - P103
영국이란 나라는 보이지 않는 사슬로 단단히 결속돼 있다. 평상시에는 지배계급이 도둑질도 하고, 관리도 엉망으로 하고, 사사건건 방해도 하고, 우리를 진창에 밀어넣기도 한다. 그러나 여론이 지배계급 인사들에게 확실히 전달되도록 하면, 즉 그들이 일반의 정서를무시하지 못하도록 밑에서 힘차게 잡아당기면, 그들도 반응하지 않기가 어렵다. 지배계급을 뭉뚱그려 ‘친파시스트‘라 비난하는 좌파 저술가들은 지나치게 단순하게 보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를 지금의국면으로 몰고 온 핵심적인 정치인 파당 중에도 과연 ‘고의적인‘ 반역자가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영국에서 그런 종류의 부패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거의 대부분이 자기기만에 가까운, 말하자면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는 식인 것이다. 게다가 의식하지 못하고 하는 일이기 때문에 제한적이기도 하다. 그런 현상을 가장 분명히 목격할 수 있는 분야가 영국 언론이다. 영국의 언론은 정직한가, 부정직한가? 평상시엔 대단히 부정직하다. - P106
영국은, 자주 인용되는 셰익스피어의 구절처럼 보배 같은 섬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괴벨스 박사의 묘사처럼 지옥인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어떤 집안을, 상당히 고루한 빅토리아 시대의 집안을 닮았다고 할 수있다. 골칫덩이가 많진 않아도 찬장마다 해골이 넘쳐나는 집안 말이다. 이 집안에는 비굴하게 아침을 떨어야 하는 부자 친척도, 끔찍이 들러붙는 가난뱅이 친척도 있으며, 집안의 수입원에 대해 함구한다는 단단한공모가 있다. 또 젊은 사람들은 대체로 좌절을 겪고, 실권은 대부분 무책임한 삼촌들이나 몸져누운 숙모들 손에 있다. 그래도 집안은 집안이다. 나름의 언어가 있고, 공통의 기억이 있으며, 적이 다가오면 단결한다. 엉뚱한 식구들이 살림을 주무르는 집안-영국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게 가장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 P107
이제는 지식인이면서 어떤 의미에서든 ‘좌파‘ 가 아닌 경우는 없다는사실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마지막 우파 지식인은 T. E. 로렌스"였을 것이다. 1930년경부터 ‘지식인‘ 이라 칭할 만한 사람이면 누구나 기존 질서에 대한 만성적인 불만 속에 살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게, 사회가 그들을 미처 수용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 이상의 발전도 없고 그렇다고 해체되지도 않는 정체된 제국에서, 그리고 우매함이라는자산밖에 가진 게 없는 이들이 지배하는 영국에서 ‘똑똑한 사람은 수상쩍은 사람이었다. T. S. 엘리엇의 시나 칼 마르크스의 이론을 이해할수 있는 머리를 가진 사람에게, 윗사람들은 절대 중요한 일을 맡기지 않았다. 그러니 지식인들은 문예비평과 좌파 정당에서만 제 역할을 찾을수 있었던 것이다. 영국 좌파 지식인들의 정서는 몇 개의 주간지와 월간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들 신문을 보면 당장 두드러지는 것은 대체로 부정적이고불만 가득한 태도와 언제나 건설적인 제안이라곤 없다는 사실이다. - P116
영국 지식인들의 생각은 아무튼 유럽화되어 있다. 그들은 음식은 파리 식을 즐기고 의견은 모스크바 식을 즐긴다. 자국에 대한 전반적인 애국심에 있어서, 그들은 반체제 사상의 섬을 형성한다. 영국은 아마도 지식인들이 자국을 수치스러워하는 유일한 대국일 것이다. 좌파 지식인사회에는 영국인이라는 것을 조금은 부끄러워하며, 영국의 관습은 경마에서부터 소기름 푸딩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비웃어주는 걸 의무로 여기는 정서가 항상 존재한다. 영국의 지식인들 대부분이 헌금함을 슬쩍하는 것보다 애국가를 부동자세로 서서 듣는 걸 더 창피한 일로 여긴다는 건, 이상하긴 해도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중대한 시기 내내 많은좌파 지식인들은 때로는 물러빠진 평화주의자로서의, 때로는 열렬한 친소파로서 동시에 언제나 반영파로서)의 전망을 퍼뜨리고자 애쓰면서영국인의 사기를 갉아먹었다. 그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으나, 영향을 끼친 건 분명한 사실이다. 영국인들이 여러 해 동안 실질적인 사기 저하로 고충을 겪었다면, 그리하여 파시스트 국가들이 영국인은 ‘나태해졌으니 전쟁을 일으켜도 무방하다고판단했다면, 좌파의 지적인 방해 행위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 P117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중산층의 사고방식과 습성이 노동계급으로 확산되는 일이다. 영국의 노동계급은 이제 거의 모든 면에서 30년전에 비해 형편이 좋아졌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노동조합의 공로이고, 어느 정도는 자연과학의 발전 덕분이다. 한나라의 생활수준이, 그에 상응하는 실질임금의 상승 없이 소폭이나마 올라간다는 건 늘 가능한 일이 아니다. 단, 문명은 어느 정도는 제 힘으로 스스로를 일으킬 수 있다. 사회가 아무리 부당하게 조직되어 있어도, 어떤 종류의 재화는 반드시공동으로 소유하기 때문에 특정 기술의 발전은 전체에게 혜택을 줄 가능성이 높다. 이를테면 백만장자는 남들에게는 어두운 동시에 자신에게만길이 밝아지도록 할 수는 없다. 문명화된 나라의 시민들 거의 대부분은 이제 반듯한 도로와 병균 없는 식수, 경찰의 보호, 무료 도서관, 그리고 어느 정도의 무상교육까지도 누리게 되었다. 영국의 공교육은 재정이 열악했음에도 불구하고 향상되었으며, 거기엔 교사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독서 습관의 엄청난 확산이 큰 역할을 했다. 이제 점점 부자와 빈자가 같은 책을 읽고, 같은 영화를 보고, 같은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게되고 있다. - P119
점잖음도, 위선도, 사려깊지 못함도, 법에 대한 숭상도, 제복에 대한 혐오도, 소기름 푸딩과 안개 자욱한 하늘과 마찬가지로 계속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의민족문화를 파괴하는 데는 장기간 외적의 지배를 받는 것과 같은 정도의 엄청난 재앙이 필요하다. 증권거래소는 헐릴 수 있고, 말이 끄는 쟁기는 트랙터로 대체될 수 있고, 시골의 대저택은 아이들의 방학 캠프로바뀔 수 있고, 이튼과 해로우의 라이벌전은 잊혀질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영국은 영국일 것이다. 그것은 과거와 미래로 이어져 있는, 그리고모든 생명체가 그러하듯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모해도 여전히 같은존재로 살아남을 힘이 있는, 불멸의 동물과도 같을 것이다.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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