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pike」. 1931년 4월 문학잡지 <뉴아델피>에 게재, 문학적인 에세이로선 처음으로 지면에 실린 글이다. 사립 명문교 이튼을 졸업한 뒤 대학 진학을 포기한 오웰이 식민지 버마에서의 5년간(1922~1927)의 경찰 생활을 접고, 밑바닥 생활을 하며 작가수업을 하다 지면에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던 무렵의 에세이다. 이 글은 나중에 줄이고 고쳐져 그의 첫 책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의 27장과 35장에 실렸다. ‘스파이크‘는 구빈원에 딸린 부랑자(노숙자)를 위한 임시 무료 수용소를 일컫는 속어인데, 간결한 번역어가 마땅찮고 강렬한 어감을 살리기 위해 본래 발음대로 적는다.
늦은 오후였다. 우리들 마흔아홉 명은(마흔여덟은 남자고 하나는 여자였다) 스파이크(부랑자 임시숙소)가 열릴 때까지 대기소인 풀밭에 누워 기다렸다. 너무 피곤해서 말들이 별로 없었다. 지칠대로 지쳐 뻗어버린 우리는 지저분한 얼굴에 사제로 만든 담배만 삐죽 내물고 있을 뿐이었다. 머리 위로는 꽃 흐드러진 밤나무 가지가 드리워져 있었고, 그 위로는 맑은 하늘에 커다란 양털구름이 거의 움직임 없이 떠 있었다. 그 아래 풀밭에 흩어져 있는 우리는 도시의 거무죽죽한 쓰레기 같았다. 우리는 풍경을 더럽히는 존재였다. 바닷가에 흩어져 있는 정어리 통조림이나 종이봉투처럼. 그나마 하는 얘기는 주로 이 스파이크의 부랑자 감독Tramp Major 에 - P9
대한 것이었다. 그는 모두가 동의하는 마왕이었고, 포악한 폭군이었으며, 고함과 모독과 가혹을 일삼는 빌어먹을 녀석이었다. 그가 가까이 있으면 그들은 자기 영혼을 제 것이라 말할 수 없을 만치 주눅이 들었고, 부랑자들 중에 말대꾸를 하다 한밤중에 쫓겨난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제대로 몸수색이라도 할 일이 있으면 그는 상대를 거꾸로 매달아 털다시피 했다. 담배를 피우다 걸리면 어떤 후환이 있을지 몰랐으며, 돈을가지고 들어갔다 발각되면(금품 소지는 불법이었다) 신의 가호를 바라는수밖에 없었다. 내 수중엔 8페니가 있었다. "아이구 이 사람아, 큰일 나." 부랑자 생활을 오래 한 이들이 조언을 해주었다. "가지고 들어가지 말게. 스파이크에 8페니 들고 들어갔다 걸리면 일주일은 살아야 돼!" - P10
그래서 나는 울타리 아래에 돈을 묻어야 했다. 부싯돌 한무더기로 자리를 표시해두었다. 이윽고 우리는 성냥과 담배를 따로 챙기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스파이크에서 담배도 반입 금지여서 정문에서 내놓는 게원칙이었다. 우리는 그것들을 양말 속에 숨겼다. 양말을 신지 않는 20퍼센트 정도는 담배를 신발 속에, 심지어 발가락 밑에 숨겨 들어가야 했다. 발목 둘레에다 밀반입품을 잔뜩 채워넣은 우리를 누가 봤으면 코끼리피부병에 걸린 줄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지독한 부랑자 감독이라 할지라도 무릎 아래는 뒤지지 않는 게 불문율이었는데 결국엔 딱 한 사람만 걸렸다. 스코티Scotty라는 키 작은 털보로, 글래스고출신이 런던 사투리를 흉내내는 듯한 묘한 악센트를 구사하는 부랑자였다. 그는 엉뚱한 순간에 양말에서 담배꽁초가 든 깡통이 떨어지는 바람에 압수를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 P10
6시에 정문이 활짝 열리자 우리는 발을 질질 끌며 안으로 들어갔다. 정문에서 직원 하나가 우리 이름과 이런저런 사항을 기입하더니 우리의소지품을 받아 챙겼다. 단 한 명이던 여자는 구빈원workhouse으로 보내졌고, 남은 우리는 스파이크로 갔다. 그곳은 음산하고 싸늘하고 회벽으로 된 건물로, 욕실과 식당 하나 그리고 100개 정도의 돌로 만든 골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무시무시한 부랑자 감독은 현관에서 우리를 맞이하더니 욕실로 몰고 가 옷을 벗게 하고 검사를 했다. 그는 마흔쯤 된퉁명스럽고 군인 같은 사람으로, 부랑자들에게 연못가로 몰고 간 양떼를 대하는 것 이상의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사람들을 이리저리 밀치고면박을 주던 그는 나한테 다가와서는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젠틀맨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내가 말했다. - P11
그는 다시 나를 오래 쳐다봤다. "팔자 한번억세게 사납소, 나리." 그가 말했다. "거 참 사나운 팔자로군." 그때부터 그는 나에게 경의에 가까운 배려를 작심한 듯했다. 욕실의 풍경은 역겨웠다. 우리들 속옷의 꼴사나운 비밀이 다 드러났다. 때가 시커멓고, 해어지고 기운 데, 단추 대신 실로 묶은 데, 몇 번이나 덧대 기운 데 투성이였던 것이다. 실내는 어느새 김이 모락거리는 알몸 한 무리로 북적였다. 부랑자들의 땀내와 스파이크 특유의 대변 냄새비슷한 악취는 막상막하였다. 일부는 목욕은 됐다며 땟국이 번들번들한 ‘발싸개‘ 만 씻었다. 우리에게는 각자 3분씩 씻을 시간이 주어졌고, 우리 모두가 함께 써야 하는 롤러 타월은 기름기가 배어 미끈미끈한 것6개뿐이었다. - P11
골방은 가로세로 8피트 5피트고, 벽 위쪽에 창살 달린 조그만 창말고는 조명기구가 없었다. 벌레는 없었고 침대 틀과 밀짚 매트리스가 있었으니, 우리에겐 제법 호사였다. 다른 스파이크에서는 딱딱한 나무 침상아니면 맨바닥에서 베개 대신 외투를 말아 베고 자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나는 독방에다 침대도 있으니 하룻밤 푹 잘 수 있겠다는 기대를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스파이크엔 반드시 무언가 잘못된 게있기 마련이며, 이곳 특유의 결함은 추위라는 걸 나는 당장 알 수 있었다. 5월이 시작된 터라, 계절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봄의 신들에게 바치는약간의 희생인 모양이었다) 당국에서 스팀을 차단했던 것이다. 무명 담요들은 거의 소용이 없었다. 그러니 반쯤 얼어붙은 듯 깬 채 동이 트기를기다리며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보면 잠드는 시간은 10분이 될까 말까 했다. - P12
차, 더 정확히 말해 차라고 잘못 부르는 그것 없이 부랑자들이 살 수나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것은 그들의 양식이요약이며, 모든 불행에 대한 만병통치약인 것이다. 그것이나마 매일 반갤런쯤 홀짝일 수 없다면, 그들이 자신의 존재를 견딜 수 없으리라 나는 확신한다. 아침식사 후 우리는 다시 옷을 벗고 건강검진을 받아야 했다. 천연두에 대한 예방책의 하나였다. 의사가 오기까지는 45분이 걸렸으니, 자기주변을 둘러보며 우리가 어떤 꼴인지를 볼 시간은 충분했다. 가관이었다. 우리는 복도에서 상의를 홀랑 벗은 채 두 줄로 서서 떨고 있었다. 높은 창으로 스며든 푸르스름하고 차가운 빛이 무자비하도록 선명하게 우리를 비추었다. 배만 불룩한 변변찮은 똥개들 같다는 느낌은 보지 않고서는 상상할 수 없으리라. 머리는 난발이고, 얼굴은 수염과 주름이 가득하고, 가슴은 푹 꺼지고, 발은 평발이고, 근육은 축 처진 것이, 온갖 기형과 몰골들이 다 모인 듯했다. 게다가 모두가 축 늘어져 있었고 혈색도 희한했다. - P13
해수뇌 ㅇㄱㄱㄴㄱㅆㄴ이 음산한 방에서 부랑자들 대부분은 연이어 10시간을 있어야 했다. 그걸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는 상상하기 힘들다. 나는 따분함이야말로부랑자 최대의 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허기나 불편보다도, 심지어 언제나 남 보기 망신스럽다는 느낌보다도 더한 것이지 싶다. 무지한 사람이라고 해서 온종일 아무 할 일 없이 가두어둔다는 건 어리석고도 잔인한 짓이다. 개를 통 속에 가둬놓고 묶어두는 일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감금을 견딜 수 있는 건, 자기 안에 위안거리가 있는 배운 사람들뿐이다. 거의 대부분이 무학인 부랑자들은 빈곤에 대해서도, 아무영문도 모르고 의지할 데도 없이 당할 뿐이다. 그런 그들이니 10시간동안 불편한 의자에 꼼짝없이 앉혀놓으면 뭘 하며 시간을 때워야 할지 - P15
알 길이 없다. 그러니 생각나는 게 있다 한들 불행을 푸념하거나 일자리를 갈망하는 것밖에 없다. 그들에겐 무위의 끔찍스러움을 견딜 자산이 없는 것이다. 때문에 삶의 너무나 많은 부분을 아무 일도 안 하면서보내야 하는 그들로선 따분함으로 인한 고통이 더 큰 법이다. 나는 그들보다 훨씬 운이 좋았다. 10시에 부랑자 감독이 오더니 스파이크에서 가장 부러움을 사는 일을 할 사람으로 나를 지목한 것이었다. 그것은 구빈원 부엌일을 돕는 것으로, 딱히 할 일이 없었기에 나는 자리를 슬쩍 피해 감자를 보관하는 광에 숨어 있었다. 그곳엔 나 말고도 일요일 아침 예배가 싫어서 몰래 빠져나온 구빈원 소속 빈민들이 좀 있었다. 또 그곳엔 난롯불도 있었고, 편히 앉을 만한 궤짝도 있었고, <패밀리헤럴드> 지난 호들도 있었으며, 구빈원 도서실에서 가져온 ‘래플스‘ 추리소설도 한 권 있었다. 스파이크에 있다 가니 거긴 천국이었다. - P16
나는 또 구빈원 식탁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내가 여태 먹어본 최고의식사 중 하나였다. 부랑자는 스파이크 안에서든 밖에서든 그런 식사를일 년에 두 번 다시 구경하기 힘들다. 구빈원 빈민들은 내게 자신들은일요일이면 배가 터지도록 먹고 나머지 엿새 동안은 굶고 지낸다고 했다. 식사가 끝나자 주방장은 내게 설거지를 하고 남은 음식을 버리라고했다. 음식쓰레기는 깜짝 놀랄 정도였다. 쇠고기로 만든 굉장한 요리들, 그리고 들통 몇 개 분량의 빵과 채소가 쓰레기처럼 내버려진 채 다 우려낸 찻잎으로 더럽혀져 있었던 것이다. 내가 좋은 음식으로 넘쳐나도록채워넣은 쓰레기통은 5개나 되었다. 내가 그러는 동안 나의 동료 부랑자들은 200야드 떨어진 스파이크에 앉아 여느 때와 똑같은 빵과 차로, 그리고 잘하면 일요일이라 특별히 나오는 차가운 삶은 감자 2개로 배를 - P16
반쯤 채우고 있었을 것이다. 남은 음식을 부랑자들에게 주지 않고 버리는 건 고의적인 방침인 듯했다. 3시에 나는 구빈원 부엌을 떠나 스파이크로 돌아갔다. 이젠 그 바글바글하고 불편한 방에서의 따분함이 못 견딜 정도였다. 담배도 더 피울수 없었다. 부랑자의 담배란 게 길에서 주운 꽁초뿐인데, 풀 뜯는 짐승이 그러하듯, 풀밭 같은 보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부랑자는 굶주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나는 부랑자 중에 좀 잘난 체하는 사람과 얘기를 나눠보았다. 그는 칼라와 넥타이 차림의 젊은목수로, 연장 한 벌이 없어서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됐다는 이였다. 그는다른 부랑자들과는 늘 거리를 좀 두었고, 스스로를 떠돌이 막일꾼이라기보다는 자유인에 가까운 사람으로 여겼다. - P17
그가 동료 부랑자들과 자신을 용케도 분리시키는 게 흥미로웠다. 그는 6개월 동안 떠돌이 생활을 했지만, 하느님 보시기에 자신은 부랑자가 아니라고 넌지시 말하는 것 같았다. 그의 몸은 스파이크에 있을지 몰라도 정신만은 멀리까지 날아올라 중산층의 순전한 정기 속에 있는 셈이었다. 118218시곗바늘은 고문을 하듯 느릿느릿 기어갔다. 우리는 너무 따분한 나머지 이젠 얘기도 할 수 없었다. 들리는 소리라곤 욕설과 긴 하품뿐이었다. 시계만 쳐다보던 시선을 억지로 거두고 한평생은 지났다 싶어 다시보면 바늘은 고작 3분을 움직였을 뿐이었다. 권태로움이 우리 영혼의움직임을 찬 양고기 비계처럼 막아버렸다. 때문에 우리는 뼈까지 아파왔다. 시곗바늘은 4시에서 멈춰 서버린 듯했고, 저녁식사는 6시까지 기다려야 했다. 우리를 들여다보듯 찾아온 달 아래엔 주목할 만한 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 P19
그로부터 13시간이 지났다. 7시에 깨워진 우리는 욕실로 달려가 터무니없이 모자라는 물을 다툰 다음, 빵과 차를 삼켰다. 이제 우리가 스파이크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은 다 채웠다. 하지만 우리는 의사에게 한번더 검진을 받을 때까지 나갈 수 없었다. 당국에선 천연두가 부랑자들을통해 퍼지는 걸 끔찍스럽게 여겼던 것이다. 이번에는 의사를 2시간 동안 기다렸고, 결국 우리는 10시가 되어서야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드디어 때가 되어 우리는 뜰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음산하고 악취진동하는 스파이크에 있다 밖으로 나오니, 모든 게 어찌나 환하고 바람냄새는 또 어찌나 향기롭던지! 부랑자 감독이 압수했던 소지품 꾸러미를 각자에게 돌려주고 점심으로 먹을 빵 한 덩이와 치즈를 나눠주자,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섰다. 스파이크의 외관과 그 규율을 어서 벗어나려고서둘러 떠났다. 한동안 자유를 누릴 때가 온 것이었다. 하루 낮 이틀 밤을 허비하고 난 우리는 8시간 정도 기분전환도 하고, 길에서 담배꽁초도 줍고, 구걸도 하고, 일거리도 찾아볼 터였다. 그리고 10마일이나 15마일, 아니면 20마일 정도 가야 다음 스파이크에 당도할 것이고, 거기서게임이 새로 시작될 것이었다. - P20
길은 조용했다. 차도 안 다니고, 꽃이 만발한 밤나무는 거대한 밀랍 초 같았다. 모든 게 너무고요하고 너무 향긋해서 몇 분 전만 해도 한 무리의 포로들과 함께 역한 하수구 냄새와 비누냄새 진동하는 곳에 바글바글 갇혀 있었다는 게실감나지 않았다. 나머지는 다 사라졌고, 이제 우리 둘만 길에 나선 부랑자 같다는 느낌이었다. 그때 뒤에서 서둘러 다가오는 발소리가 나더니 누가 내 팔을 두드렸다. 키 작은 스코티였다. 그가 숨을 헐떡이며 우릴 쫓아온 것이었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녹슨 깡통 갑 하나를 꺼내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신세 진 걸 갚으려는 사람의 표정 같았다. "자 이거, 친구." 그가 다정하게 말했다. "자네한테 담배를 좀 빚졌잖아. 어제 나한테 선심을 썼지. 아침에 나올 때 부랑자 감독이 내 담배꽁초갑을 돌려주더라구. 친절은 베풀면 돌아온다니까. 자 여깄네." 그러면서 그는 내 손에 눅눅하고, 다 썩어빠지고, 구질구질한 담배꽁초 4개를 쥐여주는 것이었다. - P21
교수형
버마였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아침이었다. 누런 양철판처럼 희부연 빛줄기 하나가 높은 담벼락 너머 형무소 안마당에 비스듬히 걸쳐 있었다. 우리는 철창이 이중으로 된 작은 짐승 우리 같은 헛간이 줄지어있는, 사형수 감방들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감방 하나는 가로세로 10피트 정도의 크기에, 판자로 만든 침상과 마실 물이 든 단지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중에는 안쪽 철창가에 갈색 피부의 남자들이 담요를 두른 채 말없이 쪼그려 앉아 있는 방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형수로, 1~2주안에 교수형에 처해지게 되어 있었다. 그중 하나가 감방에서 끌려나왔다. 힌두인‘인 그는 꼬챙이처럼 마른몸에 머리는 삭발을 했고 눈빛은 흐릿하게 젖어 있었다. 그는 숱 많고두툼한 콧수염을 길렀는데, 몸집에 비해 터무니없이 커서 마치 영화에나오는 코미디 배우의 수염 같았다. 키가 큰 인도인‘ 간수 여섯 명이 그를 감시하는 동시에 교수대로 데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둘은 총에 착 - P23
검을 한 채 서 있었고, 나머지는 힌두인 죄수에게 수갑을 채우고 사슬을수갑 사이로 통과시켜 자기네 혁대에 고정시킨 뒤 그의 팔을 옆구리와함께 단단히 묶었다. 그들은 그의 곁에 바싹 붙어 있었고, 줄곧 그가 정말곁에 있는지 확인이라도 하듯 조심스레 손을 얹고 있었다. 마치 아직살아 있어 물로 뛰어들지도 모를 물고기를 다루는 사람들 같았다. 하지만 그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거의 모르기라도 하듯 오랏줄에 맥없이 팔을 맡긴 채 아무 저항도 없이 서 있었다. 8시 정각이 되자 집합 나팔 소리가 먼 막사에서 습한 공기를 타고 고적하고 여리게 들려왔다. 우리와는 따로 서 있던 형무소장은 시무룩하니 지팡이로 자갈을 찌르고 있다가 그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는 군의관으로, 칫솔 같은 회색빛 콧수염에 목소리가 걸걸한 사람이었다. "이런, 이런, 어서 서둘러, 프란시스" 그가 안달을 했다. "저 사람 지금쯤 벌써 죽었어야지. 아직 준비 안됐나?" - P24
이상한 일이지만, 바로 그 순간까지 나는 건강하고 의식 있는 사람의목숨을 끊어버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죄수가 웅덩이를 피하느라 몸을 비키는 것을 보는 순간, 한창 물이오른 생명의 숨줄을 뚝 끊어버리는 일의 불가사의함을 말할 수 없는 부당함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가 살아있듯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모든 신체기관은 미련스러우면서도 장엄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내장은 음식물을 소화하고, 피부는 재생하고, 손톱은 자라고 조직은 계속 생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교수대 발관에 설 때에도, 10분의 1초 만에 허공을 가르며 아래로쑥 떨어질 때에도, 그의 손톱은 자라나고 있을 터였다. 그의 눈은 누런자갈과 잿빛 담장을 보았고, 그의 뇌는 여전히 기억과 예측과 추론을 했다-그는 웅덩이에 대해서도 추론을 했던 것이다. 그와 우리는 같은 세상을 함께 걷고, 보고, 듣고, 느끼고, 이해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2분뒤면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 중 하나가 죽어 없어질 터였다. 그리하여 사람 하나가 사라질 것이고, 세상은 그만큼 누추해질 것이었다. - P26
아니다. 듯 낑낑거렸다. 여전히 교수대에 서 있던 집행인은 밀가루 부대를 닮은작은 무명 자루를 꺼내더니 죄수의 얼굴에 씌웠다. 하지만 천에 가로막혀도 그 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람! 람! 람! 람! 람!" 이윽고 집행인은 아래로 내려와 손잡이를 잡고 섰다. 몇 분이 흘러간것만 같았다. 자루에 걸러진 죄수의 꾸준한 외침은 한순간도 흐트러짐없이 "람! 람! 람!" 계속됐다. 고개를 가슴에 처박고 있던 형무소장이지팡이로 땅바닥을 천천히 쑤시기 시작했다. 그는 죄수의 외침을 일정한 숫자만큼(50번 아니면 100번) 용납하기로 하고 수를 헤아리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인도인들의 낯빛이 상한 커피처럼 잿빛으로 변해갔고, 총검 한두 개가 흔들흔들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올가미와 자루를 쓰고교수대 발판에 올라서 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그의 외침을 듣고 있었다. 소리 한 번이 연장된 목숨 1초였다. 우리는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있었다. 제발 어서 죽여버려. 그냥 끝내라구 저놈의 징글맞은 소리 그만 듣게! - P27
방금 교수형이 집행된 것치고는 우리는 업무를 마친 것에 엄청난 안도감을 느꼈다. 노래라도 부르거나, 느닷없이 마구 달리거나, 낄낄거리기라도 하고픈 충동을 느꼈다. 우리는 갑자기 모두가 흥겹게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내 옆에서 걷던 유라시아계 소년은 우리가 온 쪽으로 고갯짓을 하며아는 체하는 미소를 짓고서 말했다. "아십니까요. 나리? 우리 친구가(죽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항소가 기각됐다는 말을 듣고 감방 바닥에다오줌을 쌌다는 것 말입니다. 겁을 먹은 겁죠. 자, 나리, 제 담배 하나 태워보십쇼. 제가 새로 산 은제 담뱃갑 멋지지 않습니까요. 나리? 행상한테 2루피 8아나를 주고 샀는데, 고급스러운 유러피언 스타일입죠." 여럿이 껄껄 웃었다. 무엇 때문에 웃는지 확실히 아는 사람은 없는 것같았지만. 프란시스는 소장 옆에서 걸으며 수다를 떨었다. "자, 나리, 모든 게 더없이 만족스럽게 끝났습니다요. 전부 휙! 하면서 다 끝나버린 것 같습니다요. 항상 그런 건 아닙죠. 암, 절대 안 그렇습죠! 저는 의사가 교수 - P29
대 밑으로 가서 죄수의 다리를 당겨보고 죽었는지 확인해야만 하는 경우도 여러 번 봤습죠. 얼마나 찝찝한 일입니까요!" "안 죽고 꿈틀꿈틀할 때 말이지, 음? 그거 고약하지." 소장이 말했다. "예, 나리, 그런데 놈들이 뻗댈 때는 더 고약합죠! 우리가 데리러 갔을 때 감방 철창에 떡 붙어 있는 녀석도 다 있었습죠. 녀석을 떼어놓느라고 간수 여섯이 들러붙어야 했다고 하면 못 믿으실 겁니다요. 나리. 다리 하나에 셋씩 붙어야 했지 뭡니까요. 나중엔 달래기까지 했습죠. 이 친구야. 자네가 지금 우리한테 얼마나 애를 먹이고 있는지 생각 좀해보게나! 그런데 녀석이 들으려고 해야지요! 아이고, 정말 골치 아픈녀석이었습니다요!" 나는 제법 큰 소리로 웃고 있었다. 모두가 껄껄 웃고 있었다. 소장마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모두 나가서 한잔하자구." 그가 꽤 다정하게 말했다. "차에 위스키 한 병이 있어. 그거 다 비워버리자구." 우리는 이중으로 된 형무소 정문을 지나 길에 들어섰다. "다리를 붙들고 끌어내야 했다니!" 버마인 치안판사가 갑자기 외치더니 큰 소리로키득거렸다. 우리 모두 다시 껄껄 웃기 시작했다. 그 순간엔 프란시스말한 일화가 너무 재밌다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원주민과 유럽인을 가릴 것 없이 모두 어울려 제법 의좋게 한잔했다. 죽은 자는 100야드쯤 떨어져 있었다. - P30
코끼리를 쏘다
남부 버마의 몰멩 에서 나는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받았다. 살아오면서 남들에게 미움을 받을 만큼 내가 중요해진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막연하고 사소한 반유럽 정서가 상당히 독한 그 도시에 배속된 경찰관‘이었다. 누구도 소요를 일으킬 배짱은 없었으나, 유럽 여성이 혼자시장에라도 다니면 옷에다 비틀‘ 즙을 뱉는 사람은 있을 정도였다. 나는경찰이라 손쉬운 표적이 되었고, 안전하다 싶으면 누군가가 꼭 골탕을먹였다. 축구장에서 날렵한 버마인이 내 발을 걸면 심판은(역시 버마인이었다) 딴 데를 쳐다봤고, 관중은 포복절도를 했다. - P31
이 모든 것들이 당혹스럽고 언짢았다. 왜냐하면 그 무렵 나는 제국주의가 사악한 것이니 어서 직장을 때려치우고 그로부터 멀어질수록 좋다는 생각을 이미 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나는 이론적으로는(물론 남몰래 그랬다) 전적으로 버마인들 편이었고, 그들의 압제자인 영국인들을전적으로 적대시했다. 내가 하고 있던 일에 대해서는, 내가 설명할 수있는 그 어떤 정도보다 지독하게 혐오했다. 그런 일을 하다보면 제국의추악한 짓거리들을 지근거리에서 보게 된다. 악취 지독한 철창에 처박혀 있는 불쌍한 죄수들, 장기 재소자들의 겁먹은 얼굴, 대나무로 매질을당한 사람들의 터진 엉덩이. 이 모든 게 견딜 수 없는 죄책감으로 나를짓눌렀다. 하지만 난 그럴싸한 내 나름의 관점을 전혀 갖추지 못했다. 나는 아직 어린데다 부실한 교육을 받았고, 동양에 가 있는 영국인이라면 누구나 그랬듯 내 문제를 철저히 함구한 채 혼자 해결해야 했던 것이다. 심지어 나는 대영제국이 저물어가고 있다는 것도 몰랐고, 그것을 대체해가는 신생 제국들보다는 영국이 훨씬 낫다는 건 더더욱 몰랐다. - P32
그러던 어느 날 우회적으로 깨우침을 주는 일이 벌어졌다. 그 자체로는 사소한 사건이었지만, 제국주의의 본질을(달리 말해 전제적인 지배의 진짜 동기를) 이전보다 더 잘 간파할 수 있게 해준 일이었다. 아침 일찍 시내 다른 경찰서의 고참 경위가 내게 덜컥 전화를 하더니 코끼리 한마리가 시장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부디 와서 어떻게 좀해주십사 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몰랐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고 싶어 조랑말에 올라타고 그곳으로 향했다. 소총도 챙겼는데, 케케묵은 윈체스터 44구경이라 코끼리를 잡기에는 너무 빈약했지만 그 소리는 위협으로 쓸 만하다 싶었다. 도중에여러 버마인들이 나를 지체시키며 코끼리의 소행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물론 그것은 야생 코끼리는 아니었고, ‘발정기‘ 를 맞은 길든 코끼리였다. 길든 코끼리가 다 그렇듯 녀석은 ‘발정기가 닥치자 묶여 있었는데, 전날 밤 사슬을 끊고 탈출한 것이었다. 발정난 코끼리를 다룰 수 있는유일한 사람인 조련사는 녀석을 잡으러 나섰지만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바람에 그곳에서 12시간은 걸리는 곳에 있었고, 아침에 녀석이 갑자기시내에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 P33
전령은 몇 분 뒤에 총과 탄약통 5개를 들고 왔다. 그사이 버마인 몇사람이 우리한테 오더니 코끼리가 불과 몇백 야드 거리의 밭에 있다고했다. 내가 그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사실상 그 동네 인구 전체가 집에서 몰려나와 나를 따라왔다. 큰 총을 본 그들은 내가 코끼리를 쏠 거라며 모두 흥분해서 소리쳤다. 그들은 코끼리가 자기네 집을 대놓고 부술 때는 대단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 코끼리가 총에 맞을 거라고 하니 달라졌다. 영국인 군중이라도 그랬을 것처럼, 이 일은 그들에게도 제법 재미있는 사건이었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고기 생각도 있었던것이다. 나는 어딘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우선 나는 코끼리를 쏠 생각이 없었으며(필요하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총을 빌려오라 했을 뿐이었다)자기 뒤를 따라오는 군중이 있다는 건 언제나 당혹스러운 일이다. 나는비탈 아래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총을 어깨에 걸친데다 뒤로는 계속해서 늘기만 하는 군중이 서로 밀치며 졸졸 따라오니, 내 모습은 내가 느끼기에도 바보스러웠다. - P36
피할 수 있다면 분명히 피해야 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멀리서 보니 평화롭게 풀을 뜯는 코끼리는 소보다도 위험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나는‘발정기‘ 의 발작은 이미 지나가버렸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녀석은 위험하지 않게 그저 배회할 것이고, 조련사가 돌아와서 데려가면 그만일 터였다. 더욱이 나는 녀석을 쏘고 싶은 마음이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좀 지켜보며 녀석이 다시 난폭해지지는 않는다는 걸 확인한 뒤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돌아서다 나를 따라온 군중을 흘낏 보고 말았다. 막대한 인파였다. 적어도 2000명은 되고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길 양쪽을 다 막고 길게 늘어서 있었다. 빛깔 요란한 옷들 위로 길게 이어져 있는 노란 얼굴들의 물결이 보였다. 모두 코끼리한테 총을 쏠 것이라 확실히 믿고서 제법 흥이 나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마치마술사의 묘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그들은 날좋아하지 않았지만 마술의 소총을 든 나는 잠시 봐줄 만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내가 결국엔 코끼리를 쏴야 한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사람들이내가 그러리라 기대하고 있었으니 그래야만 했던 것이다. 나는 2000명의 의지가 나를 거역할 수 없게 밀어붙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 P37
나는 일어섰다. 버마인들은 이미 나를 지나쳐진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코끼리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건 분명했지만 죽은 건 아니었다. 아주 규칙적으로 길게 그르렁거리며 헐떡일 때마다 거대하고 불룩한 옆구리가 고통스레 오르내렸다. 입은 헤벌려져 있어 옅은 분홍빛인 목구멍 깊은 곳이 보일 정도였다. 나는 코끼리가 죽을 때까지 오래 기다렸다. 하지만 호흡은 더 약해지지 않았다. 결국 나는 남은 두 발을 심장이있지 싶은 부분에 발사했다. 빨간 벨벳처럼 진한 피가 쏟아져 나왔지만그래도 죽지 않았다. 총을 맞을 때 몸을 꿈틀하지도 않았고, 고통스러운호흡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나는 그 불쾌한 숨소리를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거대한 짐승이 움직일 힘도 죽을 힘도 없이 그 자리에 쓰러져 있는 꼴을 보는 것도, 그 목숨을 어서 끊어버릴 수 없는 것도 몹시 불쾌한 노릇이었다. 나는 내 작은 소총을 가져오라고 해서 코끼리의 심장과 목에다 한 발씩 쏘아넣었다. 아무 효과도 없는 듯했다. 고통스러운헐떡임은 시계 초침이 움직이듯 꾸준히 이어졌다. - P41
서점의 추억
헌책방에서 일하던 때 주로 느낀 것은 정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점이었다(일해보지 않으면 매력적인 노신사들이 송아지 가죽으로 장정한 고서들을 마냥 열독하고 있는 천국 같은 곳으로 상상하기 쉽다). 우리 서점은예외적으로 흥미로운 책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으나, 손님들 중에 10분의 1이나마 그 진가를 알았을까 싶다. 초판 밝히는 속물들이 문학 애호가들보다 훨씬 흔했고, 싼 교과서 값을 더 깎으려는 동양 학생들이 그보다 더 흔했으며, 막연히 조카 생일 선물이라도 구하러 들르는 여성들이제일 흔했다. 우리 가게에 오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어딜 가나 성가신 존재이겠지만 서점에 와서 특별한 기회를 누리려고 하는 부류였다. 이를테면 "아픈 사람 줄 책"을 원한다거나(아주 흔한 요구다), - P43
그런데 그들 말고도 어느 헌책방에나 자주 출몰하는 성가시기로 유명한 유형이둘 있다. 하나는 묵은 식빵 껍질 냄새가 나는 쇠약한 사람이 매일같이, 어떤 때는 하루에 몇 번씩 찾아와 무가치한 책들을 팔려고 하는 경우다. 또 하나는 살 의향이 조금도 없으면서 책을 대량으로 주문하는 경우다. 우리 가게에선 물건을 외상으로 팔진 않았으나, 나중에 가져가겠다는사람들을 위해 책을 따로 남겨두거나 필요하면 주문을 해주기는 했다. 그런데 우리를 통해 책을 주문한 사람들 중에 다시 오는 사람은 절반이되지 않았다. 나는 처음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러나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서점에 찾아와 꽤 귀하고 비싼 책을 요구하며 구하게 되면 꼭 남겨두라고 우리에게 몇 번이나 다짐하고 간 뒤,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그들 중 상당수는 틀림없는 편집증 환자였다. 그들은 자기 이야기를 아주 거창하게 하곤 했다. 또 집을 나서면서어떻게 돈을 깜빡 두고 왔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대단히 기발한 얘기를지어내곤 했는데, 많은 경우 스스로 그 얘기를 믿고 있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런던 같은 도시에서는 딱히 병원에 가야할 정도는 아닌 정신이상자들이 길에 나다니는 경우가 언제나 많고, 그들은 종종 서점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왜냐하면 서점은 돈을 전혀 쓰지 않고도 오랫동안 서성일수 있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 P44
우리 서점은 햄스테드와 캠든타운 바로 접경에 있었기 때문에 준남작에서부터 버스 차장에 이르기까지 온갖 유형의 손님이 빈번히 드나들었다. 아마 우리 대여문고 회원들은 런던 독서 대중의 그럴싸한 단면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 문고 저자들 가운데 가장 잘 나간‘ 작가를언급할 만할 터이다. 프리스틀리 헤밍웨이? 월폴? 우드하우스? 아니다. 에셀 M. 델이 1위요, 워윅 디핑이 아깝게 2위요, 3위는 제프리 파놀정도이지 싶다. 델의 소설은 물론 여성들만 보는데, 한 많은 노처녀나 - P46
담뱃가게의 뚱뚱한 부인네만이 아니라 의외로 모든 부류, 모든 연령층6의 여성들이 즐겨 찾는다. 남성들이 소설을 읽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들이 아예 피하는 소설 장르들이 있는 건 사실이다. 거칠게 말해서 ‘평균치‘ 소설이랄 만한 것들은 여성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듯하다(영국 소설의 표준처럼 되어버린 평범하고 좋으면서 나쁜, ‘골즈워디 에다 물 타기‘ 식인것들을 말한다). 남성들은 존경할 만하다 싶은 소설이나 추리소설을 보는데, 그들의 추리소설 소비량만은 엄청나다. 우리 회원 한 사람은 내가아는 바로는 1년 내내 추리소설을 매주 네댓 권씩 읽었는데, 다른 서점문고에서 빌려 보는 숫자를 뺀 게 그 정도였다. 나로서는 그가 그렇게나읽으면서도 같은 책은 절대 다시 고르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그런 나부랭이들을 그렇게 많이 섭렵해도 어떻게든 기억에 다 남는 모양이었다(1년 동안 읽은 페이지를 계산해보니 4분의 3에이커를 덮을 면적이었다). 그는 제목이나 저자명을 기억하진 못했지만, 책을 슬쩍 들여다보기만 하면 ‘이미 본 것인지를 알았다. 대여문고를 운영해보면 사람들의 그런 척하는 취향 말고 진짜 취향을알게 된다. 한가지 놀라운 것은 영국 고전소설가들의 인기가 완전히끝났다는 점이다. 디킨스나 새커리, 제인 오스틴, 트롤로프 같은 이들은 일반 대여문고에 넣어보나 마나다. 아무도 고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19세기 소설은 보기만 해도 "어휴 그건 옛날 거잖아요"라며시 - P47
당장 피해버린다. 하지만 디킨스를 파는 건 셰익스피어의 경우가 그렇듯 언제나 꽤 쉬운 일이다. 디킨스는 사람들이 언제나 읽을 의향이있는 작가 중 하나로, 성경과 마찬가지로 간접적으로만 안다. 모세가파피루스 바구니 안에서 발견됐고 하느님의 뒷모습을 봤다는 걸 들어서 알듯, 빌 사익스가 강도였고 미카버 씨‘가 대머리였다는 걸 들어서아는 것이다. 대단히 주목할 만한 다른 사실 하나는 미국 책이 점점 인기가 없어져간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 놀라운 건 단편소설이 인기가 없다는 점이다(출판업자들은 이 문제로 2~3년에 한 번씩은 안달복달을 한다). 문고지기에게 책을 하나 골라달라고 하는 유형의 사람들은, 우리문고의 한 독일인 고객이 그러는 것처럼 거의 항상 "단편소설은 원치않고요" 혹은 "짧은 이야기는 바라지 않아요"라는 말부터 시작한다. 왜냐고 물으면 단편은 이야기마다 인물들이 바뀌기 때문에 적응하는 게고역이라고 설명하곤 한다. 때문에 첫 장 이후론 더 이상의 생각을 요구하지 않는 장편에 ‘빠져드는 게 좋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독자들보다는 작가들이 더 문제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영국과 미국의 단편소설은 대부분 철저히 무기력하고 무가치한 것이, 대부분의 장편보다 그정도가 훨씬 더하다. - P48
또한 이 장사는 어느 정도 이상은 천박해질 수 없는 인도적인 사업이다. 독점기업연합은 식료품 잡화상과 우유 배달 점포를 찍어눌러 퇴출시켜버릴수 있겠지만, 영세 독립 서적상은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하는 시간은 대단히 길다. 나야 파트타임 종업원일 뿐이었지만 내고용주는 매주 70시간씩 근무했는데, 책을 사러 멀리까지 끊임없이 다니느라 가게에 없는 시간을 뺀 게 그 정도였다. 게다가 근무환경이 건강에 별로 좋지 않다. 서점은 겨울이면 대개 지독히도 추운데, 너무 따뜻하면 창에 김이 서리게 되고 서적상은 창이 깨끗해야 먹고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은 지금까지 만들어진 그 어떤 물건보다도 더 많고 고약한 먼지를 뿜어내며, 책머리만큼 왕파리가 죽을 장소로 선호하는 곳은없다. 하지만 내가 서점 일을 평생 하고 싶지는 않은 진짜 이유는 그 일을하는 동안 내가 책에 대한 애정을 잃었기 때문이다. 서적상은 책에 대해 - P49
거짓말을 해야 하는데, 그러다보면 책이 싫어지게 된다. 더 나쁜 건 언제나 책 먼지를 털고 책을 이리저리 옮겨야만 한다는 점이다. 내가 책을정말 사랑한 적이 있긴 했다. 덧붙이자면 적어도 50년이 넘은 책의 모습과 냄새와 감촉을 사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시골에서 경매로 책을1실링에 한 무더기씩 사는 기쁨도 대단했다. 오래된 뜻밖의 책들을 그런 식의 묶음으로 얻는 데는 묘한 흥취가 있다. 별로 유명하지 않은 18세기 시인, 옛날 지명사전, 표지가 독특한 잊혀진 소설, 장정이 된1860년대 여성지 같은 것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부담 없이 뭘 읽고싶을 때(이를테면 목욕할 때나 너무 피곤해 잠이 오지 않는 늦은 밤이나 점심을기다리는 15분 정도의 애매한 시간 동안에는 <걸스 오운 페이퍼>의 지난 호만 한 게 없다. 그러던 내가 서점에서 일하게 되자마자 책을 더는 사지 않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한 번에 5000권, 만 권씩 보다보니 책이란게 시시했고 지긋지긋하기까지 했다. 요즘은 가끔씩만 책을 사고, 그것도 읽고는 싶은데 빌려 볼 수 없는 것만을 산다. 그리고 시시한 건 절대사지 않는다. 묵은 종이의 달큰한 냄새는 더 이상 내 마음을 끌지 못한다. 편집증 환자 같은 손님들과 죽은 왕파리들이 너무 쉽게 연상되기 때문이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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