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지금 나는 구좌에 있다.


연북정, 비석거리, 번듯한 기와집 마을이 있고, 중산간지대에 와흘리 선흘리의 본향당신당이 신령스럽다. 교래리엔 자연휴양림도 있다. 특히나 구좌엔 김녕리, 평대리, 송당리, 세화리, 하도리, 종달리 등 이름도 아름다운 동네 열두 개가 있고 중골, 연등물, 검은흘, 솔락개, 글막개, 첫동네 등제주토속을 그대로 느끼게 하는 60여 곳의 묵은 동네가 있다.
구좌는 한라산 북사면의 저지대로 넓은 초지가 바다 쪽으로 길게 뻗어 있다. 제법 넓고 비탈진 들판의 긴 밭담 속에서 당근·양파·마늘이 철따라 푸른빛을 발하고 송당목장이 있는 송당리 일대는 마지막 테우리 (목동)들이 여전히 소와 말을 키우고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비자림 (子林)도 구좌에 있다.
하도리에는 지금도 제주 해녀의 10분의 1이 변함없이 물질을 하고 있고, 갯가 곳곳엔 해녀들의 쉼터인 불턱과 세화리 갯것할망당, 종달리 돈지할망당 같은 해안가 신당이 옛날 그 모습으로 성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이처럼 구좌에는 제주의 농업, 목축업, 어업이 과거 그대로 이어져오고 있어 제주인의 건강하면서도 애틋한 삶을 속살까지 만질 수 있다. - P15

구좌는 기생화산(寄生火山) 인 오름의 왕국이다. 오름의 여왕이라 불리는 다랑쉬오름, 굽이치며 돌아가는 능선이 감미로운 용눈이오름도 여기있다. 만장굴, 김녕사굴, 용천동굴이 있는 제주도 용암동굴의 종가이기도 하다. 문주란 자생지로 유명한 토끼섬도 구좌에 있다. 게다가 1만 8천신들의 고향인 송당본향당도 여기에 있으니 구좌는 제주 자연과 인문의 원단이 모여 있는 곳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읍소재지 세화리에서 하도리 거쳐 종달리에 이르는 해안도로는 멀리성산일출봉이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져 있어 제주도 일주도로 중에서도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주는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다. 조천과 구좌는어느 면으로 보나 당당히 ‘제주답사일번지‘로 삼을 만하다. - P15

심어놓았다. 그러나 하와이나 사모아 섬에서 장대하게 자라는 나무들이제주에서는 억지로 겨우겨우 자라 대빗자루 몽둥이처럼 길게 올라간 것을 보면 감동은커녕 측은지심이 일어날 때가 많다.
진짜 제주도에서 우리의 눈과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것은 자생종 나무들이다. 구실잣밤나무, 담팔수, 먼나무, 동백나무, 후박나무, 녹나무,
협죽도 같은 늘푸른나무들이다. 자생나무로 이루어진 가로수들은 한껏우리의 눈과 마음을 기쁘게 해준다.
제주시내의 구실잣밤나무 가로수길, 서귀포의 담팔수 가로수길, 대정제주 추사관 언저리의 먼나무 가로수길, 사려니 숲길 가는 길의 삼나무가로수길, 남원 일주도로의 야자나무 가로수길, 종달리 해안도로의 수국꽃길은 그 자체가 일품이어서 차 타고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눈과 마음이 황홀해진다. - P26

‘소원을 새긴 백지!‘


사연이 많은 사람은 소지를 몇십 장 겹쳐서 가슴에 대고 빈다고 한다.
이런 높은 차원의 발원 형식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을까 보냐. 본래는 글모르는 할머니들을 위해 생겨난 의식이었다고 하는데 어떤 글을 써넣은것보다 진한 감동을 주지 않는가!
일본의 사찰에 가면 소원을 써서 절 마당에 걸어놓는 강까께(願掛)가 있고, 이스라엘 ‘통곡의 벽‘에선 소원을 적어 돌 틈에 끼워넣는다고하는데 우리 제주도에선 백지에 소원을 전사(轉 寫)해서 걸어놓는 것이다. 팽나무 신목에 흰 소지가 나부끼는 와흘본향당은 제주인의 전통과정체성을 웅변해주는 살아 있는 민속인 것이다. - P41

는 제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팽나무 대여섯 그루 아래 모셔진 이 다섯 석상을 보면 그야말로 서민적이고 해학적이고 무속적이고 제주도적인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면서깊은 정을 느끼게 된다. 불상을 보거나 돌하르방을 볼 때는 전혀 느낄 수없는 인간적 체취이다. 삼다도의 그 많은 돌 중에서 인체를 닮은 것, 얼굴을 닮은 것 다섯 개를 골라 거기에 이목구비만 슬쩍 가했을 뿐인데 누구도 석상 아니라고 할 수 없는 인간미가 넘친다. 조형적으로 세련되었다는 얘기가 아니다. 세련되기는커녕 조형이라는 개념도 없이 민초들이자신들의 정서에 맞는 돌을 주워다 세워놓았을 뿐인데 우리는 거기에서말할 수 없는 친숙감을 느끼니 이것이 민속의 힘이고 아름다움이라고할 만한 것이다. - P46

제주도 답사에서 돌아와 학생들과 얘기하는 도중에 사실 ‘회천 석인상‘이라는 아주 별격의 옛 석인상이 있었다며 사진을 보여주자 학생들은 제각기 다른 재미있는 모습들을 보면서 만면에 웃음을 띠며 즐거워했다. 그리고 이런 곳을 데리고 가지 않은 선생이 원망스럽고 너무도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생각해보자니 제주의 유서 깊은 중산간마을인 세미마을은 오래도록많은 상처를 입었다. 마을 이름은 회천동으로 둔갑했고, 포제를 지내던신당의 석인상은 화천사 오석불이라고 불리고 몸에는 유교식 위패가 새겨졌다. 거기다 4·3사건 때 이 마을들은 전소되고 많은 희생자를 내어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세워놓은 ‘4·3희생자 위령비‘가 길가에 쓸쓸히서 있다.
- P47

성에 배치된 인원도 대대적으로 보강하여 진지의 대장 아래 상비군약 100명과 예비군 100명을 두었고 전용배가 한 척 있었다고 한다. 이때성 위에 망루를 짓고 쌍벽정(雙碧亭)이라고 했는데 선조 32년(1599)에 성윤문(成允文) 목사가 다시 건물을 수리하고는 정자 이름을 연북정이라고 바꾸었다.
오늘날 조천진의 성벽은 일부만 남아 있지만 동남쪽 정면은 높이 14자의 반듯한 축대이고 북쪽은 타원형의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어 그 옛날의 장했던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다. 모양으로 보나 크기로 보나 둥그렇게 둘러진 옹성(城)이었음을 알 수 있다. - P50

연북정 정자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앞뒤 좌우로 퇴(退)가 딸린일곱 량 집이다. 일곱 량이란 서까래를 받치고 있는 도리가 일곱 개 있다는 뜻으로 세 량, 다섯 량이 아니라 일곱 량이나 되는 큰 집이라는 뜻이다. 기둥의 배열과 가구의 연결방식이 모두 제주도 주택과 비슷하며 지붕은 합각지붕으로 물매가 아주 낮다. 바람이 세기 때문에 육지의 정자처럼 기둥을 높이 올리지 못하는 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북정은 시원스런 멋이 아니라 야무진 집이라는 인상을 준다.
모든 정자는 건물 자체보다 거기서 내다보는 전망이 더 중요하고, 더아름답다. 연북정에 오르면 조천항이 멀리 내다보인다. 연북정 너머 펼 - P50

 조천진지붕이 육지의 그것처럼 활짝쳐지는 먼바다에서 파도가 넘실넘실 춤을 추듯 포구로 밀려들어오다가바위섬에 부딪칠 때는 ‘처얼썩!‘ 소리를 내며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진다. 그러고는 해안에 다다라서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가만히 뒷걸음으로 물러나며 자취를 감춘다. 열지어 들어오는 한 무리 파도가 밀려가는끝까지 눈길을 주면서 몇번 일렁이나 헤아려보기도 하고, 낮은 바위를거뜬히 타고 넘는지 숨죽여 기다려보기도 한다.
연북정 정자에 앉아 검은 바위를 넘나들며 부서지는 파도의 흰 포말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 몸과 마음이 홀연히 가벼워진다. 이상(李箱)의 표현대로 ‘정신이 은화(銀貨)처럼 맑아진다. 그것이 연북정에오르는 맛이다. - P51

신영복 선생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아버님께 보낸 편지에 연북정에 대한 역설을 이렇게 말했다.


유배지에서 다산 정약용이 쓴 글을 읽었습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대부분의 유배자들이 배소에서 망경대나 연북정 따위를 지어 임금에대한 변함없는 충성과 연모를 표시했음에 비하여 다산은 그런 정자를짓지도 않았거니와 조정이 다시 자기를 불러줄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해배만을 기다리는 삶의 피동성과 그 피동성이 결과하는 무서운 노쇠를 일찍부터 경계하였습니다.


신영복 선생은 그런 마음으로 20년간 감옥살이를 했고 그랬기에 오늘날 존경받는 지식인상이 된 것이리라. - P54

너븐숭이에서 진짜 우리의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추모의 염을 일으키는 것은 길가에 있는 애기무덤들이다. 관도 쓰지 않은 무덤인지라 대야만 한 크기로 동그랗게 현무암을 둘러놓은 것이 전부인 애기무덤 여남은 개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 애처롭고 슬픈 풍경을 나는 다 표현하지못한다. 무덤가에는 시민단체들이 연합하여 세운 작은 까만 대리석 비석이 놓여 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평화와 상생(相生)의 꽃으로 피어나소서. 4·3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며 남겨진 유가족들에게도 깊은 형제적 연대감과 평화를 기원하나이다."


조촐할지언정 위로하고 추모하는 마음이 진실되어 가슴이 뭉클해진 - P72

다. 누가 이 애기무덤과 비석을 보면서 4·3을 불온분자의 폭동이라고 할수 있겠는가. 유적지의 진정성이란 이런 것이다. 그래도 더러는 애기무덤을 보면서 "아이들까지도 죽였단 말인가?"라고 적이 놀라고 의심이 가는 분도 있을 것같다. 그러나 정말 당시는 그랬고, 그보다 더 이해하기힘든 사실도 있다. 제주의 화가 강요배가 4·3사건을 주제로 한 「동백꽃지다」 연작을 전시할 때 얘기다. 요배 그림을 좋아한 그의 팬 한 분은 그의 이름까지 멋있다고 생각해서 "선생님은 이름도 예술적이에요. 아버님이 멋있는 분이었나 봐요"라고 친근하게 말하자 요배는 멋쩍은 듯 아무 말하지 않고 빙긋이 웃기만 했다.
그때 요배는 모르는 사람이라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의 이름에는 4·3사건의 아픔이 그대로 배어 있다. 4·3사건의 양민학살 당시 지금 제주공항인 정뜨르에 토벌대가 수백 명의 주민들을 모아놓고 호명할 때 "김철 - P73

수"라고 불러 동명을 가진 세 명이 나오면 누군지 가려내지 않고 모두 처형했다는 것이다. 그때 요배 아버지는 내 아들 이름은 절대로 동명이 나오지 않는 독특한 이름으로 지을 것이라고 마음먹어 요배의 형은 강거배, 요배는 강요배가 된 것이다. 제주인에게 4·3의 상처는 그렇게 깊고오래 지속되었던 것이다.
너븐숭이 애기무덤 곁으로 큰길 안쪽에는 ‘순이삼촌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순이삼촌‘이라고 새긴 기둥이 하나 서 있고 그 주위에는 순이삼촌 소설의 문장들이 새겨진 수십 개의 장대석이 널부러져 있다. 마치북촌리 학살 때 시신들이 쓰러져 있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비석을 향해가는 동안 소설의 구절들을 스치듯 읽게 되니 자연히 고개가 땅을 향하여 추모하는 자세가 된다. 제주도에서 본 가장 진정성이 살아 있는 기념설치물이었다. 그중 한 대목을 읽어보니 이렇게 쓰여 있었다. - P74

‘순이삼촌네 그 옴팡진 돌짝밭에는 끝까지 찾아가지 않은 시체가 둘있었는데 큰아버지의 손을 빌려 치운 다음에야 고구마를 갈았다. 그해고구마 농사는 풍작이었다. 송장거름을 먹은 고구마는 목침 덩어리만큼큼직큼직했다."


지금도 사람들은 행여 무슨 오해라도 살까봐 4·3을 쉬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4·3사건을 당당히 얘기해야 한다. 그것은 외면한다고 잊혀질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다. 조천에 왔으면 마땅히 너븐숭이를들러야 진정한 답사객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 P74

"오름은 제주의 빼놓을 수 없는 표정이자 제주인의 삶이 녹아 있는 곳이라!"

나는 당장 다랑쉬오름을 가보고 싶었다. 그것을 보지 않고 어떻게 그의 그림에 평을 쓸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그의 화실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아침, 일단 제주시내로 가서 민예총의 김상철에게 전화를 걸어 답사팀을 꾸려 다랑쉬오름에 가자고 했다. 이런 일은 상철이에게 부탁하면 차질 없이, 아니 150퍼센트 해낸다. 여지없이 상철이는 자동차가진 사람을 꼬드겨서 우리 팀에 끌어넣었다.
다랑쉬오름은 구좌읍 세화리와 송당리에 걸쳐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제주의 빼놓을 수 없는 명소 비자림의 동남쪽 1킬로미터 지점이다.
제주시내에서 가자면 번영로97번 도로)와 비자림로, 중산간동로를 거쳐가거나 산천단을 지나 일단 5·16도로(1131번 도로)로 들어섰다가 산굼부리를 거쳐가는 1112번 도로로 갈 수도 있다. 제주시내에서 37킬로미터거리로, 탐방로 입구 주차장까지 45분 정도 걸린다. 어느 길로 가야 할까? 단정적으로 말하기를 잘하는 상철이는 무조건 후자로 가야 한다고했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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