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의 장엄은 천왕봉의 높이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넓이와 깊이에서 나온다. 그 면적이 자그마치 485km로 전북의 남원, 전남의 구례, 경남의 함양·산청·하동 등 3도 5군이 머리를 맞댄 곳이다. 지리산 연봉이 이루어낸 계곡의 깊이를 우리는 가늠치도 못한다. 그 크기를 말하는 것도 대안목은 달랐다. 남명 선생은 「덕산계정 기둥에 새긴 글德溪亭柱]」에서 이렇게 읊었다.


천석이나 되는 저 큰 종을 좀 보소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울리지 않는다
허나 그것이 지리산만하겠소
(지리산은) 하늘이 울어도 울리지 않는다오請看千石鐘 非大扣無聲
爭似頭流山 天鳴猶不鳴


산은 지리산이다. 지리산을 좋아하는 분은 채색 장식화보다도 수묵담채화를 좋아할 것이다. 그런 분이라면 예쁜 분원사기보다도 금사리가마의 둥근 달항아리를 더 좋아할 것이다. 그런 분이라면 바그너나 모짜르트보다도 바흐를 좋아할 것이다. 그런 분이라면 똘스또이의 소설을 책상에 앉아 줄을 치며 읽을 것이다. 하나의 안목은 다른 안목에도 통한다.
산은 지리산이다. P- 71

『언간독(諺簡)」 이라는 조선시대 목판본은 한글로 편지 쓰는 법이 사안에 따라 예문으로 제시된 책이다. 오죽했으면 한문도 아닌 한글로 편지쓰는 데도 책을 참고해야 했으며, 오죽 격식을 차렸기에 기별을 보내면서도 예를 갖추어야 했던가. 그래야 했던 것이 봉건시대이며, 지배층의 규범까지 좇느라고 피지배층이 겪어야 했던 어려움의 일단이 여기에도 나타나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 오히려 서민문화 내지 민중문화가 지니는 커다란 미덕을 내용과 형식 모든 측면에서 찾아보게 된다.
글씨체를 보면 나라에서 국민교화용으로 발행한 『훈민정음』 『오륜행실도』등의 한글서체에서 느껴지는 규율과 권위 같은 것이 없다. 그렇다고 흔히 민중문화의 한 특징으로 상정되는 투박하고, 거칠고, 정돈이 잘안된 조악한 것도 아니다. 가지런하고 소박한 가운데 편안함과 사랑스러움이 넘쳐흐르는 얌전한 글씨체이다. 마치도 동백기름으로 머리를 매만지고 검정 치마에 하얀 무명 저고리를 입고 나들이 가는 조선의 아낙을 보는듯한 맵시이다. 이것이야말로 지배층 사대부 문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서민문화의 향기인 것이다. - P11

나는 함양·산청 사람들은 복받은 인생인 줄로 안다. 듣기에 따라선 한가한 소리라고 비웃을 수도 있고, 빨치산 난리 때 애꿎은 인생들이 얼마나희생됐는지 아느냐고 따진다면 내 말을 취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장대한산, 지리산을 곁에 두고 위천수(渭川水), 경호강(鏡湖江)의 맑은 물을 품에 안고 사는 천혜의 복을 그곳 사람들은 다는 모를 것이다. 나같은 불쌍한 서울사람은 그런 부러움을 얼마든지 말할 자격이 있다. 당장 연암 박지원을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았는가.
답사는 여행인지라 모든 일정이 풍광수려한 곳으로 목적지를 삼는다.
그러나 함양·산청 사람들은 그곳이 모두 옆마을인 것이다. 차 속에서 함양읍내를 내다보면서 나는 마이크를 잡았다. - P42

단속사터에 몇차례 왔으면서도 최치원의 글씨를 찾아보지 못했던 이유는 대밭에 누워 하늘을 보는 낭만 때문이었다. 쌍탑에서 농가를 옆으로 돌아 강당자리 빈터에 서면 뒤편으로 울창한 왕죽이 빼꼼히 들어앉은 대밭이 보인다. 밖에서 보면 그 안이 어두컴컴하지만 대밭으로 들어서면 하늘이 뚫려 있어 어둡지 않다. 대밭은 해묵은 댓잎이 낙엽으로 쌓여 촉감이아련할 정도로 부드럽다.
52거기에 만사를 제치고 큰 대자로 누워 하늘을 쳐다보면 그것이 곧 단속㈜이다. 청신한 수축이 하늘을 찌를 듯 올라가서는 여린 바람에도 줄기 끝이 살랑거리며 흔들린다. 댓잎에 떨어진 햇살은 일점 광채를 발하고는 바람에 날려 바스러지듯 사라지는데 또다른 햇살이 댓잎에 다가온다.
이미 내 마음은 세상사에 지친 내가 아니다. 죽은 듯 눈을 감았다가는 푸른 하늘로 손짓하는 대끝이 그리워서 다시 눈을 떠본다. 대끝이 여전히 햇살 속에 흔들리는 것을 보고는 다시 눈을 감는다. 지리산 동남쪽 답사길에탁족하는 것보다도 나의 가슴을 씻어주는 것은 단속사 대밭 속의 오수(午睡)였다. - P52

나의 지리산 동남쪽 답사길은 매번 유월의 어느 날이었다.
6월의 산천은 참으로 심심하고 밋밋하다. 4월의 화사함, 5월의 싱그러움, 가을날의 화려함, 겨울산의 장엄함…… 그런 식으로 이어갈 마땅한형용사가 유월의 산천에는 없다. 그저 푸르름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최소한 6월의 지리산은 그렇지 않다. 어느쪽으로들어오든 지리산에 이르는 길은 산기슭마다 밤나무와 대나무로 가득하다.
6월이 되면 밤나무는 밤꽃이 피며, 대나무는 새순이 껍질을 벗고 묵은줄기 위쪽으로 고개를 내민다. 밤꽃의 불투명한 연둣빛과 대나무 새순의투명한 연둣빛은 초록의 산허리를 유연한 번지기로 우려놓는다. 산기슭한쪽 계곡 가까이 넓은 터를 일구어 가꾼 밭에는 보리가 익어가며 진초록을 발하고, 논에는 갓 모내기한 어린 벼들이 논물에 몸매를 비추며 연한연둣빛으로 어른거린다. 어쩌다 한점 긴 바람이 스치며 영롱한 햇살이 다가와 연둣빛 물결에 가볍게 입맞추고 지나갈 때 그 빛의 조화로움은 극치를 달린다. 그것이야말로 수묵화에서 단색조를 이용한 훈염법 (暈染法)의묘미를 시범적으로 보여주는 자연의 조화이다. - P54

나는 불행히도 산사나이가 못되었다. 내가 산보다도 문화유산을 더 사랑했기에 나의 답사는 항시 산기슭 어드메쯤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리산 천왕봉에는 가까이에 법계사 삼층석탑(보물 473호)이 있어 거기에 오를 기회가 있었다. 암반 위에 세워진 법계사탑은 생긴 것이 오종종하고 쩨쩨해서 볼품이 너무 없다. 단속사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어쩌다 저 탑이 보물로 지정됐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덕에 천왕봉을 오른 것은 차라리 감사해야 할 일이다.
천왕봉 일출의 황홀경은 3대를 두고 공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고 했으니 그날의 궂은 날씨를 불운이라고 생각지 않으나 그 장중한 운해를 제대로 못 본 것은 분명 불운이었다. 어차피 나는 나의 답사기에산이야기는쓸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산을 말함에 있어서도 당대의 안목이 말하는 산은 달랐다. 산에서 느끼는 크기가 달랐다. 김일손은 천왕봉의 인상을 이렇게 말했다. - P70

한밤중 천지가 청명하고 큰들은 광막하며 흰구름은 산골짜기에서 잠을 자는 듯한데, 마치 바다의 밀물에 올라앉은 것 같고, 머리 내민 산봉우리들은 흰 파도에 드러나는 섬처럼 점점이 찍혀 있다. 내려다보고 쳐다보니 마음이 오싹하고 몸은 태초의 원시에 와 있고, 가슴속은 천지와함께 흐르는 것 같았다.
이튿날 여명에 해가 돋아오르는 것을 보니 맑은 허공이 거울과 같았다. 서성이며 사방을 바라보니 만리가 끝이 없고 대지의 산은 개미집이나 버러지자국만 같다.
평소에는 다만 구름이 하늘에 붙은 줄로만 알았고 그것이 반공에 떠있는 물건이라는 것을 몰랐는데 여기 와서 보니 눈 아래 펀펀히 깔린 그아래는 반드시 대낮이 그늘져 있을 것이다. - P70

지리산의 장엄은 천왕봉의 높이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넓이와 깊이에서 나온다. 그 면적이 자그마치 485km로 전북의 남원, 전남의 구례, 경남의 함양·산청·하동 등 3도 5군이 머리를 맞댄 곳이다. 지리산 연봉이 이루어낸 계곡의 깊이를 우리는 가늠치도 못한다. 그 크기를 말하는 것도 대안목은 달랐다. 남명 선생은 「덕산계정 기둥에 새긴 글德溪亭柱]」에서 이렇게 읊었다.


천석이나 되는 저 큰 종을 좀 보소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울리지 않는다
허나 그것이 지리산만하겠소
(지리산은) 하늘이 울어도 울리지 않는다오請看千石鐘 非大扣無聲
爭似頭流山 天鳴猶不鳴


산은 지리산이다. 지리산을 좋아하는 분은 채색 장식화보다도 수묵담채화를 좋아할 것이다. 그런 분이라면 예쁜 분원사기보다도 금사리가마의 둥근 달항아리를 더 좋아할 것이다. 그런 분이라면 바그너나 모짜르트보다도 바흐를 좋아할 것이다. 그런 분이라면 똘스또이의 소설을 책상에 앉아 줄을 치며 읽을 것이다. 하나의 안목은 다른 안목에도 통한다.
산은 지리산이다. - P71

미술품은 하나의 물체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물(物) 자체로 보는것이 아니라 그 물체를 통하여 나타나는 상(像)을 갖고 이야기한다. 유식하게 말해서 오브제(objet)가 아니라 이미지(image)로 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술품에 대한 해설은 필연적으로 시각적 이미지를 언어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조건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예로부터 미술을 말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그 이미지를 극명하게 부각시킬 수 있는가를고민해왔다.
그런 중에 옛사람들이 곧잘 채택했던 방법의 하나는 시각적 이미지를시(詩) 영상으로 대치시켜보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제아무리 뛰어난 문장가라도 엄두를 못 내는 이 방법을 조선시대에는 웬만한 선비라면제화시(詩) 정도는 우리가 유행가 한가락 부르는 흥취로 해치웠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미지는 선명하게 부각되고, 확대되고, 심화되어 침묵의 물체는 생동하는 영상으로 다가오게 하였다. 그것은 곧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과의 만남이며, 말하지 않는 것과의 대화인 것이다. - P73

이런 옛글을 읽을 때면 나는 이미지의 고양과 풍성한 확대라는 것이 인간의 정서를 얼마나 풍요롭게 해주는가를 절감하게 된다. 이것은 꼭 문자속 깊은 지식인층의 지적 유희만은 아닐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일자무식의 민초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그 좋은 예를 하나 갖고 있다.
우리 어머니는 경기도 포천군 청산면 금동리 왕방산 서쪽 기슭 깊은 산골에서 태어나 소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열일곱살 때 갑자기 정신대라는 ‘여자공출‘이 시작되자 부랴랴 우리 아버지에게 시집오게 되었다. 내가 중학교 일학년 때 어머니는 나를 외가댁 가서 실컷 놀다 오라고데리고 가면서 끔찍이도 험하고 높은 칠오리고개를 넘으면서 절절 매는나를 달래기 위해 얘기를 하나 해주셨다.
외가댁 건너편 왕방마을에는 양지바른 툇마루에 앉아 아이들을 모아놓KSC고 재미있는 얘기를 하도 잘해서 ‘양달대포‘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아저씨가 있었는데, 우리 어머니가 갑자기 시집간다니까 시집가서 잘살게 되나 점봐준다면서 다섯 가지 그림 같은 정경을 말하고서는 순서대로 늘어 - P74

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어느 것이 부자가 되고 어느 것이 가난하게 되는 것인지 그 서열을 다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우리 어머닌 꼴찌서둘째였는데 나는 첫째로 부자가 되는 것을 골라서 우리 모자는 함께 좋아하며 지루한 고개를 단숨에 넘어갔다. 이후 나는 한동안 이 문제를 동무들에게도 써먹었고 작문시간에 슬쩍 도용도 하면서 그 이미지를 잊어버리지않게 되었는데, 나는 그것을 다시 도용하여 남한땅의 5대 명찰을 논하는「논제명찰(論諸名利)」을 읊어보련다. - P75

춘삼월 양지바른 댓돌 위에서 서당개가 턱을 앞발에 묻고 한가로이낮잠자는 듯한 절은 서산 개심사(開心寺)이다.

한여름 온 식구가 김매러 간 사이 대청에서 낮잠자던 어린애가 잠이깨어 엄마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는 듯한 절은 강진 무위사다.

늦가을 해질녘 할머니가 툇마루에 앉아 반가운 손님이 올 리도 없건만 산마루 넘어오는 장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듯한 절은 부안내소사(來蘇寺)이다.

겨울 폭설이 내린 산골 한 아낙네가 솔밭에서 바람이 부는 대로 굴러가는 솔방울을 줍고 있는 듯한 절은 청도 운문사(寺)이다.

몇날 며칠을 두고 비만 내리는 지루한 장마 끝에 홀연히 먹구름이 가시면서 밝은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 듯한 절은 영풍 부석사(浮石寺)이다.


우리 어머니가 택한 것은 운문사 정경이었고 나는 부석사를 꼽았었다. - P75

영풍 부석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집이다. 그러나 아름답다는 형용사로는 부석사의 장쾌함을 담아내지 못하며, 장쾌하다는 표현으로는 정연한 자태를 나타내지 못한다. 부석사는 오직 한마디, 위대한 건축 - P75

이라고 부를 때만 그 온당한 가치를 받아낼 수 있다.
건축잡지 『플러스』에서 지난(1994) 2월에 건축가 200여 명을 상대로한 설문조사를 발표한 적이 있는데, "가장 잘 지은 고건축"이라는 항목에서 압도적인 표를 얻어 당당 1위를 한 것이 부석사였다. 그 "가장 잘 지었다"는 말에는 건축적 사고가 풍부하고 건축적 짜임새가 충실하다는 뜻이들어 있으리라. 그런 전문적 안목이 아니라 한낱 여행객, 답사객의 눈이라도 풍요로운 자연의 서정과 빈틈없는 인공의 질서를 실수없이 읽어내고,
무량수전 안양루에 올라 멀어져가는 태백산맥을 바라보면 소스라치는 기쁨과 놀라운 감동을 온몸으로 느끼게 될 것이니 부석사는 정녕 위대한 건축이요, 지루한 장마 끝에 활짝 갠 맑은 하늘과 밝은 햇살 같을 뿐이다.
부석사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무량수전에 있다. 그것이 우리나라에서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이라서가 아니며, 그것이 국보 18호라서도 아니다.
부석사의 아름다움은 모든 길과 집과 자연이 이 무량수전을 위하여 제자리에서 제 몫을 하고 있는 절묘한 구조와 장대한 스케일에 있는 것이다. - P76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가 「법성게(法性偈)」에서 말한 바 "모든 것이원만하게 조화하여 두 모습으로 나뉨이 없고, 하나가 곧 모두요, 모두가 곧 하나됨"이라는 원융(圓融)의 경지를 보여주는 가람배치가 부석사인것이다. 그러니까 부석사는 곧 저 오묘하고 장엄한 화엄세계의 이미지를건축이라는 시각매체로 구현한 것이다. 이 또한 이미지와 이미지의 만남이며,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과의 대화일 것이다.
부석사는 태백산맥이 두 줄기로 나뉘어 각각 제 갈 길로 떠나가는 양백지간자리잡고 있다.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 봉황산(鳳凰山)에중턱이 된다. 이 자리가 지닌 지리적, 풍수적 의미는 그것으로 암시되며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의 발길이 닿기 쉽지 않은 국토의 오지라는 사실에서 사상사적, 역사적 의미도 간취된다. 이부석사 아랫마을 북지리에서 이제 절집의 일주문을 들어가 천왕문, 요사채, 범종각, 안양루를 거쳐 무량수전에 이르고 여기서 다시 조사당과 응진전(應眞殿)까지 순례하는 길을 걷게 되면 순례자는 필연적으로 서로 성 - P76

격을 달리하는 세 종류의 길을 걷게끔 되어 있다.
절 입구에서 일주문을 거쳐 천왕문에 이르는 돌 반, 흙 반의 비탈길은자연과 인공의 행복한 조화로움을 보여준다.
천왕문에서 요사채를 거쳐 무량수전에 이르는 부석사의 본채는 정연한돌축대와 돌계단이라는 인공의 길이다. 그것은 엄격한 체계와 가지런한질서를 담고 있으며 그 정상에 무량수전이 모셔져 있다.
무량수전에 이르면 자연의 장대한 경관이 펼쳐진다. 남쪽으로 치달리는태백산맥의 줄기가 한눈에 들어오며 그것은 곧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서막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제 우리는 상처받지 않은 위대한 자연으로 돌아온것이다.
무량수전에서 한 호흡 가다듬고 조사당, 응진전으로 오르는 길은 떡갈나무와 산죽이 싱그러운 흙길이다. 그것은 자연으로 돌아온 우리를 포근히 감싸주는 여운인 것이다.
100인공과 자연의 만남에서 인공의 세계로, 거기에서 다시 자연과 그 여운에로 이르는 부석사 순례길은 장장 시오리이건만 이 조화로움 덕분에 어느 순례자도 힘겨움없이, 지루함없이 오를 수 있게 된다.
지금 나는 저 극락세계에 오르는 행복한 순례길을 여러분과 함께 가고있는 것이다. - P77

부석사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절집을 향하면 느릿한 경사면의 비탈길은곧바로 일주문까지 닿아 있다. 길 양옆엔 은행나무 가로수, 가로수 건너편은 사과밭이다. 여기서 천왕문까지는 1km가 넘으니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지만 급한 경사가 아닌지라 힘겨울 바가 없으며 일주문이 눈앞에 들어오니 거리를 가늠할 수 있기에 느긋한 걸음으로 사위를 살피며 마음의 가닥을 잡을 수 있다.
별스러운 수식이 있을 리 없는 이 부석사 진입로야말로 현대인에게 침묵의 충언과 준엄한 꾸짖음 그리고 포근한 애무의 손길을 던져주는 조선 - P77

땅 최고의 명상로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비탈길은 사람의 발길을 느긋하게 잡아놓는다. 제아무리 잰 걸음의 성급한 현대인이라도 이 비탈길에 와서는 발목이 잡힌다. 사람은 걸어다닐때 머릿속이 가장 맑다고 한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직장에서 집까지,
학교에서 집까지 가는 한 시간 남짓한 시간에 머릿속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돌아오는 길은 어떠했고요? 현대인은 최소 하루 두 시간 자기만의 명상시간을 갖고 있는 셈인데 대부분은 그 시간을 지겨운 일상의 공백으로소비해버리고 있다. 내용없는 수다와 어지럽고 경박한 스포츠신문에, 아니면 멍한 상태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낭비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비탈길은 그런 경박과 멍청함을 용서하지 않는다. 아무리 완만해도 비탈인지라 하체는 긴장하고 있다. 꾹꾹 누르는 발걸음의 무게가 순례자의 마음속에 기여하는 바는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만약 저 일주문이없어 길의 끝이 어딘지 가늠치 못할 경우와 비교해보자. 루돌프 아른하임의 『시각적 인식』이라는 책에는 공간에 반응하는 인간의 감성적 습성에대한 아주 섬세한 분석이 들어 있는데 그의 명제 중에는 "모든 물체는 공간을 창출한다"는 것이 있다. 한폭 풍경화 속에 그려 있는 길에 사람이 하나 들어 있냐 않냐의 차이가 그 명제의 정당성을 부여해주고 있다. - P78

더욱이 일주문을 향한 우리의 발걸음은 움직이고 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일주문은 선명하게 보이고 크게 보인다. 그것을 통하여 움직이고 있는 자신의 위치를 명확히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부석사 진입로의 이 비탈길은 사철 중 늦가을이 가장 아름답다. 가로수은행나무 잎이 떨어져 샛노란 낙엽이 일주문 너머 저쪽까지 펼쳐질 때 그길은 순례자를 맞이하는 부처님의 자비로운 배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늦가을 부석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은행잎 카펫길보다도 사과나무밭 때문이었다. 나는 언제나 내 인생을 사과나무처럼 가꾸고 싶어한다. 어차피 나는 세한삼우(歲寒三友)의 송죽매(松竹梅)는 될 수가 없다. 그런 고고함, 그런 기품, 그런 청순함이 타고나면서부터 없었고 살아가면서 더 - P78

잃어버렸다. 그러나 사과나무는 될 수가 있을 것도 같다. 사람에 따라서는사과나무를 사오 꽃이 필 때가 좋다고 하고, 시월에 과실이 주렁주렁 열릴 때가 좋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잎도 열매도 없는 마른 가지의 사과나무를 무한대로 사랑하고 그런 이미지의 인간이 되기를 동경한다.
사과나무의 줄기는 직선으로 뻗고 직선으로 올라간다. 그렇게 되도록가지치기를 해야 사과가 잘 열린다. 한 줄기에 수십개씩 달리는 열매의 하중을 견디려면 줄기는 굵고 곧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모든 사과나무는 운동선수의 팔뚝처럼 굳세고 힘있어 보인다. 곧게 뻗어오른 사과나무의 줄기와 가지를 보면 대지에 굳게 뿌리를 내린 채 하늘을 향해 역기를드는 역도선수의 용틀임을 느끼게 된다. 그러한 사과나무의 힘은 꽃이 필때도 열매를 맺을 때도 아닌 마른 줄기의 늦가을이 제격이다.
내 사랑하는 사과나무의 생김새는 그것 자체가 위대한 조형성을 보여준다. 묵은 줄기는 은회색이고 새 가지는 자색을 띠는 색감은 유연한 느낌을주지만 형체는 어느 모로 보아도 불균형을 이루면서 전체는 완벽한 힘의미학을 견지하고 있다.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나는 그 사실을 나중에 알고 나서 더욱더 사과나무를 동경하게 되었다.
"세상엔 느티나무 뽑을 장사는 있어도 사과나무 뽑을 장사는 없다." - P80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사람도 인기척도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루, 조사당, 응향각 들이 마치도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싶어진다. 이 대자연 속에 이렇게 아늑하고도눈맛이 시원한 시야를 터줄 줄 아는 한국인, 높지도 얕지도 않은 이 자리를 점지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층 그윽하게 빛내주고 부처님의 믿 - P98

음을 더욱 숭엄한 아름다움으로 이끌어줄 수 있었던 뛰어난 안목의 소유자, 그 한국인, 지금 우리의 머릿속에 빙빙 도는 그 큰 이름은 부석사의 창건주 의상대사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하여 ‘사무치는‘ 이라는 단어의 참맛을 배웠다.
그렇다! 내가 해마다 거르는 일 없이 부석사를 가고 또 간 것은 사무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 P99

그런 자제와 금기를 풀고 4년 전 처음으로 아우라지강의 겨울날을 공식적인 답사로 행하게 된 것은 또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는 그 비포장흙길이 이제는 몽땅 포장되었기 때문이다. 비행기재는 터널로 통과하게되었고, 여량땅을 들어가는 데는 평창을 거칠 것도 없이 영동고속도로 하진부에서 곧장 질러갈 수 있게 된 편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ᆞ둘째 이유는 조금 심각한 얘기다. 사북과 고한을 거쳐야 함은 변함없는일이고 탄광촌의 비참함은 날로 더해가는 것이지만, 나는 우리 답사회원같은 고급 도회인들이 그런 기회 아니면 탄광촌의 내음을 맛볼 수 없다는생각, 그래서 현실을 머릿속에 그릴 때농촌, 탄광촌은 안중에도 없고 도회적 풍광만 염두에 둘지 모른다는 생각에 결단내린 것이다. 탄광촌사람들에 대한 미안함과 회원들의 체험 사이를 여러번 저울질하였다. 그때 내게 생각나는 것은 노신 선생이 인력거꾼」이라는 글을 쓰면서 걸을 것인가 탈 것인가를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결국 노신은 그 노인의 인력거를 타고 눈길을 갔듯이 나는 답사객을 이끌고 탄광촌을 지나갔다. - P105

언제부터인지 나는 꽃과 나무를 보면서 한송이 한그루의 빼어난 아름다움보다는 낙엽송처럼 그 개체야 별스런 개성도 내세울 미감도 없지만 바로 그 평범성이 집합을 이루어 새롭게 드러내는 총합미를 좋아하고 있다.
개나리, 진달래, 들국화, 솔숲과 대밭……… 지난 늦가을 아우라지강을 찾아가는 길에 차창 밖으로 비껴선 낙엽송 군락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나도 모르게 일어나는 한 의문이 있었다. 저 아름다움의 참 가치에 이제야눈을 돌리게 된 것은 나이를 들어가는 연륜 덕분인가, 아니면 80년대라는간고한 세월을 살아왔던 경험 탓일까.
달리는 차 속에 비스듬히 누워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풍광을 바라보며이생각 저생각에 잠길 때 나는 답사와 여행이 우리 시대 인간의 정서함양에 기여하는 공헌이 결코 예사롭지 않음을 새삼 느낀다. 그러나 이런 여유로운 사색이란 중년의 나이에 들어서야 맛볼 수 있는 낭만일 뿐 20대의청년들에게는 그저 늙다리들의 궁상으로 비치기 십상이다. - P108

대개 현실에 뿌리를 두지 못하고 관념으로 무장한 이데올로기는 경고 과격하게 마련이다. 그 경직성과 관념적 과격성이 치기였다는 것을 자각한 이효석이 갈 곳은 어디였을까? 하나의 목표를 향해 치닫던 사람이그 목표와 이상을 회의하여 잃게 되면 돌아갈 곳이 어디였을까? 이런 상황에서 갈 수 있는 곳은 오직 하나, 꾸밈없는 자기 본연의 자리로 원위치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효석은 일단 자연과 고향과 현실로•되돌아온 것이었다. 바로 그때 그는 「메밀꽃 필 무렵」을 쓴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가 어디로 갔는가는 그 다음 문제이다. 「메밀꽃 필 무렵」의 끝마무리를 기묘한 인연으로 돌린 데에서 어느정도 감지되듯이 그는 탐미주의로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 P117

태백시 황지의 화가 황재형이 우리 회원들했다. 그는 서툰 말솜씨로, 그러나 단호하고 자랑스런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보여드릴 것이라고는 산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저 무표정한 산들을 잘 보고 가십시오. 설악산 같은 절묘한 구성도 없고, 남도의 능선처럼 포근히 안기는 느린 곡선도 없습니다. 오직 직선과 사선만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산의 정직성이고 강원도 태백산 자락의 진국입니다. 맛있게 요리된 반찬이 아니고 밭에서 금방 뽑아낸 싱싱한 무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영서지방 사람들이 갖고 있는 산의 개념은 아주 다르다. 우리는보통 들판에 높이 솟아 있는 것이 산인 줄로 아는데 정선·평창 사람들은산을 오히려 들판 같은 개념으로 삼고 그 비탈을 갈아 감자와 옥수수를 심고 살아왔다. 마치 서해안 어촌사람들이 갯벌을 받으로 삼고, 제주도 어부 - P122

들이 바다를 밭이라 부르듯이.
아우라지에서 정선에 이르는 산과 강은 국토의 오장육부가 아니고서는 세상천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유장한 아름다움과 처연한 감상의 집합체이다. 그래서 고은 선생은 평창에서 비행기재를 넘어 비봉산 고갯마루에서 멀리 정선읍내를 바라볼 때 찾아온 감정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도달감과 단절감"이었다고 술회하였다. 나는 그때 고은 선생은 강을 넘어가지 못하는 산의 숙명을 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람들은 산자분수령이라는 말에 익숙하여 "산은 스스로 분수령이 된다"며 산은 물을 가르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는 사실을 곧잘 말한다. 그러나 비록 산이 있어 물이 흐르고 물이 모여 강을 이루었지만 산은 절대로 강을 넘지 못함을 생각지 않는다. 오직 강이 있기에 그 산들은 여기서 저기로 떨어져 있을 뿐이다. 강이 아니라면 산은 여지없이 연이어 달렸으리라. - P123

나는 여량땅 아우라지강가에 서서 낙엽송 군락들이 줄지어 정상을 향해달리는 저마다 다른 표정의 높고 낮은 산봉우리들이 수수만년을 저렇게마주보면서 단 한번도 만날 수 없음은 바로 그 자신들로 인하여 이루어진강을 넘지 못함 때문이라는 무서운 역설(逆) 의 논리를 배우게 되었다.
한 시대를 이끌어가는 각 분야의 어떠한 거봉(巨峰)들도 결국은 역사라는흐름, 민의(民意)라는 대세를 넘지 못하고 어느 자리엔가 멈출 수밖에 없는 지식인의 한계, 인간의 숙명 같은 것을 보았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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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0 18: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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