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를 전공하는 윤용이교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박물관 진열실에 있는 도자기들을 보고있으면 어떤 때는 도자기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나도 당신처럼 한때는 세상을 살았던 시절이 있었소˝라는 유물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이다. 오직 사랑하는 자만이 그 말을 들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고 그에게 얘기했다. 그리고 나는 조선 정조시대에 유한준(兪漢)이라는 문인이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의 수장품에 부친 글에서 읽은 천하의 명언도 얘기해주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마치 어린아이의 응얼거리는 소리를 남들은 몰라도 그 에미만은 다 알아듣고 젖도 주고 기저귀도 갈아준다.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최재현교수가 사경을 헤매어 말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할 때,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입모양만 보고도 빠짐없이 들을 수 있었던 분은 미망인 한 분뿐이었다. 오직 사랑만이 그것을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1992. 2. P- 236

첫째는 현대인 특히 도시인의 삶의 패턴이 크게 변하여 주말·휴일이면시내가 거의 철시상태가 되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도시인은 일상의 권태로움, 가정과 직장의 틀 속에 박혀 있음으로 해서 생기는 만성적 피곤과 긴장을 풀어가면서 살기를 원하게 되었다. 특히 자동차문화의 급속한 확산은잿빛 도시를 떠나 싱싱한 자연과 만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커다란 정신적기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체감하게끔 했다. 수많은 여행안내책과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 같은 저서가 큰 인기를 끈 것은 이같은 현상을 말해준다.
그러나 사람들은 놀기를 좋아하면서도 단순히 노는 것에는 금방 싫증을느낀다. 노는 중에 무엇인가 하나라도 얻을 수 있는 삶의 기쁨이 동반될 때비로소 논다는 일은 더욱 즐겁고 계속 즐길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러기 때문에 답사야말로 진짜 즐거운 여행길이 되는 것이다. - P200

둘째는 내 것, 우리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깊이 알고 싶어하는 자주적정서가 우리 세대에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60년대 후반 근대화·산업화·서구화 정책의 수행과정에서 남의 것에 대한 동경과 관심이 지난 세대의정서적 성향이었다면, 이제는 내 것도 귀중함을 알게 될 정도로 우리의 문화의식이 고양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박태순의 『국토와 민중, 신경림의 민요기행』, 최영희의 한국사기행 그리고 한길역사기행 같은 저서가 80년대에 쏟아져 나오게 된 시대적 배경은 답사문화의 확산과 궤를 같이한다.
이리하여 답사에 광신도적 취미가 붙은 사람까지 생기게 된 것이 오늘의현상이다. 특히 답사에 처음 맛들인 사람들은 대개 그동안 무심하게 지나쳐버렸던 유물들의 참된 가치를 알게 되면서 기쁨과 회한을 동시에 맛보고,
"한반도는 전체가 박물관"이라는 명제에 이론 없이 동의할 만큼 국토의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유물들을 보면서 경이로움과 자신의 무지함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 P200

그 기쁨과 경이로움의 근저에 흐르는 자신의 무지와 무심함은 답사객의발과 눈을 더없이 부지런하게 만들곤 한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 부지런히가서 열심히 보고 빠짐없이 느끼려는 답사에의 열정을 갖는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껏 이 답사객들을 위한 올바른 안내서가 나온 적이 없다. 또한현지에서 구하게 되는 안내서와 해설문이란 거의 다 터무니없는 찬사가 아00 S니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얘기들뿐이다.
지금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양양 낙산사로 향하고 있다. 그러나 낙산사를 답사할 때 내가 제시할 안내서는 시중 어디에도 없으며, 낙산사에 가도없다. - P201

"동해 낙산사!"라고 말해야 한다. 거기에는 반드시 감탄사가 붙어 있지 않으면 하나의 고유명사가 되지 않는다.
창연망망한 동해와 더불어오랜 세월을 그 파도 속에 싸여서 살아온 낙산사를 어찌 감탄부 없이 부를 수 있겠는가.


그런 낙산사이다. 그러나 나는 어느 답사객이 낙산사를 둘러보고 감탄부호를 찍으면서 "동해 낙산사!"라고 할 수 있을까 의심해본다. 대부분의 답사객은 홍예문으로 들어가 원통보전, 칠층석탑, 범종각, 의상대, 해수관음,
홍련암, 관음굴을 길표시 따라 답사하며, 안내판을 읽으면서 마침표를 찍을것이다. 그리고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이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마침표 대신 물음표로 바꿀지도 모른다. 뭐가 좋다는 것이고, 뭐가 "동해 낙산사!"란 말인가? - P202

그 나름의 훈련과 연륜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면 거기에는 당연히 급수가매겨질 수 있다. 문화유산답사도 마찬가지여서 오래 다녀본 사람과 이제 막이 방면에 눈뜬 사람이 같을 수 없다.
답사의 초급자는 어디에 가든 무엇 하나 놓치지 않을 성심으로 발걸음을바삐 움직이며 골똘히 살피고 알아먹기 힘든 안내문도 참을성을 갖고 꼼꼼히 읽어간다. 그러나 중급의 답사객은 걸음걸이부터 다르다. 문화재뿐만 아니라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는 여유를 갖는다. 그러면서 그는 다른 곳에서보았던 비슷한 유물을 연상해내어 상호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곧잘 비교해보곤 한다. 말하자면 초급자가 낱낱 유물의 개별적·절대적 가치를 익히는과정이라면 중급자는 그것의 상대적 가치를 확인해가는 수준인 것이다.
그러나 고급의 경지에 다다른 답사객은 얼핏 보기에 답사에의 열정과 성심이 식은 듯 돌아다니기보다는 눌러앉기를 좋아하고 많이 보기보다는 오래보기를 원한다. 지나가는 동네분과 시답지 않은 객담을 늘어놓고 가겟방을기웃거리다가 대열에서 곧잘 이탈하곤 한다. 허나 그것은 불성실이나 나태함의 작태가 아니라 그 고장 사람들의 살내음을 맛보기 위한 고급자의 상용수단인 것을 초급자들은 잘 모른다.  - P217

가 된 것이다.
마을에서 10분쯤 더 산길을 오르면 산등성을 널찍하게 깎아 만든 제법평평한 밭이 보이는데, 그 밭 한가운데 까무잡잡하고 아담하게 생긴 삼층석탑이 결코 외롭지 않게 오뚝하니 솟아 있다. 산길은 설악산 어드메로 길길이 뻗어올라 석탑이 기대고 있는 등의 두께는 헤아릴 길 없이 두껍고 든든하다. 석탑 앞에 서서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면 계곡은 가파르게 흘러내리고산자락 아랫도리가 끝나는 자리에서는 맑고 맑은 동해바다가 위로 치솟아저 높은 곳에서 수평선을 그으며 밝은 빛을 반사하고 있다. 모든 수평선은보는 사람보다 위쪽에 위치하고, 모든 수평선은 빛을 반사한다는 원칙이 여기서도 적용된다. 까만 석탑은 거기에 세워진 지 1,000년이 넘도록 그 동해바다를 비껴보고 있는 것이다. - P219

그것은 지방에서 나름대로 경제적·군사적 부를 키워온 호족들이었다. 호족의입장에서 보면 도의가 주장한 ‘자심즉불(自心佛)‘과 ‘일문일가(一門一는 하나의 구원의 사상인 셈이었다. 왕즉불의 논리가 지배하는 한 호족들의 위치는 지배층으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러나 체제와 질서가중요한 것이 아니라 깨침의 능력이 중요하고 스스로 일가를 이룰 수 있다는사상은 곧 호족도 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비약하게 된다. 이에 호족들은 다투어 지방에 선종사찰을 세우게 된다. 선종의 구산선문이 한결같이 오지 중의 오지로 들어가 보령의 성주사, 명주의 굴산사 등은 오늘날에도 폐사지로 남고 영월 법흥사, 남원실상사, 곡성 태안사, 문경 봉암사, 장홍보림사처럼 답사객을 열광케 하는 심산의 명찰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리고 역사의 진행은 이내 호족 중의 한 사람인 왕건의 승리, 불교의 이데올로기는 선종의 우위라는 확고한 전통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 모든진행의 출발이 곧 여기 진전사에서 비롯되었으니 어찌 우리가 도의와 진전사를 모르고 역사를 말할 수 있겠는가. 진전사 폐사지에 서면 나는 항시 변혁의 계절을 살던 한 선각자의 외로움과 의로움을 함께 새겨보게 된다. - P225

‘하늘 아래 끝동네‘, 그것은 반역의 자랑이다. 지리산 뱀사골 달궁마을 너머 해발 900m 되는 곳에 있는 심원마을 사람들이 ‘하늘 아래 첫동네‘ 라며역설의 자랑을 펴는 것보다 훨씬 정직하고 숙명적이며 비장감과 허망이 감돈다.
그 하늘 아래 끝동네 끝번지 되는 곳에 선림원지가 있는 것이다. 56번 국도상의 황이리에서 하차하여 동쪽을 바라보고 응복산(1360m) 만월봉(1281m)에서 내려오는 미천(川)계곡을 따라 40여 분 걸어가면 선림원지가 나온다. 군사도로로 잘 다듬어진 길인지라 하늘 아래 끝동네에 온 기분이 덜하지만, 길가엔 향신제로 이름난 산초나무가 유난히 많고 산비탈 외딴집에도 토종꿀 재배통이 늘어서 있어 오염되지 않은 자연의 비경(秘境)에 취해 결코 가깝지 않은 이 길을 피곤한 줄 모르고 행복하게 걷게 한다.
미천계곡은 맑다 못해 투명하며 늦가을 단풍이 계곡 아래까지 절정을 이룰때면 그 환상의 빛깔을 남김없이 받아내곤 한다. - P231

도자기를 전공하는 윤용이교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박물관 진열실에 있는 도자기들을 보고있으면 어떤 때는 도자기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나도 당신처럼 한때는 세상을 살았던 시절이 있었소"라는 유물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이다. 오직 사랑하는 자만이 그 말을 들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고 그에게 얘기했다. 그리고 나는 조선 정조시대에 유한준(兪漢)이라는 문인이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의 수장품에 부친 글에서 읽은 천하의 명언도 얘기해주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마치 어린아이의 응얼거리는 소리를 남들은 몰라도 그 에미만은 다 알아듣고 젖도 주고 기저귀도 갈아준다.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최재현교수가 사경을 헤매어 말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할 때,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입모양만 보고도 빠짐없이 들을 수 있었던 분은 미망인 한 분뿐이었다. 오직 사랑만이 그것을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1992. 2. - P236

답사를 다니면서 나는 어디를 가든 특별한 연줄이나 알음알이 없이 여느여행자와 마찬가지로 입장료를 열심히 내면서 다녔다. 특출나게 전문가라고내세울 형편도 아니었지만 유별난 혜택을 받는다는 것이 겸연쩍기도 했고그렇게 한들 내 마음이 편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대접 받아서 될일이라면 만인이 똑같이 누릴 수 있는 대접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나는 지금도 버리지 않고 있다. 이런 식의 오기 아닌 오기 때문에 나는 그동안 무수한불편과 수모와 억울함을 당해야만 했다. 답사처 어디를 가든 따라붙는 저일방적인 통보의 붉은 색 표지판, 촬영금지와 출입금지 때문이었다. 관계자를 찾아가 양해를 구하면 뜻밖의 호의를 받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대개는 싸늘한 문전박대가 일쑤였다. 동사무소나 경찰서에 가서도 느끼는일이지만 대개 장사꾼 아닌 다음에는 사람을 많이 대하는 사람일수록 사람을 인격으로 대하지 않고 건수로 처리하는 습성이 있다.
The4년 전엔가 경주 안강의 옥산서원에 있는 회재 이언적의 서재였던 독락당에 들렀는데 그 후손이라는 자가 자물쇠로 잠가놓고는 출입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군청 문화재과나 유림의 허락을 받아오라는 것이었다. 내가 여기에온 것이 예닐곱 번 되었지만 이런 일이 없었고 오늘은 일요일이며 지금 같 - P237

이온 답사객이 역사교사모임이라고 사정했지만 그는 끝내 문을 열어주지않았다. 나는 그때 땅속의 회재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한 모든 미술관들이 전시장에서 촬영을 금지하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세계의 모든유수한 미술관들은 플래시를 사용하지 않는 한 얼마든지 촬영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나는 외국에 나갔을 때 이 점이 퍽 신기하게 생각됐다. 하도 많은금지를 당하고 살아온지라 개방되었다는 것이 차라리 이상스러웠던 것이다.
-마치 요즘 서울에서 차가 안 막히고 잘 빠지면 이상스러운 것처럼. 뉴욕메트로폴리탄 뮤지움 관계자를 만났을 때 촬영허가에 대한 그들의 아이디어를 물었더니, 플래시를 사용하면 자외선이 유물보존에 나쁘고 또 다른 관객을 방해하므로 금지하는 것이며, 상업적으로 이용할 사진은 어차피 특수 조명을 해야 하니까 일반 관객이 찍어가는 사진은 박물관 홍보에도 좋다는 것이었다. - P238

모든 문화재의 소유자는 그것의 재산권과 관리의무가 있을 뿐이며, 그것의 인문적 가치를 공유할 권한은 만인에게 있다는 생각이 보편화될 때 우리는 문화적으로 민주화의 길에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1983년 가을 어느날, 나는 저 유명한 지(智)대사의 비와 부도를 보기 위하여 문경 봉암사(鳳巖寺)를 찾아갔다. 문경에서 가은을 거 봉암사까지 가는 저 엄청난 비포장길은 시외버스도 두 시간 남짓 걸리는 캄캄한산골이었다. 아침에 서울을 떠나 저녁 나절에 당도해보니, 아뿔싸! 봉암사는 1982년부터 80여 명의 남자가 결제와 산철없이 정진하는 청정도량으로 되었기 때문에 일반인 출입이 군대보다 더 엄하게 통제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비록 불자는 아니지만 나는 이 숭고한 뜻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래도 뜻이 있으면 길이 있으리라 믿고 경비 아저씨에게 갖은 엄살과 애교와 궁상을 번갈아 떨며 애원하며 달라붙었더니 자신은 권한이 없고 저기오는 스님에게 말해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지옥에 가서 부처님이라도 만난듯한 기쁨과 희망으로 사정을 말했다. 그러나 그 스님은 내 말을 대충 듣고는 절집은 부처님 모신 곳이지 미술사의 대상이 아니라고 자기식의 논리로 - P238

훈계만 하고는 나를 떠밀듯 내쫓았다. 최소한 안됐다는 표정이라도 지어줄줄로 알았던 내가 잘못이었을까.
답사를 다니면서 내가 크게 배운 것은 참는 것이다. 이럴 때는 싸우는 것보다 참는 것이 낫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했던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는참지만 속으로 치미는 울화까지 참을 정도로 인격이 수양되지 못하여 여관한채 없는 원북마을에서 막차를 타고 나오면서 나는 그 중이 가엾다고 생각하면서 나의 허망을 달랬다. 사실 내가 좀더 인품을 갖추려면 "인연이 닿지 않아서"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풀었어야 했을 것이다. - P239

그리하여 봉암사는 나에게 꿈속의 절집으로 언제나 남아 있었다. 천하의대문장가 최치원이지증대사의 비를 쓰면서 묘사한 봉암사의 모습은 나의상상속 환상의 절집이 되었고 그래서 나는 그 인연을 찾으려고 기회 있을때면 봉암사 타령을 노래하듯 했다. 극작가 안종관형이 명진스님이 거기 있어서 몇 번 가보았는데 정말 좋다고 하였으나 명진스님은 이미 서울 개운사에서 대승불교승가회를 하고 있었고, 신륵사 원경스님께 사정을 말했더니음력 칠월 하순에 보름간 해제기간이 있으니 그때 같이 가자고 했으나 양력으로 살다보니 그 날짜를 맞추지 못하고 또 몇 년이 흘렀다.
1990년 늦겨울 어느날, 정말로 인연이 닿으려고 해서인지 문화유산답사회의 한 열성회원이 봉암사에서 큰 선방을 짓는데 상량식이 있어 초대받았으니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열 일을 제쳐두고 따라가서 10년의한을 풀 수 있게 되었다. 환상속의 절집 봉암사! 그러나 내가 정말로 행복할 요량이었다면 그때 봉암사에 가지 말았어야 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사회학자 아도르노는 음악에 대단한 소양이 있어서 음악사회학』이라는 저서를 남긴 일도 있는데 그가 평소에 하던 말이 "베토벤의 교향곡은 어느 심포니가 연주하는 것보다도 악보를 읽으면서 내가 머리속에서 그려내는 것이더욱 아름답다"고 했다는데, 나에게 있어서 봉암사야말로 글 속의 봉암사라야 아름답다. - P239

"당신, 절에 가면 부처님께 절이라도 한번 해보구려." 
"내가 미치기 전에야 돌덩이, 쇳덩이 앞에 엎어져 빌겠어. 그런다고 소원성취 되는 것도 아닌데."
"절이라는 것이 소원성취 해달라고 비는 것인 줄 아세요."
"그러면, 망하게 해달라고 빈담?"
"그런 게 아녜요."
"그러면 뭐야."
"절이란 돌덩이, 쇳덩이 앞에서도 무릎을 꿇을 수 있다는 자기의 겸손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함께 살아가면서 대개는 내 주장이 이기는데 가끔은 이렇게 결정타를 맞는 것이 나의 가정생활이다.
하심(下心)!  마음을 내린다는 것! 그것은 불자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아름다운 모습이며, 가히 본받을 만한 것이었다. - P254

봉암사에서 진짜로 멋있는 유물은 대웅전 앞마당에 있는 한 쌍의 노주석(柱石) 이다. 정료석 또는 순한글로 불우리라고 하는 이 돌받침은 야간에 행사가 있을 때 관솔불을 피워 그 위에 얹어 마당을 밝히던 곳이다. 이런 불우리를 봉암사처럼 옛 모습 그대로 지니고 있는 곳은 흔치 않다.
평범한 구상으로 그 형태도 단순하지만 둥근 받침돌이 위로 오므라드는 긴장된 맛과 그 위에 얹힌 판석의 듬직스러움이 한 시대의 멋스러움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129415그리고 대웅전 건물이야 20세기 후반의 것이니 그렇고 그런 것이지만 그돌축대만은 9세기 지증대사 창건 당시의 모습이다. 특히 이 돌축대에서 맨아래쪽 기단부를 보면 우묵하게 홈을 판 돌받침을 앞쪽으로 길게 깐 것이있는데 이것은 지붕의 낙숫물이 마당을 파놓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물받침홈통인 것이다. 옛 사람의 철저함과 멋스러움이 여기서도 감지된다. - P267

소쇄원 원림은 결국 자연의 풍치를 그대로 살리면서 곳곳에 인공을 가하여 자연과 인공의 행복한 조화공간을 창출한 점에 그 미덕이 있는 것이다.
소쇄원에 설치된 집과 담장 그리고 화단과 물살의 방향바꿈 그 모두가 인공의 정성과 공교로움을 다하고 있지만, 그 사람의 손길들은 자연을 정복하거나 자연을 경영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자연 속에 행복하게 파묻히고자 하는 온정을 심어놓은 모습이기에 우리는 조선시대 원림의 미학이라는 하나의미적 규범을 거기서 배우고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소쇄원에 처음 가보는 사람들은 우선 길이가 50m나 되는 기와지붕을 얹은 긴 흙돌담의 아이디어에 놀라게 된다. 가지런하게 잘 쌓은 이 흙돌담은소쇄원과 지석마을을 갈라놓는 경계 구실을 하고 있지만, 소쇄원 안에서 바라볼 때는 더없이 아늑한 공간으로 감싸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 본래 자연그대로의 상태라는 것은 두려움 내지 무서움을 유발한다. 그러나 인간의 손길이 적절히 닿아 있을 때 우리의 정서는 안정을 찾는다. 그러니까 담장은외부공간과의 차단, 내부공간의 온화함, 자연에 가한 인간의 손길이라는 3중효과를 갖고 있다. - P286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소쇄원의 구조를 낱낱이 설명하는 일을 애시당초 포기해버렸다. 그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기도 하거니와 문자 매체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나는 독자의 상상력에 맡길 의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력은 꽤나 근수가 나갈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별것아닌 것이 그것이다. 어떤 화가도 자연 속의 풍경 그 자체의 맛을 만분의 일도 못 잡아내며, 어떤 소설가의 상상력도 광주민중항쟁이나 6월혁명의 파국과 대전환을 드라마로 꾸며내지 못한다.
그러나 모방과 경험에 기초한 상상력과 창의력은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것이니 겸재의 「박연폭포 그림이나 벽초의 『임꺽정』, 나관중의 『삼국지』는 실경이나 사실보다도 엄청난 감동으로 우리 가슴속에 깊이 각인된다. 만약에 당신이 소쇄원이나 윤선도가 보길도에 지은 부용동 원림 같은 것을 본다음에는 그보다 더 훌륭한 원을 조영할 수도 있겠지만 한번도 본 일이없는 상태에서 함부로 원림을 상상할 일이 아니다. 소쇄원 원림에 대한 당신의 상상은 아마도 입구부터 틀릴 것이다. - P288

소쇄원,식영정 ·취가정 환벽당을 양품에 안고 광주댐 너른 호수로 흘러들어가는 증암천을 그 옛날에는 자미탄(紫薇灘)이라 불렀다고 한다. ‘자미‘는 목백일홍나무의 별칭이고 ‘탄‘은 여울이라는 뜻이니 개울 양옆으로늘어선 목백일홍의 아름다움으로 얻은 이름일 것이다.
목백일홍은 순우리말로는 배롱나무라고 부르는데 따뜻한 남쪽이 원산지여서 차령산맥 북쪽에서는 정원수로 가꾸기 전에는 살 수 없다. 그래서 나같은 서울사람은 배롱나무의 아름다움이 차라리 남녘에 대한 향수의 상징같이 각인되어 있다.
배롱나무는 낙엽교목 또는 관목으로 분류될 정도로 키가 크지 않은 나무이다. 하지만 해묵은 배롱나무는 작은 거인과도 같은 늠름한 기품이 배어있다. 줄기는 약간 경사지게 구부러지면서 자라고, 가지는 옆으로 넓게 퍼져서 불균형의 부정형을 이룬다. 그런데 그 줄기와 가지는 아주 단단하고매끄럽고 윤기가 나면서 고귀한 멋이 가득하여 한 터럭의 속기(氣)도 없다. 잎이 다 떨어진 겨울날의 배롱나무는 나신(裸身)과도 같아서 사람의 손이 닿으면 가지끝이 파르르 떤다고 부끄럼나무라고도 하고 간지럼나무라고도 한다. 어찌 보면 뼈마디가 굵은 여인의 팔뚝 같기도 하고 다이어트를 심 - P291

하게 한 무용수의 몸매 같기도 한데, 그렇다고 배롱나무에서 색기(色氣)를풍기는 요염함을 느껴본 적은 없다. 일본사람들은 이 배롱나무를 사루수베리( 즉 원숭이도 미끄러지는 나무라고 부른다. 그만큼 배롱나)),
무의 줄기는 매끄럽다.
배롱나무의 진짜 아름다움은 한여름 꽃이 만개할 때이다. 7월이 되면 나무 아래쪽부터 피어오르기 시작하여 9월까지 100일간 붉은 빛을 발한다.
그래서 백일홍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저 꽃이 다 지면 벼가 익는다고 해서쌀밥나무라는 별명도 얻었다. 배롱나무꽃은 작은 꽃송이가 한데 어울려 포도송이가 거꾸로 선 모양으로 피어나는데 탐스런 송이송이가 윤기나는 가지위로 치솟듯 피어날 때 그 화사한 자태에 취하지 않을 인간이 없다.
본래 화려함에는 으레 번잡스러움이 뒤따르게 마련이건만 배롱나무의 화사함 속에는 오히려 청순하고 정숙한 분위기마저 풍기니 어느 격조 높은 문인화가인들 배롱나무꽃 같은 맑은 그림을 그려낸 적이 있었던가 싶기도 하다. - P292

나는 배롱나무꽃이 한여름 땡볕에 피어난다는 사실에 더욱 큰 매력을 느낀다. 춘삼월이 되면 대부분의 나무는 잎이 채 나기도 전에 앞을 다투어 꽃부터 피우며 갖은 맵시를 자랑하다가 5월이면 벌써 연둣빛 신록에 묻혀버리고 마는데, 배롱나무는 그 빛깔 있는 계절에는 미동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을 준비하고서는 세상이 꽃에 대한 감각을 잃어갈 즈음에 장장 석달하고도 열흘을 피어 보이니 인간세상에서 대기만성하는 분들의 모습이 그런 것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배롱나무를 볼적이면 곱디곱게 늙은 비구니스님의 잔잔한 미소 같은 청아(淸雅)한 기품을 느끼곤 한다.
그런 배롱나무가 지금 증암천변에서는 자취를 감추었다. 아마도 신작로를 낼 때 베어졌을 것이며, 천변에 시멘트 방죽을 쌓으면서 베어지기도 했을 것이다. 식영정의 옛 주인이던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이 쓴 시 「배롱나무꽃 핀 여울에서는 "누군가 가장 아끼던 것을 산 아래 시내에다 심어놓았구나"라고 하였으니, 옛 사람은 없던 배롱나무도 새로 심어놓았건만우리 시대는 어찌하여 ‘잃어버린 자미탄의 여름날‘을 안타까워하는 처참한 신세가 되었단 말인가. - P292

이후 오희도는 높은 벼슬을 마다하고 다시 후서마을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의 아들 오명중(吳明仲: 1619∼1655)이 아예 세상을버리고 여기에 칩거할 뜻으로 조영한 원림이 이 명옥헌이다. 
명옥헌은 가운데 섬이 있는 네모난 연못을 파고 그 위쪽에 정자와 서재를겸한 건물을 지은 단조로운 구성이지만 연못 주위에 소나무와 배롱나무를장엄하게 포치하고 언덕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시야를 끌어들임으로써 더없이 시원한 공간을 창출한 뛰어난 조원의 원림인 것이다.
명옥헌의 배롱나무숲은 거대한 고목으로 자라났다. 일조량이 많은 곳이라 남도의 여느 배롱나무와는 달리 키가 크고 가지도 무성하고 꽃송이가 많이 달린다. 한여름 배롱나무꽃이 만개할 때 여기에 들른 사람들은 좀처럼발길을 떼지 못한다.
본래 배롱나무는 자미탄처럼 개울가에 있을 때보다 정원수로 자랄 때가멋있다. 남도의 고찰, 해남 대흥사, 강진 무위사, 고창 선운사 경내의 배롱나무는 극락세계의 안내양처럼 해맑은 미소를 띠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고 최순우관장 이래로 배롱나무를 정원수로 채택하고 있다. 중국의 당나라시절 3성 6부의 하나인 중서성(中書省)에는 배롱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해서 양귀비 애인인 현종이 중서성을 자미성이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지금 명옥헌의 배롱나무는 모르긴 해도 천연기념물로 지정할 만한 장관인데 문화재관리국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 P304

죽림칠현이 얼마나 부자였던가를 알 수 있다. 그 점에서 나의 이번 답사기는 호화판 인생의 풍류를 더듬는 반민중적 성격을 띤다. 그러나 내 글이절대로 풍류객의 객담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부자라고 모두 그런 정자와 원림을 경영한 것은 아니었다. 또 부자의 정서가 모두 반민중적인 것은 아니다. 지배층의 문화를 모두 반민중적인 것으로 치부해버린다면 우리가 민중이라는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모든 문화유산을 모조리 폐기 처분하는 것밖에 없다. 인간이 자신의 정서를 고양시키어,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에는 여러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옛날에는 사대부 지배층만이 독차지했던 정자와 원림의 미학을 보다 넓은 계급적지평에서 그것의 공공성으로 환원시키는 일이 민중적 재창조의 길이 될 것이다. 만약 민중적 삶 속에서 정자의 의미를 찾고 싶으면 다른 현장으로 가야 한다. 그것은 곧 모정(茅亭)이다.
담양의 원림과 정자를 답사하고 올라오는 길, 나는 차창 밖으로 넓은 들판 한쪽에 외롭게 서 있는 모정을 보면서 또 다른 명상에 잠시 잠겨본다. - P307

보길도와 강진의 동백꽃은 3월말이면 다 질 정도로 일찍 피지만, 선운사동백꽃은 동백나무 자생지의 북방한계선상에 있기 때문에 4월말이 되어야절정을 이루며 고창군에서 주관하는 선운사 동백연(冬柏燕)도 이무렵에 열린다. 동백꽃은 반쯤 져갈 때가 보기 좋다. 떨어진 동백꽃이 검붉게 빛바랜채 깔려 있는데 밝은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이파리 사이사이로 아직도 붉고 싱싱한 동백꽃송이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는 모습은 마치 그림 속에 점점이 붉은 악센트를 가한 한 폭의 명화를 연상케 한다. 그날따라 하늘이 유난히 맑다면 가히 환상적이다.
그러나 동백꽃이 지는 모습 자체는 차라리 잔인스럽다. 꽃잎이 흩날리며시들어가는 것이 꽃들의 생리겠건만 동백꽃은 송이째 부러지며 쓰러진다.
마치 비정한 칼끝에 목이 베어져 나가는 것만 같다. 1978년 내가 처음으로동백꽃 지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이 세상의 허망이 거기 있다고 생각하며,
유신독재의 비호 속에 영화를 누리는 자들의 초상이 바로 저것이라고 생각했다. - P310

비록 그 추잡한 인간들에 비교하기에는 동백꽃이 너무 밝고 고왔지만. 그러나 1981년, 광주의 아픔을 어떻게 새겨야 할지 가늠하기 힘들던시절, 선운사 뒷산에 버려진 듯 뒹구는 동백꽃 송이들은 마치도 덧없이 쓰러져간 민중의 넋이 거기 누워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자연은 우리에게 이처럼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르게 다가온다는 것을 나는 그때 알았다.
이런 동백꽃의 아름다움을 때맞추어 본다는 것은 여간한 행운이 아니고는 힘들다. 그것도 평일이 아닌 휴일을 택하자면 일년에 꼭 한 번밖에 없는것이다. 그래서 이 고장 출신 시인 서정주가 말(末) 당이 아니라 미당(未堂)이었던 시절에 쓴 「선운사 동구」라는 명시가 나왔다.


선운사 골짜기로 / 선운사 동백꽃을/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피지 안했고 /막걸릿집 여자의/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읍니다/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읍니다.


선운사 동구 길가의 밭 한 모퉁이에는 서정주가 쓴 이 시의 육필원고를그대로 새긴 ‘미당시비‘가 세워져 있다. -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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