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릉(宣靖陵, 사적 제199호)은 조선왕조 9대 왕인 성종의 선릉(宣陵)과 11대 중종의 정릉(靖陵)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선정릉은 지하철2호선 선릉역 10번 출구에서 도보로 약 7분, 9호선 선정릉역 3번 출구에서약 16분 걸린다. 능의 출입구는 본래 선릉로 곁 서쪽에 있었지만 8년전(2014)에 넓은 주차장을 마련하고 동쪽으로 옮겼다.
선정릉의 위치(선릉로100길 1)는 서울 강남의 한복판으로 동쪽으로는봉은사와 무역센터 등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선릉로라 불리는 대로가 바짝 붙어 지나가고, 남쪽으로는 빌딩 너머로 테헤란로가 길게 나있다. 현재 선정릉의 면적은 7만 2,800평이며 둘레가 2킬로미터에 달하는 부채꼴 모양으로 능침(무덤) 주변은 솔밭과 숲으로 이 - P151

루어져 있다.
도시공학적으로 볼 때 선정릉은 서울 강남 도심 속의 녹지 공간으로훌륭한 가치를 지닌다. 강남에 선정릉마저 없이 빌딩 숲을 이루었다면그 삭막한 도시경관이 어떠했을까. 상상조차 하기 싫다.
선정릉의 하루 입장객 수는 약 천 명이다. 아침 6시에 문을 열고 밤9시(동절기에는 오후 4시 30분, 2월은 오후 5시에 닫는데 아침에는 대개 인근주민, 점심때는 외지 탐방객과 주변 직장인, 저녁에는 데이트족이 많이이용한다. 봄철 선릉과 정릉 사이로 난 긴 숲길에 벚꽃이 만발할 때면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이런 봄꽃놀이를 만끽한다는 것에 너나없이 놀라움을 느낀다. 공원도 이런 공원이 없다.
그래서 한때는 선정릉에 공원이라는 이름이 붙은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붙여진 이름은 선정릉공원이 아니라 삼릉(三陵)공원이었다.
이는 참으로 엉뚱한 명칭이다. 선정릉에는 선릉과 정릉 둘밖에 없음에도 삼릉이라고 불렀던 까닭은 능침(봉분)이 셋이라 그랬던 모양이다. 그러나 능침이 셋이라고 무조건 삼릉이 되는 것이 아니다. - P153

왕릉이란 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왕과 왕비는 함께 묻히기도 하고 따로묻히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조선시대 왕릉에는 다섯 가지 유형이 있다.

단릉(單陵): 왕이나 왕비 한분만 묻힌 능 (예: 문정왕후 태릉) - P153

합장릉(葬陵): 두 분이 하나의 봉분에 함께 묻힌능 (예: 세종 영룽)
쌍릉(雙): 왕과 왕비가 곁에 나란히 묻힌 능 (예: 태종 헌릉)
삼연릉(三連陵): 왕, 왕비, 계비 세분이 나란히 묻힌능 (예: 헌종 경릉)
동원상하릉(同原上下): 왕과 왕비가 같은 언덕 아래위로 묻힌 경우(예: 효종 영릉)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왕과 왕비가 같은 산줄기의 다른 언덕에 묻힌 경우 (예: 성종 선릉)

중종의 정릉은 단릉이고 성종의 선릉은 동원이강릉이다. 성종의 능침과 계비인 정현왕후의 능침이 다른 언덕에 있지만 같은 산줄기에 있어홍살문과 정자각이 하나만 있다. - P154

성종대왕 선릉
중종대왕 정릉
세종대왕 영릉
정조대왕 건릉
장조(사도세자) 융릉
문정왕후(중종 비) 태릉 - P155

왕릉을 비롯한 무덤에는 죽음에 대한 그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 유교적 사생관(死生觀)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혼백이 분리되어 혼(魂, 넋)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魄, 형체)은 땅에 묻힌다. 그래서 혼이 깃든 신주(神主)를 만들어 사당에 모시고 백은 땅에 묻고 무덤을 만들었다. 왕가에서 혼을 모신 곳이 종묘이고 백을 안치한 곳이 왕릉이다.
조선왕조 역대 왕은 27명이지만 왕과 왕비의 왕릉은 총 42기이다. 이 - P156

는 왕과 왕비가 따로 묻힌 단릉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태조의 4대조능과 실질적인 왕은 아니지만 나중에 왕으로 추대된 추존왕들의 까지더하면 숫자는 50기까지 늘어난다.
조선시대 왕릉은 풍수상 길지를 택해 양지바른 남쪽 언덕에 품위있게 조성되어 있다. 왕릉의 구조에는 정연한 건축적·조경적 의장(디자인)이 구현되어 있다. 절대군주의 무덤으로는 규모가 큰 편이 아니지만 다른 나라의 왕릉처럼 인공적인 축조물로 위세를 드러내지 않고 자연과조화를 이루는 탁월한 공간 경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조선왕조의 왕릉은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는 물론이고 세계사적으로 그 독특한 문화유산적 가치가 인정되어 2009년에 북한에 있 - P157

는 2기를 제외하고 남한에 있는 40기 모두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북한의 2기는 태조의 원인 신의왕후제릉(齊陵), 정종의 후릉(厚陵)이다.
조선왕릉의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할 때 전문가들 사이에서 선정릉은빼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왜냐하면 세계유산 심의는 아주 까다로워문화유산으로서의 ‘고유 가치‘ 못지않게 ‘보존 실태‘를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하는데 선정릉은 능역이 크게 훼손되었기 때문에 미리 제외하자는 의견이었다. 그런데 조선왕릉 등재를 위한 2차에 걸친 국제학술대회가 열렸을 때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의 외국인 학자들을 선정릉에 안내하여 서울의 강남 개발과 이곳 주변의 엄청난 땅값을 알려주자 이들은 오히려 이와 같이 개발 압력이 크고 지가가 높은 지역에서문화재를 끝까지 보존하고 있는 국민정신은 높이 살 만하다며 조선왕릉전체를 빠짐없이 연속유산으로 등재 신청할 것을 권유했다. ‘보존 실태‘
는 나쁘지만 ‘보존 의지‘를 보여준다고 인정한 것이었다. - P158

정자각 좌우 아래쪽에는 대개 3칸짜리 작은 건물이 마치이 건물을 호위하듯 다소곳이자리하고 있다. 오른쪽(동쪽)은제사를 준비하는 수복방(守僕房)이고, 왼쪽(서쪽)은 제수를넣어두는 수라간(水間)이다. 이 두 건물이 있어 왕릉은 살아 있는 공간이라는 분위기를 얻는다. 중종대왕 정릉이 썰렁해 보이는 것은 이 수복방과 수라간이 없기 때문이다.
두 건물은 비슷해 보이지만 수라간은 벽돌 담장으로 닫힌 공간이고수복방은 콩떡 담장에 툇마루가 있는 열린 공간이다. 이것이 우리나라건축에서 보여주는 ‘비대칭의 대칭‘이다. 전체적으로는 비슷하면서 디테일을 달리하여 은근히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자각 오른쪽 계단을 내려와 능침으로 가자면 바로 이 왕릉의 주인을 알리는 비석을 모신 비각(碑閣)이 있다. 비석에는 단정하면서도 흔들림 없는 전서체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 P165

조선국(朝鮮)
성종대왕(成宗大王)선릉(宣陵)
정현왕후(貞顯王后) 부좌강

부좌강은 왼쪽 언덕에 합사(合祀)되어 있다는 뜻이다. 즉 능침은 달라도 같은 선릉이라고 밝혀둔 것이다. 영조 31년(1755)에 세운 이 비석 뒷면에는 성종대왕의 이력 중 1457년에 태어나 1469년에 즉위하고1494년에 승하했으며 재위는 25년, 향년 37세였다는 사실이 적혀 있다.
정현왕후 윤씨의 경우, 1462년에 태어나 1480년에 왕비로 책봉되었고1530년에 68세로 승하하여 대왕릉 왼쪽에 장사지냈다는 사실만 간단히쓰여 있다. - P166

중종대왕의 정릉으로 가는 길은 방문객들이 선정릉 안에서 가장 좋아하는 산책길이다. 벚꽃나무 숲길을 지나가다보면 왼쪽으로 정릉의 정자각과 능침이 비껴 보인다. 그러나 정릉은 그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쓸쓸하기만 하다. 오늘날 쓸쓸해 보이는 까닭은 바로 곁으로 큰길이 나있고 그 너머로는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으며 수복방과 수라간이 복원되지 않아 전체적 균형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 P179

그 옛날에도 쓸쓸했다는 것은 중종에게 3명의 왕비가 있었으나 사후어느 왕비와도 함께 묻히지 못하고 홀로 누워 있는 단릉이기 때문이다.
중종의 첫째 왕비는 단경왕후, 둘째 왕비는 장경왕후, 셋째 왕비는 문정왕후다. 장경왕후는 인종을 낳았고, 문정왕후는 명종을 낳았다.
단경왕후(1487~1557)는 좌의정을 지낸 신수근의 딸로 연산군 5년(1499)에 진성대군 시절의 중종과 결혼했는데 1506년 연산군을 몰아내는 반정으로 중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자연히 왕비가 되었다. 그런데 중종반정 때 반대편에 있었던 아버지가 죽임을 당했다. 이에 단경왕후는역적의 딸이라고 하여 왕비가 된 지 7일 만에 폐위되어 궁궐에서 쫓겨났다.
궁궐에서 강제로 쫓겨난 신씨는 인왕산 아랫마을 서촌에 살면서 중종을 향한 그리움을 전하기 위해 다홍치마를 산자락 바위에 펼쳐놓고눈물을 흘리다 내려오곤 했다고 한다. 이 바위가 인왕산 치마바위다. - P180

그러나 명종 20년(1565)에 세상을 떠난 문정왕후는 중종 곁에 묻히지못했다. 대신들은 정릉이 지대가 낮아 또 하나의 능침을 조성하는 것은불가하다고 반대했다. 실제로 정릉은 무리하게 이장한 것이어서 장마때마다 홍살문과 정자각이 침수되었다. 이에 명종은 다시 정릉을 원래있던 희롱으로 옮길 생각까지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문정왕후는 지금의 서울 노원구 공릉동 언덕에 홀로 묻히고 능호를 태릉(泰陵)이라고 했다. 이리하여 문정왕후의 태릉은 외따로떨어진 단릉으로 조성되었지만 능침과 정자각 사이가 어느 왕릉보다 길고 문신석·무신석의 조각상도 늠름하여 장중한 기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연 여장부 문정왕후의 능 같다고들 말한다.
이처럼 중종의 무덤은 계비 장경왕후 곁에 나란히 모셔져 있던 것을굳이 이곳으로 이장해 결국 외따로 떨어진 단릉이 되었다. 조선왕릉 중왕만 홀로 있는 무덤은 태조의 건원릉, 단종의 장릉 이외엔 중종의 정릉밖에 없다. 그나마 위안이 된다면 아버지 성종과 어머니 정현왕후의 곁에 묻혀 있다는 점이다. - P182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30년에 걸쳐 이와 같은 치유의 과정이 이루어진 뒤 조선과 에도막부 사이에는 비로소 친선 외교의 길이 열렸다. 다만 일본의 사신이 조선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사신이 일본으로 갈 테니 그 경비는 일본 측이 부담하라는 조건을 달았다. 일본 측은이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1636년 일본으로 떠나는 사신은 이제 쇄환사라는 이름을버리고 ‘신뢰가 통한다‘는 뜻의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라는 이름을 달 - P190

고 출발했다. 조선통신사의 일행은 정사, 부사 이하 400명에서 500명에이르는 규모였고 왕복 열 달이 걸리는 긴 여정이었다. 이때부터 1811년까지 조선통신사가 모두 아홉 차례 파견되었다.
이것이 임진왜란 이후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고 조일 간의 평화와 선린외교가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이는 오늘날 일제 식민지배라는 과거사문제를 풀어가는 데 하나의 시사점을 보여주는 역사적 경험으로 삼을만하다. - P191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있는 봉은사(奉恩寺)는 현대사회로 들어와 도심속의 섬처럼 남아 있지만 그렇다고 이 사찰이 갖고 있는 불교계에서의위상과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크게 변한 것은 아니다.
봉은사는 명종 5년(1550) 문정왕후(중종의 왕비가 어린 명종을 대신해대리청정하면서 보우(1509~65) 스님을 앞세워 조선불교를 중흥하며 선·교양 부활시킬 때 선종의 수사찰(寺刹)이 되었다. 그때 교)을종의 수사찰은 세조 광릉의 능사인 남양주 봉선사(奉先寺)였다. 그리고보우 스님은 판선종사 도대선사(判事都大禪師)로 봉은사 주지를 맡으면서 사실상 오늘날 봉은사의 중창조가 되었다. - P193

봉은사의 이런 영광은 선정릉의 능침사찰로 한양에서 가까운 경기도광주군 언주면에 위치했다는 지리적 장점 덕분이었다. 그러나 현대사회로 들어와서는 서울과 가깝다는 사실이 정반대 상황으로 작용했다.
서울이 날로 팽창하여 1963년에는 서울특별시 성동구로 편입니강남 개발이 본격화되는 1975년에는 강남구가 신설되면서 사찰 영역전체가 개발 압력을 받게 되었다. 1976년 강북에서 강남으로 이전하는경기고등학교 부지를 선정릉과 봉은사의 뒷산인 수도산 일대로 정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봉은사는 건물이 들어선 4천여 평만 남기고 토지를전부 내주게 될 판이었다. 이 위기를 헤쳐나간 분이 당시 주지직을 맡고있던 영암당(廣巖堂) 임성(任性, 1907~87) 스님이었다. 봉은사 주지를 역임한 진화 스님은 "영암 스님이 안 계셨다면 오늘의 봉은사는 없다"고했다. - P194

그런데 일주문이 사라진 봉은사는 절 입구가 너무도 허전하다 생각해모처럼 자리 잡고 잘 있는 오봉산 석굴암에서 다시 이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초정권창륜이 쓴 <수도산 봉은사>라는 현판을 달고 찰주도 반듯하게 깎아 비스듬히 받쳐둔 것이 오늘날 이 봉은사일주문의 모습이다.
이 과정을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중창의 개념으로 새로운 환경에 맞는 일주문을 세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이를테면 중후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부산 금정산 범어사의 일주문을 벤치마킹한다든지, 아니면 아예 건축가에게 의뢰하여 도심 사찰에 어울리도록 현대건축 개념을 도입한 새로운 일주문을 세워본다든지. 아무튼 이 일주문으로 봉은사는 첫인상에서 꽤나 손해를 보고 있다. - P201

조선왕조는 성리학을 이데올로기로 삼으면서 국초부터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강력히 시행해 태종 6년(1406) 조계종, 천태종 등 11개종파의 242개 사찰만 공인했는데 이때 견성사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세종 6년(1424)에 조선불교를 선교 양종 체제로 통폐합하고선종은 덕수궁 자리에 있던흥천사(興天寺), 교종은 당시 연희방(연희동)의 흥덕사(興德寺)로 지정하며 최종적으로 36개 사찰만 공인했다. 이때도 견성사는 보이지 않는다.
건성사가 다시 역사 속에 등장하는 것은 1495년에 타계한 성종의 선등이 견성사 곁에 조성되고 나서다. 이에 견성사는 왕릉을 지키는 왕실의 원찰(利)이 되어 연산군 4년(1498)에 크게 중창하고 절 이름도 능침사찰에 걸맞게 봉은사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 P207

당시 유학자들은 보우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던 것이다. 보우의불교 중흥은 문정왕후의 권세를 끼고 벌인 사상적 반역이라고 생각했다. 보우에 대한 증오는 오랫동안 유가 사회에 내려와 급기야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에는 진짜 ‘요승‘으로 묘사되어 있다. 나 역시 한때는 보우스님에 대해 그런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보우 스님은 진심으로 불교를 다시 중흥시키고자 노력했던당대의 능력 있는 스님이었다. 그는 문정왕후의 부름을 받아 열과 성을다해 불교를 일으켰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보우 스님은 비참한 죽음을맞았고 유학자들의 기록에 역사를 더럽힌 죄인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만약에 보우 스님이 없었다면 조선시대 불교는 진짜 미미했을 것이다.
보우 스님이 부활시킨 승과에서 15년 동안 휴정, 유정 같은 엘리트를비롯하여 4천여 명의 승려를 배출한 것이 임진왜란 때 의승군(僧軍)이 맹활약을 펼치는 기틀이 되었음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보우 스님은 사라져가는 조선불교에 새 불씨를 일으켜준 조선불교의 중흥조이다. - P213

다. 이 불상에서 발견된 발원문 덕에 제작 과정이 소상히 밝혀져 있기때문이다.
이 세 불상은 1651년 조각승 승일(勝一) 등 9명이 대웅보전에 봉안하기 위하여 조성한 것인데, 1689년에 발생한 화재로 인해 소실된 본존 석가여래좌상을 1765년에 새로 조성하여 기존의 아미타여래좌상, 약사여래좌상과 함께 봉안한 것이라며 불상들의 이름을 명확히 알려주고 있다.
좀더 설명하자면 조선 후기에 부처님만 세 분 모신 삼존불은 삼세불(三世佛)인 경우도 있고 삼신불(三身佛)인 경우도 있어 이를 구별하기 쉽지 않다. 삼세불은 시간적 개념으로 약사여래(과거불), 석가여래(현재불), - P218

아미타여래(미래불)를 모신 것이고, 삼신불(三身佛)은 존재론적 개념으로비로자나불(법신불) 석가모니불(신불)과 노사나불(보신불)을 모신 것이다.
그런데 봉은사 삼존불은 명확히 삼세불이라고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이 삼존불상의 인상을 보면 참으로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고개를 약간 앞으로 숙인 모습이어서 더욱 인간미가 느껴진다.
어찌 보면 단정한 선비의 이미지 같기도 하다.
본래 불상이란 그 시대의 이상적인 인간상을 반영한다. 삼국시대 청동불이 절대자의 친절성을 나타내는 미소가 특징이고, 통일신라 석불이이상적인 인간상으로서 절대자의 근엄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고, 나말여초의 철불에 힘있고 현세적인 능력이 강조되어 있고, 고려시대 철불·석불이 파격적인 괴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에 반하여 조선시대 불상은 이봉은사 삼존불상처럼 거의다 조용히 앉아 있는 침묵의 좌상 모습을 하고 있다. - P219

북극보전(北極寶殿)은 보통 절집에서 산신각, 삼성각, 칠성각이 있는자리에 위치한 건물로 민간신앙을 불교가 받아들인 곳인데, 봉은사에서는 산신님, 칠성님에 더해 나한 중에서도 원력이 뛰어난 독성(獨聖, 나반존자까지 모두 모시고 있어 제법 큰 규모다. 이름 또한 독특하게 북극성을 끌어와 지었다. 북극보전은 대중들이 대웅전 다음으로 선호하는 기도처이다.
영각(閣)에는 봉은사의 역대 주지 중 일곱 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연회국사, 보우대사, 서산대사, 사명당, 그리고 <판전>의 화엄경판을제작한 영기 스님, 오늘의 봉은사를 지킨 영암 스님, 그리고 불교계의 큰스님이었던 석주 스님 등이다. 참으로 봉은사는 영각을 지어 자랑스러운 주지 스님들을 기릴 만하다. - P221

을늙은 스님 한 분이 댓가지를 하나 가지고 들어왔다. 그리고 댓가지끝에 작은 종이 통 하나를 매달았다. 통 가운데에는 바늘과 같은 작은봉(화)이 있었다. 1개를 골라 공의 바른팔 근육 위에 곧추세웠다.
작은 스님이 석유황에 불을 붙여 가지고 와서 작은 봉끝에 붙였다.
타는 것이 촛불 같았으나 바로 꺼졌다.
나로서는 평생 처음 보는 일이었다. 스님이 나간 후 공들에게 물었다. "그 하시는 것은 무슨 뜻이고, 무슨 법이며, 뭐라고 부릅니까?"
어당 이상수 선생이 말씀하기를"이는 자화참회라는 것이다. 수계(受戒)라고도 부른다. (…) 이는 모든 더러운 것을 살라버리고 귀의청정(歸依淸淨)하는 맹세이니 불법(佛法)이 그러하니라." 하였다.
나는 처음으로 이 일을 보았고, 비록 말하지는 않았으나 심히 의아스럽고 괴이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추사처럼 높고 귀한 분이 어찌 이렇게 불심(佛心)에 미망되었는지 늘 의심했다. - P228

추사는 이처럼 말년을 봉은사에서 지내며 대웅전 서편에 있는 전에 기념비적 작품을 남겼다. 판전은 당대에 화엄 강의로 이름 높았던 남호(南湖) 영기(永, 1820~72) 스님이 봉은사에 간경소經所)를 차리고왕실 내탕금(판공비)과 대신들의 시주를 모아 ‘화엄경 소초본(疏鈔本)』80권 등을 목판으로 새기는 불사를 일으켜 마침내 3,175매의 목판으로완성하고, 이를 보관할 경판고로 지은 건물이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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