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12월 백석은 자야에게 함께 만주로 가자고 다시 청했으나 역시 거절 당했다. 이에 백석은 홀로 신경 (현 장춘시)으로 떠나면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를 지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 것이다


이후 둘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자야는 백석을 평생 잊지 못해 그의 생일인 7월 1일에는 금식을 하고 그를 기렸다고 한다.
P119, 120



아침에 읽는 ‘백석‘ 좋다. 좋구나!
그저 좋구나.







우리나라는 화강암의 나라여서 일찍부터 석조 조각이 발달했다. 불교가 들어온 이래로는 석탑·석등 석불이 많이 조성되었고 능묘에서는 석인상과 장명등이 세워졌다. 민간신앙처에서는 돌장승, 민묘에서는 동자석이 무덤을 지켜왔다. 그 하나하나가 독특한 아름다움과 그 시대의문화상을 반영하고 있다. 그중 많은 석물들이 일제강점기에 박물관으로혹은 대저택의 정원 조각으로 팔려나갔는데 그 수가 얼마인지 헤아릴수 없다.
우리옛돌박물관은 세중그룹의 천신일 회장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석물들을 모아 전문 박물관으로 세운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오면 우리석조 조각의 다양한 면모를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우리의 석물들은 일본을 비롯한 외국으로도 많이 흘러 나갔다. 천신일 회장은 2001년 - P115

일본인 구사카 마모루에게서 문인석·무인석 · 동자석 등 석조 유물 70점을 환수해 오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내가 우리옛돌박물관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은 야외 전시장 맨 위쪽의 쉼터다. 여기에는 민묘의 귀여운 동자석들이 저마다의 표정으로 도열해 있는데 시계(視界)가 사방으로 열려 있어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가구박물관은 전통 목가구 전문 박물관으로 우리나라 전통 주생활 공간과 실내 가구를 집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전통 가구를 종류별(사랑방 ·안방·부엌 등), 재료별(먹감나무·은행나무·대나무·소나무 · 종이 등), 지역별(각 지방 형식)로 분류·전시하고 20명 이내의 그룹 가이드 투어로 관람객에게 사랑방 가구의 단아함, 안방 가구의 화려함, 서민 가구의 질박함을 느낄 수 있게 해설해주고 있다. - P116

한국가구박물관은 이화여대 미술대학을 나온 정미숙 관장이 오랜 기간 수집한 목가구 2,000점을 기반으로 세운 것이다. 한옥의 마니아인정관장은 사라져가는 고가 열 채를 박물관으로 옮겨와 고재를 그대로살리면서 적절히 배치해 한옥의 총체적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CNN이 2011년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박물관‘으로 선정하기도했다.
한국가구박물관에는 서울을 방문한 외국 귀빈들이 줄을 이어 찾아왔다. 독일 대통령, 벨기에 국왕 부부, 스웨덴 국왕, 중국 국가주석, IMF 총재, 영화배우 브래드 피트등이 다녀갔다. 그리고 우리 한옥의 멋과 분위기를 살린 넓은 특별전시장에서는 강연과 연회를 열 수 있어 2010년G20 서울정상회의의 20개국 정상 배우자의 공식 오찬을 비롯해 굵직한국제회의 연회장으로 이용되었다. 인기 예능 프로그램인 ‘1박2일‘(KBS)의 촬영 장소, 그리고 ‘유 퀴즈 온 더 블럭‘(TVN)의 BTS 인터뷰 장소로사용되어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다. - P117

한국가구박물관 아래쪽 선잠단으로 내려가는 비탈길(선잠단로) 대로변에는 길상사(吉祥寺)라는 절이 있다. 본래 이 건물은 1970년대에 삼청각, 오진암과 함께 3대 요정으로 일컬어지던 대원각(大苑閣)이었는데1997년에 사찰로 태어난 것이다.
대원각 주인 김영한(金英韓, 1916~99)은 1916년 서울에서 태어나 집안이 가난에 몰리자 17세 때(1932) 조선 권번에 들어가 진향(眞香)이라는기생이 되었고 여창가곡과 궁중무의 명기로 성장했다.
1935년 진향은 조선어학회 회원인 해관 신윤국의 후원으로 일본에 - P117

유학했는데 해관 선생이 투옥되자 면회차 귀국해 함흥에 머물렀다. 그리고 이듬해(1936) 함흥 권번에서 시인 백석(白石, 1912~66)을 운명적으로만났다. 백석이 막 첫 시집 『사슴』을 펴내고 함흥 영생고등보통학교 영어교사로 부임했을 때 회식 자리에서 만난 것이었다.
백석은 진향에게 첫눈에 반해 "오늘부터 당신은 영원한 내 여자야.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기 전까지 우리에게 이별은 없어"라고 하며 ‘자야(夜)‘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자야는 이백(李白)의 「자야의 오나라 노래(子夜吳歌)」라는 시에 등장하는 여인의 이름이다. 그때부터 둘은 연인이되었다.
1937년 12월 백석은 아버지의 강요로 고향으로 내려가 결혼했다. 그러나 곧바로 함흥으로 와 자야에게 함께 만주로 가서 살자고 했다. 하지만 자야는 거절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백석은 뒤따라 서울로 올라와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면서 자야와 재회해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렸다. - P118

8·15해방 후 백석은 북에 남고 자야는 중앙대학교 영문과에 들어가1953년에 졸업했다. 1955년 자야는 성북동 배밭골이라 불리는 대지 2만평을 빚을 내어 매입했다. 10여 년간 땅을 되팔아 빚을 갚으면서도 7천평이 남았을 때 한옥을 짓고 대원각을 열었다. 마침 1970년 삼청터널이 - P120

뚫리면서 대원각은 크게 번창했다. 당시는 요정 정치가 한창인 때여서대원각은 권력자나 재력가 아니면 갈수 없었다.
1980년대로 들어서면서 요정 정치도 시들해졌다. 김자야는 일선에서물러나 대리 사장에게 운영을 맡겼다. 대리 사장은 대원각을 불고기와평양냉면을 파는 고급 음식점으로 바꾸었다. 그 시절 나는 어른을 따라대원각에 한번 가본 적이 있는데 기본 한상이 1인당 2만5천 원이었다.
일선에서 물러난 김자야는 스승 하규일(河)의 일대기와 가곡 악보를 채록한 『선가 하규일 선생 약전』을 펴냈다. 그러다 1987년에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다가 불현듯 대원각을 절로 만들겠다고 결심하고도움을 청할 생각으로 법정을 찾아갔다. 그러나 법정은 주지를 맡아본경험이 없고 아무것에도 메이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라 자리에 적합하지않다고 거절했다. 이후 자야가 10년을 두고 부탁하자 법정은 마침내 이 - P121

곳을 조계종 송광사의 말사이자
‘맑고 향기롭게‘ 운동의 근본도량으로 삼기로 했고, 대원각은1997년 길상사라는 이름으로다시 태어났다. 자야에게는 길상화라는 법명이 주어졌다.
당시 대원각의 재산은 시가1천억 원이 넘는 것이었다. 기자간담회 때 그 많은 재산이 아깝지 않느냐는 물음에 자야는 "1천억은 그 사람(백석)의시한줄만못하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 P122

1997년 12월 14일 길상사창건 법회 때 법정 스님이 대시주자인 김자야에게 마이크를 넘겨주자 그는 "저는 불교를 잘 모르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제가 대원각을절에 시주한 소원은 다만 이곳에서 그 사람과 내가 함께 들을 수 있는 맑고 장엄한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 입니다"라고 말했다.
최종태 <관음보살상>길상사 경내에는 극락전·지장전·설법전 등 여러 법당과 행지실·청향당·길상헌 등 요사(寮舍, 스님들의 처소)가 있다. 대원각의 본채는 극락전으로, 대연회장은 설법전으로, 기생 숙소는 요사채로 바뀌었고, 팔각정에는 자야가 백석과 함께 듣고 싶다고 한 범종이 걸려 있다.
- P122

설법전 앞에는 조각가 최종태가 제작한 관음보살상이 있다. 이 보살상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그가 명동성당과 혜화동성당에 조성한 성모마리아상과 많이 닮았다. 본래 불교와 천주교는 닮은 점이 많다. 1997년12월 14일 개원법회를 할 때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해 축사를 했고, 법정스님은 이에 대한 답례로 1998년 2월 24일에 축성 100주년을 맞은 명동성당을 찾아 법문을 설법했다.
1999년 11월 14일 자야는 임종을 앞두고 유언하면서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길상사에 눈 많이 내리는 날 뿌려달라"고 했다. 백석의 시 나와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시구처럼 눈이 푹푹 내리는 날 백석에게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이 순애보를 이생진 시인은 「내가 백석이 되어로었다. 길상헌 뒤쪽 언덕에는 김자야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 P123

해방공간에서 백석은 북에 있었다. 말하자면 재작가였다. 그러나백석은 월북작가로 지목되어 1988년 해금될 때까지 금기였다. 백석 시집 ‘사슴』을 갖고 있으면 불온문서를 지녔다는 물증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북에서 대접받은 것도 아니었다. 오랫동안 잊힐 수밖에 없었던백석이 우리에게 다시 돌아온 계기는 시인 이동순이 『백석시전집』(창작사 1987)을 펴내면서다.
그러나 백석이 동시대와 후대의 시인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이동순은 「문학사의 영향론을 통해 본 백석의 시에서 백석의 시 영향 아래 있던 시인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청록파 시인(박목월 · 박두진 · 조지훈)들과 윤동주, 그리고 해방 후의. - P123

신경림·박용래·이시영 · 김명인·송수권·최두석·박태일·안도현·심호택·허의행 등


안도현은 『백석 평전』(다산책방 2014)에서 ‘백석 시의 영향을 받은 시인들‘이라는 항목을 따로 설정하고는 다섯 살 아래의 윤동주는 사슴』을끼고 살았고 신경림은 ‘내 시의 스승으로는 서슴없이 백석‘이라고 했다고 증언했으며 안도현 자신은 백석의 영향을 받은 정도가 아니라 ‘베꼈다‘고 했다. 실제로 백석의 「모닥불」과 안도현의 「모닥불을 비교해보면그가 백석의 시에 얼마나 큰 신세를 졌는지 알 수 있다. 백석의 사슴은2005년 계간 『시인세계』에서 현역 시인 156명이 뽑은 ‘우리 시대 시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자야는 말년에 이동순의 교열을 받아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 1995)을 - P124

펴내고 1997년에는 백석문학상 제정 기금 2억 원을 출연했다. 백석문학상은 출판사 창비 (당시 창작과비평사) 주관으로 1999년부터 지금(2022)까지 32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제1회에는 황지우의 『어느 날 나는 흐린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문학과지성사 1998)와 이상국의 『집은 아직 따뜻하다』 (창작과비평사 1998)가 공동수상했다. - P125

「고풍의상」은 우리 고유의 의상인 한복과 춤을 제재로 고전적인 우아한 아름다움과 낭만을 노래한 조지훈의 시를 가사로 윤이상이 작곡한 곡입니다. 풍속도와도 같은 시각적인 아름다움과 율동에서 오는 우아한 고전미 그리고 청각적인 맛과 현대미가 조화를 이룬 작품입니다. 「산유화」(김소월 시, 김순남 작곡)와 함께 전통음악에 바탕으로 둔독자적인 음악어법으로 한국예술가곡의 새로운 지평을 연 곡이기도합니다. 금지곡은 아니었지만 작곡자의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한때안 불린 적이 있습니다. 광복 이후에 만든 작품 중 남북한에서 모두애창하는 가곡이라는 이색적인 기록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수자(李子) 여사의 『내 남편 윤이상』(전2권, 창작과비평사 1998)을 보면 1953년 전쟁이 끝나면서 피아노 값이 치솟아 오빠가 결혼 기념으로사준 피아노를 팔고 약간을 보태서 성북동에 집을 마련했는데 개울(성북천) 건너에 조지훈 시인이 살고 계셔서 아주 가까이 지냈다고 했다. 그래서 고려대학교 교가는 조지훈 작사, 윤이상 작곡으로 되어 있다. - P129

윤이상이 살던 집은 최순우 옛집의 바로 맞은편에 있었다. 최순우 옛집은 성북동에서 전통 가옥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한옥으로수연산방과 쌍벽을 이룬다. 미술사학자 정양모 선생의 말씀에 의하면, - P129

박물관에서 퇴근하면 예쁜 한옥을 고르기 위해 함께 한옥을 보러 여러동네를 다니다가 결국 1976년에 최순우 선생이 이 집으로 이사하셨다고 한다.
이 집은 1930년대 성북동의 주택 붐 때 부동산 개발업자가 지은 기역자 집으로 앞마당과 뒤뜰이 나뉘어 있는 공간 구조가 맘에 들어 결정했다고 한다. 그 대신 기둥과 마루에 니스 칠한 것을 모두 벗겨내어 나무의 재질감을 다 살려내고 뒷마당엔 소나무, 아가위나무, 모과나무, 감나무, 산사나무 등 우리 산천의 친숙한 나무들을 심고, 모란과 수련 등을손수 키우시며 강진 청자가마 발굴 때 캐온 국화를 비롯해 여름 풀꽃을심어 꾸미지 않은 듯 꾸민 정겨운 정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실내에는 문갑·책장·서탁·서안·사방탁자·반닫이 등 조선시대 실내 장식을 재현하듯 배치했는데 목기들은 하나같이 단아한 사랑방 - P130

가구로 오동나무 가구를 선호했다.
뒤뜰로 통하는 사랑방 문에는 ‘오수당(午睡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는 단원 김홍도의 글씨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단원유묵첩(檀園遺墨帖)>에 쓰인 글씨를 모각한 것이다. 이 집을 보고 있으면 최순우선생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 절로 생각난다.


한국의 미술은 언제나 담담하다. 그리고 욕심이 없어서 좋다. 없으면 없는 대로의 재료, 있으면 있는 대로의 솜씨가 별로 꾸밈없이 드러난 것, 다채롭지도 수다스럽지도 않은 그다지 슬픈 것도 즐거울 것도없는 덤덤한 매무새가 한국미술의 마음씨이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학고재 1994, 14~19면) - P131

이처럼 최순우 옛집은 우리 한옥과 목가구의 멋을 은근히 보여주는데 최순우 선생 사후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것을 2002년 겨울 사단법인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서 시민 모금으로 구입해 보수했고, 재단법인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이 창립과 동시에 시민문화유산 제1호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성북동 답사에서 한옥의 참 멋을이렇게 느끼고 배우고 맛볼 수 있게 되었다. - P132

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 1916~84) 선생은 개성 출신으로 한국미술사의 아버지인 우현 고유섭 선생이 개성박물관장으로 있을 때 박물관에들어와 평생을 박물관에서 살았다. 말년에는 7년간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내다가 재직 중 돌아가신 박물관 인생이다.
최순우 선생은 미를 보는 타고난 안목과 뛰어난 미문가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신문, 잡지에 우리 미술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알리는 많은 글을 기고했다. 600여 편에 달하는 글이 『최순우전집』(전5권, 학고재 1992)에들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글을 모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는 한국미의 지남철이라고 할 만하다. 나는 이 책을 책임 맡아 편집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 P132

"평소에 누군가로부터 어떻게 하면 우리 미술과 문화재에 눈을 뜰 수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지체 없이 ‘좋은 미술품을 좋은 선생과함께 감상하며 그 선생의 눈을 빌려 내 눈을 여는 길‘이라고 대답하곤한다. 그때의 선생은 사람일 수도 있지만 책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좋은 선생, 좋은 책으로 이 책 이상이 없다는 대답까지 해오고 있다." - P132

최순우 선생의 최고 가는 명문으로는 역시 부석사무량수전」을 꼽아야겠지만 여기서는 「백자 달항아리」을 예로 들어보겠다. 최순우 선생은달항아리를 보고 있으면 잘생긴 종갓집 맏며느리를 보고 있는 듯한 흐뭇함이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폭넓은 흰 빛의 세계와 형언하기 힘든 부정형의 원이 그려주는 무심한 아름다움을 모르고서 한국미의 본바탕을 체득했다고 말할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조선백자 항아리들에 표현된 원의 어진 맛은그 흰 바탕색과 어울려 너무나 욕심이 없고 너무나 순정적이어서 마치인간이 지닌 가식 없는 어진 마음의 본바탕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 P133

최순우 선생은 인품이 고고하여 항시 주위에 많은 학자·문인 · 언론인 화가들이 모였다. 그래서 그 교류의 폭이 넓었는데 그중 빼놓을 수없는 분이 수화 김환기이다. 김환기는 작업일기를 매일 한두 마디씩 적어놓았는데 일기장 마지막에서 두 번째 날 일기에 이렇게 쓰여 있다.


1974년 7월 9일
어젯밤, 최순우 씨 꿈을 꾸다… 불란서 담배를 피우고 싶다.


그리고 수화 김환기는 보름 뒤인 7월 25일 세상을 떠나셨다. - P133

산정이 2020년 타계하면서 유족들은 많은 작품을 기증하여2021년 성북구립미술관에서 ‘화가의 사람,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장대하게 열었다.
산정은 옛 호고일당 못지않게 추사 김정희에 심취했고 목가구를 비롯한 고미술을 사랑했다. 무송재는 한옥을 품위있게 지은 것으로 이름높다. 정원에 있는 괴석은 자신의 은사이기도 한 근원 김용준의 노시산방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무송재의 한옥은 모르긴 몰라도 그의 부인인 정민자 여사의 안목이크게 반영되어 있을 것으로 믿는다. 정민자 여사는 전통 한옥에 대한 조예가 깊은 한옥연구가이자 재단법인 아름지기의 고문으로 안국동 샛골목에 있는 아름지기 한옥을 현대식으로 아름답게 리노베이션한 분이다.
산정은 서울미대 출신 화가들과 묵림회 (墨林會)를 창립하고 이를 이끌어왔는데 무송재 주위에는 묵림회 회원인 백계 정탁영, 이석 임송희,
남계 이규선 등의 집들이 모여 있어 언젠가는 나 같은 답사객이 여기를찾아와 내가 수향산방과 최순우 옛집을 말하듯 이야기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P135

그뿐 아니라 그의 소설에서는 1920년대 무성영화 시대에 소련의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S. Eisenstein)이 「전함 포템킨」에서 보여준 그 유명한 ‘몽타주기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장면 장면을 나열하는 것 같지만 그 장면들이 정반합(正反合)으로 발전하면서 이미지를 증폭시키는 서술 방법이다. 그러니까 박태원의 소설에는 전위적인 미술, 고현학이라는 학문적 시각, 영화의 몽타주기법 등 여러 요소들이 녹아 있어 내용은 세태소설이면서도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 잘 어우러져 있다.
박태원은 영화광이어서 극장 명치좌(明治座, 현 명동예술극장)에서 상연한 르네 클레르(René Clair) 감독의 유령은 서쪽으로 간다」와 「최후의억만장자」를 이상과 함께 보러 다녔다고 한다(김인혜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때」, 국립현대미술관 2021). 그래서 그의 외손자인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을 때 사람들은 외할아버지 DNA가 그렇게흘렀다고들 말하기도 했다. - P138

그런 모더니스트 박태원이 월북한 것을 두고 사람들은 의아스럽게생각했는데 전하기로는 가족들에게 (이미 월북한) 이태준을 만나러 간다고 하고 나갔다고 한다. 월북 후 박태원은 평양문학대학에서 1955년까지 교수로 재직했지만 남로당 계열이라는 이유로 숙청당하고 4년간 평안남도 강서 지방의 한 집단농장에서 강제 노동을 했다.
1960년에 다시 대학교수로 복귀해 1965년에 장편소설 『갑오농민전쟁」의 제1부와 제2부에 해당하는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를 발표했다.
그러나 강제 노동 중 겪은 영양실조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1965년에 망막염으로 실명했고, 1975년에는 전신불수가 되었다.
그럼에도 박태원은 1977년부터 갑오농민전쟁』의 마지막 제3부를 북 - P138

한에서 새로 결혼한 부인 권영희에게 근 10년간 구술로 불러주어 완성해갔다. 그러나 완간을 보지 못한 채 1986년 7월,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났고 소설은 이듬해 부인 권영희와의 공동 저작으로 발간되었다. 이것이북한의 역사소설 가운데 최고 걸작으로 손꼽는 『갑오농민전쟁』이다. - P139

이 시기 그 유명한 『님의 침묵』(1926)을 발표했다. 국문학자들은 말한다. 소월의 『진달래꽃』(1925)이 나올 때 곧바로 만해의 ‘님의 침묵이나온 것은 우리 근대문학 전개의 홍복이었다고.
1927년 민족주의 운동가들과 사회주의자들이 함께 일제에 맞서 신간회를 결성할 때 만해는 중앙집행위원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신간회는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 결국 사회주의자들의 주장대로 1931년 5월에해체되었다.
그러자 만해 선생은 1931년 6월 잡지 『불교』를 인수하고 혼신을 다해 펴냈다. 사직동 셋방 냉골에 혼자 살면서 1933년 7월 재정난으로 폐간될 때까지 108호를 펴내면서 200편이나 되는 글을 썼다(고은 『한용운 평전』, 민음사 1975).
그 무렵 만해가 당수로 있는 불교 비밀결사인 ‘만당(卍黨)‘도 해체되었다. 일제의 폭압은 날로 심해져갔다. 그때 나이 53세였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만해는 1933년 재혼을 하고 심우장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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