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넓다. 평수로 약 2억 평 (605제곱킬로미터)이나 된다(참고로 제주도는 약 6억 평). 조선왕조의 수도 한양이 왕조의 멸망 이후 근현대에도 수도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게 된 것은 한양도성 밖으로 팽창할 수 있는 넓은들판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아테네, 로마 같은 고대도시들과는사뭇 다른 지형적 이점이다. 특히 한강 남쪽의 드넓은 강남 지역으로 인구가 대이동하면서 서울의 넓이와 깊이가 크게 확장되었다.
이런 이유로 서울 사대문 밖의 역사문화 유적은 대부분 양주군·광주군·고양군·양천현 등 옛 조선시대 경기도 군현(郡縣)이 그대로 편입된것이어서 ‘서울적(的)‘이지 않은 것이 많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유네스코세계유산에 등재된 조선시대 왕릉이다. 신덕왕후의 정릉, 태종의 현릉,
순조의 인릉, 성종의 선릉, 중종의 정릉, 문정왕후의 태릉, 명종의 강릉,
경종의 의릉 등 여덟 능이 서울에 있고, 여기에 서오릉의 다섯 능과 서삼릉의 세 능 등 여덟능이 서울 근교인 경기도 고양시에, 동구릉의 아홉 능이 구리시에 있다. 이왕릉들의 답사기를 쓰자면 미상불 별도의 한 - P5

권이 될 것이다.
이에 여기서는 대표적인 예로 강남구의 선릉과 정릉을 소개했다. 특히 이 두 능은 조선 왕릉 중 임진왜란 때 일본인 ‘범릉적(犯陵賊)‘에게 도굴되는 아픔이 남아 있는 곳이어서 각별한 해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른 왕릉의 답사 때는 여기에 실린 왕릉의 기본 구조에 대한 해설이 나름의 길잡이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강남의 봉은사는 본래 한강 뚝섬 너머 경기도 광주에 있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찰로 ‘선종종찰(禪宗宗刹)‘이라는 명성을 갖고 있는 고찰이다. 강남 개발로 주변의 자연 경관을 다 잃었지만 지금도 도심 속의녹지 공간으로 시민과 외국인 관광객의 사랑을 받고 있다. - P6

특히 봉은사는 문정왕후가 보우 스님을 앞세워 불교를 중흥시킬때 승려들의 과거 시험인 승과가 치러지던 사찰이다. 이때 제1회에 서산대사 휴정, 제4회에 사명당 유정이 배출되었고 두 분이 모두 봉은사의주지를 역임했던 명찰이다. 그뿐 아니라 많은 불교 문화재가 지금도전해지고 있고 추사 김정희의 절필(絶筆)이자 명작인 <판전>이 남아 있는 곳이어서 서울의 대표적인 사찰로 삼아 답사기에 쓴 것이다.
강서구 가양동은 본래 경기도 양천현으로 지금도 양천향교와 소악루가 옛 모습을 전하고 있다. 『동의보감』의 저자인 구암 허준의 관향인 이곳에는 ‘허준박물관‘이 있고, 겸재 정선이 노년에 5년간 양천현령을 지내면서 <경교명승첩〉을 비롯한 많은 명작들을 남겨 ‘겸재정선미술관‘이세워져 있다. 우리나라의 의성(聖)인 허준과 화성(聖)인 정선의 기념관이 있으니 답사처로 빼놓을 수 없었다. 특히 이곳은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를 통해 그 옛날의 한강 풍광을 복원해볼 수 있는 아주 각별한 답사처다. - P6

성북동은 여느 유적지와 다른 근현대사 답사처다. 이곳은 근대사회로이행하는 과정에서 새로 형성된 동네로 사대문 안의 북촌, 서촌과는 또다른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본래 한양도성 밖 10리 지역은 ‘성저십리(城底十里)‘라고 해서 사람이 살지 못하게 했고, ‘선잠단‘ 등을 제외하고는 자연녹지 그대로 남겨두었다. 그러다 18세기 영조 때 둔전(屯田)이설치되면서 비로소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이때 둔전 주민들이비단 표백과 메주 생산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집 주위에 복숭아를 많이심어 이곳은 ‘북둔도화(北屯桃花)‘라는 명승의 이름을 얻었다. 조선 말기가 되면 ‘성북동별서‘ 등 많은 권세가들의 별장이 성북동 골짜기를 차지했다.
1930년대 들어 경성(서울)의 인구가 폭증하면서 일제가 택지 개발을적극 추진할 때 성북동은 신흥 주택지로 각광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들어와 살았다.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 상허 이태준의 수연산방, 근원 김용준의 노시산방, 간송 전형필의 북단장, 인곡 배정국의 승설암, 조지훈의 방우산장, 구보 박태원의 싸리울타리 초가집, 수화 김환기의 수향산방 등이 있었다. - P7

한국전쟁 이후에도 시인 김광섭, 작곡가 윤이상, 화가 김기창과 서세옥, 박물관장 최순우 등이 들어와 살면서 전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근현대 문화예술의 거리‘를 형성했다. 거기에다 백석 시인의 영원한 사랑 김자야의 요정 대원각이 법정 스님의 길상사로 다시 태어나고, 간송미술관과 함께 한국가구박물관, 우리옛돌박물관, 성북구립미술관이 들어서면서 품격 높은 문화예술의 동네가 되었다.
그런가 하면 서울 성곽 비탈진 곳으로는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이 형성한 북정마을이 있고 1970년대 삼청터널이 뚫린 이후로는 각국 대사 - P7

저들과 대저택들이 들어서 있어 한국 근현대사의 모든 것을 느낄 수있는 곳이다. 나는 여기에 살았던 문화예술인들의 자취를 따라가며 우리 근현대 예술의 향기를 담아보고자 성북동 답사기를세장에 걸쳐 실었다.

‘망우리 별곡‘은 망우리 공동묘지 답사기다. 망우리공동묘지 역시1930년대에 일제가 주택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경성 근교이태원, 미아리, 노고산, 신사동(은평구 고택골) 등에 있던 기존의 공동묘지들을 멀리이장시키기 위하여 마련한 공간이다. 1933년부터 시작되어 1973년까지40년간 4만 7,700여 기가 들어섰다. 1973년에 매장이 종료되고 이후 이장과 폐묘만 허용하면서 현재 약 7천 기의 무덤이 남아 있다. - P8

여기에는 만해 한용운, 위창 오세창, 호암 문일평, 소파방정환, 죽산조봉암, 설산 장덕수, 종두법의 지석영, 독립운동가 유상규, 소설가 계용묵, 화가 이중섭과 이인성, 조각가 권진규 시인 박인환, 가수 차중락 등많은 역사문화 인물들의 묘가 산재해 있다. 이태원 공동묘지를 이장할때 무연고 묘지의 시신을 화장하여 합동으로 모신 ‘이태원묘지 무연분묘 합장묘‘에는 유관순 열사의 넋이 들어 있기도 하다.
망우리공동묘지는 폐장된 이후 ‘망우묘지공원‘으로 명칭을 바꾸었고, 1990년대 들어서는 이곳을 역사문화 위인들을 기리는 묘원공원으로가꾸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마침내 만해 한용운 선생의 묘가 국가등록문화재 제519호로 지정되고, 독립유공자 여덟 분의 묘가 국가등록문화재 제691호(1~8)로 일괄 지정되었다. 금년(2022) 4월 방문자 센터 ‘중랑망우공간‘이 개관하면서 이름도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바꾸었다.
공동묘지라는 어두운 이미지가 역사문화공원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 - P8

다. 파리의 페르라셰즈 묘지(Cimetière du Père-Lachaise)는 작곡가 쇼팽, 소설가 발자크, 화가 쇠라, 가수 에디트 피아프 등이 묻혀 있는 명소다. 무덤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거기 그분들이 있기 때문에 찾아가는것이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망우산에 위치한 우리 망우역사문화공원도 역사인물들의 넋이 그렇게 서려 있는 귀중한 공원묘지다.
나는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이 모든 유적들을 이야기하면서 서울 답사기를 엮어갔다. - P9

이번에 서울 답사기 두 권을 펴냄으로써 서울편은 4권으로 완결되었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국내편은 총 12권이 되었다. 돌이켜보건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이 나온 때가 1993년이었으니 그로부터 장장 30년이 지나도록 끊이지 않고 이어가 이제 12권째를 펴냈는데도 아직 수많은 답사처를 남겨놓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이 답사기 시리즈를 마감할 준비를 하고 있다. 당장 여기에서 끝내지 못하는 것은 경주남산, 남도의 산사, 경상도의 가야고분 등 시리즈 전체로 보았을 때 빠져서는 안 되는 유적들을 그대로 남겨두고 마침표를 찍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다음 답사기는 ‘국토박물관 순례‘라는 제목으로 그간 다루지않은 유적들을 시대순으로 펴내고 이 시리즈를 끝맺을 계획이다. 첫 번째 꼭지는 ‘전곡리구석기시대 유적‘이고, 마지막 장은 ‘독도‘가 될 것이다. 그때 가서 독자 여러분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겠다.
2022년 10월유홍준 - P9

성북동은 한양도성 북쪽 성곽과 맞붙어 있는 산동네로 북악산(백악산)구준봉에서 발원한 성북천의 산자락에 성격을 전혀 달리하는 집들이 무리 지어 들어서 있다. 타동네 사람들은 성북동이라고 하면 번듯한 외국대사관저와 높직한 축대 위의 대저택들이 들어서 있는 부촌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드라마에서 부잣집 사모님이 전화를 걸 때 "여기는 성북동인데요"라는 대사가 나오곤 한다. 그러나 이 집들은 1970년 12월 30일,
삼청터널이 개통된 이후 양지바른 남쪽 산자락을 개발해 ‘꿩의 바다‘라는 길을 중심으로 들어선 신흥 저택들이다. 성북동에는 이곳 외에도 오랜 시간을 두고 형성되어온 묵은 동네들이 따로 있다. - P13

삼선교에서 천변길을 따라 들어오는 막힌 골짜기로 한양도성 축조 당시엔 자연 그대로의 산림녹지였다. 그러다 약 300년전, 영조시대에 둔전이 설치되면서 비로소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둔전이란 병사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주둔하는 군사제도로, 처음에는 이곳에 30여 가구의 둔전 주민들이 베와 모시를 표백하는 마전 일을 하면서 살았다.
둔전 주민들이 성북동 골짜기에 유실수로 복숭아를 많이 심어 이곳은 봄이면 복사꽃이 만발하는 꽃동네가 되었다. 장안에 이 소문이 퍼져봄철이면 많은 문인 묵객들이 유람을 오는 한양의 대표적인 명승 중 하나가 되었다. 이를 ‘마전골의 북둔도화(北屯桃花)‘라고 예찬했다.
그리고 조선 말기가 되면서 이 풍광 수려한 골짜기에 권세가들의 별장과 별들이 곳곳 들어섰다. 지금은 ‘서울 성북동 별서‘와 학교법인보인학원을 세운 이종석의 ‘일관정‘만 남아 있지만 과거에는 ‘오로정‘
등 10여 채의 별장이 있었다. - P14

그후에도 성북동은 여전히 도심과 멀지 않은 한적한 주택가여서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문화예술인들이 계속 모여들었다. 청록파시인 조지훈, 「성북동 비둘기의 시인 김광섭,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친일문학론』의 임종국, 화가 윤중식, 조각가 송영수, 한국화가 운보 김기창과 우향 박래현의 집터에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고, 영원한 박물관장인 혜곡 최순우의 ‘최순우 옛집‘, 최근(2020)에 타계한 한국화가 산정서세옥의 집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성북동은 시내와 가깝고 자연 풍광이 살아 있다는 유리한 입지를 가지고 있어 간송미술관, 한국가구박물관, 우리옛돌박물관, 변종 - P16

하미술관 같은 유수한 사립 미술관들이 들어서 있고, 백석 시인의 영원한 연인인 김자야가 자신이 운영하던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법정 스님게 부탁해 아름다운 절집으로 다시 탄생시킨 ‘길상사‘도 있다. 이리하여2013년, 성북동은 서울시 최초로 ‘역사문화지구‘로 지정되었다.
오늘날 성북천은 복개되어 삼선교에서 삼청터널로 이어지는 성북동길이 되었다. 이 대로변에 일찍부터 기사식당 쌍다리 돼지불백을 비롯해게장백반의 국화정원, 국밥집 마전터, 국시집, 누룽지백숙 등 고만고만한단품요리 맛집들이 들어섰고 근래에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양식당들이하나둘씩 생겨나면서 이곳은 마이카 시대의 유람객들이 편하게 들렀다가는 서울의 명소가 되었다. 성북동은 이처럼 근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달리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대표적인 ‘근현대 문화예술의 거리‘가 되어 우리 같은 답사객들의 발길을 부르고 있다. - P17

정조 8년(1784) 봄, 당시 잠시 벼슬에서 물러나 있었던 65세의 채제공은아들 채홍원을 데리고 벗과 친지 5~6명과 도성 안팎의 경치 좋은 곳을노닐고는 네 편의 기행문을 썼는데, 그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이 유저동기(遊北渚洞記)』라는 성북동 유람기다.


북성을 돌아 몇 리안 되어 골짜기가 입을 벌리듯 열려 있다. 여기가 이른바 북저동이라는 곳이다. 골짜기 안으로 들어서니 제단이 하나 있는데 (・・・) 여기서 춘삼월에 선장에게 제사 지낸다고 한다. 백 보쯤 더 가니 (…) 다리 아래로 여러 물길이 모이고 있어 물소리가 우렁찼다. (・・・) 복사꽃 무더기가 비단으로 장막을 친 듯 물가 이편 저편이온통 붉었다. (…)또 다리를 건너니어영둔(屯, 성북)이 나왔다. 정원과 건물이제법 넉넉해 보였다. 둔사 밖에는 작은 연못에 돌담이 둘러져 있는데(・・・) 꽃이 물에 거꾸로 비쳐 꽃 그림자가 아물거리고 줄기가 구부러져암벽과 맞닿아 활 모양으로 구부러져 있어 병풍이나 장막 같았다. (・・) - P27

혹 가다가 혹 앉아 있다가 하면서 내려다보니 촌가가 점점이 산기슭에 흩어져 있는데 대체로 복사꽃으로 울타리를 삼았다. 창호과 처마의 모서리가 언뜻언뜻 울타리 밖으로 드러나 보였다. 도성의 인사들은 고관에서 여항의 서민에 이르기까지 놀고 구경함을 시간이 모자란 듯이 열중하였다. 수레와 말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노랫소리 번갈아 일어나며 사이사이 생황과 퉁소 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채제공은 유흥객들의 시끄러운 소리를 참지 못해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 절벽에 자라는 소나무 아래에 부들자리를 펴고 나란히 앉아 성안에서 가져온 떡과 밥을 먹은 뒤 신시(오후 3~5시) 무렵 다시 - P27

성북둔으로 와서 잠을 잤다고 하며 유람의 소회를 이렇게 말했다.


나와 더불어 세 사람이 각각 시 한 편씩을 지었다. 싸늘한 산기운을머금고 석양을 마주하니 (・・・) 낮에 놀던 사람들은 돌아가고 흰 달만이 텅 빈 하늘에 홀로 떠 있었다. 연못 위에 호젓하게 앉아 있노라니 잠자는 것도 잊었다. 달은 색이고 꽃은 향일 뿐이어서 눈으로 보고 코로맡아도 무엇이 많고 적은지 알지 못했다. (・・・) 잠자리가 향기의 나라에 있는 것만 같았다. - P28

별장과 별서는혼용되지만 대개 별장은 이따금 드나드는 곳이고, 별서는 본가에서 떨어져 있는 살림집을 말한다. 그렇기에 별장은 정자를 중심으로 하고, 별서는 아름다운 정원(庭園), 정확히 말해서 원림(園林)으로 꾸며져 있다.
정원과 원림은 개념이 다르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정원과 원림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만 정원은 주택 울타리 안에서 자연을 가꾼 것이고 원림은 풍광 수려한 곳에 살림집 · 서재 · 정자 등 건물을 적절한 곳에 배치한 것이다. 자연과 인공의 관계가 정반대인 셈이다.
이처럼 조선시대에 별장·별서가 발달한 것은 우리나라의 자연 풍광이 수려하기 때문이었는데 북둔도화의 성북동에도 자연히 문인 묵객과권세가들이 경영하는 별장 별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유득공(柳得恭)의 ‘북 비롯해 ‘오로‘ ‘성북정‘ ‘백운정사‘ 등초당‘을이 이곳에 있었다. - P29

성북동 삼거리 선잠단에서 길상사로 올라가는 선로에 위치한 서울성북동 별서는 약 4,360평(주변 경관을 포함하면 약 3만 평) 규모로 가파른 산비탈에 자리하고 있다. 산에서 내려오는 두 줄기 급한 물살이 하나로 합쳐지는 골짜기로 초입 벼랑에는 ‘쌍류동천(雙流洞天)‘이라는 글자가 굳센 글씨체로 크게 새겨져 있다.
여기서 계류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청산일조‘(靑山壹條, 푸른 산한 줄기)라는 멋진 전서체의 암각 글씨가 새겨져 있고 이내 영벽지(影 - P32

池)라는 아름다운 인공 연못이 나온다. 영벽지란 푸른빛이 비치는 연못이라는 뜻이다. 계곡을 원림으로 경영한 이별서의 핵심 공간으로 모든건조물이 여기를 중심으로 하여 배치되어 있다. 보길도 원림의 세연정,
소쇄원 계곡의 광풍에 해당하는 곳이다.
영벽지 서쪽으로는 연못을 넓게 조망할 수 있는 높은 곳에 낮은 기와돌담으로 감싸인 사랑채와 안채가 있고, 동쪽의 집채만 한 바위 위로는원림 위쪽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 있다. 그리고 맨 위쪽에는 송석정(石亭)이라는 정면 7칸, 측면2칸의 제법 큰 누각형 건물이 있다. 이것이 서울 성북동 별서의 기본 구조다.
영벽지에는 아담한 초서체로 ‘영벽지(影池)‘라고 깊게 새겨져 있고그 아래에 단정한 해서체로 다음과 같은 글귀가 얕게 새겨져 있다. - P33

장빙가는 고드름집이라는 뜻인데 그 옆에는 추사의 또 다른 호인 ‘완당(堂)‘이라는 낙관이 새겨져 있어 김정희의 글씨임을 말해주고 있다. 뜻도 그렇고 추사체의 파격미를 보여주는 멋진 글씨인데 이것이 추사 당년 그의 글씨인지, 후대에 그의 글씨를 빌려와 새긴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장병가를 장외가外家로 보는 견해도 있다).
영벽지에는 용두가산(龍頭假山)이라는 인공 조산이 있으며 주위에는수령이 200~300년 되는 느티나무·소나무·참나무·단풍나무. 다래나무.엄나무·말채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어 철마다 다른 빛으로 그윽한 풍광을 자아낸다. 봄철 신록이연두빛으로 피어날 때도 아름답지만특히 늦가을 단풍잎들이 영벽지 물 위에 수북이 쌓여 있을 때, 그리고얼음장 위에 흰 눈이 쌓이고 벼랑에 고드름이 달려 있을 때는 가히 환상적이다. - P35

망국의 왕손으로서 수난받은 일생이었으나, 그는 끝까지 일제에 굴하지 않은 기개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의친왕 시절 성북동 별서의 일은별로 알려진 것이 없고 『동아일보』 1927년 12월 23일자에는 ‘이강공 별저 화재‘라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20일 오후 12시 경에 시외 숭인면 성북리 이강공 전하 별저에 불이나서 오전 1시까지에 안채 열네 간이 전소하고 부속 건물 한 채가 반소하였는데 원인은 온돌불을 너무 지나친 것이라 하며 손해는 건물2,000원에 가구 100원, 합이 2,100원이라더라. - P39

이외에도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 백양당 출판사 사장인 인곡 배정국의 ‘승설암‘, 근원 김용준의 ‘노시산방‘, 구보 박태원의 싸리울타리 초가집 등등이 뒤이어 들어왔으니 성북동은 과연 우리나라 근대문학의 산실로 전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문예의 향기와 인문정신이 살아 있는 동네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곳으로 유람도 아니고, 피크닉도 아니고, 답사를 떠난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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