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너무 머리가 좋아서 탈이야.˝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서문

나는 이 책에 실린 여성들이 생전에 들었던 찬사, 즉 예리함을키워드로 삼아 그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그들 각자가 지닌 재능은 서로 달랐으나, 잊을 수 없는 글을쓰는 재주를 지녔다는 점은 그들 모두의 공통점이었다. 도러시파커가 자신의 삶에서 느낀 부조리함을 신랄하게 돌아본 글을 쓰지않았다면, 세상은 지금과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단 한 번의 여행을다룬 1인칭 글 속에 세상의 역사 절반을 쓸어담을 수 있었던 리베카웨스트의 능력도 마찬가지다. 전체주의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생각,
트롤 무리 속에 떨어진 공주의 기묘한 의식을 주제로 삼은 메리매카시의 소설, 해석에 대한 수전 손택의 생각, 영화 제작자들에 대한폴린 케일의 정력적인 비평,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노라 에프런의회의적 시각, 권력을 쥔 사람들의 결점을 나열한 레나타 애들러의 글,
정신분석학과 저널리즘의 위험과 보람을 돌아본 재닛 맬컴의 글 또한그렇다. - P9

개인적인 성공으로 인해 그들이 ‘페미니즘‘의 집단적인정치학과 긴장 관계에 놓인 적도 많았다. 이 책에 실린 여성들 중에는페미니스트를 자처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러나활동가로 일하는 것에 만족감을 느낀 사람은 사실상 한 명도 없었다.
활동가에 가장 근접했던 리베카 웨스트도 결국은 여성참정권운동가들이 감탄스러울 만큼 맹렬하면서도 동시에 용서할 수 없을만큼 숙녀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택은 페미니즘을 변호하는글을 썼으나, 곧 돌아서서 에이드리언 리치를 향해 노호를 내질렀다.
페미니즘 운동이 외부의 도전을 받았을 때 드러내는 ‘어리석음‘을지적한 것이다. 심지어 노라 에프런도 1972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조직을 갖추려는 여성들의 노력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고백한 적이있다. - P10

이 여성들 각자의 전기가 모두 이미 나와 있어서나는 게걸스레 그 책들을 읽었다. 하지만 전기가 으레 그렇듯이,
이 책들은 주인공으로 삼은 여성 한 사람만을 별개로 분리해서살펴보고 있었다. 내 눈에는 그들 사이의 연결점이 보이는 것 같은데,
그들의 전기에는 그 점이 빠져 있었다. 미국문학의 발전을 보여주는연대표에서는 보통 남성 소설가들의 이름이 이정표 역할을 한다.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 로스와 벨로와 샐린저 같은 작가들. 이런연대표에서 동시대의 여성 문필가들 또한 기억할 가치가 있는 작업을했다는 사실은 별로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이보다 학문적이고
‘지적인 역사‘에서도, 보통은 남자들이 전체를 지배했다고 여겨진다.
확실히 20세기 중반의 이른바 뉴욕 지식인들은 대개 남성 집단으로표현된다. 그러나 내 조사 결과는 달랐다. 단순히 수적인 측면에서남성이 여성보다 많았을 수는 있다. 그러나 기억할 만한 작품, 즉당대를 규정하는 작품의 생산이라는 중요한 측면에서, 여성들은남성에게 뒤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능가한 적도 많았다. - P11

아무래도 당시에는 유난히 똑똑하고, 빼어나고, 예리한 여성에게항상 찬사만 쏟아진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 이유인 것 같다는 생각을떨칠 수가 없다. 당시 사람들은 이 여성들의 신랄한 말에 못되게 굴때가 더 많았다. 브로드웨이의 제작자들은 연극비평가의 자리를빼앗아버릴 만큼 파커를 싫어했다. 파티전 리뷰에서 일하던 메리매카시의 친구들은 그녀가 자신들을 주제로 쓴 패러디를 무시하면서,
그녀가 오만하고 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폴린 케일은 동시대의남성 영화인들에게서 진지함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사실그녀는 지금도 같은 비판을 받고 있다. 존 디디언이 캘리포니아중부에 대해 쓴 유명한 에세이 황금 꿈을 꾸는 사람들을발표했을 때, 독자들은 가차 없는 편지를 보내왔다. 언론인들이취재 대상의 허영심을 이용한다고 재닛 맬컴이 지적했을 때는 신문칼럼니스트들이 나서서 언론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그녀에게 창피를주었다. - P12

이 책에 실린 여성들이 항상 옳았던 것은 아니다. 그들이인구통계적으로 완벽한 표본인 것도 아니다. 이 여성들은 백인 중산층출신이라는 비슷한 배경을 갖고 있다. 유대인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그들도 각자의 버릇, 선입관, 편견의 산물이다.
만약 세상이 지금보다 더 완벽했다면, 조라 닐허스턴 같은 흑인작가가 이 집단의 일부로서 더 널리 인정받았겠지만 지금은 인종차별때문에 그녀의 작품이 이 집단의 가장자리에만 머물고 있다.
그렇다 해도 이 여성들은 20세기의 훌륭한 논쟁들에 치열하게참여했다. 그것이 이 책의 요점이다. 그들은 작품만으로도 존재를인정받기에 충분하다.
내게 또 하나의 동기가 있었음을 여기서 자백해야겠다. 이두 번째 동기로 인해 나는 이 여성들에 대해 다양한 의문을 갖고조사해보게 되었다. 특정한 포부를 지닌 젊은 여성 독자라면,
이 여성들의 이야기를 아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세상구석구석에 성차별이 배어 있다 해도, 그것을 뚫고 나아가는 길이 - P13

있음을 아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다.
따라서 내가 이 책에서 이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방해를 받기도하고 도움을 받기도 하면서, 실수를 저지른 적도 있지만 실수가전부가 아닌 인간으로서 그토록 우아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며결코 잊을 수 없는 존재가 될 수 있었던 원인이 무엇인지 의문을 갖고조사해본 이유는 딱 하나뿐이다. 페미니즘 이후의 시대인 지금도우리에게는 이런 여성들이 더 필요하다는 것. - P14


"파커는
펜을 망치처럼 휘둘렀다."

한 시대를 이끈 별이었던 도러시 파커는 열아홉 살 때부터 일을시작했다. 처음부터 그녀의 가정형편이 그렇게 어려웠던 것은 아니다.
1893년에 그녀가 태어났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상당히 부유한모피 상인이었다. 아버지의 성은 로스차일드였는데, 파커는 나중에인터뷰를 할 때마다 유명한 은행가인 그로스차일드 집안이 아니라고밝히곤 했다. 그래도 어쨌든 뉴욕의 점잖은 유대인 가정이었던 그녀의집은 저지쇼어에서 휴가를 즐기고, 맨해튼 어퍼웨스트사이드에커다란 아파트를 한 채 가지고 있을 만큼 경제적으로 풍족했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가 1913년 겨울에 세상을 떠났다. 첫 아내에이어 재혼한 아내도 세상을 떠나고, 형제까지 타이타닉 호와 함께바닷속으로 사라져버리면서 상심한 탓이었다. 그는 자녀들에게 거의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 P19

정확히 언제부터 시를쓰겠다는 생각을 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어쨌든 파커는 어렸을때부터 시를 썼다. 그녀는 기록을 꼼꼼히 남기는 성격이 아니었고,
그녀의 원고도 거의 남은 것이 없다. 파커가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쓴 편지 몇 통을 그녀의 전기 작가가 어렵게 손에 넣은 적이 있는데,
거기에 이미 작가의 싹이 드러나 있었다. "글씨가 위로 솟아오르는모양이면, 희망적인 성격이래요." 그녀는 아버지에게 쓴 편지에서자신의 필체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러고는 나중에 그녀 특유의방식이 된, 분위기를 확 꺼뜨리는 말을 덧붙였다. "제가 그런 것같아요.….5재능도 때로는 일종의 우연일 수 있다. 재능이 어떤 사람을선택해서, 그 사람 본인은 한 번도 꿈꾼 적이 없는 삶을 마련해주는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도러시 파커가 작가가 되는 데 한 손을 거든 우연은 딱 이것 하나뿐이었다. - P22

그녀는 계속 발전하면서 강렬한 문장을 더 많이 만들어내고, 자신의과녁을 더 정밀하게 타격했다. 그녀의 재능은 처음부터 분명히 드러나있었지만, 솜씨를 갈고닦아 발전시키는 데는 그만큼 시간이 필요했다.
크라운인실드의 감탄과 관심이라는 자극 또한 그녀의 발전에 반드시필요한 요소였던 것 같다. 일을 시작하고 몇 해 동안 파커는 그 어느때보다 많은 글을 쏟아냈다. 스스로 길을 개척하는 삶이 그녀에게는잘 맞았다. 그래서 그녀는 1916년 봄에 에드윈 폰드 파커 2세와결혼한 뒤에도 자신의 힘으로 살아갔다.
그녀에게 파커라는 성을 준 남자는 코네티컷의 훌륭한 가문에서태어난 금발의 젊은 주식중개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경우와마찬가지로, 그의 가문 또한 알려진 것만큼 부유하지는 않았다.
에디라고 불리던 그는 자신의 목소리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눈을 통해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그는 처음부터 술을 즐겨 마시는 미식가였다.
장차 그의 신부가 된 파커보다 훨씬 더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도러시는 절대 금주가에 가까웠다. 그러나 결혼생활을 하면서 에디가그녀를 진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 P30

그녀의 시는 그런 면에서 많은 시련을 겪었다. 미국에서 경묘시의인기가 점점 줄어들다가 1930년대에는 완전히 사라져버렸기때문이다. 지금은 이런 시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 별로 없다.
진부하고, 지나치게 장식적으로 보이는 탓이다. 파커 역시시에서 주로 로맨스를 주제로 다뤘는데, 이로 인해 감상적이라는비판을 받았다. 파커는 이 비판을 스스로 받아들여, 자신의 시가무가치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주의 깊게 읽어보면,
그녀의 주위 사람들을 사로잡은 그 빛을 시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녀가 내버리다시피 한 시에도 강렬한 구석이 있다. 1922년에 쓴「신여성」(The Flapper)이 한 예다.

그녀의 소녀다움이 소란을 일으키고
그녀의 태도가 소동을 일으킬지 몰라도
그녀는 해롭지 않아
잠수함만큼은  - P38

그래도 파커와 스콧 피츠제럴드는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친구로 지냈다. 두 사람은 너무나 비슷했다. 거의 언제나 술에취해 있고, 글이 제대로 써지지 않아 애를 먹는다는 점이 그랬다.
나중에는 피츠제럴드도 자신의 초기 작품이 지닌 약점과 재즈시대의 방종 속에 깃든 공허함에 대한 파커의 의견에 동의하게되었다.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를 발표한 1925년무렵에 피츠제럴드는 더 이상 무심함을 숭배하지 않았다. 신여성과부잣집 자식들은 이미 각자의 장미를 좀먹는 벌레 취급을 받았다.
그래도 사람들은 반짝이는 것이 모두 모조품에 불과한 현실보다는신기루처럼 아른거리는 개츠비의 웨스트 에그 같은 곳에 훨씬 더 매력을 느꼈다. - P41

파커와 달리 피츠제럴드는 마흔네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떠났다. 과음에 결핵 발병이 겹쳐 1940년에 그의 목숨을 앗아가고말았다. 파커는 그보다 거의 30년을 더 살았다. 그녀는 관 속에 누워있는 그를 보고 『위대한 개츠비』의 한 구절을 그에게 인용해주었다.
"불쌍한 개자식." 그러나 아무도 이 말의 출처를 몰랐다. 1920년대말에 파커는 자신의 구축된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모든신문, 모든 잡지에 그녀의 글이 실렸고, 모든 사람이 그녀의 시나신랄한 말을 싣고 싶어 했다. 1927년에 파커는 『사필귀정(EnoughRope)이라는 시집을 발표했다.이 책이 곧바로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그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놀라운 일이었다. 그녀의 시가 워낙인기를 얻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파티에서 재치 있는 사람으로 깊은인상을 남기려고 흔히 그녀의 시를 인용해서 말하곤 했다. "거의 모든사람이 그녀의 시를 적어도 10여 편 정도 인용하거나, 재인용하거나,
잘못 인용하고 있다." 1928년에 『시』 (Poetry)에 글을 기고한 어떤비평가가 뚱하니 늘어놓은 말이다. "마작게임과 십자말풀이의 자리를그녀의 시가 대신 차지해버린 것 같다." - P43

‘세련된‘(sophisticate)이라는 단어만큼 끔찍한 함의를 지닌단어는 없을 겁니다. 이 단어는 ‘사교계 명사‘ (socialite)와거의 같은 반열이죠. 사전에 나와 있는 뜻도 전혀 매력적이지않습니다. 동사로서 이 단어의 뜻은 현혹시키다, 순수함을빼앗다, 인위적으로 만들다, 자기 뜻에 맞춰 함부로 고치다,
불순물을 섞다 등입니다. 이정도만 해도 충분하다 싶겠지만,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요즘은 이 단어가 ‘지식인이면서 감정적인고립주의자가 되다,‘ ‘동료와 세상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사람들을 조롱하다,‘ ‘항상 아래만 보고 주위를 둘러보지 않다‘
‘재미없는 일에만 웃음을 터뜨리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것같습니다.  - P57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말이었다. ‘세련됨‘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겉모습에만 집착한다는 결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파커의 말과글은 결코 덧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지금도 파커의시 이력서」를 주고받고, A. A. 밀른과 캐서린 헵번에 대한 파커의비판을 인용한다. 파커가 작가로서 쥐어짜이고 있다는 생각을 한 지오래이던 1957년에 한 말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
"나는 돈을 좀 벌고 싶다. 좋은 글도 쓰고 싶다. 이 둘을 다 해내는것은 가능한 일이다. 정말로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것이지나친 바람이라면, 나는 돈을 버는 쪽을 택할 것 같다."그러나 할리우드와 정치활동 이후의 파커에 대해 그녀를 아는사람들은 거의 모두 그녀가 실패했다고 보았던 것 같다. 그녀가작업했던 영화들은 그녀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되었고,
그녀가 참여한 정치 슬로건은 모든 것을 우스갯거리로 삼는 데 특별한솜씨를 지닌 사람의 작품으로 보기에는 치명적일 만큼 진지하게보였다. 훌륭한 단편작가가 되겠다는 그녀의 포부도 시들해진 것 같았다. - P57

그러나 자신을 벌하는 독백을 늘어놓은 파커 본인과 달리, 다른사람들은 좀 더 쉽게 그녀에게 찬사를 보냈다. 리베카 웨스트라는작가는 1928년에 러시아의 신비주의자 라스푸틴을 다룬, 엄청나게엉뚱한 신간서적에 대한 서평에서 틀림없이 미국의 유머작가가 쓴것 같다고 말했다. 그 책에서 자신이 "최고의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도러시 파커의 독특한 천재성의 흔적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59웨스트는 파커가 몇 달 전 『뉴요커」에 발표한 단편소설 작은 것하나」(Just a Little One)를 특히 좋아했다. 어떤여자가 술집에서술에 완전히 취한 나머지 영업용 마차의 말 한마리를 자기 집으로데려가 함께 사는 꿈을 꾼다는 내용의 단편이다. 웨스트는 남자로인한 절망과 그 절망을 글로 옮기는 법을 조금 아는 사람이었다. - P58


"그녀의 혀는 예리하고,
그녀는 순진함 때문에
고생하지 않는다."

리베카 웨스트는 당대에 대단한 찬사를 받은 여성 작가라는 점에서영국판 파커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젊었을 때 웨스트는 페이비언사회주의에 심취했다. 블룸즈베리 그룹의 버지니아 울프와 바네사벨 자매처럼 예술가와 작가의 실험적인 정신에도 푹 빠져 있었다.
웨스트는 처음부터 자기 세계의 ‘진지한 사람들‘ 사이에서 편안히자리를 잡고 있었다. 파커는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확실한소속감이었다. 따라서 웨스트는 자신감 부족으로 고생한 적이 별로없었다. 오히려 자신감 때문에 아슬아슬한 수준까지 포부를 키운적이 많았다.
웨스트는 『자유여성』(Freewoman)이라는 회보에서 소설가 H.
G. 웰스를 공격함으로써 그에게 자신을 소개하며 이름을 알렸다. 이일화는 아마도 훗날 연인이 된 사람들이 한쪽의 지독하기 짝이 없는서평 때문에 서로 만나게 된 유일한 사례일 것이다. 아주 젊은 나이의웨스트는 지금은 잊힌 웰스의 소설 『결혼』(Marriage)을 읽고 마음에들지 않았다. 웰스는 당시 가장 존경받는 작가 중 한 명이었지만,
웨스트는 그런 것에 겁먹지 않았다. "물론 그는 소설가들 사이에서깐깐한 노처녀 같은 사람이다." 웨스트는 성적인 급진주의를표방하는 웰스의 자랑스러운 주장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겨냥했다. - P63

따라서 웨스트가 여성참정권 운동에 매력을 느낀 것은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이 운동이 중요하며, 자신의 경험과도부합한다고 보았다. 운동가들이 소리를 높여 거칠게 투쟁하는 모습도매력적이었다. 웨스트는 두 자매와 항상 말다툼을 벌이며 투사로자라났다. 그녀의 타고난 카리스마 또한 정치활동에 유용했다.
웨스트는 당시 여성참정권 운동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던에멀라인 팽크허스트와 그녀의 딸 크리스타벨이 펼치는 주장에금방 공감했다. 그들이 조직한 여성사회정치연맹은 이미 여성참정권운동의 기수가 되어 있었다. 팽크허스트 모녀는 당시의 기준으로 최고유명인사였다. "영국 전역을 뒤흔든 십자군: 예쁜 아가씨 사령관."
미국 신문에 실린 대표적인 헤드라인 중 하나다. "크리스타벨팽크허스트, 젊음과 미모와 부를 지닌 그녀가 여성참정권을 위한운동의 창시자이자 최고의 기획자." "
웨스트는 자주 두 사람과 함께 시위행진에 나섰으며, 그들의활동에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그들의 세계에 잘 적응하지는 못했다.
팽크허스트 모녀, 특히 크리스타벨은 여성참정권을 열정적이고사납게 외쳐대는 선동가였다. 웨스트는 에멀라인의 비슷한 부분에자주 찬사를 보냈다. - P69

웨스트는 서슴지 않고 글에 감정을 드러낸 여성으로 유명했다.
그녀는 글에서 말을 얼버무린 적이 별로 없으며, 언제나 일인칭을이용해서 독자가 주관적인 세계에 발을 들였음을 일깨워주었다.
그러나 웨스트의 한 친구는 『뉴요커』의 기자에게 그녀가 "다른사람들에 비해 피부가 몇 층이나 더 얇은, 일종의 심리적 혈우병환자" 10였다고 말했다. 그녀의 글은 그녀가 생각하는 것, 원하는 것,
느끼는 것과 매우 직접적으로 닿아 있었다. 그녀는 파커처럼 자신을비난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보호했다. 자신의 성격을압도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을 쓴 것이다. 그녀의 글은 가끔 경제적인궁핍이 구두점처럼 드러나는, 길고 긴 한 문장처럼 읽힌다.  - P71


요즘 영국에는 비평이 존재하지 않는다. 미약한 환호의 합창,
경찰이 그 책을 억압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잠잠해지지 않는 드높은 찬사, 열정으로 달아오르지도 않고 분노로 역전되는 법도없는 온화한 상냥함이 있을 뿐이다. 


그녀가 부족하다고 질타하는 바로 이런 비평으로 성공의 길을걸어왔음을 감안할 때, 이 글은 어쩌면 현실을 과장한 것일 수도있었다. 여기서 웨스트가 추상적인 표현으로 도피한 것은 다소예외적이다. 보통 그녀는 개인적인 일화를 기반으로 글을 쓰는편인데, 이 글에는 그런 일화가 전혀 없었다. 그녀가 ‘가혹한 비판‘을요구한 것이 당시 자신이 처한 상황 때문에 느끼고 있던 좌절감에서기인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녀는 꼼짝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려있으면서도, 그 상황에 대한 글을 쓸 수 없었다. 결혼하지 않고아이를 낳는 일이 금기시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문제 대신
‘영국의 비평‘을 언급한 것은 자신의 문제를 직접 언급하지 않고도자신이 맞닥뜨린 진부한 문제를 다루는 방법이었다. "자신의 정신을잊어버린다면, 확실히 우리는 안전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썼다. 이 말 자체도 진실이지만, 또한 그녀의 상황에 비춰봤을 때스스로를 일깨우는 역할을 하는 말이기도 했다. - P78

깔끔하게 헤어질 기회를 제공해준 것은 미국 순회강연이었다.
웨스트는 1923년 10월에 앤서니를 어머니에게 맡기고 미국으로떠났다. 미국에서 그녀는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결혼하지 않은여성으로서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로이 할 수 있는 상황도 그녀에게아주 잘 맞았다. 적어도 대중적인 이미지로는 그랬다. 미국 언론은확실히 그녀에게 반한 상태였다. 그녀는 독립적인 정신을 지닌 새로운여성의 화신이었다. 게다가 그런 여성들과 관련된 질문에 그녀가아주 기꺼이 대답해준다는 점이 기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예를 들어, 뉴욕 타임스』는 젊은 여성 소설가들이 갑자기 급격히 오늘어나는 듯한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웨스트에게 물었다. "전쟁때문일까요?" 웨스트는 고개를 저었다.
- P84

웨스트는 또한,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나이를 먹으면서자신이 더 나아진 것 같다고 덧붙이면서, 버지니아 울프, G. B. 스턴,
캐서린 맨스필드를 예로 들었다. "여자가 서른 살이 넘으면, 보다시피,
자기만의 삶을 살게 된다." 웨스트는 이렇게 단언했다. "인생이모종의 의미를 지니게 되고, 여자 본인도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된다."웨스트는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말을할 때 그녀의 나이가 이미 서른 살이었으며, 그녀는 확실히 양지에서햇빛을 받는 위치에 있었다. 미국에서 그녀가 가는 곳마다 엄청난대중의 관심이 뒤따랐다. 파커처럼 그녀는 유명 작가였다. 미국전역의 여성클럽에서 그녀의 강연이 열렸고, 사교 약속도 넘칠 만큼가득 잡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미국이 보여주는 관심만큼 미국을믿지 않았다. 미국 여행에 대해 『뉴 리퍼블릭』에 4회에 걸쳐 기고한글에서 그녀는 뉴욕의 "부유함은 눈이 부시지만 "단조로움 때문에눈이 피로해지기도" 한다고 썼다.  - P85

웨스트는 『뉴요커』의 특파원으로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도취재했다. 그런데 이 재판에서 그녀는 다소 까다로운 이슈에직면했다. 나치를 딱히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펜은그들을 궁극적으로 그리 위협적이지 않은 존재로 그려냈다.
총통대리였던 루돌프 헤스를 보고 웨스트는 그가 "미쳤음이 너무나분명히 드러나서 그를 재판정에 세운 것이 부끄러운 일처럼 보일정도였다" 고 썼다. 히틀러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헤르만 괴링에대해서는 "아주 부드러운 사람"이라고 썼다. 나중에 한나 아렌트가내놓아 유명해진 주장, 즉 나치의 관리들 중 일부가 전통적인 의미의악마는 아니라는 주장을 웨스트가 펼친 것은 아니다. 그녀는 그들이분명히 죄를 저질렀다고 확신했으며, 오로지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상당히 분명하게표현했다. - P98

나치의 만행은 20세기 후반에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중요한이슈가 되었다. 그러나 웨스트는 종전 직후에 쓴 이런 글에서독일인들이 나치의 만행에 대해 느끼는 집단적인 죄책감이라는문제에 별로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도 그것이벌을 받아 마땅한 행위라는 사실 외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나치가 전쟁 중에 저지른 전체적인 행위에 대해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믿고, "그들이 유대인에게 한 짓을 나치의 범죄라는 일반적인 범주에뭉뚱그려서 포함시켰을 뿐이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심각한 주의태만이었다. 여기에 부분적으로영향을 미친 것은, 재판이 지루하게 느릿느릿 이어지는 동안 웨스트가소련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나치즘과 공산주의사상 사이에 비슷한 부분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조이스 재판을 다룬글에서 이미 경고를 울렸다. - P99

말년에 웨스트는 이처럼 자신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것을절감했다.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그녀는 이렇게 썼다. "여성 작가가반드시 해야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첫째, 너무 착하게 굴면 안된다. 둘째, 요절해야 한다. 캐서린 맨스필드가 우리 모두에게 어떤존재인지 생각해보세요. 셋째, 버지니아 울프처럼 자살한다. 계속글을 쓰는 것, 그것도 좋은 글을 쓰는 것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일입니다." 웨스트는 죽는 날까지 화가 같고 수다를 떠는 것 같은특유의 문체로 글을 썼다. 그녀의 책은 여전히 찬사를 받았으며,
그녀는 지식인 토크쇼에 자주 게스트로 출연했다. 국가적인 중대한문제의 전문가로 대접받는 소수의 여성 중 한 명이기도 했다. 하지만실수를 저지른 적도 있었다. 반공주의에 대한 집착도 실수 중하나였다. - P100

당시의 백인 지식인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웨스트도 이 사건에경악했다. 그녀는 깊숙이 웅크리고 있던 인종차별주의가 이 사건을낳았다고 보았다. "그 남자들이 누구든, 윌리얼의 피부색이 그들의행동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척하는 것은 당연히 말도 안 되는짓이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그러나 자신에게 분명히 느껴지는 이사건의 뉘앙스를 전달하는 데에는 애를 먹었다. 그녀는 흑인들의 고통앞에서 백인들이 벌을 받지 않고 넘어가는 문화가 있는 것 같지는않다고 썼다. 웨스트가 보기에 피고들은 유죄판결을 받을 것이라고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웨스트는 얼이 "백인들에 대해 커다란적대감을 갖고 있었다"고 진단했다. 얼에게 린치를 가한 백인남자들이 그 일을 즐긴 것 같지는 않다는 말도 썼다. 웨스트는 피를보고 싶다는 욕망보다는 죽은 택시기사에 대한 우정에서 기인한분노가 그들을 움직였다고 말했다. 그녀가 길게 인용한 흑인은 딱 한사람뿐인데, 이 흑인은 "흑인 차별정책이 연장되기를 호소" 했다. - P106

잡았다.
그녀에게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해준 글 유색인종인 나에 대한느낌」(How It Feels to Be Colored Me)을 발표한 것은 1928년이었다.
허스턴은 어린 나이로 이턴빌을 떠날 때까지 자신이 ‘유색인종‘임을알지 못했다고 썼다. 또한 자신이 유색인종이라는 사실이 비극을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다른 흑인들이 인종 때문에 느끼는슬픔에도 동참하지 못했다. "내 칼을 날카롭게 다듬느라 너무 바빠서그럴 틈이 없었다." 그러나 백인들의 세상에서 20년을 살다 보니
"순백색 환경 속에 던져졌을 때 누구보다 피부색을 느끼게 되었다.
당시는 물론이고 그 뒤로도 오랫동안 미국의 지식인 세계는 몹시하얀색이었다. 자유롭다는 북부에서조차 신문과 잡지가 사실상인종을 기준으로 분리되어 있을 정도였다. 주요 백인 신문들이허스턴의 작품을 다뤄주었지만(『뉴욕 타임스』는 그녀의 모든 저서에대해 서평을 실었다), 그녀를 흑인 작가로 보는 시각이 무엇보다 앞에자리잡고 있었다. 흑인 작가들이 『뉴 리퍼블릭이나 『뉴요커』에서원고청탁을 받는 일도 없었다.  - P108

이 글이 허스턴의 글 중에서 최고의 작품은 아니지만, 확실히활기가 넘친다. 그녀가 다른 환경에서 다른 삶을 살았다면, 나중에뉴 저널리즘이라고 불리게 된 풍조, 즉 사실과 감정과 개인적인경험을 모두 하나로 융합하는 풍조의 특징을 지닌 재판기사를 써낼수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웨스트가 제대로 다루지 못한그린빌 재판 같은 사건에도 허스턴이 같은 방식을 적용할 수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피츠버그 리어는 그녀에게 주기로 했던 원고료800달러를 지불하지 않았다. 8년 뒤인 1961년에 익명의 존재로 5세상을 떠난 그녀가 다시 살아난 것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다.
허스턴의 글이 다시 널리 읽히게 된 데에는 흑인 페미니스트 작가인앨리스 워커의 공이 크다. 그러나 오늘날 허스턴은 언론인보다소설가로 여겨지고 있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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