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진이정

  시인이여,

  토씨 하나

  찾아 천지를 돈다

  시인이 먹는 밥, 비웃지 마라

  병이 나으면

  시인도 사라지리라

     시집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중에서














  일부러 산수유꽃을 보러 산수유 마을에 간 적이 있다. 마을 골목이나 언덕에나 나이 먹은 산수유들이 무리 지어 넘실넘실 피어서 서로 눈 맞춤하고 있었다. 하필 눈이 폴폴 날리고 지리산은 눈을 하얗게이고 있는 이른 봄날이었다. 그날, 비로소 알았다. 산수유의 노랑은 겸손한 색이었다. 그 무엇이든 그 누구이든 어우러지게 만드는 색이었다. 마음 안으로 스며드는 색이었다. 그 후로 겸손한 노랑은 끌림이다. 산수유꽃 빛깔을 닮은 얇은 시집이 왔다. 표지색부터 겸손해서 더욱 처연한 슬픔이 가득한 故진이정시인의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가 복간되었다. 이 시집을 끌고 다니는 며칠 동안 시인을 꿈꾸는 친구의 따끈따끈한 산문집과 동행했다.

  [답장이 없는 삶이라도 (김해서 산문) 세미콜론(2022)]이다.

  세상은 마침 모든 색상들이 절정을 이루는 늦가을이다. 즐겨듣는 라디오에서는 아침마다 "가을은 모든 잎이 꽃이 되는 두 번째 봄이다- 알베르 카뮈-"의 말을 들려주고 있었다. 나날이 진해지는 은행잎의 노랑이, 세월호의 노랑과 우리들의 대통령의 노랑과 겹쳐지고 이태원과 더해져서 아득하게 먹먹한 노랑이 되고 있었다. 파랑이 약간 입혀진 산수유의 노랑이 올 시월의 "두 번째 봄"을 서럽게, 부끄럽게 만들고 있었다. 무책임한 어른의 일원이 되어버린 것이 한없이 부끄럽다. 작아진다.

  책 얘기로 돌아가서 솔직히 한 것도 없이 나이만 먹은 탓인지 젊은 작가들의 책은 조심스럽다. 소설들은 더러 읽기도 하고 그것보다 더 더러 뭐라고 끄적거리기도 하지만 산문집에는 어떤 덧붙이기도 주저한다. 사실 덧붙일 말이 궁색하다. 단지 나이만 더 먹었다 뿐이지 이 작가들의 성찰이나 시선은 한참 윗길이어서 늙은 나를 서늘하게 만든다. 새삼 내 나이를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 책 또한 마찬가지였다. 읽는 동안은 나이를 잊었고 읽고 나서는 내 나이가 부끄럽다. 이래저래 창피하고 부끄러운 11월을 맞았다.

  "사실, 이 작가를 안다. 아니 이 작가의 아빠를 안다." 이렇게 적고 보니 과연 안다고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모르는 쪽이 더 정확할 수도 있겠다. 블로그의 오랜 이웃인데 어렸을 때 '토비'라 불리던 이 친구의 동시와 근황을 가끔 올리셨다. 하여 더욱 조심스럽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일어나지 않도록 만드는 것.

  비키지 않는 것.

  나는 내 자리를 알아요.


  책은 저렇게 시작된다.

  저 문장들로 나는 이 책을 읽고 뭐라고 뭐라고 쓰게 될 것임을 예감했다. "내 자리를 알"아도 "비키지 않는 것"의 용기를 아는 작가에게는 어떤 말들도, 어떤 후기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어야 했다. 이 책은 이태원과 무관한데도 결국은 무관하지 않다. 저 문장이 콕 박혀온다. 이것이 글의 힘은 아닐까 생각했다.













좋아하는 것을 계속 좋아하면서도 세상에 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만 했다. 시를 흠모하여 시로 다져진 내 감각이 무엇으로든 세상에 쓰일 수 있음을, 그것으로도 이 한 몸을 지탱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시들어가는 녀석에게.

에세이, 인터뷰를 비롯한 잡지 기사, 주얼리나 향기 제품 설명글, 책 큐레이션 등. 시로 터득한 나만의 화법과 관점으로 일을 해나갔고, 차츰 나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렇게 살고도 여태 굶어 죽지 않은 이유다. 사부작사부작 다양한 작업을 했고, 대단히 벌지는 못했다. 하지만 내게는 버티는 힘이 존재한다. 그 사실만으로 자긍심을 되찾고 감사한 마음으로 일할 수 있다. 일은 일이고 시는 시니까. 시인은 어떤 상태일 뿐 직업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후부터 나는 내 시를 먹여 살리기 위해 일하는 몸으로 전환되었다.

- P65

상상하는 것. 어쩌면 상상력이 밥 먹여준다는 말은 틀렸을지도 모른다. 상상력은 밥 대신 미래를 짓는다. 오늘이라는 토양 위에 내일의 태양빛을 불러오도록 한다. 그 빛의 아름다움을 보도록 한다. 그리하여 살게끔 한다.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죽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게 연루된 다음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것들이 예상한 모습을 하고 있지 않더라도, 그것이 끝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이어지는 삶은 우리가 이어갈 삶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야기는 그렇게 쓰인다는 것을 망각할 리 없다. - P66

다정함과 섬세함에 대한 나름의 고찰은 다음과 같다. 다정한 사람들은 리액션이 좋다. 경험상 이들은 무드나 환경에 약하고 상대방의 감정과 표정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따뜻한 사람이다. 그만큼 감정 기복도 심하고 표정 변화도 크게 드러난다. 누군가 울 때 같이 우는 사람이 딱 ‘다정‘ 유형.

반면, 섬세한 사람은 순간순간의 리액션이 크지 않더라도 기억력이 좋은 경우가 많다. 그 사람과 어떤 식당에서 어떤 농담을 나눴는지, 그 사람은 머리가 아플 때 어떤 약을 먹고 어떻게 쉬는지, 그 사람은 평소에 귀걸이를 빼서 어디에 두는지 등등, 대상에 대한 정보를 입력하고 잊지 않는 것이다. 잊지 않았다는 것이 어떻게든 행동에서 티가 난다. - P106, 107

주변에 다정하고 섬세한 사람들이 많다. 허술하긴 해도 내가 분류한 이 유형을 참고해 그들을 관찰하는 것은 오랫동안 흥미로울 것 같다. 다정한 사람들의 입매와 눈빛, 눈썹과 고개의 방향, 허리를 숙이는 방식. 그리고 섬세한 사람들의 행동과 그 곁의 장면들. 나비 같고 나무 같은 사람들이다. 사랑스럽고 성실한 내 사람들.

섬세한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풍경 위에서 다정한 사람들이여, 내내 행복하기를! - P110, 111

좋은 것을 다 갖고 있는 듯 보이는 언어에 현혹되지 말자. 좋은 것을 다 이해하고 있다는 듯 으쓱하는 사진에도 휘둘리지 말자. 그것들이 독점한 가치는 사실 우리 안에도 있다. 고유한 빛을 머금은 채.

자기 삶의 서사를 단단하게 쌓아가기 위해 자신을 둘러싼 사랑의 고유함을 공부하는 사람. 그리하여 그 사랑 한가운데 기어코 들어가 젖어보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타자를 ‘이해한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런 작가, 그런 에디터로 성장할 수 있을까.

혼자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결국 내가 의지해야 하는 존재도 우리다. 서로 다른, 긁힌 자국투성이의, 미우면서도 사랑스러운 우리.

우리가 지킬 삶은 우리를 외롭게 하지 않을 것이다. - P269, 270

유월, 시 쓰기 참 좋은 계절이야. 쓰고 있어도 시가 그리워져. 때론 밉기도 해. 벽을 미워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지만, 아무튼 그래. 네가 날 자주 미워했던 것과 비슷한 마음이겠지. 나도 네가 날 미워해서 네가 미웠어. 이젠 그저 모두가 건강했으면 좋겠구나. 장마가 오기 전까지, 장마가 끝나기 전까지, 겨울이 되기 전까지, 다음 해로 넘어가기 전까지. 그다음 해, 다다음 해, 언제 까지든. - P305

책은 저렇게 끝맺는다. 시인을 꿈꾸는 작가 '김해서'의 책은 기승전詩이다.

그래서 '다정'이라면 '한 다정'하면서도 궁극의 '섬세한 유형'의 나는 "옥타비오 파스의 시"를 작가를 위해 찾아 읽는다.

내가 보는 것과 내가 말하는 것

내가 말하는 것과 내가 침묵하는 것

내가 침묵하는 것과 내가 꿈꾸는 것

내가 꿈꾸는 것과 내가 잊는 것,

그 사이















시를 좋아한다. 자주 찾아 읽는다. 새로운 시인을 만나기도 하고 읽었던 시집을 또 읽기도 한다. 보따리 같은 가방 안에는 언제나 두 권의 책이 있다. 아침에 필이 꽂히는 시집 한 권, 읽고 있는 책 한 권. 시는 특히 버스에서 읽기 좋다. 시 한 편이 나를 훌쩍 다른 세상으로 데려다주는 '찰나'는 언제나 황홀하다. 시를 버리지 않으면 시는 멀리 있지 않다. 행간과 행간 사이에 잠시 머무는 그 사이에 '우주'가 있고 '詩'가 있다. [답장이 없는 삶이라도]에는 이미 빼곡한 답장들과 시들이 범람하고 있다. 받아 적기만 하면 되겠다. '시인'이 되려고 '일상'을 포기하지 않은 작가의 하루하루가 이미 '시'다. 주변을 향한 다정하고도 섬세한 시선이 세상을 품고 있기에 그의 시들은 따뜻하다. '사람'이 살아있는 '시인 김해서'의 시집을 가방 안에서 설레며 꺼내는 버스 안의 나를 상상해 본다. 기분이 좋다. 유쾌해지는 긴 편지를 한 통 받은 느낌이다. 이 글은 부끄러운 답장이다.

마지막으로 황현산 선생의 글을 덧붙여둔다. 시인에게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시는 승인하고 구성하고 조직할 수있으며, 거부하고 파괴하고 해체할 수 있다. 그러나 거부는 승인의마지막 패를 함부로 사용하지 않기 위해서다. 시는 제가 부르는 노래를 비웃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비웃음으로 다시 확인되는 것은노래의 존재다. 분석의식에서 떠날 수 없는 시는 제가 완전하고 절대적인 세계를 실현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시는(만)그 세계의 전문가다. 시는 순진하면서도 순진하지 않아서, 자유와평등을 완전하게 누리고 생명이 모욕받지 않는, 풍요로운 세계가실현된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 풍요로운 세계가 존재할 수없다고도 믿지 않는다. 불행의 끝까지 가게 하는, 어떤 불행의 말이라도 그 말을 시 되게 하는, 고양된 감정을 그 세계가 아니라면어디서 얻어올 것인가. 시는 현실에 내재하는 현실 아닌 것의 알레고리다. 그 점에서 시는 진보주의자다. 제가 옳다고 믿는 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지 외에 다른 어떤 말로 진보주의를 정의할 것인가, 사물을, 말을, 사람을 시적으로 만든다는 것은 옳은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높이로 정신을 들어 올린다는 뜻이다.

  시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시의 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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