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년 4월 10일경, 곡성 봉두산에 있던 도당 연락과 분트가 적의 기습으로전멸당하고 생포자까지 생기는 바람에 동부와 서부를 연결하는 기존의모든 연락루트가 차단됐다. 몇 차례 서부와 연락을 시도했으나 루트에 매복해 있던 적의 기습으로 도중에서 모두 희생되고 말았다.
곡성군당 위원장을 지내 그곳 지리를 잘 아는 그에게 동서부를 연결하는 새로운 연락루트를 확보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4월 16일, 야산엔 진달래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고 노곤노곤한봄볕에 새 생명이 움터오는 아름다운 봄이었지만 빨치산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춘궁기의 시작이었다. 도당에도 식량이 바닥나 하루를 굶은 채그는 연락루트 확보작업을 할 대원 일곱 명을 거느리고 밤길을 나섰다.
비상미 한 톨도 없었다. 야산에는 쑥과 취가 제법 먹을 만하게 자라 있었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쑥과 취를 뜯어 소금만 넣고 항고에 삶아 배가 부르도록 먹었다. 겨울 내내 소금밥만 먹은데다 이틀을 굶었으니 그렇게 맛 - P9

이 좋을 수가 없었다. 그때 그는 장염으로 오랫동안 앓고 있었는데 이날쑥을 한 항고 먹은 다음부터는 신기하게 설사가 잡히고 통증이 가라앉았다. 예부터 장 나쁜 데는 쑥이 직방이라더니 민간요법도 과학성이 있는모양이었다. 봄나물 덕분에 병도 고치고 허기도 면한 그들은 봉두산으로들어가기 직전 황전면 면소재지 가까운 마을에서 남의 집 담을 타넘어 도둑질을 했다. 제일 좋은 집을 골라 들어간 탓에 일곱 명이 한 달은 견딜수 있을 정도로 성과가 좋았다. 밥이 해결됐으니 발걸음도 가벼워서 봉두산에 날 새기 전에 도착했다. - P10

"고생들이 많제라? 끼니도 때우기 힘들 것인디 얼른 이거나 드시오."
같이 먹자고 몇 번이나 권했지만 박 씨는 국물 한 수저도 입에 대지 않았다. 식구가 열이니 산에 있는 그나 박 씨나 먹고 사는 게 비슷했을 텐데도 투박한 손으로 닭을 찢어주며 기어이 그에게만 고기를 먹이려는 박 씨의 순박한 심성에 가슴이 저려왔다. 작년 여름인가 보급투쟁을 나갔을 때그는 박 씨와 비슷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여름철이라 일을 마치고늦은 저녁을 먹는 중이었는데 올망졸망한 아이들까지 십여 명이 둘러앉아 멀건 보리죽을 먹고 있었다. 기름기 없는 얼굴에 마른버짐이 희끗희끗한 그 가난한 농부는 남은 죽도 더 이상 없었는지 빈 대접 하나를 가져다십시일반으로 자기들이 먹던 죽을 한수저씩 덜어 그에게 보리죽 한 사발을 내밀었다. 뒤져보면 꿔다놓은 보리 한 됫박쯤은 있을지도 몰랐지만 그것마저 털어 가면 당장 내일부터는 입에 거미줄을 쳐야 할 형편 같았다.
그가 아무리 굶었다고 하더라도 종일 힘겨운 일을 마치고 난 농부의 유일한 끼니까지 뺏어먹을 수는 없었다. 그는 덜어준 죽에 입도 대지 않고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 기껏 힘겹게 보급투쟁 해놓은 쌀 두어 되를 꺼내 놓았다. 박 씨도 그 농부와 형편이 다를 리 없었다. 그런 박 씨가설날에나 쓰려고 아껴놓았을 닭을 그를 위해 내놓은 것이다. - P12

모든 성원들의 길잡이이자 중요한 이론교육지인 <로동신문>이 발간되지 않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의약품의 경우도규제가 심했지만 그래도 약은 광주나 대도시의 약국을 샅샅이 훑고 다니며 소량씩 구입하면 안전했다. 그러나 종이는 달랐다. 농가에서 문종이외에 종이가 필요할 리가 없으니 규제가 심해서 추적당할 가능성이 매우높았다. 돈이 있어도 구입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도당에서는 모두 그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는데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돈으로 못 사면 방법이라고는 종이공장을 습격하는 수밖에 없는데 종이공장 사장의 성향을 알 수도없을뿐더러 경찰들의 감시도 여간 심한 게 아니었다. 할 수 없이 그는 자신의 조직선을 이용해 주변 종이공장의 실태를 알아보도록 했다. 조직을할 수 없으면 하다못해 도둑질이라도 하려는 생각이었다. 주변에 두 군데의 공장이 가동되고 있다는 것과 재고가 남아있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모두 곡성에 있는 공장이었는데, 곡성은 원래 이전부터 조직력이 취약해 함부로 조직하려고 나섰다가는 경치기 십상이었다. - P14

"워매?"
공원이 깜짝 놀라며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었다.
"당신들 통도 크요이, 시방 주인집 사랑방에 순사들이 잠복해 있음서조깨 전에 야식까지 해묵고 금세 잠들었는디."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섰다. 그들이 떠난 후 공원이 신고만 하면 아깝게 얻은 이 종이를 팽개치고 튀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얼른 주머니에서 5천 환을 꺼내 공원의 손에 쥐어주면서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두 사람은 천지분간 못하고 자요. 당신만 모른 척하면 되오. 이거 오천환이니 모른 척하고 자요."
"고마워요. 그러것소."
돈이 든 손을 꼭 움켜쥐고 공원은 그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순박한청년 같았다. 그는 조용히 문을 열고 나와 뜀박질로 밤새 행군을 계속했다. 모든 간부들이 입이 함박꽃처럼 벌어져서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그날 밤 박영발이 다시 그를 불렀다. - P15

집은 살림살이가 제법 괜찮은지 억새대로 지붕을 이었는데 달빛이 은은하게 떨어지는 억새지붕이 참 아름다웠다. 워낙 마을에 빨치산이 들어온적이 없어서인지 집주인은 매우 친절했다. 백운산 주변 마을에선 요즘 들어 보기 드문 일이었다. 수십 번씩 빨치산에게 살림살이를 털리고 난 주민들이 이제는 빨치산만 보이면 뭐든지 감추느라고 난리였고,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빨치산이 느끼기에도 호의적이진 않았다. 그러나 이마을엔 난생 처음 빨치산부대가 들어왔으니 쌓인 불만이 있을 리도 없고 오히려 약간의 호기심도 발동하여 다들 신기해하며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자청해서 챙겨주었다. 20분만에 보급을 완료하고 1선에 모였는데 다들 허리가 휘도록 배낭 가득 쌀을 짊어지고 있었다.  - P17

봉두산 분트로 돌아온 그는 다음날부터 모든 지하조직원을 대도시로보내 필요한 약품을 구입하게 했다. 일주일 후 페니실린, 머큐로크롬, 붕대, 소독솜, 주사기 등 다량의 약품을 총사령부로 보낼 수 있었다. 물자를확보할 수 있는 정도의 조직도 대단한 도움이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현재의 당의 위기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대도시로 조직기반을 확대해야 했다.
이런저런 궁리 속에 산은 점점 검푸르게 자신을 불태우며 여름을 맞아들이고 있었다. 이것이 산에서, 동지 곁에서 보내는 마지막 여름이라는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을, 한치 앞의 역사를 알 수 없듯이. - P19

친구고 부모고 없던 그 험난한 시절에도 어디에나 아름다운 사연은 많았다.
고생을 한 보람은 충분했다. 고철과 김춘옥이 세상에 다시없는 맛이라며 정말 맛있게, 꽤 많은 수박을 하루 만에 다 먹어치웠던 것이다. 다음날김춘옥의 하산일자가 결정되어 내려왔다. 8월19일, 일주일 후면 김춘옥은 산을 떠난다. 1950년 9.28후퇴와 함께 입산했던 만 2년의 사생활이 끝나는 것이다. 이제 그녀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 다른 전쟁이다. 과연그녀가 자신의 임무를 다할 수 있을까. 바깥사회의 고통은 순식간에 목숨을 앗아가는 총알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스며들어 어느날인가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안일함이나 긴장의 이완이다. 어쩌면 그것은 눈앞에 보이는 적보다 훨씬 어려운 적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피해갈수 없는 길이었다. 숨막히는 시간은 화살처럼 날아갔다. 백운산의 여름은 점점 뜨겁게 타올랐다. - P33

"좋네."
당과 조직을 해치지 않는 한 무슨 방법을 써도 좋다. 살아남아서 임무를 수행하라. 고철의 말이 비수처럼 가슴을 찔렀다. 비겁하게 자수를 한다, 자수? 그렇게 살아남아야 하는가. 아니, 비겁해지더라도 나에게는 해야 할 임무가 있다. 죽고 사는 것도 자신의 자존심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다. 죽는 것은 깨끗하고 단순하고 고결하지만, 그럼 그에게 맡겨졌던 임무는 어쩔 것인가. 어떤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서 임무를 완수하시오, 완수하시오, 완수......
"서장님은 자수 외에는 나를 살릴 방법이 없소? 솔직하게 대답해주어야 내 태도를 결정할 수 있소."
- P41

"그것도 책임지겠네."
함께 싸우던 동지들이 생포되거나 자수한 뒤에 얼마나 많이 이용됐는가, 심지어는 부대를 결성해 동지였던 빨치산을 잡으러 다니기도 하고,
밀고해서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비행기로 자수를 권유하는 방송을 해대고………. 만약 자신도 그런 식으로 이용된다면 그렇게까지 살아남을 생각은 없지만, 자수한 사실이 기사화만 되더라도 그가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일 터였다. 충격으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그를 따르고 신뢰하던 하부원들 중에서는 심각하게 동요하는 사람이 생겨날지도 몰랐다. 그의 지하조직 임무를 아는 사람은 박영발과 고철, 단 두 사람뿐이었다. - P42

구빨치로 자수한 사람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그만큼투철한 사상으로 단련된 사람들이었다. 자수∙∙∙∙∙∙ 그 말의 찜찜한 여운이좀체 사라지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서장님!"
침묵을 깨고 그가 서장을 불렀다.
"당신의 인격을 믿고 당신 말에 순응하겠소. 나는 당분간 공산주의 활동을 하지 않을 것이오. 나만 살겠소. 그 대신 당신은 나의 신변은 물론언론보도 등으로 나를 이용하려는 어떤 것에도 일체의 책임을 져주시오.
살기 위해 자수는 하지만 생사를 같이 했던 동지들을 팔아먹을 수는 없소. 그렇게까지 구차하게 살고 싶지는 않소. 나를 이용해서 어떻게 하지않겠다면 자수할 것이니, 나머지 모든 것은 당신이 책임을 지고 여기 있는 여러분들 앞에서 서약해주시오."
- P43

누구나 살다 보면 가끔씩 예기치 않은 사건들을 만난다. 그리고 때로는그 예기치 않았던 사건이 그 사람의인생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혹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방향으로 몰고가기도 한다. 52년 8월 19일의 사건이 그랬다. 자수는 그가 원하던 방향이 아니었다. 김춘옥만 데려다주고 오는것이 그날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일은 계획대로만 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가?"
화순으로 달리는 지프차 안에서 경찰서장이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는 김춘옥과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결혼할 사입니다."
어차피 앞으로 계속 만나야 할 사이니 그렇게 대답해둬야 할 것 같았다. 그때까지 한마디도 없이 굳은 얼굴로 앉아 있던 김춘옥이 그의 팔을슬며시 잡아당기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어떻게 하죠?" - P44

"글쎄요. 운명을 걸고 부딪쳐봅시다."
운명? 그렇다. 이제 그 스스로 운명을 만들어나가야 했다. 미처 준비도끝나기 전에 갑작스레 다가와 버린 일이지만 어차피 그의 임무는 지하조직의 건설이었다. 그의 운명도, 전남도당의 운명도, 이 땅 사회주의운동의 운명도 그가 하기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 지프는 어둠을 가르며 보성-화순간 국도를 달려갔다.
화순경찰서 앞, 경찰서의 간부들이 그들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앞에서 간단한 인사만 마치고 그들은 경찰서장을 따라 관사로 갔다. 종일준비했던 듯 푸짐한 저녁상이 들어왔다. 배가 무척 고팠지만 일부러 준비해 놓은 추어탕이며 김치며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너무 매웠다. 짠 소금만으로 몇 년을 보내왔으니 고춧가루 범벅인 김치가 매울 수밖에 없었다. 정신 못 차리게 매운 김치를 씹으면서야 비로소 자신이 산을 떠나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여기는 산이 아니다.  - P45

언제 적이 쳐들어올지 몰라 순간순간 가슴 졸이고, 날이면 날마다 적의 총탄에 사람이 죽어가는 산이아니다. 쓸쓸함, 허전함, 두려움………. 정체를 알 수 없는 온갖 감정들이솟구쳤다. 그는 단 한 번도 동지들의 곁을 떠나본 적이 없었다. 46년 이래처음으로 조직을 떠나온 것이다. 이제 그 혼자 모든 것에 대항해 싸우고새롭게 만들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 혼자서!
다음날 그들은 자수진술서를 썼다.
"저는 여순반란사건 당시 아버지가 좌익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하자 그 충격으로 산에 입산했으며…….… 몸이 약해 더 이상 산에서 활동하기도 힘든데다 공산주의 활동에 염증을 느껴………."
염증을 느껴.....… 정말이지 그런 자술서를 써야 하는 자신이 굴욕스러웠다. - P45

전라남도 총사령부 사령관 김선우, 전남 보성 출생………. 총사와 화순군의 조직체계, 현재의 생존자, 직책, 경력 등이 모두 도표로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거의 정확했다. 누군가의 이름 위에는 붉은 색으로 가위표가 그어지고 그 옆에 사망 날짜와 장소까지 완벽하게 기입돼 있었다.
가슴이 서늘하게 얼어붙었다. 경찰에서는 빨치산의 모든 정보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이었다. 경찰서장이 웃으며 의자를 내밀었다. 서장은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서로가 속한 사회적 관계를 떠나면 그들은 아마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서장이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반동권력의 하수인이었고, 그에게는 성심껏 최선을다해 진실로 잘해주겠지만 자신의 일로 돌아가면 빨치산 토벌을 지시해야 하는 적이었다. 이런 것이 바로 세상이었다. - P46

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휴전협정 전문이 실린 신문을몇 번이고 샅샅이 뒤졌지만 어디에도 빨치산 문제는 다뤄져 있지 않았다.
전선이 없어지면 빨치산에게 남은 건 궤멸뿐인데, 혹시나 했던 포로교환에도 빨치산은 언급되지 않은 것이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휴전에 기뻐하면서도 빨치산의 미래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했다. 왜 북한은 빨치산 문제를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은 것일까. 자신의 전선을 지키라는 것인가? 이 휴전상태가 얼마나 갈지는 아무도 몰랐다. 이제 통일이란 어쩌면 자신들이 살아생전에 보지 못하는 먼 미래의 일일 수도 있었다. 남한의 빨치산은 전선도 없어진 지금 무엇을 위해 싸울 것인가. 남한자체의 힘만으로 사회주의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지난 몇 년간 죽음을 넘나들며 체험한 사실이었다. 남한 정부는 입산자 전원에 대한 세밀한자료를 갖고 있었다. 이제 빨치산들이 경찰의 정보망을 피해 지하로 잠입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만큼 어려운 일이 되었다.  - P63

집행유예를 받은 것만 믿고 고향으로 돌아왔던 권상수는 경찰에게 끈질긴 협박과 회유를 받았다. 권상수는 무엇보다 생명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이었다. 결국 경찰에 협조하기로 하고구례 지하조직을 깨뜨리기 위해 양경한의 조직에 가담한 것이었다. 간첩이승엽의 비서라는 이유로 도당에서 의심했던 양경한이 아니라 권상수가 바로 조직을 팔아넘긴 장본인이었다.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동지를 팔아 얻은 권상수의 생명은 오래가지 않았다. 경찰에게 한 번 꼬리를 물린 권상수는 그 후로도 계속 경찰의 앞잡이가 되어 수십 명의 동지들을 감옥으로 팔아넘기고, 그것도 모자라 구례군당을 완전히 박살내기 위해 군당으로 재입산했다가 권상수의 정체를눈치 챈 군당 성원들에게 총살당하고 말았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일수록 죽음은 집요하게 쫓아다닌다. 권상수뿐만 아니라 수많은 배신자들의최후 또한 마찬가지였다. - P77

"김왕규는 나를 심판할 자격이 없는 친일파이며 민족반역자요. 나는적어도 우리 조선민족을 외세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으나 김왕규는 일제시대에 일본정부의 관료로 출세한 친일파요. 그런 친일파가 해방된 세상에서도 여전히 애국자 행세를 하며 설치고 있소. 나는그런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싸웠던 사람이오. 김왕규는 자기 입으로 자기를 애국자라 하며 나를 비애국민으로 매도하지만 과연 누가 애국자고 누가 비애국민이오? 내가 취조를 받기 위해 검사 방에 갈 때마다 김왕규는양담배를 수북이 쌓아놓고 피워댔소. 전쟁이 끝나고 우리 민족의 경제를부흥, 발전시켜야 할 이 마당에 양담배를 피워대다니! 그가 과연 애국자요?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기 마련이오. 누가 애국자였고 누가 이 민족을위해 살았으며, 누가 사형을 언도받아야 할지는 역사가 반드시 증명할 것이오, 당신들이 나에게 사형이 아니라 능지처참형을 선고한다 할지라도나는 지금까지 내가 했던 모든 애국적 행위를 후회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미제의 앞잡이들이 선고하는 무엇도 인정하지 않소!"
그는 사형을 언도받았다.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 P78

미제의 식민지정책은 더 노골화될 것이고, 권력을 잡기 위해 조국을 미제에 팔아먹은반동권력의 횡포도 점점 더 심해질 것이었다. 그러나 결코 영원한 후퇴란없다. 언제일지는 모른다. 그들이 다 죽고 난 뒤, 어쩌면 한 세기 뒤일 수도 있다. 세게 눌린 용수철일수록 더 거세게 튀어오르듯이 억압당하는인민들은 언젠가 다시 자신들의 피로써 항거할 것이고, 미래의 새로운 세대는 한국현대사의 초기에 피로 씌어진 역사의 바탕 위에서 더욱 거세게타오를 것이다. 그 밑거름만 되어도 좋다. 자기가 반드시 살아서 그날을봐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단지, 조금만 더 주의했더라면 권상수 같은비겁한 배신자 때문에 모든 일을 그르치지 않고 일본으로 가는 밀항 루트를 개척할 수 있었을 테고, 그랬더라면 얼마 남지 않은 빨치산 동지들의안전을 보장할 수도 있었으리라는 자책감만이 그를 괴롭힐 뿐이었다.
3월 말, 제법 따스한 햇살이 사형언도를 받고 다시 유치장으로 돌아가는 그의 여위고 상처 난 몸 위로 쏟아져 내렸다. 종달새 한 마리가 하늘저 높은 곳으로 치솟아 오르며 맑은 울음을 토해냈다. 그는 햇살에 시린눈을 치켜뜨며 사라져가는 종달새를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 P79

최근에 왔다는 몇 사람만 한 손에 하얀 쌀밥 한 덩이를, 다른 한 손으론 고무신에 멀건 소금을 받아들었다.
순천에서 매일 소금을 바른 꽁보리밥만 먹다가 쌀밥을 먹으니 꿀맛이었다. 이렇게 맛있는 밥을 안 먹다니 웬일인가 싶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반찬 없이 하얀 쌀밥을 일주일만 먹으면 당장 밥냄새도 싫어지고 밥꼴도보기 싫어지며 급기야는 이질에 걸려 죽어간다는 것이었다. 12방에만 해도 그런 이질 중환자가 일곱 명이었다. 따발총 환자라고 불린 그들은 이빨이 시커멓게 썩어 들어가고 눈이 침침해지며 계속 설사를 해대 하루 종일 변기통에만 앉아 있었다. 교도소에서는 그렇게 남아돌아가는 쌀밥을말려 과잣집에 비싼 값으로 팔아 축재를 했다. 집과 연락이 닿고 집에서뒷바라지를 할 수 있는 사람이면 사실을 청해 생명을 건질 수 있었지만남한에 아무 연고도 없는 이북 출신이거나 연락이 돼도 식구들마저 굶고있는 기본출신들은 사식 하나 시켜먹지 못하고 그대로 이질에 걸려 죽어갔다. 그가 온 후 한 달 동안만 해도 수십 명의 동지들이 이질에 목숨을잃었다. 사람의 목숨을 쌀 한 말과 맞바꾸는 셈이었다.  - P81

말 뒤엔 당연히 몽둥이찜질이었다. 살아 있다는 자체가 치욕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끈질긴 것인지를 그는 알고 있었다. 죽음처럼 허망한 것도 없지만, 또 인간의 생명처럼 끈질긴 것도 없다.
그는 언젠가 전투 중에 포탄을 머리에 맞고 허연 뇌수가 땅으로 철철 흘러내린 부상자를 본 적이 있었다. 뇌수의 절반이 흘러내렸는데도 그는 죽지 않았고, 마침 곁에 있던 의무지도원이 흙은 털 겨를도 없이 솔잎새만뜯어낸 후 뇌를 다시 집어놓고 머리를 꿰맸었다. 얼마 뒤 그는 멀쩡하게살아났다. 언어장애나 뭐나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렇게 멀쩡하게 나아서 한 일 년을 더 살았던 그는 그 후 다시 가슴에 직격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목숨을 구걸하진 않지만 살아 있는 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용기였다. - P82

그러는 사이에도 끊임없이 시간은 흘러갔다.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가을이 오고, 54년 12월 30일 대법원에서 무기로 형이 확정되었다. 목숨이야 건졌지만 사형보다 나을 것도 없었다. 평생을 적의 감옥에서 갇혀지내야 한다는 사실이 더 끔찍했다. 단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 있으니 미래에 대한 희망, 해방의 꿈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기약할 수 없는 기다림이 절망보다도 오히려 수십 배 고통스럽다는것은 그런 기다림을 경험한 자가 아니면 알지 못한다. - P83

보안과장이 쌀 무게라는 것을 몰랐을 리 없고, 그동안 그들이 공공연하게 쌀을 훔쳐 먹은 사실을 모를 리도 없었다. 훔쳐 먹은 것은 보안과장에게도 소장에게도 다 뇌물로 올라갈 것이 뻔했다. 그 앞에서 마지못해 쇼를 하는 것이라 해도 보안과장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그들의 말대로 빨갱이 하나쯤 죽는다고 해도 문제될 것 없는 세상인데 그래도 과장은 그를 인간적으로 대해준 것이다.
다음날 다시 보안과장이 그를 찾아왔다. 단식 나흘째, 물 한모금 넘기지 않았지만 산에서 열흘씩도 굶었던 걸 생각하면 별 고통스러울 것도 없었다. - P93

보안과장이 그와 다른 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보안과장이라고 자기 눈앞의 온갖 부정들이 보이지 않을 리 없었다. 보안과장은 이번만이 아니라이전부터 그러한 숱한 모순들 앞에서 몸을 숙이며 살아왔고, 그는 어떻게든 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발버둥쳐왔다. 그러나 모든 것에 질서가 있다는 보안과장의 말은 옳았다. 하나의 거대한 모순이나 부정을 무너뜨리려고 할 때는 조직의 힘이 필요했다. 혼자서는 안 된다. - P94

얼마 뒤면 또다시 원상복귀할 거라는 것을 그는알고 있었다. 원천적으로 부정의 질서를 제거하지 않는 한 어떤 식으로도부정과 싸워 이길 수는 없었다. 이번 단식의 효과도 오래갈 리 없었다. 열사람이 도둑 하나 못 막는다는 말도 있거니와 위로부터 부정을 근절하지않는 이상 혼자 힘으로 아무리 떠들어봐야 잘되면 순간적인 처방일 뿐이었다. - P95

제도의 근본적인 변화 없이는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아무리 아니라고 부인해도 그 잘못된 제도에 빌붙거나 그 제도를 도우며살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로서는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이 실패로끝났다고 해서 모든 것을 무로 돌릴 수는 없었다. 그는, 그들은 분명히 옳았다. 후회는 아니었지만 승리를 확신하며 싸우던 그때가, 콩 한 조각을나눠먹던 동지들이 그리운 것이야 어쩔 수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죽음이 가까이 있기는 하지만, 그때는 적어도 적과 대등하게 싸웠고 지금은적의 포로로 갇혀 있다. 담장 밖을 구경하지 못한 지도 벌써 3년, 언제쯤이나 담장을 벗어날 수 있을까? 담장 밖의 세상에 언제쯤 풍요한 인민의나라가 세워질까? - P98

김규호는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럴만한 능력이 있다면 그래야지요. 취업 중에 있는 우리 동지들을올바른 방향으로 지도할 동지도 반드시 필요하오. 동지가 그 일을 하시오. 동무의 말이 옳소."
"선생님은?"
김규호는 대답 없이 조용히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그는 지금도 알수 없다. 전술적으로 전향이 필요하긴 해도 자신은 도저히 그렇게 할 수없다는 뜻이었을까? 끝까지 전향을 거부하던 김규호는 감방에서 공산주의 교육을 시켰다 하여 5년 형을 추가 받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복역하다 위암에 걸리자 스스로 이불을 찢어 목을 맸다. 적들 앞에 자신의 죽어가는 비참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전향을 하는 것도 괜찮다는 김규호의 말을 듣고도 그는 한동안 망설였다. 김춘옥을 데려다 주러 갔다가 자기까지 자수를 해야 했던 그날의 복잡한 심정과 똑같았다. 전향서 한 장에 지금껏 가져왔던 사상이 하루아침에 그야말로 전향되는 것은 아닐 테지만 기분은 좋지 않았다. 서글픔, 분노......, 온갖 생각이 들끓었다. 7월 4일 그는 드디어 전향서를 썼다.  - P99

국가에서 금지하는 사상을 머릿속에 지니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며 좌절을 느낄 때마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던 김규호의 미소를 떠올렸다. 김규호는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의 사상을 한 치도 양보하지않고 살다 죽었다.
나는 무엇인가? 살아남아서, 세상으로 나와서 무엇을 했는가? 스스로의 임무를 다하지 못한 것은 철저하지 못한 사상성 때문인가, 아니면 반동의 시대 때문인가?
그는 스스로에게 수없이 묻고 또 물었다. 아무튼 그는 전향을 했다. 그가 가장 존경하던 김규호는 그대로 특사에 남았다. 그가 사랑했던 많은동지들은 남녘의 산과 들에서 죽었다. 남한에서의 치열했던 사회주의 운동은 교도소 특사에 갇힌 채 막을 내렸다. 그의 앞날에는 이제까지와는전혀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눈물과 치욕의 삶이.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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