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굶어죽을 판인데 조직확대고 교란투쟁이고 가능할 리가 없었다. 전남도당에서는 쌀 한 줌이 한 사람 목숨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떠돌았다. 하루 두 끼가 한 끼로, 이삼 일에 한 끼로, 그나마 죽으로 점점 줄어들었다. 죽이라고 해야 반 되도 안 되는 쌀을 털어 넣고 가마솥 가득히 물을부어 끓여 칠팔십 명이 먹어야 했으니 죽이 아니라 죽물인 셈이었다. 산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정보는 점점 어두워지고 토벌대의 공격은 날이 갈수록 거세지고 몇 년간 식민지 조국의 해방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바쳤던 아까운 동지들의 목숨을 쌀 한 줌과 맞바꾸는 날들이 계속됐다. 이불홑청 하나만으로도 어떻게든 겨울은 갔고 참담한 굶주림 속에서도 기어이 봄은 왔다. 봄이 되면 나물이라도 뜯어먹을 수 있어 겨울보다는 사정이 훨씬 좋았다. 백운산 아래서부터 겨우내 굶주린 나무들이 제법푸근한 봄빛으로 물이 오르고, 아직 나물을 캐기에는 이른 4월 초순이었다. - P191
도당 전원이 계속되는 보급투쟁의 실패로 사흘간 죽 한 모금 넘기지 못한 채 물로 연명할 지경이 되었다. 지금까지 잘 먹었더라면 그깟 사흘 굶은 것쯤 문제도 아니겠지만, 두어 달을 어쩌다 죽 한 모금씩 먹고 버티다사흘 내내 멀건 죽 한 모금 못 먹었으니 다들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목숨을 걸고 대대적인 보급투쟁을 시도하든지 앉아서 굶어 죽든지 양단간에 결정을 내려야만 할 고비였다. 드디어 도당에서는 마지막 운명을 걸고 마지막 전투를 결정했다.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도당을 유지할수 있는 핵심간부일고여덟 명만 남기고 전원이 전투에 참가하기로 했다. 전원이라고 해봤자 무장한 유격대원 마흔여섯 명에 비무장 기관원 서른명이 전부였다. - P191
주는 사람도 받아먹는 사람도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미래가 확실히 보장되어 있을 때는 누구나 원칙에 충실할 수 있다. 그러나 내일 당장 자신의 생명조차 보장할 수 없을 때, 낙관보다는 좌절이 압도적인 상황에서까지 원칙을 지키고 동지애를 지킨다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 역사와 개인을 일치시키는 철저한 신념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세계역사상 유일무이할 만큼 처참하고 탁월한 빨치산의 투쟁은 그런 사람들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고, 훗날 그 수많은 좌익수들이 언제 감옥에서 나간다는 기약도 없이, 또 이 나라의 역사가 자신들이 살아있는 동안 변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이 수십 년간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아침에 일어나는 문제에서부터 모든 생활을 철저하게 조직하고 투쟁할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역사발전에 대한 확고한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제기암골에서는 그렇게 콩 한 말로 최후의 만찬이 벌어지고있었다. - P193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뭔가가 입 안으로 흘러내렸다. 무슨 액체가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흘러드는 것이 느껴진 순간 도저히 떠질 것 같지않게 무겁던 눈꺼풀이 번쩍 치켜졌다. 낯익은 동지가 귀한 날계란을 깨뜨려 그에게 먹이고 있었다. 잠시 후에는 식은 밥 덩어리가 씹을 새도 없이꾸역꾸역 밀려들었다. 하기는 씹을 힘도 없었다. 밥을 그냥 삼켰는지 씹어 먹었는지 기억도 없는데 잠시 후에는 신기하게도 발가락이 움직이고손도 들어올려지고 몸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희한한 일이었다. 사람의 몸이란 게 태엽을 감아주면 그만큼만 움직이는 시계 같기도 하고저울 같기도 했다. 먹은 밥이 소화가 됐을 무렵에는 혼자 힘으로 걸을 수도 있었다. - P194
이게 끝인가? 이게 몇 년간 몸 바쳐 싸워왔던 혁명사업의 끝이란 말인가? 동지들은, 소중한 우리 동지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슬픔보다도 고독이 뼛속까지 사무쳐왔다. 이제 혼자라는 고독감에 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갑자기 못 견디게 목이 말랐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산 전체는 저녁 그림자에 싸여 어둡고, 그 어둠의 저편에서 박정숙이 땅바닥에 쓰러져 울고 있었다. 박정숙의 숨죽인 울음소리가터질 듯이 그의 가슴으로 밀려들었다. 어디선가 소쩍새가 울었다. 박정술을 위로해야 한다는 생각도 없이 그는 그저 갈증을 달랠 생각뿐이었다. - P202
우물에 엎드려 정신없이 물을 들이마셨다. 미친 듯이 실컷 물을 먹고 고개를 드는데 우물 속에 뭔가 하얀 것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허리를숙여 건졌더니 물에 불은 콩이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콩을 입으로 가져갔다. 비록 날콩이었지만 이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소하고 맛있었다. 박정숙도 달려와 울음을 그치고 열심히 콩을 건져 먹었다. 목 잘린 동지의 시체가 달빛에 시커멓게 드러난 모습을 보면서도 그들은콩 먹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 콩을 먹다 공포와 고통을 잊은 건지, 아니그 엄청난 두려움을 이기 위해 콩이라도 먹어야 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산등성이에서 휘영청 달이 떠올랐다. 두 사람은 열심히 콩을 씹어 먹고 있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도당도, 전남 유격대도 전멸되었다. 자, 어디로 갈 것인가! 건너편 산 능선에서는 국군이 순찰을 하며 보초를 불러내고 있었다. - P202
누가 먹으려고 했던 콩이었을까? 결국 그것조차 먹지 못한 채 남겨두고간 동지 대신 배를 채운 유혁운과 박정숙은 남은 콩을 죄다 건져 유엔잠바의 호주머니 양쪽이 불룩하도록 담아 넣은 채 곡성군당을 향해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한때 자신이 속해 있던 곡성군당 외에 달리 선을 댈 방법이 없었다. 적에게 투항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가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할 수 있는 한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살아남은 자로서, 그리고 이 땅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자로서 마땅한 도리였다. - P203
이 날만을 위해 살았던 것처럼 사람들은 미친 듯이 노래 부르고 춤을추며 해방의 첫 밤을 보냈다. 희미한 어둠 속에 드러난 동지들의 흥겨운모습을 보면서 핑 눈물이 돌았다. 이 밤의 감동을 즐기는 백여 명 중에 구대원은 서른 명도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전쟁 이후 한 달 사이에 새로 규합한 동지들이었다. 그 어려운 날들을 버티며 이날을 위해 싸워온 수천명의 진짜 투사들은 곳곳의 산기슭에서 썩어가고 있거나 이미 한 줌의 흙으로 변했을 것이었다. - P220
작년 초봄, 백운산 특각에서의 첫 오락회가 떠올랐다. 그때 우리를 그렇게 웃겨주던 만담가 박동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혁명의 열정에 떨며 그 밤을 함께 즐겼던 동지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쇠고기 굽는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 감미로운데………. 목울대를 타고 올라오는 울음덩이를 꿀꺽 삼키며 그는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오늘을위해 싸우다 오늘이 오기 전에 가버린 동지들, 동지들은 가고 나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이미 우리에게 ‘나 혼자‘ 란 없다. 박정하가 죽고 김지희가 죽고 박정숙이 죽고 유혁운이 살아남은 게 아니다. 우리 중의 많은 사람이 죽고 우리 중의 일부가 살아남았을 뿐이다. 동지들! 그대들이 흘린피로 오늘은 왔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들의 피로 오늘의 해방을 이어갈것이다. 그는 동지들의 피로 찾은 해방의 감격을 가슴속에 꼭꼭 눌러 담으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 P220
날이 새기 바쁘게 광주를 향하여 백여 명의 대열이 백아산을 떠났다. 조금씩 멀어지는 백아산을 유혁운은 자꾸 뒤돌아보았다. 그 고생을 하고백아산으로 오다 죽어버린 박정숙, 백아산에서 백운산에서 온 산을 피로물들이며 쓰러진 동지들! 목이 잘린 채 굴러다니는 동지의 시체를 보면서날콩을 주워 먹던 그 밤엔 달도 참 밝았었다. 백운산에서 도당과 유격대가 박살나던 날, 그는 눈물도 없이 동지들의 시체를 그러모아 돌무덤을만들면서 눈물보다 더 뼈아픈 맹세를 했었다. 살아남은 우리가 당신들의못 다한 꿈을 이루겠노라고, 당신들의 원수를 갚겠노라고, 그리고 이제 해방은 왔다. - P221
동지들이여 들리는가! 백주대낮에 대로를 걷는 우리의 힘찬 발소리가, 가슴 터지는 감동의 함성이 들리는가. 우리의 피로 찾은 이 해방을 영원히 인민의 것으로 하기 위해 먼저 간 당신들이 죽으면서도 꿈꾸던 세상, 그 무산계급의 평등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우리도 기꺼이 당신들의 뒤를따르겠노라. 그의 눈가에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을 꿈벅이며 그는 오래도록백아산을 보았다. 문득 한여름의 땡볕에 푸르다 못해 검게 타오르는 나무들이 하나씩 동지들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백아산 능선마다 봉우리마다힘차게 버티고 선 동지들은 열심히 손을 흔들어댔다. 그제야 그는 미련없이 되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우리는 간다. 발전하는 역사와 더불어 지나간 슬픈 역사를 묻고 우리는 전진한다. 태양은 머리 위에서 이글거리고, 해방 광주는 조금씩 가까워졌다. - P221
해방의 감격에 들떠 해방조국을 건설하겠다는 기쁨 하나로 자기를 따라나섰던 그 150여 명의 탄광노동자들 가운데 다시 가족의 품에 안긴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 유혁운은 알지 못한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지난 후 탄광촌 부근을 지나면서 유혁운은 문득 그날 입은 옷 그대로 그를 따라나섰던 노동자와 가족들이 두고두고 흘렸을 눈물을 떠올렸고, 자신을 심판한 사람들의 말대로 수많은 죽음과 한이 과연 자신의 책임이어야 하는지 씁쓸한 생각에 잠긴 적이 있었다. 그들 중에는 물론 자기 앞에엄청난 고통이 숨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한 채 그저 해방의 감격에들떠 따라나선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나중에 자신의 죽음에 직면해서 누군가를 원망하며 죽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원망한 건 분명 그를 그런 일로 몰아넣은 일개인이 아니라 이 땅의 서러운반동의 역사였을 것이다. - P226
해방 이후 빨치산 출신들을 중앙당학교나 모스크바에 유학시키는 정책이 추진되고 있었다. 실무에 어둡고 이론이 약한 빨치산 출신들을 사상적으로 무장, 단련시키기 위한 정책이었다. 전남도당에서는 1차로 도 여맹조직부장 유일남 등 세 명이 8월 15일자로 중앙당학교로 떠났고, 모스크바 유학은 그들 셋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꿈에 부풀었던 모스크바 유학도 결국 헛일이 되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몇 번 공부할 기회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철도학교 대신 농림학교나 일반 중학에 갔더라면, 조용식과 서울에 갔을때 어떻게든 서울에 남아 고학을 했더라면, 모스크바 유학 결정이 조금만더 빨랐더라면 그의 삶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개인의 삶이건역사건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추측은 환상일 뿐이다. 누구에게나 가지않은 길이 있지만 선택한 길만이 유일한 현실이기에. - P239
두 사람 모두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엉거주춤 고개를 숙였다. 같이 일하는 동지를 여자로 느껴보긴 처음이었다. 그동안 김병억에게 얘기를 많이 들었던 탓일까, 아니면 김춘옥의 다부진 모습에 마음이 끌린 것일까. 사랑하는 여자와 마주선 것처럼 그의 가슴은 흥분으로 방망이질치고 하늘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어디서나 배짱좋고 농담 잘하던 그가 웬일인지 말 한마디 꺼낼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인채 서로의 발끝만 바라보다 그들은 곧 헤어졌다. 그리고 전쟁의 와중에난생 처음 사랑이 꽃피기 시작했다. 8.15가 지나면서 적기의 공습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23일에는 수십 대의 대편대가 나타나 광주를 온통 불바다로 만들었다. 비행기 공습은 날이갈수록 심해졌다. 전선은 한 달째 낙동강에서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었다. 어쩐지 불안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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