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때로 운명이란 묘한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일본인 교장을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양심적인 교육자라고는 하지만 뼛속까지 일본인인 교장이 전세의 불리함까지 솔직하게 얘기하면서 중학 진학을 말리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다고 그가운명론자인 것은 아니지만 순간의 선택이 운명을 완전히 뒤바뀌게 하는것을 그는 수없이 보았고 경험했다. 그만 해도 징용을 피해 간 철도에서또 다른 운명을 만났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인생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었다 해도 징용에 끌려가 죽지 않은 한 철도에서 그가 택한 길은 당시의유일한 선택이었고 어디에서 만나는가가 달라졌을 뿐일 터였다.
190어쨌든 그는 자신의 앞길에 어떤 운명이 기다리는지도 알지 못한 채1945년 4월 3일 구례구 철도역에 부임했다. - P79

새 관청에는 일제시대부터 그 자리를 지켜왔던 사람들이 해방조국의 관리로 다시 임명되었다. 45년 10월 미군정의 아놀드 군정장관의 선언대로 "남한에서 유일 합법적인 정부는 오직 미군정일 뿐이며, 미군정은 행정부의 모든 영역에서포괄적인 통제력과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민중의 요구는미군정에게 고려해야 할 하등의 이유도 없는 것이었다. 남한 전역에서 혁명적 민중의 자발적 참여와 공산주의자를 중심으로 민족주의자와 일부우익까지 참여하여 건설되었던 인민위원회는 미군정의 군홧발에 산산이짓밟혔다. 인민위원회가 주장했던 토지개혁과 일제의 적산 처리 문제도당연히 미군정의 손으로 넘어갔다. 남한 자산의 80퍼센트, 주식회사 총자본의 90퍼센트, 토지의 70퍼센트, 경지의 30퍼센트가 미군정에 넘어간 것이다. 조선 인민의 뼈와 땀으로 축적된 적산은 미군정에 의해 친일 민족반역자와 매판자본가, 반봉건 지주에게 불하되어 한국화약이나 동양맥주, 해태제과, 동양시멘트, 선경 등등 내로라는 독점재벌로 성장하거나 몰락해갔다.  - P85

줄만 잘 잡으면 귀속업체를 몇 개씩 차지하기도 했던 대부분의 귀속재산 관리자들은 "생산의 유지 · 부흥보다 원료자재, 반제품, 기계 및 부속품, 심지어는 공장 건설시설의 부속품까지 암매하여 생산시설의 파괴와 생산력 쇠퇴의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물론 이런 현상은 미국내의 과잉생산물을 남한에 떠안기고자 했던 미군정의 공업생산 정체조장정책과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미군정은 남한을 미국의 잉여농산물 시장으로 편성하기 위한농업정책을 실시해, 인민들이 그렇게도 부르짖던 "토지를 인민위원회로넘기라"는 요구를 묵살하고 직접 일본인의 토지를 접수하여 남한 최고의지주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4퍼센트의 지주가 전체 경지면적의 6퍼센트를 소유하고, 67퍼센트의 농가가 1 정보 미만의 영세빈농이었던 반봉건 - P85

적 소작관계를 지속시켰으며, 이같이 영락하는 빈농에게 생산량의 50퍼센트를 소작료로 징수하는가 하면 생산량의 40~60퍼센트를 시가의 25센트로 강제 출케 하고 팔십여 종의 각종 세금을 부과했다. 친일 민족반역자들은 해방으로 친일의 딱지를 벗어던지고 공개적인 도둑질을 할수 있게 된 것이고, 대다수의 인민들은 해방으로 눈 버젓이 뜬 채 강도질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도둑들에게 친일의 표지를 벗겨주고 합법이라는전가의 보도를 쥐어준 것은 바로 미군정이었다.
그러나 일개 노동자였던 그는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신문 볼 새도 없이 꼬박 스물네 시간을 일하고 나면 죽음 같은 피로가몰려왔다. 기차표를 타기 위해 주먹밥을 싸가지고 와서 밤을 새며 기다리는 사람들이 주고받는 이런저런 말들이 그가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세상소식이었다. - P86

당 가입과 동시에 그는 새 이름을 부여받았다. 경찰의 눈을 피해 비밀활동을 하자면 당연히 새 이름이 필요했다. 유혁이라는 이름이었다.
조국도 없는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의 흐름대로 흘러가기만 했던 정운창은 이 땅에 인민의 국가, 한쪽에서는 쌀이 썩어나고 한쪽에서는 굶어죽게만드는 외세의 간섭 없는 인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하여 유일한 인민의 당에 가입하면서 새롭게 태어난 것이었다. 당과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각오를 했지만, 그는 자신의 새 이름으로 겪어야 할 고난과 고통을 가히짐작하지도 못했고, 이 민족의 역사와 운명을 알 수도 없었다. 그러나 단하나만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의 선택은 유일하고 정당한 것이었고선택한다는 것은 그에 따르는 고통까지도 선택하는 것임을. - P96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설이 외전으로 전해졌을 때 물의가 분분하더니 이번에는 지방 순회 중인 이 박사가 남조선 정부설을 강연했다 하여 파문이 컸다.
남조선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조선의 영구불행인 것쯤은 아동주졸도 다 아는 일이어든 이것을 가지고 떠든다는것은 조선의 수치요, 독립을 지연시키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온건 중립지인 <조선일보>의 1946년 6월 14일 사설 - P97

죽은 사람들은 전남도당 선전부장 박석우(담양 출신으로 일본 명치대 졸업) 일행이 분명했다. 얼마 전 그들이 지리산으로 이현상을 만나러 갈 때선전부장 수행원의 옷차림이 너무 초라하기에 유혁운은 자기 속옷과 철도국 정복을 입혀 보냈다. 그의 옷에 그만한 체격이라면 그 선전부장 일행이 틀림없었다. 비밀활동으로 단련된 간부가 어떻게 족적을 남기고 다닐 만큼 소홀했는지, 당사자들이야 그 부주의의 대가로 목숨을 버렸지만남은 사람들은 흐린 겨울 하늘만큼 답답했다.
어머니는 그가 집을 나올 때까지 따라나오며 그의 몸을 만져보고 몇 번씩 똑같은 말을 물어보았다.
"아이, 니가 참말 사람이지야?" - P128

아직은 텅 빈 아지트를 지키며 혁운은 지리산과 달리 벌써 싱싱하게 피어오는 백운산의 봄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용지동 계곡을 연둣빛물들이며 하루가 다르게 푸른 잎사귀를 살랑거리는 도토리나무며 떡갈나무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그는 문득 무릎을 쳤다.
아! 저게 바로 혁명이구나. 헐벗은 인민대중의 가슴을 녹음으로 뒤덮어오는 것. 어린 등짝이 휘어지게 나뭇짐을 지고 산을 내려올 때나,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친구들을 눈물로 바라볼 때나, 느닷없이 합환주를 마셔야 했을 때나, 언제나 그의 가슴에서 불어대던 스산한 바람이 어느 사이엔가 멈춰 있었다. 대신 그 가슴엔 촉촉하게 물오른 사월의 신록이 넘실대고 있었다. - P142

9.16결투 승리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빨치산 최대의 적인 겨울이 닥쳐왔다. 산에서의 겨울은 유난히도 일찍 찾아왔고 서둘러 온 만큼이나 미적거리다가 봄을 뒤쫓아온 여름에 채여서야 때 아닌 눈보라까지 쏟아 부으며 간신히 뒤돌아서는 것이었다. 애절한 그리움도 시간이 흐르면 익숙해지고 아무리 미운 사람도 자주 보면 정이 붙는 법이니 벌써 세 번째 맞는 겨울이면 면역이 생길 법도 하련만, 두려울 것 하나 없는 빨치산에게도 이 겨울만은 여전히 두렵고 무서운 존재였다. 게다가 9.16 결투 이래대대적인 토벌작전이 개시되어 어디 한군데 진득이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산에서 겨울을 나는 동안은 추위와 토벌대의 추적에 전멸이나 당하지않으면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었다. - P171

소성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푹 쉴수 있었다. 조 영감 집안일이나 도와주려고 해도 한겨울이라 쇠죽 쑤는일 외에 별다른 일거리도 없었다. 뜨듯한 아랫목에서 비록 보리밥이나마끼니마다 밥 한 그릇을 비우면 등 따시고 배부르고 세상 부러울게 없었다. 몸이 편해지니 가족들 생각이 났다. 아버지도 없는 구차한 살림을 어머니 혼자 어떻게 꾸려가고 있을까. 혼례식만 올린 채 버려두고 떠나온그 여자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 여자에 대한 사랑이 생겼다거나 세월이 그만치 흘렀으니 웬만하면 포기하고 내 여자로 받아들이겠다거나하는 감정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대한 그리움 탓일까, 기억조차 희미한 여자의 얼굴이 아슴푸레 떠올랐다. 남녘으로 향한 툇마루에 나와 앉아 서서히 서쪽으로 기울어가는 태양빛을 쬐고 앉아 있으면 엊그제산에서 있었던 일들이 모두 꿈만 같았다. 해방된 지 벌써 사 년이 지났다. - P178

비합으로 쫓겨 입산한 지도 만 이 년이 지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남로당에 입당한 이래로 그는 계속 앞만 쳐다보며 달려왔다. 어떻게 여기까지달려왔는지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삼 년을 한걸음에 휙 지나쳐온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생각하면 이전의 전 생애를 다 합친 것보다도더 중요한 사건들이 너무나 많아 그 삼 년이 까마득한 옛날 같기도 했다.
혁명이란 어쩌면 삶의 농축액이나 엑기스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1950년의 새해가 밝았다. 이제 그도 스물세 살이었다. 비록 갓 스물을넘긴 어린 나이였지만 그는 기억도 할 수 없을 만큼 짧고 길었던 지난 삼년간 역사라는 거대한 물결의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격렬하고 풍부한 삶의 체험을 했으며 그 체험을 통해 나이와는 관계없이 성숙한 인간으로 변해 있었다. - P178

그는 긴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때 그렇게 짓궂게 자신을 놀려대던 동지들의 장난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자신이 보통의 상식으로는이상하리만치 순수했음도, 한창 나이에 젊은 여자와 며칠 밤을 보내면서도 여자 때문에 가슴 졸이기보다는 맡은 임무에 가슴 졸이던 그 시절은얼마나 인간적이고 아름다웠는지…...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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