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최초의 싸움은 아버지 때문에 시작되었다. 1974년 국민학교 4학년 때였다. 그날 별로 친하지 않던 그 아이와 무엇 때문에 해거름까지 학교에 남아 있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 아이가 그 엄청난 말을 꺼낸 순간부터가 소 엉덩이에 찍힌 낙인처럼 선명하게 새겨져 있을 뿐이다. "느그 아부지가 빨갱이람서?" 무슨 말다툼 끝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아이의 말 속에는 네까짓게 빨갱이 딸 주제에, 하는 경멸과 떳떳한 자기 자신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역력히 배어 있었다. "아니야." 아버지가 빨갱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었으므로조금 당황하면서도 나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내가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그 아이의 얼굴색이 새파랗게 겁에 질려갔다. 사람이 그런 표정을 짓는 건 말하지 말 것을 말했거나 뭔가 나쁜 일을 하다 들켰을 때뿐임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 P13
머리를 빡빡 깎고 수인복을 입었달 뿐 아버지는 옛날 모습 그대로였다. 아궁이 앞에 쭈그려 앉아 번데기나 메뚜기를 구워주고, 내 말이 되어온 방안을 기어 다니던 바로 그 아버지였다. 굶주린 사람들을 채찍으로후려 패는 괴물이 아니었다. 몇 년간 사무쳤던 그리움이 한꺼번에 솟구쳐오르기 시작했다. "아빠!" 어머니 아버지가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막상 아빠라고 부르고 나자머쓱했다. 할 말이 없었다. 말 잇기 놀이를 하며 장난치던 아버지였는데, 술자리마다 나를 안고 다니던 아버지였는데도 서먹했다. 무슨 말을 해야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냥 아버지를 만져보고 싶었다. 까슬까슬한 턱에 입 맞추고 싶었다. 나를 잠재워주던 아버지의 넉넉한 등에 업히면 다시 옛날처럼 아버지가 내 곁으로 돌아올 것 같았다. 빨갱이가 아니라 내 친구였던 다정한 아버지로…... 그러나 손을 내밀어도 아버지는 잡히지 않았다. 바로 코앞에 있는 아버지를 나는 만질 수가 없었다. 면회시간 오분은 금세 지나갔다. 공부 잘하라며 돌아서는 아버지의 눈이 눈물로 젖어드는 걸 나는 보았다. 아버지의 눈물은 처음이었다. 허탈했다. 빨갱이를 본 것도 아니고 아버지를 본것도 아니고 단지 아버지의 그림자를 잠깐 스쳐간 기분이었다. - P18
나는 가난한 게 부끄럽지는 않았다.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빨갱이 자식이라는 놀림보다는 견디기 쉬웠다. 입학 때부터 입어서 무릎이 툭 튀어나오고 껑충하게 짧은 바지가 창피하게 느껴질 때면 시골이 그리웠다. 여름이면 멱 감던 섬진강, 여름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던 섬진강가의포플러나무와 하얀 삐비꽃, 오징어마질을 하다 옷이 뜯어져 울먹이던 아이들.…… 내 우상이 산산이 부서지기 전까지 참으로 좋은 시절이었다. 그때는 나보다 예쁘고 옷 잘 입은 애를 봐도 아무렇지 않았었다. 언젠가아버지가 외항선원이어서 예쁜 옷을 잘 입던 영희가 분홍빛 원피스를 입고 왔을 때, 하얗게 부서지는 햇살 속에서 분홍빛 치마를 나풀거리며 팔짝이던 모습이 얼마나 예쁘던지 넋을 잃고 바라보았던 적이 있다. 그때는부끄럽지 않던 내 모습이 이제는 왜 창피하게 느껴지는 것인지 나는 알수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고향으로 달려가는 내 마음은 민방위훈련 날의 처참했던 기억의 벽에 부딪쳐 다시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 P26
아무도 나를 눈여겨 봐주는 사람이 없었다. 시골애답게 새까맣고 깡마른 나는 무엇 하나 내세울 게 없어서 학기 초부터 기가 죽었다. 단발머리가 잘 어울려서 새침하게 예쁜데다 공부까지 잘하는 애들이 자꾸 나를 주눅 들게 했다. 가정조사란 걸 했을 때는 학교를 그만두고 싶을 정도였다. 가정조사란 건 결국 학생들의 빈부를 파악하자는 의도였다. 한창 민감한 나이의 여자애들 가슴에 지워지지 않을 못을 박아도 좋을 만큼 더 큰어른들의 뜻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자기 집이 있는 사람 손들어요, 자기 공부방이 있는 사람, 자가용, 냉장고, 세탁기, 카메라, 오디오가있는 사람, 수십 개의 항목 중에서 내가 손을 올린 것은 단 하나였다. "텔레비전은 거의 다 있을 테니까 없는 사람이 손을 들지" 고개를 푹 수그린 채 간신히 머리 위로 손을 올린 사람은 나까지 네 명이었다. 손을 들기까지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텔레비전이 있고 없고 따위로 창피해 한다는 사실이 더 부끄러워서 나는 후끈거리는 얼굴을 꽂꽂이 쳐들고 손을 들었다. - P28
내 자존심을 회복할 계기를 만들어준 사람은 국어선생님이었다. 국어시간에 ‘오 분 스피치‘ 란 게 있었다. 번호순대로 하루에 한 명씩 주제를정해 오 분간 발표를 하는 것이었다. 내 차례가 왔다. 대충대충 시간이나때우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나는 며칠간 꼼꼼하게 원고를 준비하고 달달월 만큼 연습을 했다. 주제는 안락사였다. 발표가 끝나고 나자 선생님은나의 자세와 발표내용에 대해 극찬을 했다. 서울로 올라온 뒤 그렇게 칭찬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국어선생님에게 그날은 기억조차 희미한 대수롭지 않은 추억 중의 하나로 묻혀졌을 것이 분명하다. 당시 선생님은 자기의 칭찬이 한 아이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지 상상할수 없었을 테지만 그 칭찬 한마디는 내 인생에 새로운 역전의 계기가 되었다. - P30
내가 알고 싶은 건 공산주의에 대한 것이었지만 어머니는 당황하고 난감한 얼굴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한참 후에야 엉뚱하게 다른 사람얘기를 꺼냈다. 나도 아는 사람에 대한 얘기였다. 구례에서 중학교 수학선생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우리 집과 무슨 관계인지는 몰라도 삼촌이라고 부르며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가 지금 감옥에 있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그가 잡혀간 것은 수업시간에 북한 얘기를 잠깐 꺼낸 지 며칠 후의일이었다. 북한을 고무 찬양했던 것도 아니었다. 북한이 정말 그렇게 못사느냐는 학생의 질문에 아니라고, 거기도 우리와 똑같이 사람 사는 데라고, 평양에는 지하철도 있다고 대답한 것이 전부였다. - P33
나는 부모의 과거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들어보지 못했다. 누구에게나과거가 있기 마련이라는 생각조차 가지지 못했을 만큼 나는 부모의 과거에 대해 무지했다. 자식에게도 말하지 못할 과거를 가진 부모, 나보다 한발 앞서가는 어머니의 여윈 어깨가 모든 것을 거부하는 듯 완고하고 고집스러워 보인 것은 잠시의 착각인지도 몰랐다. 나는 어머니에게 끌리는 마음을 애써 눌렀다. 내 미래를 빼앗아간 자가 내 부모가 아니라면, 내 부모역시 나와 똑같이 과거와 미래를 차압당한 사람이라면, 내 분노를 어디로쏟아부어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이었다. 부모를 적으로 생각하는 편이 훨씬 간단하고 편했다. - P40
제, 금매, 나를 바라보는 할머니의 늙은 눈에는 눈물 같은 것이 어려 있었다. 할머니와 길을 걸으면 흡사 과거의 터널을 지나는 기분이었다. 나는 할머니를 통해 이전에 그렇게 궁금해 하던 부모님의 과거로 향하는 열쇠를 찾은셈이었다. 이를 눈치 챈 부모님이 할머니에게 나 데리고 무슨 말 하지 못하도록 말씀을 드리기도 한 모양이었지만 할머니와 나의 은밀한 여행은멈춰지지 않았다. 역사란 세계사 책 속에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걷는 이 길, 내가 사는 이 반내골에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다는 게 신비로웠다. 구름위로 솟은 지리산을 볼 때면 가슴이 뛰었다. 어머니 아버지의 삶이 비로소 구체적인 형상을 띠고 다가왔다. 할머니의 말대로 공산당이 모두 잘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면, 설령 두 분 때문에 연좌제 정도가 아 - P55
니라 목숨마저 허용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내가 학교에서 배운 역사가 반쪽짜리 역사였거나 어쩌면 완전히 잘못된 역사인 것만은 분명했다. 영어단어와 수학공식은 배웠지만, 이승만과 박정희의 공적에 대해서는 배웠지만, 학교에서는 내 혼란의 일부분도 해결해주지 않았다. 왜 세상에는 차별이 있는지, 왜 나는 공산당의 딸로 태어나 불이익을 당해야 하는지, 할머니를 통해서 모든 것을 해결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할머니는 책에 씌어진 역사와는 다른, 보통사람들의 역사가 있다는 것, 내 부모는 그 역사의 와중에서 그것이 옳든 그르든, 없는 사람들의 세상을 건설하겠다는 신념으로 목숨까지 내던졌다는 것을 내게 알려주었다. - P56
아직도 한참은 더 자라야 할 몸에 걸친 양복과 구두가 생소했으며, 아이들이 거칠게 주고받는 말들 또한 내게는 낯설었다. 아마도 내가 하는말들이 내 고민들이 그 아이들 역시 낯설었을 것이며, 낯설 뿐만 아니라한심하고 화가 났을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이들은 내 앞에서 아무 말도하지 않았다. 수줍고 쑥스럽게 안부 인사나 할 뿐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세상 사람들 누구나 나와 별다를 바 없는 고통과 절망을짊어진 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내가 빨갱이 딸이라는 표지를 달고 울부짖을 때 반내골 아이들은 가난이라는 표지를 달고 나처럼미래와 희망을 갈가리 찢기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와는 다른 그아이들의 슬픔을 이해할 것 같았다. 반내골 아이들처럼 미래의 진로가 뒤바뀔 만큼은 아니었지만 나 역시 배고픈 고통은 알고 있었다. - P57
부잣집 애들만큼 돈을 쓰는 것은 결코 황새가 되는 길이 아니었다. 더초라한 뱁새가 될 뿐이었다. 나는 그걸 몰랐다. 그래도 나는 선택받은 사람이었다. 선택의 여지도 없이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구로공단이나 부산으로 떠나든가, 남의 집 식모가 되어야 하는 애들이 태반인데 적어도내게는 내 맘대로 되지 않는 미래를 한탄하고 고민할 여지라도 남아 있었다. 가난이라는 굴레는 빨갱이라는 낙인보다 더 무서웠다. 일상의 무료, 삶의 권태나 즐기던 내가 부끄러웠다. 삶이라는 것이 알지 못할 힘에 의해서 농락당하는 것이거나, 끝내는 모든 인연을 두고 빈손으로 떠나는 허망한 것일지라도 그저 물러나 있는 것은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 속에서 뭔가 내가 할 일이 있을 것 같았다. 세상을너무 성급하게 알려고 덤빌 필요는 없었다. 어른들이 읽는 책을 똑같이다 읽고 아무리 어른인 척해봐야 나는 고작 열여덟이었고, 세상을 다 알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다. - P58
처음엔 우리에게 닥친 재앙이 알 수 없는 힘 때문이라 믿었다. 분노의화살을 어디로 돌려야 할지 모른 채 덫에 걸린 산짐승처럼 날뛰던 나는그 재앙의 정체를 깨달아갔다. 현재의 쇠고기 소비량도 고려하지 않고 한꺼번에 다량의 소를 도입한 정부, 초지 조성의 가능성이나 도입 비육을위한 일체의 사전점검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초지 조성을 장려하고 도입우 비율을 권장한 정부, 도입부의 병 진단조차 못하는 실정에 병든 소를도입한 정부, 범인은 바로 정부였다. 이 무모한 정책이 독재권력의 장기집권을 위한 정치자금의 필요와 몇몇 특권층의 더 호화로운 생활을 위해필요했기 때문이라는 것, 그들에게 수많은 농민의 좌절과 고통쯤은 개똥만도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 P60
"세상엔 두 개의 계급 즉,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남의 노동을 착취해서살찌는 자와 자신의 노동을 팔아서 남까지 살찌우는 자밖에 없다." 나는 두 눈이 확 터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왜 세상을 거대한 덩어리로보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진 개인으로밖에 보지 못했던가. 나는 왜 세상이정체된 채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이 정체된 세상 속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인가. 자본주의가 봉건주의의 낡은 틀을 혁명으로 파괴했듯이, 체제 안에서 해결할 수 없는 모순도 있게 마련이었다. 노동자에 대한 착취로 유지되는 자본주의는 우리의 영원한 천국이 아니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했던 못 가진 자의 표지는 새로운 세상을 건설할 계급의 표지였고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표지였다. - P63
현실은 짐작할 수 없으리만치 풍부하고 다양했지만 결코 종잡을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의 세포에서 인간으로 진보했듯이 부조리한 모든것에는 반드시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다. 한때 나를 매료시켰던 카프카나카뮈의 부조리는 진실이 아니라 당시 시대적 상황의 즉자적 반영에 불과했다. 선생님이나 교과서나 고전이라는 문학작품의 대부분은 본질이 겹겹이 감춰진 현상만을 가진 자의 이데올로기를 가르치고 보여주었을 뿐이었다. - P63
세상을 이해하는 철학을 공부하고 우리 민족의 근대사를 알게 되면서나는 빨치산의 딸이라는 카인의 표지가 부끄러운 것도 죄스러운 것도 아님을 깨달았다. 부모님은 오히려 내게 가장 순결한 이름을 물려준 것이었다. 친일파의 딸도 아니고 제국주의를 등에 업은 매판자본가의 딸도 아니라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나는 대부분의 여성이 봉건적 인습에 묶여 있을 때 떨쳐 일어나 빨치산이 되었던 어머니의 딸이었다. - P63
거의 모든 동지들이 죽을 때까지 살려준 목숨이라면, 총알을 비껴가게해서 살려준 목숨이라면 스스로 죽을 때까지 내버려둘 수도 있었을 텐데! 물을 사람이 있다면 묻고 싶었다. 빨갱이라서 자식에게까지 거부당했던어머니, 이제야 겨우 그 자식이 어머니 품으로 돌아가는 마당인데 어머니를 떠나보내야 했다. - P66
그 틈틈이 두분은 돋보기를 끼고 책을 읽었다. 내가 사다드린 이태의 《남부군》이었다. 흐린 불빛 아래 일에 지친 몸으로 책을 읽으며 부모님은 간혹 울고 웃었다. 책에 적혀 있는 옛 동지의 이름을 발견하고 어머니는 몇날며칠 잠을이루지 못했다. 그것은 나와 관련된 일을 제외하고 어떤 일에도 좀처럼흔들리지 않던 부모님의 얼굴에 떠오른 최초의 감정이었다. 산을 내려온이래 가슴을 닫고 살아온 부모님들이 그 굳은 마음의 빗장을 열려는 것일까? 세상은 분명 좋아지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싸웠던 두 분에게는 너무나 느리고 더딘 걸음이었을지 모르지만, 세상에서는 봉인되었던 옛 이야기들이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노동자 농민들의 목소리가 힘을 얻어가고 있었다. - P67
"목적이 왜 없었겠냐. 더러 그런 사람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은그렇지 않았다. 조국을 미제의 손에서 해방시키고 노동자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었다. 휴전 무렵에 가서는 지리산을 무대로 한 무장투쟁이 사실상 불가능해졌고 기다리는 건 이름 없는 죽음뿐이라는 걸알았지만 그래도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우리가 다 죽으면 다음 세대가, 그리고 전 세계의 노동자가 함께 싸워 주리라고 믿었다. 그런 신념이 없었다면 어떻게 목숨까지 초개처럼 버려가면서 그 악조건을 견딜 수있었겠냐?" - P68
전남도당 조직부부장을 지낸 아버지, 그 유명한 남부군의 정치지도원을 지낸 어머니, 나는 두 분이 자신들의 과거를 두 발로 삼아 당당히 설 수있기를 기도했다. 그것이 사십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사상의 순결을 지켜내며 창살 안에서만 살아온 사람들을 위해 나와 있는 사람들이 할 수있는 최소한의 갚음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내 부모와 내 부모 같은 선배어른들의 과거를 복원하는 것, 그것은 바로 내가, 그리고 나와 같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해야 할 일이었다. 두 분은 부산하게 서두르더니 집을 나섰다. 7시, 반내골 산 위로 막 해가 솟고 있었다. 저 산으로 백운산과 지리산을 넘나들며 부모님은 역사와민족을 위해 젊음을 불태웠으리라. 그 산그림자 아래로 동지였던 아버지는 어머니를 부축하며 걷고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두 분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만나고자 하는 사람과 재회하길 빌면서, 그들의 재회가 결국울음바다가 되어 아직도 메마른 이 땅을 넉넉히 적셔주길 빌면서. - P70
멀리 지리산에도 아침햇살이 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산에서 땅을뒤흔드는 함성이 들려온다고 생각했다. 결코 패잔병의 함성이 아니었다. 4.19로, 80년 광주로, 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이어져 잠자는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소리였다.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지리산을 바라보았다. 산이점점 커지더니 불쑥 내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 산등성이에 내 부모가, 내부모의 얘기 속에서 혹은 역사책 속에서 말로만 듣던 수많은 사람들이 서있었다. 나는 그들을 그 함성을 뒤쫓기 시작했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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