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도 아픈 자식 얘기를 어디서든 후련하게 할 수 있었으면 울화가 풀렸을까. 조금 더 오래 살았을까. 동준 군 어머니 말씀에서 엄마가 감내한 외로움의 크기를 짐작한다. 피붙이인 나도 감정노동을 거부했다. 나 역시 인생 최대의 난국을 보내는 중이어서 같이 무너질까 봐 엄마를 더 피했다. 만약 어느 자리에서든 엄마가 위축되지 않고 괜찮은 척도 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슬픔을 떠들었다면, 듣는 사람들이 동정이나 입막음이 아닌 토닥이는 눈길로 들어주었다면 적어도 ˝자신의 존재가 통째로 세상에서 삭제되는 ‘시선의 차별˝을 겪진 않았을 것 같다.
동준 군 어머니는 자식이 그리울 땐 가끔 기사를 검색해 읽는다고 했다. 그렇게 아이를 기억하는 게 슬프지만 그게 세상과 자식 이야기를 나누는 방법인 것이다. 아이가 허술한 시스템에 의해서 죽었고, 그렇게 자식을 보낸 사람들은 아이를 배려하지 못한 세상과사람에 대한 분노가 있다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도 받아들이는 것도 자연스러웠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우리 엄마의 친척이, 동준 군 어머니의 친지가 그랬듯이 ˝악의없는 농담과 별생각 없는 자랑˝에 차별의 싹이 숨어 있다. ˝사회적으로 낙오자도 사회적 부적격자도 아닌 ‘선량한 시민‘인 그들이 차별 감정을 생산하고 있다.˝ 이처럼 ‘악독한 권력자‘가 아닌 ‘선량한 시민‘에 의해 생산되는 차별 감정이기에 이것을 해결하기가 어렵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방법은 이것이 유일하다. 자기 안에 숨은나태함, 눈속임, 냉혹함과 끊임없이 싸우기. ˝나는 차별하지 않는다는 확신에 빠져 있는 한, 나는 ‘옳다‘는 태도를 견지하는 한, 사람은차별 감정과 진지하게 마주할 수 없다.˝
어김없이 돌아온 슬픔의 달 4월, 타인의 아픔을 알아채지 못하는 나의 나태와 둔감을 경계하며 세월호에서, 세월호만큼 위태로운일터에서 침몰당한 이들과 자식을 잃은 부모들을 생각한다. 그들은어떤 표정을 지으며 숱한 자식 이야기가 오가는 그 쓸쓸한 자리를견뎠을까. p196,197
또 다시 이런 일이......
먹먹하다.
가을볕도 슬프다.

"행복이란 거의 없다. 나이 든 사람들은 그중에서도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는 더욱 그렇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노년에 자신의생을 되돌아본 많은 위인들은 자신들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합쳐보아야 채 하루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 <길 위의 철학자》의 저자 에릭 호퍼의 말에 나는 동의한다. 삶은 그저 살아가는 것이지 불행해지기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니듯 행복해지기 위해 사는 것도 아니다. 충족은 또 얼마나 금세 냉소로 식어버리는가. 읽고 쓰고듣는 일을 업으로 삼으면서 나는 삶의 ‘행복 불가능성‘을, 즉 그냥살아감 자체를 받아들였다. - P141
에릭 호퍼는 이런 통찰도 내놓는다. "우리는 일이란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해요. 이 세상에는 모든 이들이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의미가 있는 일이라는 건 있을 수 없어요." (190) 일이 의미 있기를 요구하는 것은 ‘인간의 몰염치‘라고 했다는 조지 산타야나의 말까지 덧붙이면서, 삶의 유일한 의미는 배움에 있다고 그는 말한다. 에릭 호퍼는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떠돌이 노동자 출신의 사상가다. 도스토옙스키나 몽테뉴의 저서를 거의외울 정도로 읽었고, 글을 쓰면서는 "제대로 된 형용사를 찾는 데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51)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은 무모함, 빠져나가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부어댈 때 잠깐의 흘러넘침, 그것이 사유의 결과물로 손 - P141
에 쥐여진다. 이 아름다운 낭비에 헌신할 때 우리는 읽고 쓰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부디 그 이공계 학생이 한번의 강좌, 몇 번의 시도로글쓰기에 좌절하고 물러나지 않았으면 한다. - P142
나는 작가라는 말이 여전히 어렵다. 뜻과 범주가 모호하다. 행위인지, 직업인지, 자격인지, 욕망인지, 존재 그 자체인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글 쓰는 사람‘으로 내 꿈을 구체화하고 실천했다. 주변에서는 작가로 활동하려면 문창과나 국문과를 늦게라도 가라고 권했지만,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기에 자격 요건을 갖추기보다 일단 쓸 수 있는 걸 쓸 수 있는 데에 썼다. 블로그에 에세이를 쓰고 <오마이뉴스>에 시민기자로 등록해 활동했다. 본 것, 들은 것, 한 것을쓰다보니 그게 사실과 경험에 기반한 논픽션이었다. 논픽션 분야는등단 제도나 절차가 없으니 내가 작가가 됐는지 안 됐는지 가늠할척도가 없었다. 그게 속 편했다. 작가라는 긍지 없이, 작가가 아니라는 결핍도 없이 쓸 수 있었다. - P144
작가를 꿈꾸는 학생에게 말했다. "쓰고 싶으면 빨리 쓰세요. 작가는 쓰는 사람이지 쓰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문창과간다고 작가의 길이 보증되고 경영학과 간다고 그 길이 봉쇄되진않는다. 가장 큰 장벽은 부모의 반대가 아니라 자기생각의 빈곤이다. 자꾸 몸에 들러붙는 생각, 솟아나는 얘기, 복받치는 불행이 아니라면 무엇을 쓸까. "나는 우리나라의 하고많은 불행을 보아왔다. 내가 보는 가난ㅡ나는 그걸 외면할 수가 없다." (129쪽)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에게창작 동력은 ‘하고많은 불행‘이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 현장을 지키면서 고통의 목소리를 기록했다. 나는 그들 책에서 큰 자극을 받는다. 하고많은 불행의 언저리를 서성이다 보아버린 것을 쓰고자 노력한다. - P145
작가가 되려면 얼마나 책을 읽어야 하느냐는 질문도 곧잘 나온다. 나는 네루다의 이 시를 읽어주고 싶다. "내가 책을 덮을 때 나는삶을 연다! 책들은 서가로 보내자, 나는 거리로 나가련다/나는 삶자체에서 삶을 배웠고, 단 한 번의 키스에서 사랑을 배웠으며/ 사 - P145
람들과 함께 싸우고/ 그들의 말을 내 노래 속에서 말하며 그들과더불어 산 거 말고는 누구한테 어떤 것도 가르칠 수 없었다. " <책에 부치는 노래 1> 중에서, 96쪽) - P146
하시 ㅊ읽고 쓰고 말하고 고치기의 반복. 이 고된 노역을 우리는 왜 자처하는가. 글쓰기의 목적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이렇게 정리해본다. 삶이 고차함수인데 글이 쉽게 써지면 반칙이다. 정확한 단어와 표현을 고심하다 보면 자신을 스스로 속일 가능성이 줄어들고, 몸을숙여 한 사람의 내면의 갱도에 들어가는 훈련으로 남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을 수 있다고. "모든 사물과 현상을 씨 - 동기 -로부터 본다" (김수영) 는 것,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 타인의 처지가 되어보는 일, 사람살이에 꼭 필요한이것을 교육받을 기회가 드물었던 우리는 글쓰기를 핑계 삼아 공부하고 있다. 꼰대 발언, 혐오 발언이 승한 시대에 말을 지키는 것은나를 지키는 것이기도 하니까. - P149
부모와 산다고 다 행복하지 않듯이 부모가 없다고 꼭 불행하지않다. 복지시설에서 사는 열다섯 살 아이의 비밀이 아픈 것이지, 그아이의 삶 자체가 슬픈 것은 아니다. 아침에 학교에 가고 아이돌 좋아하고 친구들이랑 싸우고 떠들고 치마 기장 줄이기에 연연하며 핸드폰 카톡에 정신이 팔려 있는 모습은 또래 아이와 다르지 않다. 부모의 부재를 무조건 동정하거나 차별하는 시선만 아니라면 아이가기죽을 일도, 거짓으로 둘러댈 일도 없다. 한 아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건 타인의 돌봄이다. 그 타인이꼭 부모일 필요는 없다. 부모이기도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인간은 나 - P162
약하고 흔들리는 존재다. 자식을 낳는다고 남을 돌볼 수 있는 육체적·정신적·경제적 상태가 자동으로 세팅되지는 않으며 세팅되었다고 한들 영원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아이는 무조건 친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식으로 혈연을 강조하고 모성에 대한 환상을 부풀리는방향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128쪽). 한 아이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든 신체적 온전함과 존엄성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후원금을 척척 내는 어른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부모님 뭐하시느냐‘다짜고짜 묻지 않는 어른이 많아져야 하고 이력서에 가족관계를 쓰지 않도록 하는 제도가 생겨야 한다. 이 세상에 ‘불쌍한 아이‘는 없다. 부모 없이 자란 자식이라는 굴레를 씌우고불쌍한 아이를 만들어내는 집요한 어른들이 있고, 정상가족이라는틀로 자율적 존재를 가두거나 배제하는 닫힌 사회가 있을 뿐이다. - P163
그날 우린 깔깔대다가 같이 울었다. 듣고도 믿기지 않는 실화. 구토가 치미는 정도의 기억. 가부장제 생존자의 증언은 왜 언제나새롭고도 새삼스러운가. 한 사람이 물꼬 터주면 "삭히거나 잊어야 하는 줄만 알았던 자신의 이야기 (278쪽)를 너도나도 꺼내놓는다. 그리고 거기에는 "참고 또 참는 사람, 남자가 하는 일에 토를 달지않는 사람, 남자와 아이들에게 궁극의 편안함을 제공하는 사람. 자기 욕구를 헐어 남의 욕구를 채워주는 사람, 자기주장이 없거나 약하므로 갈등을 일으킬 일도 없는 사람" (51쪽)으로 길러졌으나 이제 그런 자기를 들여다보는 사람으로 변신한 한 존재가 있다. 그저 말하고 있음. 단지 말하고 싶음. 나는 말해야겠으므로 쓰인 소설 한 권, 여성들의 삶을 정가운데로 놓은 이야기가 있어 참 다행이다. - P174
사건의 핵심 명제, 성폭력은 강자가 가까이 있는 약자에게 가하는 폭력이라는 것. 토르디스를 성폭행한 것이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었듯이, 내가 본 성폭력 피해자 가운데 90퍼센트는 아는 사람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 아버지, 삼촌, 이모부, 오빠, 선배, 친구, 담임선생님, 교수, 직장 동료, 남편 등등. 그들은 힘으로든 돈으로든지위로든 피해자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졌다. 이렇게 ‘믿을 수 있다고 여겨지는 이들‘로부터의 폭력이기에 여파가 크다. 피해자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바로 알아차리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토르디스는 말한다. "나는 네가 나한테 한 행동이 강간이라는 걸 몰랐어. 신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상처가 컸는데도 말이야." (192쪽) 가까스로 인지한 다음에는 가해자가 아니라 자기를 혐오한다. "첫 이성 관계에서 참혹하게 실패한 후로 나는 스스로의 판단을 믿을 수가 없었다." (23) 이는 피해자들이 공통으로 겪는 아픔이다. - P176
성폭력 피해 사실을 말하면, 왜 수년이 지났는데 지금 말하느냐는 반응부터 나온다. 시간은 만인에게 공평하게 흐르지 않는다. 이제 와서 말하는 게 아니라 이제 겨우 말하는 것이다. 친척에게 17세때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는 열일곱 스물일곱, 서른일곱 등 10년 단위로 악몽에 시달렸다. 그해마다 몸이 아팠고 일상이 무너졌다고했다. 고등학생 때 오빠에게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는 그 오빠의 딸이 결혼할 정도로 세월이 흘렀음에도 복수를 꿈꾼다. 조카의 결혼식장에 찾아가서 ‘사실을 폭로하는‘ 상상을 한다. - P177
《용서의 나라》를 읽는 내내 분노하고 의심하다 안도했다. 성폭력 사건이 믿기지 않는 것만큼 용서의 귀결도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저게 가능한가 싶었는데, 가능하게 되어가는 장대한 여정을 따라가면서 나는 성폭력 사건의 복잡성과 다층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용서는 신이 지급하는 쿠폰이 아니고 인간의 용기를 거름 삼아 자라는 나무라는 것. 가해자와 피해자, 공동체 구성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용기 내어 정성스럽게 가꾸어야 한다는 것 말이다. 살아 있음 자체가 용기다. "삶은 계속된다. 한껏 이용하라. 네가 가진 게 별로 없다 해도 삶만은 네 것이다."(451쪽)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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