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에게 다가오는 사랑의 기회에 관심이 많다. 이제껏 사랑을몇 번 해봤느냐는 물음을 실없이 던져보기도 한다. 상대는 거의 머뭇거린다. 사랑과 사랑 아닌 것의 기준 설정부터 간단치 않은 거다.
내게 사랑은 나 아닌 것에 ‘빠져듦‘ 그리고 ‘달라짐‘이다. 우연한 계기로 엮여 서로의 세계를 흡수하면서 안 하던 짓을 하거나 하던 짓을 안 하게 되는 일, 연애가 그랬고 공부가 그랬다. 이전과 다른 삶으로 넘어가는 계기적 사건이 사랑 같다. - P87

"사랑에 빠지지 않는 한 사랑은 없다."(151쪽) 사랑은 특별한 지식이나 기술이 필요치 않다는 점에서 쉽고, 자기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점에서 어렵다. 그러니 사랑을 얼마나 해보았느냐는 질문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다. 당신은 다른 존재가 되어보았느냐. 왜 사랑이필요하냐고 묻는다면, 비활성화된 자아의 활성화가 암울한 현실에숨구멍을 열어주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존재의 등이 켜지는 순간사랑은 속삭인다. "삶을 붙들고 최선을 다해요." (123쪽) - P91

평생 아픈 몸을 살았다. 그림자처럼 들러붙어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자기 고통에 매몰되어 살았기에 타인의 고통을 좀처럼 보지못했음을 그는 뒤늦게 자각하고 반성했다. 하지만 그토록 혹독한고통의 시간을 살아온 그이기에 배제와 차별, 불의와 불공정에 대한 남다른 예민함을 지녔을 것이다. 읽고 쓸 때 단어 하나 잣대 삼아자기 생각의 크기를 재어보고, 책 한권 거울삼아 자기 일상의 태도를 점검했던 그의 영전에 책 한권을 놓아드리고 싶다. - P95

‘노키즈존‘이라는 말을 보고 철렁했다. 개인의 시간과 공간이침해당하지 않을 권리를 내세우며 식당이나 카페에서 아이들 출입을 금한다는데 그 논리가 옹색하다. 우리는 누군가의 시공간을 침해하면서 어른이 됐다. 여전히 힘 있는 어른들은 자기보다 약한 자의 시공간을 임의로 강탈하면서 자기를 유지한다. 왜 아이들을 대상으로만 권리를 주장하는 걸까? 그래도 되니까 그럴 것이다. 나 역시 양육의 책임을 나누지 않는 어른(배우자)에게 가야 할 원망이 애꽃은 아이에 대한 부정으로 나타나곤 했으니까. - P100

인간사회는 민폐 사슬이다. 인간은 나약하기에 사회성을 갖는다. 살자면 기대지 않을 수도 기댐을 안 받을 수도 없다. 아기를 안고 공부에 나선 엄마처럼 폐 끼치는 상황을 두려워 말아야 하고 공동체는 아이들을 군말 없이 품어야 한다. 배제를 당하면서 자란 ‘키즈‘들이 타자를 배제하는 어른이 되리란 건 자명하다. 건강한 의존성을 확장해나가는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는 관계에 눈뜨고 삶을 배우는 어른이 될 수 있다. - P100

동한다‘로아무려나, 제 몸 써서 일한 사람들이 갖는 삶에 대한 통찰력, 남의 몫 가로채지 않고 자기 손 놀려 ‘저금통‘ 같은 갯벌 일구어 살아온 이들의 가뿐함, 그 와중에도 기역자로 굽은 허리를 펴 "누부리7곱과(노을이 고와) (98) 라며 감탄할 줄 아는 우아함을 배운다. 이 책의최고령 97세 소무의도 윤희분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농땡이가최고야. 젊어서 일 많이 하지 마시오. 늙어서 이렇게 아플 줄 알았으면 그렇게 안 했어. 젊었을 때는 뼈가 나긋나긋하니까 물불 안 가렸지, 농땡이가 최고야." (220) 짐승처럼 일하다가 벌레처럼 작아진 몸피에서 나온 사리 같은 말, 인간다움을 추구하기에 너무도 혁명적인 그 입말을 곱씹는다. - P104

‘엄마표 김치‘라는 말이 그리운 말에서 징그러운 말이 되어간다. 엄마의 자기희생이 강요된 말, 넙죽 받아먹기만 하는 자들이 계속 받아먹기를 염원하는 말이다. 어느 소설가의 문학관에는 대하소설을 쓰는 동안 사용한 볼펜과 원고지가 탑처럼 쌓여 있다고 하는데, 엄마들이 평생 담근 김치와 사용한 고무장갑을 한눈에 쌓아놓으면 어떤 붉은 스펙터클이 나올지 상상해본다. 어머니가 해주신밥과 김치 먹고 굴러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절대 가시화되지 않는이상한 노동, 피와 살로 스며서 똥으로 나가버리는 엄마의 땀. 부불노동unpaid work 으로서 가사노동의 불꽃인 김장.
한 동료의 엄마는 여든 살을 맞아 김장을 안 한다고 선언했다고한다. 늦은 은퇴다. 엄마들의 잇단 김장 파업 선언에 김치 난민이 속출하는 또 다른 겨울 풍경을 그려본다. - P107

우리가 배워야 하는 건 어머니의 은혜가 아니라 어머니의 고통이어야 했다. ‘평생 밥 당번‘으로 사느라 뼈가 녹는 고충을 당사자들은 제대로 말하지 않았고, 구구절절 말하지 않는 고통을 남들이 먼저 알아주는 법은 없다. 하지만 그 고통을 알아보는 능력이 부족하면 나쁜 어른으로 오래 늙는다. 살면서 제대로 배운 적 없지만 살면서 너무도 필요한 일이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기‘라는 걸 절감하던 나날에, 참고서 같은 책이 내게로 왔다.
"어린 나는 엄마에게도 무슨 사정이 있겠지 생각할 수 없었고,
엄마의 내부에서도 무너지고 있는 게 있을 거라고 마음 쓸 수 없었다. (…) 꼬박꼬박 월급을 가져다주는 건실한 남편과 크게 속 썩이지 - P109

않는 아들딸을 두고도 그럴 수 있다. 그런 걸 이제 나는 안다. 나는엄마의 삶을 이해하려고, 배웠다. 배운 사람은 그런 걸 이해하려는사람이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을."(13)시인 김현이 쓴 《걱정 말고 다녀와》라는 산문집이다. "엄마가술에 취해 내게 전화하지 않으면 좋겠다"라고 시작하는 이 책은 술에 취한 (아빠가 아니라) 엄마라는 낯선 존재를 드러내 밝힌다. 엄마가 되어본 것처럼, 저자는 다른 존재가 가까스로 되어본다. 애인의입장이 되어보고, 그날 보았던 한 남자의 입장이 되어보고, 카페를환하게 밝히는 어린 연인들의 입장이 되어보고, 오래된 수습사원이되어본다. 그리고 퀴어퍼레이드에 와서 북치고 고함치며 남의 축제를 방해하는 혐오세력의 입장이 되어본다. - P110

"아마도 스스로를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며 ‘비정상적인‘ 사람들을 비난하기 위해 광장으로 나왔던 사람도 지친 몸으로 애인을향해 갔을 것이다. 그는 애인과 뽀뽀했을까.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얼굴로 애인의 얼굴을 마주 보고 그날 자신이 보낸 ‘혐오의 하루‘를 말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 ‘뽀뽀하기 위한 하루의 얼굴‘을 어디 감히그런 얼굴 따위가 이길 수 있으랴. 나는 뽀뽀하는 사람으로서 모든혐오와 차별에 반대한다." (42)자신을 뽀뽀하는 사람으로 정체화하고 혐오세력의 뽀뽀 불가능성을 예측하는 장면은 통쾌하고, 글을 마무리하며 켄 로치의 영화 <다정한 입맞춤을 인용하는 대목은 진실의 무게로 묵직하다. 가 - P110

만히 응시하고 넌지시 되어보는 이야기를 풀어놓다가 켄 로치 영화를 막판에 무심하게 곁들이는데, 그것이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처럼 절묘하게 본문과 들어맞는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의 부제가 ‘켄 로치에게‘다.
"그의 영화는 보는 이에게 요청한다. ‘그들의 애인이, 그들의 가족이, 그들의 친구가, 그들의 동료가 되어보십시오. 그러니까 그들이 되어보세요.‘ 이때의 되어보기는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라는 가상 체험이면서 동시에 나는 과연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가를되돌아보는 현실 체험이다."(119) - P111

켄 로치의 ‘되어보기의 망토‘가 공용화되는 세상을 상상했다.
밥 먹는 사람이 밥하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기. 이때의 밥하기는여유 있게 놀다가 모처럼 하는 일회성 노동이 아니라 삼시세끼를차려내는 노동이 수십 년간 누적된 상태에서 중단 없이 이어지는반복성 노동이며, "견딜 수 없는 기분과 나락으로 떨어진 것 같은 감정이 때때로 찾아왔"(13쪽)을 때에도 몸을 일으켜 차려야 하는 모진노역이다. 숟가락 하나 더 놓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자리를 마련하고 입맛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일이다. 이런 찬찬하고 총체적인 ‘되어보기‘란 어떻게 가능할까.
"켄 로치의 재현은 많은 경우 본 것을 다시 보라고 요청한다" (36쪽)고 김현은 전한다. 엄마에게서 엄마를 지우고 한 인간으로 다시 보고, "가장 빨리 미화되고 가장 느리게 진상이 밝혀지는 가족에의 환상"(103)을 차분하게 마주하라는 충고다.  - P112

정확하게는 세월호 유가족 인터뷰집 《금요일엔 돌아오렴》의 문장들이 생각난다. 내 평생 목도한 비참의총화,그 불가해한 사건의 실체를 나는 이 책으로 이해했다. 번호가 매겨진 희생자가 아닌 한 명한명 아이들이 어떤 이름을 가졌는지, 하루아침에 자식을 잃었다.
는 건 어떻게 실감하는지, 슬픔이 정수리까지 꽉 찬 몸으로 살아가는 일상은 얼마나 휘청이는지, 대체 어떤 사건이 일어난 건지 부모들은 소상히 들려준다.
"전화로 미지 엄마한테 속옷서부터 팬티까지 얘기했지. ‘겉옷은무슨 색인데 이게 맞냐‘ 그랬더니 ‘맞다‘. ‘속옷은 땡땡이 입었는데이거 맞냐‘, ‘맞다‘. ‘팬티는 줄무늬에 뭐가 있는데 맞냐‘, ‘맞다."(54)미지 아버지 유해종 씨는 사고 한 달 만에 속옷 무늬로 딸의 시신을찾는다. 죽은 아이를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물. 무늬도 색깔도크기도 제각각인 속옷은 아이의 몸과 취향의 고유성을 나타내는 표지이자 엄마와의 내밀한 연결을 매개하는 유품이 된다. 아마도 미지 어머니는 일 인분만큼 줄어든 빨랫감에서, 보이지 않는 땡땡이무늬의 속옷에서 딸의 부재를 두고두고 실감할 것이다. - P116

소연 아버지 김진철 씨는 아이가 세 살 때부터 "도둑질만 안 하고" 다 해가며 홀로 아이를 키운 한 부모 가장이다. 세상에 딸하고나 둘만 남겨졌는데 잃은 그 아이, 딸의 장례를 치르고 집에 왔을 때소포가 와 있었다. "풀어보니 소연이가 인터넷으로 산 책들인듸 소설책과 참고서였어유. 그걸 보고 엄청 울었네요. 그 책들을 샀을 때 - P116

는 열심히 살려고 그런 거 아니여유. 근디 죽어버렸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겄시유." (96쪽) 그 책들은 결국 딸의 친한 친구에게 주었다고나온다. 짧게 언급된 한 줄 문장. 나는 그 행간에 오래 머물렀다. 너무 빨리 간 아이의 너무 늦게 도착한 책들을 안고 오열하는 아버지.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고, 책들을 건네주고, 살아 있는 딸의 친구를 보면서 부러움에 눈물짓고 소주를 들이켜다 쓰러져 잠들었을 아버지의 동선을 끝말잇기 하듯이 더듬더듬 그려보았다. 유통기한 없는 슬픔의 효소는 얼마나 오래 아버지의 술잔을 채웠을까. - P117

슬픔은 이토록 개별적이고 구체적이고 성가시고 집요하고 난데없다. 예습과 추론이 불가능하고 복습과 암기로 공부해야 하는과목이다.
나는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글쓰기 수업 교재로 자주 쓴다. 한국사회 모순과 부조리를 보여주는 사회학 교과서이자, 삶을 질문하게 하는 철학서,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다루는 문학 작품으로 더없다. - P117

"끼니는 김밥이나 샌드위치로 해결하면 그만이었다. 더 이상 절약할 곳이 없다고 느꼈을 때 나는 세미나 뒤풀이 모임에 빠지기 시작했고 친구들을 거의 만나지 않았다."(15)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을 경우, 메뉴와 가격을 선택하는 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195帝)
‘우리 때‘와 달리 혼밥이 왜 그리 유행하는지 잘 몰랐다. 요즘 청년들이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서 스펙 관리만 하느라 밥도 혼자 먹고 깍쟁이처럼 뒤풀이도 안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500원, 1000원이 고민거리가 되는 "굶주림이 익숙해진 삶을 채무자-대학생은 피할 수 없었다. "밥 한 끼에 마음 졸이며 눈치를 보는 삶 속에서 음식뿐만 아니라 생활의 전 영역에서 스스로 단속하며 살아간다."(196) - P123

 나는 가난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는 틀에 박힌 말로 위로했는데 저자는 나은 답을들려준다.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는문화가 부끄러운 것이다."(102쪽)

가난은 상대적이나, 한 존재에게서 중요한 것들을 뺏어간다. 밥부터 포기시키고 밥이 매개하는 관계와 건강을 무너뜨린다. 가난은말을 가로챈다. 감추고 싶은 것은 강제로 노출시키고, 말하고 싶은것은 들어주지 않는다. 먹고살기 바빠 일일이 사정을 말할 기회가없다. 설명도 간단치 않다. 저자처럼 수년을 공부하고 책 한권 분량의 구조적 분석을 마쳐야 제대로 이해시킬까 말까다. - P124

모든 존재의 행위는 저 살려고 하는 일. 여성학자 벨 훅스가 말한 ‘감정적 자기 절단‘이 남자들 생존에 유리한 시대가 있었다. 그긴 세월 부작용이 일상의 폭력을 낳았음을 미투 운동이 증명한다.
미투 운동이 일자 술렁이는 여자들에 비해 남자들은 잠잠했다. 참회하느라 그런다, 켕겨서 그런다, 조심하느라 그런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내가 볼 땐 몸치처럼 주춤했던 거 같다. 타인의 고통에 깊게개입하고 슬픔의 장단을 맞춰본 적이 없기에 언제 어떻게 끼어들어야 할지 모르는 상태. - P127

내가 아는 공감 방법은 듣는 것이다. 남의 처지와 고통의 서사를 듣는 일은 간단치 않다. 자기 판단과 가치를 내려놓으면서, 가령
‘왜 이제 말하느냐‘ 심판하는 게 아니라 왜 이제 말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해하려 애쓰면서, 동시에 자기 경험과 아픔을 불러내는 고강도의 정서 작업이다. 온몸이 귀가 되어야 하는 일. 얼마 전 본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당신이 할 말을 생각하는 동안 나는 들을 준비를 할 거예요." - P128

삶은 늘 우리의 경험과 인식을 초과한다. 문학으로 타인의 삶을상상할 수는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왜 결혼생활 10년이 넘도록 잘참다가 하필 그날부터 호텔로 갔는지, 기껏 가놓고 왜 그 방에서 아
‘무것도 하지 않았는지, 결혼 전 광고회사에서 일했던 ‘스마트한 여
‘성‘인데 어째서 이혼하지 않고 지리멸렬한 결혼을 이어갔는지, 매사합리적인 언어를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설명 불가능하다. 문학의 언어는 보여준다. 스스로 전개되는 삶을 통해 합리와 이성으로 기획된 세계의 빈틈과 모순을 드러낸다. 그래서 《19호실로 가다》의 첫문장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지성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수 있다."(277쪽) - P131

"밥 안 해놓는다고 자주 갈등 겪어, 잠자던 딸 둔기로 살해한 아버지". 어느 기사 제목이다. 노예제 사회도 아니고 2018년 1월 19일에한국에서 벌어진 일이라니 믿기질 않아서 몇 번을 읽었다. 여자가 여자라서 화장실 가다 죽고, 안 만나준다고 전 애인에게 죽고, 밤늦게다닌다고 남편한테 죽고, 미용실에서 일하다 죽고, 술자리에서 희롱당하는 뉴스가 연일 터지는 와중에 유독 충격이었다.
나는 밥에 대한 글을 참 많이 썼다. 뇌의 반이 밥(걱정)으로 차있어서다. 누구나 자신이 속박된 주제에 대해 쓸 수밖에 없다. 밥얘기를 쓰면서도 스스로 검열했다. 글감치고는 시시한 거 아닌가, 그깟 밥이 뭐라고, 나라의 명운이 걸린 것도 아니고…… - P132

여성혐오로 인한 죽음, 그리고 성폭력 피해는 주식 시세나 날씨처럼 매일 생산되는 뉴스다. 한샘 기업 내 성폭력 사건이 폭로된 게불과 몇 달 전이고,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벌어진 게 2년전이다. 누구도 들어주지 않아서 서사가 되지 못한 채 눈송이처럼흩어져버린 힘없는 여성 피해자들 이야기는 반도의 땅 곳곳에 설산을 이루고도 남는다.
우리가 무서워해야 할 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페미니스트가가리키는 여성이 처한 현실의 참담함이다. 여자는 밥하려고 태어나지 않았고 꽃처럼 꺾어도 되는 존재가 아닌데 밥 안 한다고 죽이고꽃 꺾듯 존엄을 꺾어버리는 무수한 사건들에도, 우리는 계속 놀라고 말리고 떠들고 분노해야 한다. - P134

난 그에게 공감 훈련을 위해 자신과 대화해보기를 권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가장 먼 존재라고 니체가 일갈했다시피, 가장 먼 타인인 자기 삶부터 들여다보고 자신과 소통을 시도하는 거다.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 싶다고 느낄 때 ‘왜?‘라고 질문하고, 좋음이란 무엇인지, 그것이 돈인지 관계인지 가치인지 정확하게 따지면서 글로 써보자고.
추상적인 다짐이 아닌 구체적인 상황을 예로 들어 복기해보면자기 감정과 생각. 욕망의 여러 층위와 갈래가 보이고, 나라는 사람은 하나로 정리되기 어려운 복합적인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자기에대해 섣불리 장담하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서 타인도 함부로 재단하기 어려워진다. 조심스러워지는 일은 섬세해지는 일. 그렇게 내 판단을 내려놓고 남의 처지가 되어보는 게 공감의 시작이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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