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사람의 말들이 내게로 온다. 한번은 역전 식당에 국밥 한그릇 먹으러 들어갔는데, 독상을 받아놓고 밥을 먹는 내 등 뒤로 주방 이모와 주인아주머니의 구성진 남도사투리가 윙윙거렸다. 스마트폰으로 행선지인 도서관 위치를 찾던 나는 한 대목에서귀가 번쩍 뜨였다. "그 여자가 얼마나 예쁜지 가을 고등어처럼 반짝반짝해야." ‘가을 고등어!‘ 나는 얼른 지도창을 빠져나와 검색창을 열었다. ‘가을 고등어 낚시‘가 연관 검색어로 뜬다. 가을 고등어는 다른 계절에 비해 지방이 올라 고소한 맛이 극에 달한다고 한다. 물오른 등 푸른 생명체라니. 싱그러운 말의 파동이 그대로 전해왔다. - P5
글을 써도 고통스럽고 글을 안 써도 고통스럽다. 그러면 쓰는게 낫다. 뭐라도 하다 보면 시간이 가니까. 슬프지만 일을 하고, 슬픈데도 밥을 먹고, 슬프니까 글을 쓴다. 그렇게 하루를 보냈으면 내일도 살 수 있다. 서툴더라도 자기 말로 고통을 써본다면 일상을 중단시키는 고통이 다스릴 만한 고통이 될 수는 있다. 그러므로 우리뭐든 써보자고 하면 저마다 무언가를 쓰기 시작한다. - P6
아름답거나 아릿하거나, 날카롭거나 뭉근하거나 타인의 말은나를 찌르고 흔든다. 사고를 원점으로 돌려놓는다. 그렇게 몸에 자리 잡고 나가지 않는 말들이 쌓이고 숙성되고 연결되면 한 편의 글이 되었다. 이 과정을 꾸준히 반복하면서 남의 말을 듣는 훈련이 조금은 된 것 같다. 무엇보다 큰 수확은 내가 편견이 많다는 사실을 안것이다. 그렇게 책을 읽어도 이 모양인가 싶어 자주 부끄러웠다. - P7
핍보다 과잉이 들야 온전히 들리기 때문이다. 타인의 입장에서는 일이 잘될 때도 있고 안될 때도 있지만 적어도 노력하는 동안 성급한 추측과 단정, 존재의생략과 차별에 대한 예민성을 기를 수 있었다. 우리에게 삶을 담아낼 어휘는 항상 모자라고, 삶은 언제나 말보다 크다는 것. 이 예정된 말의 실패에 대해 황현산은 《말과 시간의 깊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제 정신에 들어있는 내용을 말로 소통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말이 그 정신 내용을 다소통시키는 것은 아니다. 말은 복수의 인간을 상정하지만, 정신에는 한 개인에게만 특수하게 해당되는몫이 항상 남아 있다." 나의 편견을 확인할 때마다 나의 소망은 구체화됐다. 모두를 설득하는 글보다 "한 개인에게만 특수하게 해당되는 몫"을 놓치지 않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다. - P8
"한 사람 한 사람 대단해 보여요." 같은 고백들. 물증은 없지만 말하자면 그렇다. 본디 글쓰기에는 한 사람 인격의 최상의 측면이 발휘되는 속성이 있다. 그 글이 나의 생각과 행동을 잡아준다. 한 사람을사연과 이야기의 존재로 바라보면 존경스럽다. 나는 길에서 만나는사람들을 틈틈이 관찰한다. 야쿠르트 아줌마, 버스 운전기사, 학원가는 아이를 보면서 저이는 어떠한 삶의 사정과 행로를 거쳐 지금여기에 있을까 상상한다. 한 사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적어도 무작정 혐오하기는 어렵다. 누구라도 그러리라 생각한다. 서로 아무런삶의 연결고리가 없을 때 더 쉽게 혐오하지만, 서로의 삶이 한 자락이라도 섞이면 이해하고 공감할 여지는 꼭 생긴다. - P9
그런 측면에서 글 쓰는 일은 좋은 직업 같다. 나는 인터뷰를 하고 글쓰기 강의를 진행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의 깊고 내밀한 이야기를 많이 듣는 편이다. 삶을 위무하고 지혜를 안겨주는 보석 같은 이야기들을 선물 받는다. 혼자만 알기 아깝다. 이야기 전달자로서 책임감을 느낀다. 소설가 위화도 "작가란 집시들의 말을 빌리자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돈을 받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 P10
그렇게 불확실한 날들을 10년쯤 보내고서야 문득 깨달았다. 그어정쩡함이 글쓰기의 동력이었음을. 글 쓰는 일은 질문하는 일이다.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고 혼란스러워야 사유가 발생한다. 좋은 글이란 무엇인지, 아이가 잘 큰다는 것과 좋은 엄마가 된다는 건 어떤건지 온통 혼란스러웠고 그럴 때마다 하나씩 붙잡고 검토하며 써나갔다. 쓰는 과정에서 모호함은 섬세함으로, 속상함은 담담함으로 바뀌었다. 물론 글쓰기로 정리한 생각들은 다른 삶의 국면에서 금세헝클어지고 말았지만, 그렇기에 거듭 써야 했다. 어차피 더러워질걸 알면서도 또 청소를 하듯이 말이다. - P18
"춤추는 별을 잉태하려면 내면에 혼돈을 지녀야 한다"라는 니체의 말대로, 불확실한 삶의 긴장 상태는 글쓰기 좋은 조건이라고, 우리는 또 대부분 그렇게 산다. 주변을 봐도 고시 합격생보다는 준비생이 많다. 고액 연봉에 승승장구하는 직장인보다는 비정규직이나 아르바이트노동자가 다수다. 연인 관계도 팽팽한 사랑 감정을 느낄 때보다 지리멸렬하고 느슨해서 친구인지 가족인지 헷갈리는 시기가 길다. 그러니 어정쩡한 상태를 삶의 실패나 무능으로 여기지 말자고 했다. - P19
"어떤 감정이입은 배워야만 하고, 그 다음에 상상해야만 한다."(1574) 구원은 과거에 있다. 엄마가 되면서 상실한 ‘아이적‘ 감각을 복원하기. 이를 위해서는 엄마가 쓴 자식 양육서를 읽느니 딸이쓴 엄마 이야기를 보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환경운동가이자 작가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 앞부분에 나오는 엄마의 이 - P24
야기는 그런 점에서 귀했다. 사실 딸의 금발과 눈썹을 질투하는 엄마는 보편적이지 않다. 전래동화 캐릭터처럼 오싹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시기심이라는 "감정을 이성적 명분으로 바꾸고 명분을사실로 바꾸는" 어머니, "내 삶에 분노를 쏟아내는" "나를 단한 번도 알아보지 못한" 저자의 어머니는 내 모습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나도 종종 딸을 향한 불안함이라는 감정을 기정 사실로왜곡할 때가 있고, 나의 풀리지 않는 화를 아이에게 퍼붓기도 한다. 보고 싶은 면에만 초점을 맞추니 있는 그대로의 아이를 본 적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으로 ‘연구 대상‘ 엄마를 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딸의 지적여정을 함께 하고 난 후, 나의 꿈은 정교해졌다. 스스로 좋은 엄마라고 착각하지 않는 엄마 되기, 아이의 눈에 비치는 내 모습을 수시로그려보기. 그저 고양이처럼 말없이 아이 주변을 어슬렁거리기. - P25
좋음과 나쁨의 전복이 아닌 규범의 용도 폐기. 누구도 소외되지 않으니 배려도 필요치 않은 상태. 누가 결혼했든 이혼했든 합격했든실직했든 발병했든 서툰 연극 배우처럼 구는 짓은 이제 그만이다. 나이 들면서 체지방이 늘 듯 안 쓰는 핸드폰 번호가 쌓인다. 번호는 정리해도 인연은 삭제되지 않고 내가 피해도 삶이 만나게 한다. 사는 동안 운명을 뒤바꿔놓을 결정적인 만남은 거의 일어나지않겠지만 신상 정보 업데이트가 안 된 지인들과의 애매한 만남, 아니 마주침은 종종 일어날 것 같다. "우리의 인생은 (.…) 어릴 적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고, 협소하고, 단편적이다."(116) 이 단편적 만남, 하찮은 우연에 잘 임하고싶다. 안색을 살피고 고요를 챙길 것. 앞으로 수차례의 결혼식과 장례식 그리고 무수한 대중교통 탑승 기회가 남았다. - P30
저자의 일침대로라면 육성만 담지 말고 울림과 떨림까지 담아야 하고 그것은 "무언가를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의 저항"으로 가능하다. 이 무위의 글쓰기라는 경지는 아득하지만 일단 쓰기에 대한 열망으로 조급해진 마음은 누그러뜨려준다. 무언가를 즉각적으로 수행하려는 욕심을 무너뜨리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힘을 다스리라는 글쓰기의 이정표 앞에서 나는 또 가던 길 멈추고 숨을 고른다. 글이 불이 되는 글쓰기를 해낼 재주는 없지만 쓰면서 알아가고싶다. 전업 작가가 되고 싶으면, 혹은 되었다면 하루에 이삼십 장씩쓰라는 말보다 이쪽이 더 윤리적이며 매혹적이고 현실적이다. 이미글이 범람하는 시대에 제면기에서 면발 나오듯 줄줄 써대는 게 능사는 아니며, 그렇게 능력을 행위로 소모하다간 4대 보험 적용도 안되는 무명 작가로 과로사하기 딱 좋다는 자각이 아주 세게 드는 조언이다. 고마워요, 아감벤 씨, - P34
수레는 늘 엎드려서 네 발로 무지랑 눈을 맞추었다. 이것이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 "되기"인가. 자신의 고정된 위치를 버리고 다른 존재로 넘어가기. 한 사람의 놀이 능력은 곧 교감 능력이자 변신 능력이고 사랑 능력이나 다름없었다. 고양이는 만져지는 자연이다. 무지는 명당자리를 용케도 발견한다. 외출에서 돌아와 겉옷을 벗자마자 손 씻고 오면 그새 외투 위에 왕처럼 앉아 있다. 목도리 · 스카프부터 쇼핑백 · 책까지 폭신하든단단하는 보드랍든 뭐든 한 겹 깔고 본다. 커튼 사이로 한줌 별이 들면 그곳이 아무리 손바닥만 할지라도 몸집의 표면적을 최대화해 누린다. 볕을 모은다. 무지를 보면서 알았다. 나는 고양이를 싫어한 게아니라 고양이 키우는 걸 싫어했던 거구나. - P37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여섯 살 여자아이 ‘무니‘의 무지갯빛 표정이 화면을 꽉 채운다. 싸구려 모텔에서 단기투숙자로 미혼모 엄마와 사는 아이는 가난과 결핍의 공간을 생성과 자극의 놀이터로 만든다. 이 낙담하지 않는 악동은 자신의 신묘한 능력을 고백한다. "난 어른들이 울려고 하면 바로 알아." 엄마의 기후 변화를 귀신같이 감지하는 것도 아이고, 어떤 절망에 빠졌어도 라면 수프 같은 복원력으로 생기를 되찾는 것도 아이다. "고통이 아픔을 준다는 것이 고통에 반대하는 논거가 될 순 없다"는 니체의 말을 생각한다. 인간은 최악의 상태에서 진정한 통찰과 만난다는 뜻이다. 한부모 가정 아이는 불행하다기보다 예민하다. 그 예민함의 촉수로 무니가 타인의 슬픔을 포착하듯, 또 다른 무니들이 삶의 무수한 장면을 읽어내고 속 깊은 글을 써내는 걸 나는 본다. 그래서 묻게 된다. 이혼은, 한부모 가정은, 누구의 무엇을 언제를 기준으로 결핍이고 약점인 것이냐고, 나와 내 친구가 오매불망걱정했던 그 작았던 아이들은 자기 고통을 응시하고 기록하는 사람으로 옆에 있다. - P42
소설을 읽다보면 바틀비가 답답하고 불안하다. 제 발로 사무실에 들어갔으면 일은 해야 하지 않나, 안 할 거면 왜 안 하는지 적어도 이유는 말해야 하지 않나, 그래도 살아야 하지 않나 싶은데 그 모든 걸 안 하고 ‘끝‘까지 버틴다. 그런 행동에 대한 속 시원한 해명 없이 소설은 장탄식으로 끝난다.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 (102쪽)그 허탈함, 황망함, 난감함, 쓸쓸함 속에서 사유가 일어난다(좋은 소설인 것이다). 나는 내 생각을 생각했다. 처음엔 바틀비가 이유도없이 일하지 않는 게 이상했는데, 아니다.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을 그토록 열심히 하는 게 이상하다. 바틀비는 왜 자기 생각과 입장을 설명하지 않을까 궁금했다가, 그럼 나는 구구절절 말함으로써 타인을 이해시키고 타인으로부터이해받은 적이 얼마나 있었는지 회의가 들었다. 말하는 대로 이해받는다는 믿음이야말로 헛것 아닌가……… - P45
그간은 글쓰기를 열렬히 원하는 이들만 만났다. 만사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그러다 비자발적 집단과의 수업에서 난관에 봉착했고 그 와중에 나는 얼굴이 자주 화끈거렸는데, 평소 목소리 없는자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글을 쓰고 싶다고 떠들고 다닌 게 생각나서다. 실상은 목소리 없는 자를 좀처럼 못 견디고, 논리적 전개가 아니면 상황 이해에 서툴고, 원활한 목표 달성에 방해가 되면 구성원을 제쳐두기도 하는 사람이 나였다. 우선은 불안과 조급 없이 목소리 없는 이들과 ‘그냥 있는‘ 연습부터 해야 했던 것이다. 합리성으로 포획되지 않는 삶, 실패로서만 확인되는 앎이 있다. 그것은 나를 원점으로 돌려놓는다. 아내의 병을 고치겠다는 의지가확고한 남편이 정작 아내의 말을 듣지 못하듯이, 어떤 목표에 사로잡히면 사람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성실함의 중단, 합리성의 거부를 실천한 바틀비처럼 나도 성실함과 합리성의 스위치를 몸에서 꺼두어야 할까보다. 그래야 사람이 보일 것 같다. - P47
이 낯설고 익숙한 상황, 이야기의 전후 맥락을 살피기보다 자신을 불쑥 내세우는 남성성의 노출에 난 또 찔렸다. 이번엔 정신을 집중해 말했다. 내 몸을 통과한 폭력의 기억에 대한 가치 폄훼를 바로잡아야 했다. 당신의 발언은 내가 폭력의 당사자여도 문제, 아니어도 문제다. 용기 내어 자기 아픔을 터놓고 그 아픔에 같이 아파하고감응한 사람들에 대한 결례이자 업신여김이다. 폭력의 피해를 개인의 박복과 불운으로 취급하는 것, 수치심을 심어주어 침묵을 강요하고 사적인 문제로 돌리는 관습이 얼마나 많은 폭력을 양산하고방치하는지가 오늘 강의 주제라고 정리해주었다. 물론 냉정하거나 초연하지 못했다. 맥없이 터진 눈물을 꾹꾹 누르며 말했고 그는 주저 없이 사과했다. 자신이 강의 중간에 들어와서 앞의 이야기를 못 들었고 인문학을 배운 지 얼마 안 돼서 잘 몰라그렇다는 말도 덧붙였다. 선량한 눈매를 가진 그의 사과를 의심하진 않지만 변명을 듣고 나니 그의 언행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강의 내용 파악이 어렵고 공부가 부족하다고 여기면서도 스스로 말하도록 허락했고 기어코 한 수 가르치려 들었으므로, - P51
리베카 솔닛은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에서 자신의 경험을 고백한다. 한 여성이 결혼하지 않는 이유를 학대하는 아버지를 둔 탓으로 단정하는 저 장면은, 한국사회의 장대한 폭력에관한 서사를 한 여성의 트라우마로 간단히 환원해버리는 목소리와겹친다. ‘남자도 돈 버느라 힘들다.‘ ‘남자도 설거지 한다.‘ ‘남자는 여자를 위해 목숨도 던질 수 있다.‘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구구절절한 말하기는 (여성이 그렇다는 걸 알았다가 아니라) 남자는 이렇다는 걸 알아달라는 한 줄 요약으로 돌아오곤 한다. 이런 반복적인 상황이 나의 역량이나 경험 부족 탓이 아닐까 자책했으나 솔닛의 사례와 연결되니 보편적 젠더 현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 P52
"남자들은 감정이입의 범위를 넓혀서 다른 젠더와 자신을 동일시해보라는 요구를 받지 않는다. 백인은 유색인종과는 달리 다른 인종에 동일시해보라는 요구를 받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지배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은 곧 자신만을 볼 뿐 남들은 보지 않는 것이다." (89) - P52
태어나면서부터 여성은 침묵하는 법을 익히고 남성은 감정을도려내는 법을 배운다. 그렇게 가부장제는 인간 본성을 왜곡시키고그 하자와 결함을 체화한 젠더 역할 수행을 윤활유 삼아 굴러간다. 말하기를 익히지 못한 여성이 공감을 배우지 못한 남성과 동료시민으로 살아가자니 여기저기서 삐걱거리고, 맞추어 살자니 공부가 끝이 없다. 난 강연 중 눈물바람이 세 번째다. 두 번은 말하다가 혼자 울컥했다. 더 울어야 할 것이다. 내 나약함을 혐오하지 않기 위해 목표를바꾼다. 울지 않고 말하는 게 아니라 울더라도 정확하게 말하는 것. "내 내면에 대한 권한을 스스로 가짐으로써 다가오는 침입자에 맞서서 훌륭한 문지기가 되는 것, 최소한 ‘왜 그런 걸 묻죠?‘라고 재깍되물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19쪽) - P53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난 그래도엄마가 됐을 거 같다. 아이를 무작정 좋아하는 데다가, 한 생명을 키우는 데 필요한 재화와 노동의 총량에 대한 정보를 알더라도 구체적인 실감은 어려우니 용감하게 출산의 길을 가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 놓고 여전히 생일날 온전한 식사를 위한 외출권과 효행 미역국을 요구하며 1인 시위를 하는 심정으로 살았으리라. 이러한 내 부산스러운 행동과 생각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낳을자유‘다. "부모를 골라서 태어날 수 없는 아이들의 평등을 지켜주는공적 자원 "281쪽)과 "아이를 낳지 않고 싶은 여성이 비난받지 않을 자유"(283쪽)가 확보된 상태. 특정 상대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헌신하지 않는 관계 맺기가 가능하도록 가족제도가 개선될 때까지, 나는 무한한 모성을 강요하는 세상의 모든 면접관들에게 말씀드릴 작정이다. 엄마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 - P57
결국 딸은 원하는 학교에 원서를 넣었다. 네 상식과 내 상식의다름, 자기 불안의 겨룸, 상호 애환에 대한 무지, 욕망의 투사, 필요의 거래가 얽히고설킨 복잡한 관계. 엄마와 딸. 그러나 패자가 정해진 싸움이다. "부모가 원하는 자리로 되돌아오는 자식은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아이는 내 자식이고 나는 그 애의 부모이고, 그 사실만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196쪽) 작은 인간‘의 태를 벗고 세상의중심으로 나아가는 딸아이에 비추어 ‘왜소해진 나‘를 본다. 더는 작지 않은 아이가 더는 쪼그라들고 싶지 않은 엄마를 흔들어 깨운다. - P72
"지금까지 제 글이 이상하고 못났던 것은 배움이 부족해서라고생각했어요. 필사를 하지 않아서, 단어를 많이 몰라서, 독서량이 부족해서. 그게 아니더라고요. 나를 생각하지 않아서였어요. 나를 바라볼 수 있을 만큼의 고독과 외로움이 괴로워서. 그럴 때 늘 찾았던친구들, 드라마, 영화, 책이 문제였어요. 나 자신과 생각보다 서먹한사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글쓰기에 대한 귀한 깨우침이 담긴 고백이다. 나는 수업과 강연을 진행하면서 사람들이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것, 아니 자기 삶을진득하게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는 걸 자주 느낀다. 그래 본 적이없어서인 것 같다. 한국에서 입시제도 위주의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에게 글쓰기란 남에게 평가받는 일이다. 출제자의도에 부합하는표준화된 ‘답‘을 찾다 보니 자기로부터 멀어지고 남의 사고에 집중하는 연습을 꾸준히 하게 된다. - P74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글을 쓰는동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발견합니다. 글을 써보지 않으면 자신이 무엇을 쓸 수 있는지, 무엇을 알고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48쪽) "미리 어떤 것을 써야지 생각하고 머릿속에 준비해둔 원고를 ‘프린트아웃‘한다고 해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218쪽)글쓰기를 시작하는 용기, 그리고 방법은 내 안에 있다. "자기 자신을 단서 삼아 이야기를 밀고 나가" 32 야 글쓰기에 힘이 붙고 논의가 섬세해지면서 자기의 고유한 목소리가 나온다. 엄마에 관한글쓴이의 고백처럼 우리는 ‘생각보다 자신에 무지하고 자기와 서먹하기에, 글을 쓰면서 나를 알아가는 쾌감도 크다. 그렇게 마음을 다쏟는 태도로 삶을 기록할 때라야 "신체에 닿는 언어"를 낳고 "그런언어만이 타자에게 전해" (311쪽)진다. - P75
‘나는 왜 엄마만 미워했을까‘라고 글을 쓰는 딸이 어딘가에 있고, 다른 한쪽에는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지 않아도되는가‘를 생각하며 육아법을 설계하는 엄마가 있다. 저마다 속상하고 답답할 때마다 한 줄 한 줄 길어 올린 글쓰기로 자기 언어를 만들어가는 풍경을 그려본다. 그럴 때 존재를 옥죄는 말들이 "인정과 도리에 맞는 언어로 교체되고 세상이 좀 더 살만해질 거란 믿음이 내겐 있다. "그것은 채점자 앞에 제출한 ‘답안‘이 아니라 될수록 많은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이기 때문"(303쪽)일 것이다. - P77
이것이 눈물의 완창인가 박연준 시인이 친구 앞에서 마음 푹 놓고 실컷 울어댄 일이 있는데 그걸 두고 친구들이 "완창" (판소리의 한마당을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는 일)이라 부르며 놀렸다고 한다. 한 세월떠나보내는 느낌, 사연 한편 완성되는 느낌으로 더없는 표현이다. 요즘 나는 해일처럼 밀려오는 감정에 익사당하지도, 폭포 같은눈물에 잠식되지도 않는다. 재무구조가 개선되지는 않았지만 집은넓어졌고 조용히 울 수 있는 방도 생겼는데 예전보다 덜 운다. 나이들면 머리숱이 줄고 생리 양이 줄듯이 눈물도 줄어드는 걸까. "가끔그때가 그립다. 이제는 체력이 달려서 그리고 그만큼 슬프지가 않아서 완창을 할 수가 없다. 살면서 완창은 그리 자주 오는 것이 아닌가 보지?" (50)한 세월이 갔다. 눈물도 잦아들고 눈물의 목격자도 떠났다. 멀리서 지켜봤을 거 같다. 내가 모처럼 사연 있는 여자처럼 한바탕 운그 사연을 나의 스물두 살 자동차는 알리라. - P80
궁극적으로는 영웅이 필요 없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나는생각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 다양한 면이 있다. 이러한 선과악의 복잡다단한 조합은 고정된 상태에 머물지 않는다. 인격은 극히 다양한 속성의 복합체일 뿐만 아니라 그 속성들은 해마다, 심지어 시간마다 달라진다." (82쪽) 그렇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허물과 결핍의 존재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우상이 된다는 건 한 사람이 단순화·고정화·신화화된다는 뜻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현명하게도 인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그날 그는 용감했다." - P82
자신이 용감해지는 자리를 알기. 내가 글을 쓰는 이유도 이것이다. 글을 쓸 때 나는 그나마 용감하다. 글 바깥에선 비겁하고 부산스럽지만 글 안에서만은 일관되고 침착하려 애쓴다. 글과 삶의(불일치는 내 삶의 영원한 화두다. 잘 존재하는 방법은 어렵고, 글쓰는 내가 가장 나으니까, 삶에서 그 비중을 늘리는 전략을 일찍이짰다. 글쓰기 수업도 그 일환으로 재밌게 하고 있다. 학인들은 매번말한다. "우리 수업에 ‘좋은 사람들‘이 정말 많이 와요." 그러면 내가정정한다. 좋은 사람들이 오는 게 아니라 여기서는 우리가 좋은 사람이 되는 거라고. - P83
서로가 경쟁자 아닌 경청자가 될 때, 삶의 결을 섬세하게 살피는 관찰자가 될 때 우린 누구나 괜찮은 사람이 된다. 대인배라도 된듯한 그 착각이 좋은 글을 쓰게 하는 동력임은 물론이다. "작가란 최상의 순간에 자기 인격의 최상의 측면을 갖고 주로 글을 쓰고 실제로도 그래야 한다."(83) 저마다 삶에 몰입하고 자기 인격의 최상을만나는 횟수가 잦아지면 우상의 존재도 자연 소멸하지 않을까.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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