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를 피워올리는 꽃은 쓰다

                            김태정

  청매화차라니

  나같이 멋없고 궁색한 사람에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청매화차

  무슨 유명한 다원에서 만든 것도 아니고

  초의선사의 다도를 본뜬 것도 아닌

  이른 봄 우이동 산기슭에서 우연히 마주친,

  모래바람에 휘날리던 꽃잎 한 주먹 주워

  아무렇게나 말려 만든 그 청매화차

  한 사나흘 초봄 몸살을 앓다 일어나

  오늘은 그 청매화차를 마셔보기로 한다

  포슬포슬 멋대로 말라비틀어진 꽃잎에

  아직 향기가 남아 있을까

  첫 날갯짓을 하는 나비처럼

  막 끓여온 물 속에서 화르르 펴지는 꽃잎들

  갈라지고 터진 입안 가득

  오래 삭혀 말간 피 같은 향기 고여온다

  누군가 내게 은밀히 보내는 타전 같기도 해

  새삼 무언가 그리워져 잘근잘근

  꽃잎 한점을 씹어보았을 뿐인데

  입안 가득 고여오는 꽃잎의

  은근하게도 씁쓸한 맛

  꽃잎의 향기는 달콤하나

  향기를 피워올리는 삶은 쓰거웁구나

  청매화차라니

  달콤하고 은은한 향기의 청매화차라니

  삶이 초봄의 몸살 같은 마흔은

  향기를 피워올리는 꽃잎의

  쓰디쓴 맛을 사랑할 나이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 2004)]중에서

  "청매화차라니/ 나같이 멋없고 궁색한 사람에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청매화차" 이 구절은 입안에 오래 남아있는 향기처럼 마음에 남는다. 매번 읽을 때마다 그렇고 가끔 나와 어울리지 않을 어떤 장소에서도 문득 떠오른다. '청매화차라니'는 가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한 체념과 포기의 상징 같은 것이다. 감정이입을 쉽게 하는 나는 시인의 "청매화차라니/ 달콤하고 은은한 향기의 청매화차라니/ 삶이 초봄의 몸살 같은 마흔은/ 향기를 피워올리는 꽃잎의/ 쓰디쓴 맛을 사랑할 나이"에서 무너진다. 마흔의 나를 다시 만나는 것 같다. 시인의 생애는 '향기를 피워올리는' 거기 멈춰있고 (벌써 11주기가 지나간다.) 나는 여전한 진행형이지만 진행형일 뿐 '쓰디쓴 맛'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가을이면 단풍을 만나듯 시집을 만나본다. 시를 음미하듯 몇 편 읽고 나면 마음이 수굿해진다. 가난한 저녁도 힘이 된다.

  지난 주말은 웨딩홀 뷔페에서 접시 빼는 알바를 했다. '웨딩홀'이나 '뷔페'는 손가락도 남을 만큼의 내 일상에서 '청매화차라니' 같은 장소이고 어리버리한 신입 알바에게는 뒤섞인 음식 냄새만으로도 허기를 채울 수 있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은 다르다. 다른 기억으로 남는다. 화려한 음식들과 떠들썩한 '뷔페'의 구석에서 고개를 묻고 허기를 달래는 많은 종사원들 사이에 끼여 덜 불은 컵라면에 식은 김밥을 먹었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제 몫의 삶을 살아갈 때 '달콤하고 은은한' 세상은 구현되는 것이다. 모두 같을 필요는 없다. '다름'들이 모여 세상을 이룬다.




  두 아이가 있다.

  첫아이는 '캄보디아, 푸옥'의 아이였는데 이사를 가면서 헤어졌다.

  두 번째 아이는 '말리, 사모리'의 아이였는데 올해 성년이 되어서 자립하게 되었다. 셋째는 '에티오피아, 하브로'의 아이와 만나게 되었고 이제 네 번째 아이의 사진을 어제 받았다. 어떤 아이가 올까 궁금했는데 '말리, 베마'의 이제 5살이 된 아이다. 사진을 보내려고 제일 좋은 옷으로 차려입고 여러 사람 앞에서 사진을 찍혔을 아이는 멀뚱한 날 것의 표정이다. 반갑고도 고맙다.

  후원자라고 하기에는 성의 없고 게으른 편이다. 1년에 한 번 선물을 보낼 뿐이고 편지는 아예 쓰지 않는다. 처음 두 아이 모두 헤어지게 되면서 겨우 한 통씩 보냈다. 아이들이나 사업장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성향적으로 뭔가 요란한 걸 좋아하지 않는다. 돈 몇 푼으로 대단한 걸 한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편지'는 중학교 때인가 취미로 '편지 쓰기'를 적어 넣었을 정도로 편지 쓰기를 좋아한다. 이 정도나마 글을 쓰게 된 것도 무수한 편지 쓰기의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편지'를 안 쓴다. 그 아이가 내게 고맙다는 것을 강제하기 싫다. '편지'를 쓰다 보면 서로 그런 뻔한 내용들이 오고 갈 것이 두렵다. '사랑'을 가장한 '애착'도 두렵기에 적당한 거리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편지를 쓰지 않기로 했다. '편지'는 작별 용이다.

  돌아보면 나에게도 '후원자'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말처럼 하는 '많이 배웠다면'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배움'이 간절하기도 했다. 세상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키다리 아저씨'에 대한 환상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키다리 아저씨'는 부재했다. 그래서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이런저런 후원을 시작했다. 세상 어딘가의 한 아이를 위해서.

  내 마음은 그것이 전부인데 아이들이 주는 뿌듯함은 의외에서 발견된다. 가령 '청매화차라니'의 순간들마다 스스로를 일으켜 세울 때가 그렇고, 적어도 세상에 와서 그럴듯한 일 한 가지는 하고 가는구나 싶은 안도감을 가질 때가 그러하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스스로를 돕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착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조금 다른 것이다.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우선순위가 다를 뿐이다. 나는 옳고 너는 틀린 것이 아니다.

  월드비전에서는 후원금의 절반은 지역에 쓴다 한다. 지역이 같이 좋아지는 것은 아이의 환경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방식이 좋아서 '월드비전'을 선택했다. 종교적인 것은 관심 없다. 한 아이에게 3만 원씩, 다른 단체인 유니세프에도 보내니 한 달에 십만 원. 사실 최저시급의 내 급여로는 버거운 금액이기도 하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알바 하루면 해결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몸을 움직여 일을 할 때까지는 계속 해갈 작정이다. 십만 원으로 가질 수 있는 최대치의 뿌듯함은 '책 구매'와 함께 지금의 나를 살아가게 만든다.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청매화차라니'를 잊지 않고. '김태정'시인도 고개를 끄덕여주실 것이다.



향기를 피워올리는 꽃은 쓰다

청매화차라니
나같이 멋없고 궁색한 사람에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청매화차
무슨 유명한 다원에서 만든 것도 아니고
초의선사의 다도를 본뜬 것도 아닌

이른 봄 우이동 산기슭에서 우연히 마주친,
모래바람에 휘날리던 꽃잎 한 주먹 주워
아무렇게나 말려 만든 그 청매화차

한 사나흘 초봄 몸살을 앓다 일어나
오늘은 그 청매화차를 마셔보기로 한다
포슬포슬 멋대로 말라비틀어진 꽃잎에
아직 향기가 남아 있을까
첫 날갯짓을 하는 나비처럼
막 끓여온 물 속에서 화르르 펴지는 꽃잎들
갈라지고 터진 입안 가득

오래 삭혀 말간 피 같은 향기 고여온다

누군가 내게 은밀히 보내는 타전 같기도 해
새삼 무언가 그리워져 잘근잘근
꽃잎 한점을 씹어보았을 뿐인데
입안 가득 고여오는 꽃잎의
은근하게도 씁쓸한 맛
꽃잎의 향기는 달콤하나
향기를 피워올리는 삶은 쓰거웁구나

청매화차라니
달콤하고 은은한 향기의 청매화차라니
삶이 초봄의 몸살 같은 마흔은
향기를 피워올리는 꽃잎의
쓰디쓴 맛을 사랑할 나이

쌀 한줌 두부 한모 사들고 돌아오는 저녁/ 내 야트막한 골목길에 멈춰서서 바라보면/ 배고픈 애인아/ 따뜻한 저녁 한끼 지어주랴/ 너도 삶이 만만치 않았으리니/ 내 슬픔에 네가 기대어/ 네 고독에 내가 기대어/ 겨울을 살자/ 이 겨울을 살자 <겨울산>부분


한 주먹 왕소금에도/ 상처는 좀체 절여지지 않아/ 갈수록 빳빳이 고개 쳐드는 슬픔/ 꼭 내 상처를 확인하는 것 같아// 소금 한 주먹 더 뿌릴까 망설이다가/ 그만, 조금만 더 기다리자/ 제 스스로 제 성깔 잠 재울 때까지/ 제 스스로 편안해질 때까지// 상처를 헤집듯/ 배추를 뒤집으며/ 나는 그 날것의 자존심을/ 한입 베물어본다 <배추 절이기>부분

저녁상 물리고/ 설거지도 말끔히 끝낸/ 배부른 아홉시에는/ 슬금슬금 졸음 오는 아홉시에는/ 아직 잠들기엔 이른 아홉시에는/​마감이 코앞인 시나 한편/심심한 시나 한편 써야겠다//​ 언젠가 보았던 공장 담벼락 공고판/ ‘실밥 따는 아줌마 구함/ 1EA당 50냥/ 꼬마 시다 환영‘을 낙서처럼 끄적이면서/ 아직도 그 고단한 노임이/ 1EA당 50냥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꼬마 시다 환영이라는 속보이는 문구도/ 아랍을 겨냥한 미국적 속내를 닮았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배부른 아홉시에는/ 1EA당 50냥의 노동도/실밥 따는 아줌마도 꼬마 시다도/ 아프간이나 팔레스타인만큼 먼/ 강 건너 불빛 배부른 아홉시에는,​ <배부른 아홉시에는>부분

이것도 보릿고개 덕이라면 덕이겠다/ 궁핍이 나로 하여 ​글을 쓰게 하니/ 궁핍이 글로 하여 나를 살게 하니/가난은 어쩔 수 없는 나의 조력자인가 <궁핍이 나로 하여>​부분


부업이나마 한 일년/ 가윗밥을 넣고 아이롱을 달구어도/ 밥의 내력을 모른다는 시인/ 밤새 꾸벅이며 실밥이나 따고 있어라/ 하루종일 뺑이치는 미싱 소리에/ 서투른 가위질이나 하고 있어라// 그래도 모른다면/ 해가 지고 해가 떠도/ 기계가 멈추고 기계​가 돌아도/ 끝내 모른다면// 요 시인, 철 없는 시인/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다만/ 생업과 부업의 차이/ 다시 해가 뜨고 해가 지고/ 기계가 멈추고 기계가 돌아도/ 끝내 변하지 않는 사실/ 엄지와 검지의 굳은살로 밥이 된다는 것만 알아라/ 그것만 알고 있어라 <부업>부분

오늘은 조카가 선물해준 샤프로 시를 써보기로 한다/ 굵고 뭉툭한 연필심에 비하면/ 이 가늘고 날카로운 0.5밀리 샤프심은/ 가볍고 세련된 샤프의 자존심을 증거한다/ 아무리 정교한 세밀화라 해도/ 구석구석 닿지 않는 곳이 없는 샤프심은/ 가끔 내 삶의 미세한 신경회로를 건들이지만/ 그 정도 사소한 경박성쯤은/ 애교로 봐줄 아량도 과시하면서// 뒤꼭지만 눌러주면 무한정 심이 나오는/ 그의 놀라운 생산력은/ 몽당연필도 아쉬웠던 나의 어린 시절을 조롱하는 듯도 하지만/ 샤프로 시를 쓰는 오늘만큼/ 내 손아귀에서 내 어깨에서 내 삶에서/ 짐짓 무게를 덜어내고자 한다/ 그러므로 손끝의 힘을 빼고/ 빙판 위를 미끄러져 나가는 쇼트트랙 선수처럼/ 가볍게 여유롭게 어디 한번 중력을 탈주해보자/ 생계만큼 무거운 원고지의 중량을 통과해보자/ 그러나......// 처음으로 샤프를 쥔 손은 불안하고 또 불온하다/ 글자와 글자 사이를 곡예하듯 아슬아슬하다/ 너무 힘을 줘도 너무 힘을 빼도 안되는/ 그 적당히

세상의 불빛 한점


세상에 보태줄 것 없어
마음만 숨가쁘던 그대 언덕길
기름때 먼지 속에서도
봉숭아는 이쁘게만 피었더랬습니다
우리 너무 젊어 차라리 어리숙하던 시절
괜시레 발그레 귓불 붉히며
돌멩이나 툭툭 차보기도 하고
공장 앞 전봇대 뒤에 숨어서
땀에 전 작업복의 그대를
말없이 바라보기나 할 뿐
긴긴 여름해도 저물어
늦은 땟거리 사들고 허위허위
비탈길 올라가는 아줌마들을 지나
공사장 옆 건널목으로 이어지던 기다림 끝엔
언제나 그대가 있었습니다

먼 데 손수레 덜덜 구르는 소리
막 잔업 들어간 길갓집 미싱 소리
한나절 땀으로 얼룩진 소리들과 더불어
숨가쁜 비탈길 올라가던 그대
넘어질 듯 넘어질 듯 허방을 짚는 손에
야트막한 지붕들은 덩달아 기우뚱거렸댔습니다​
​그대 이 언덕길 다할 때까지
넘어지지 말기를
휘청거리지 말기를
마음은 저물도록 발길만 흩뜨리고
그대 사라진 언덕길 꼭대기에는
그제 막 보태진 세상의 불빛 한점이
어둠속에서 참 따뜻했더랬습니다​

가을 드들강


울어매 생전의 소원처럼 새가 되었을까
새라도 깨끗한 물가에 사는 물새가

물새가 울음을 떨어뜨리며 날아가자
바람 불고 강물에 잔주름 진다
슬픔은 한 빛으로 날아오르는 거
그래, 가끔은 강물도 흔들리는 어깨를
보일 때가 있지
오늘같이 춥고 떨리는 저녁이면
딸꾹질을 하듯 꾹꾹 슬픔을 씹어 삼키는,
울음은 속울음이어야 하지 울어매처럼
저 홀로 듣는 저의 울음소린
바흐의 무반주첼로곡만큼 낮고 고독한 거
아니아니 뒤란에서 저 홀로 익어가는
간장맨치로 된장맨치로 톱톱하니
은근하니 맛깔스러운 거
강 건너 들판에서 매포한 연기 건너온다

이맘때쯤 눈물은
뜨락에 널어놓은 태양초처럼
매움하니 알큰하니 빠알가니
한세상 슬픔의 속내, 도란도란 익어가는데
강은 얼마나 많은 울음소릴 감추고 있는지
저 춥고 떨리는 물무늬 다 헤아릴 길 없는데
출렁이는 어깨 다독여주듯
두터워지는 산그늘이나 한자락
기일게 끌어당겨 덮어주고는
나도 그만 강 건너 불빛 속으로 돌아가야 할까부다

물푸레나무


물푸레나무는
물에 담근 가지가
그 물, 파르스름하게 물들인다고 해서
물푸레나무라지요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는 건지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름
어쩌면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
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부끄럽게도 아직 한번도 본 적 없는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
물 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
또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일 것만 같아
어쩌면 나에게
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며 찬찬히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
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
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
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호마이카상


이젠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
네가 낡아서가 아니야
싫증 나서는 더더욱 아니야
이십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해온
네가 이젠 무서워졌다
무서워졌다 나의 무표정까지도 거뜬히
읽어낼 줄 아는 네가,
반질반질 닮아버린 귀퉁이만큼 노련해진 네가.
너를 펼쳐놓는 순간부터
시를 쓸지 책을 읽을지
아니면 밥을 차려 먹을지
내 행동을 점칠 줄 아는 네가 무서워졌다
네 앞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네 앞에선 거짓말을 못한다는 것이 무서워졌다
이십년 전이나 이십년 후나
변함없이 궁핍한 끼니를 네게 보여야 한다는 것이
불편해졌다

책상도 되고 밥상도 되는 네 앞에서
시도 되지 못하고 밥도 되지 못하는
나의 현재가 문득 초라해졌다
시가 밥을 속이는지
밥이 시를 속이는지
죽도 밥도 아닌 세월이 문득 쓸쓸해졌다
이 초라함이,
이 쓸쓸함이 무서워졌다
네 앞에서 발바닥이 되어버린 자존심
아무래도 이 시시한 자존심 때문에
너를 버려야 할까보다
그래 이젠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

동백꽃 피는 해우소


나에게도 집이란 것이 있다면
미황사 감로다실 옆의 단풍나무를 지나
그 아래 감나무를 지나
김장독 묻어둔 텃밭가를 돌아
무명저고리에 행주치마 같은
두 칸짜리 해우소
꼭 고만한 집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방에도 창문이 있다면
세상을 두 발로 버티듯 버티고 앉아
그리울 것도 슬플 것도 없는 얼굴로
버티고 앉아
저 알 수 없는 바닥의 깊이를 헤아려보기도 하면서
똥 누는 일, 그 삶의 즐거운 안간힘 다음에
바라보는 해우소 나무쪽창 같은
꼭 고만한 나무쪽창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마당에 나무가 있다면
미황사 감로다실 옆의 단풍나무를 지나
그 아래 감나무를 지나 나지막한 세계를 내려서듯
김장독 묻어둔 텃밭가를 지나 두 칸짜리 해우소
세상을 두 발로 버티듯 버티고 앉아
슬픔도 기쁨도 다만
두 발로 지그시 누르고 버티고 앉아
똥 누는 일 그 안간힘 뒤에 바라보는 쪽창 너머
환하게 안겨오는 애기동백꽃,
꼭 고만한 나무 한그루였으면 좋겠다

삶의 안간힘 끝에 문득 찾아오는
환하고 쓸쓸한 꽃바구니 같은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힘들다던/ 네루다 시집 속엔/ 오래 삭힌 멍처럼 빛바랜 쑥이파리 한점/ 매캐한 이 콧물과 재채기는/ 먼지 때문에/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힘들다는 그 말/ 때문이 아니라/ 다만 먼지 때문에// 바람이 꽃가루를 날려보내듯/ 먼지가 울컥, 눈물을 불러 일으켰나 <눈물의 배후>부분

미황사


열이레 달이 힘겹게 산기슭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사랑도 나를 가득하게 하지 못하여
고통과 결핍으로 충만하던 때
나는 쫓기듯 땅끝 작은 절에 짐을 부렸습니다

세심당 마루 끝 방문을 열면
그 안에 가득하던 나무기둥 냄새
창호지 냄새, 다 타버린 향 냄새
흙벽에 기댄 몸은 살붙이처럼
아랫배 깊숙이 그 냄새들을 보듬었습니다

열이레 달이 힘겹게 산기슭을 오르고 있었고
잃어버린 사람들을 그리며 나는
아물지 못한 상실감으로 한 시절을
오래, 휘청였습니다

……색즉시고옹공즉시새액수사앙행식역부우여시이사리자아아시이제법공상불생불며얼…… 불생불멸…… 불생불멸…… 불생불멸……

꽃살문 너머
반야심경이 물결처럼 출렁이면
나는 언제나 이 대목에서 목이 메곤 하였는데

그리운 이의 한 생애가
잠시 내 손등에 앉았다가 포르르,
새처럼 날아간 거라고
땅끝 바다 시린 파도가 잠시
가슴을 철썩이다 가버린 거라고……
스님의 목소리는 어쩐지
발밑에 바스라지는 낙엽처럼 자꾸만
자꾸만 서걱이는 것이었는데

차마 다 터뜨리지 못한 울음처럼
늙은 달이 온몸을 밀어올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필생의 호흡이 빛이 되어
대웅전 주춧돌이 환해지는 밤
오리, 다람쥐가 돌 속에서 합장하고
게와 물고기가 땅끝 파도를 부르는
생의 한때가 잠시 슬픈 듯 즐거웠습니다
열반을 기다리는 달이여
그의 필생의 울음이 빛이 되어
미황사는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홀로 충만했습니다

봄산

삼십칠년이란 세월을 내 이름 속에서 헤매었듯 봄산에서 한때, 길을 잃은 적이 있었습니다 진달래 향기에 깊이 취했던 것도 아닌데 등산객들의 발자국 어지러운 샛길, 길이 너무 많아 차라리 길을 놓아버리고 싶었던 걸까요 길 안팎에서 한나절을 헤매었습니다 바람 속 무성한 시누대 숲은 좀처럼 길을 열어주지 않고 해묵은 낙엽들은 밑에서 아프게 바스라지는데

손바닥에 잔금이 이리도 많은 걸 보니 너도 잔근심이 많겠구나, 겨울 실가지처럼 무수한 손금에서 삶의 비밀을 뒤적이듯 봄산 난마처럼 얽혀 있는 샛길에서 길을 찾듯 삼십칠년이란 세월을 내 이름 속에서 헤매었습니다 곧을 태 곧을 정, 까짓거 대나무처럼만 살면 될 거 아닌가 뜻도 모르는 채 내 이름 석자에 온 생을 맡겼습니다 곧고 곧아라 삶도 사랑도, 내 이름대로만 살면 될 거 아닌가 겁도 없이

봄도 아직 이른 봄이라 살갗을 파고드는 바람에 진달래 낯빛 핏기 없이 질려 있는데 시누대는 제 울음만큼 한매듭씩 자라나는데 내 몸이 내 이름을 감당하지 못하여 나는 자주 휘청거리곤 했지요 대나무붙이들아 늬들도 과분하게 주어진 이름들이 부끄러워 자꾸만 고개를 숙이는거니?

손바닥의 잔금만큼 사소한 근심들이 거미줄 치던 세월, 시누대 그 고통의 생장점이 스스로 바람을 불러일으키듯 슬픔이 나를 팽창시켰고 나는 어느덧 손금 위에서 서성이지 않아도 좋을 나이

삼십칠년이란 세월을 내 이름 속에서 헤매듯 봄산에서 한때, 길을 잃은 적이 있었습니다 길을 찾아헤매는 내 발자국이 길 위에 길을 보태었다는 걸, 산을 내려온 뒤에야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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