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하고자 하는 한스 카스토르프의 이야기는그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가 눈길을 끄는젊은이이기는 하지만 평범한 젊은이란 사실을독자들이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단히들려줄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이는 이야기 그 자체를위한 것이다(그렇지만 이 이야기가 그의 이야기이며,
누구에게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그를 위해 마음에 새겨 두는 것이 필요하다).

토마스 만, 홍성 옮김, 『마의 산』, 을유문화사, 2008.


굉장히 복잡한 문장 같지만 이런저런 부연 설명을 걷어 내면이 이야기는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일 뿐이다‘라는 뜻의 문장이된다. 소설의 첫 문장으로 이보다 적절한 문장이 또 있을까. 게다가 토마스 만 소설의 첫 문장으로도 마침맞고.
토마스 만의 소설을 읽다 보면 지적 과시처럼 보이는 긴 논쟁이나 설명과 마주할 때가 많은데, 저 첫 문장처럼 그 길고 긴 ‘부연 설명‘을 걷어 내면, 대개는 탁월한 재능을 가진 이야기꾼이들려줄 법한 특출한 이야기와 맞닥뜨리게 된다. 게다가 그 특출한 이야기는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짜여 있어, 가령 문체를 느끼면서 읽어야 한다는 플로베르의 소설을 번역문으로 읽을 때의 지루함 같은 것은 끼어들 여지가 없는, 아주 흥미진진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p120, 121



다른 사람의 삶에 공감하려면 ‘내 삶‘이라는 기반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글을 제대로 읽어 내려면 ‘내 문장‘이라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 문장‘은 바로 ‘내 삶‘을 표현한 것이어야 하고, 이게 바로 글쓰기와 글 읽기의 시작점 아니겠는가. 규칙과 기술을 익히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문장을 읽거나 쓸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이런저런 기법을 익힌다고 해서 내손끝에서 나만의 문장이 저절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글이 첫눈에 말끔하게 해독되는 것도 아니듯이.
첫 문장으로 돌아가 보는 건 어떨까. 삶의첫문장이든 글쓰 - P10

기의 첫 문장이든, 우선은 소설의 첫 문장을 통해 내 글쓰기의첫 문장으로 돌아가 볼 수 있다면, 더불어 내 삶의 첫 문장까지다시 살펴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하여 처음부터 이렇게 살려던 것도 아니었고, 처음부터 이렇게 쓰려던 것도 아니었노라고 스스로에게 말해 볼 수 있다면.


이 책은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려 주는 책이 아니니오해 없기 바란다. 소설에 대해 논한 책 또한 아니다. 단지 소설의 첫 문장에 기대어 쓴 짧은 단상을 모은 책에 불과하다. - P11


"이제 어떻게 될까, 응?"
앤서니 버지스, 박시영 옮김, 『시계태엽 오렌지』,
민음사, 2005.


"다음이 뭐야. 다음이 뭐야....…‘‘
토마스 만, 홍성광 옮김, 『부덴브로크 가의사람들, 
민음사, 2001. - P18

궁금했다. 과연 다음이 어떻게 될지, 잘되고 못되고를 떠나서그냥 궁금했을 뿐이다. 그런 마음으로 소설책도 읽고 내 삶에대한 기대감도 키웠던 모양이다.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다음을 궁금해하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궁금했다"라고 과거형으로 썼으니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겠다.
그렇다. 언제부터인지 내 안에서 더 이상 그런 마음을 찾아볼수 없게 되었다. 다음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지도 않을뿐더러 기대감도 사라졌다. 소설책을 봐도 재미가 없고 삶은 그야말로 균일한 시간이 째깍째깍 흐르는 시계 같아져서 드라마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실망하기만 한 건 아니다. 어쩌면 이야기나 삶의 다른 면을 보게 되었는지도 모르니까. 더 이상 궁금하지도 않고기대할 것도 없을 때 이야기는 이제까지와 다른 면을 드러내 보이고, 삶 또한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인과관계의 틀에서벗어나 마치 꿈속처럼 제각각의 세계를 펼쳐 보일 수도 있으니까.
이젠 소설책을 읽을 때든 삶의 모퉁이에서 다음 장면을 앞두고 있을 때든 내가 궁금해하는 다음은, 다음의 내가 어떤 나일지뿐이다. 다음 이야기에서 내가 어떤 느낌을 갖게 될지, 또는삶의 다음 장면에서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하게 될지……. 그게궁금할 뿐이다. 다음의 나. - P19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레프 톨스토이, 박형규 옮김, 『안나 카레니나』,
문학동네, 2010.


죽음이 다 같은 것은 아니다.

비카스 스와루프, 조영학 옮김, ‘6인의 용의자』,
문학동네, 2009. - P22

뭐 하나 같은 것이 없다. 삶도 죽음도. 물론 그사이에서 겪는행복과 불행의 모습도 다르고, 그 행불행을 함께하는 사람들의마음까지도 다 제각각이다.
같지 않아야 마땅하다. 우린 모두 서로 다른 사람이니까. 이자명한 사실을 왜 자꾸만 부정하려는 건지.
말만 해도 그렇다. 같아야 한다는 강박이 얼마나 지독했으면같지 않은 걸 ‘같잖다‘라고 표현했을까.
무섭다. 말도 무섭고 그 말에 담긴 사람들의 욕망도 무섭고.
아무도 나와 같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털끝만큼도 같지 않기를…………. - P23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찰스 디킨스, 이은정 옮김, 『두 도시 이야기』,
펭귄클래식 코리아, 2012.



우리 시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이다.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이인규 옮김, 『채털리부인의 연인』, 민음사, 2003. - P50

어느 시대나 다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누구에겐 최고의 시절이 누구에겐 최악의 시절이 되고, 누군가에겐 지혜의 시대가 누군가에겐 어리석음의 시대가 되기도 하지만, 공통적인 건 모든시대가 본질적으로 비극적이라는 것. 왜냐하면 ‘우리 시대‘ 이니까. 다른 이가 아닌 나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시간들. 생각이 다르고 취향이 다른 여러 사람이 동시대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그 엄청난 모순을 버텨 내야 하는 시간들이니까. - P51

초겨울에 남풍이 불어서 흑산행돛배는 출항하지 못했다.

김훈, 『흑산』, 학고재, 2011.



봄 병풍의 그림은 중천에 걸려 있는
흐릿한 달, 동풍에 흔들리는 강변의 갈대,
그리고 걸식하는 법사法師다.

마루야마 겐지, 한성례 옮김, 『달에 울다』, 자음과모음,
2009. - P64

바람이 분다. 순간 깨닫는다. 바람은 부는 순간 이미 떠나고없다는 것을, 정체를 알 수 없을 때까지만 내 곁에 머물 뿐, 아,
바람이구나 하고 느낄 때면 이미 바람은 내 곁을 떠나고 없다.
그래서, 바람이다. - P65

내가 처음 여자의 성기를 본 것은일곱 살 때였다.

송기원, 『여자에 관한 명상』, 
문학동네, 1996.



올여름에 나는 처음으로 텔레비전에서
포르노 영화를 보았다.

아니 에르노, 최정수 옮김, 『단순한 열정』, 문학동네, 2012.



처음이란 균형을 맞추는 데 가장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하는 시간이다.

프랭크 허버트, 김승욱 옮김, 『듄』, 
황금가지, 2001. - P66

처음으로 꿈꾼 날, 처음으로 이 뽑은 날, 처음으로 글씨 쓴 날,
처음으로 친구와 싸운날, 처음으로 자장면먹은 날, 처음으로남의 집에서 잠잔 날, 처음으로 버스 탄날, 처음으로 내 이름으로 된 통장 만든 날, 처음으로 도서관에서 책 빌린 날, 처음으로서점에서 책 산 날, 처음으로 욕한 날, 처음으로 주먹질한 날, 처음으로 나 혼자 목욕 간 날, 처음으로 돈가스 먹은 날, 처음으로영화 본 날, 처음으로 누군가와 어깨동무한 날, 처음으로 누군가를 좋아한 날, 처음으로 누군가를 미워한 날, 처음으로 키스한날, 처음으로 섹스한 날, 처음으로 자살을 생각한 날, 처음으로내 손으로 밥한 날, 처음으로 세금 낸 날, 처음으로 내가 쓸 도마를 사 가지고 온 날, 처음으로 운전한 날………….
정확한 날짜를 기억할 수 없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 문신처럼새겨진 날들. - P67

나는 인생의 가장 내밀한 진실을
비빔국수를 통해 배웠다.

정세랑, 『이만큼 가까이』, 
창비, 2014. - P70

비빔국수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인생의 내밀한 진실이라.
그게 과연 뭘까?
글쎄, 결국엔 다 거기서 거기라는 거?
비빔국수야말로 다 거기서 거기니까.
맛도 특별할 게 없고, 들어가는 재료도 특별할 게 없는 데다,
종류도 따로 없어 그저 비빔국수이니까.
흰쌀밥에 잡곡밥, 콩밥, 콩나물밥, 가지밥 등등 외려 밥이 더종류도 많고 맛도 다양하지 않은가. 같은 국수라도 뜨끈한 국물맛을 내는 국수라면 잔치국수, 가락국수, 칼국수처럼 가짓수를제법 늘어놓을 수 있지만 비빔국수는 그저 비빔국수일 뿐.
다만 단맛을 높이거나 신맛을 더하거나 매운맛을 강하게 하면서 차이를 내는 게 고작이다. 그래 봐야 거기서 거기지만.
거기서 거기인 비빔국수.
거기서 거기인 삶. - P71

꿀벌 이야기에서 꿀이 빠질 수없는 것처럼 사람 이야기에선 돈이빠질 수 없는 노릇이다.

커트 보네거트, 김한영 옮김, 『신의 축복이있기를, 로즈워터씨』, 
문학동네, 2010.



팔 수 있는 물건들은 모두 팔아 치웠다.
천명관, 『고령화 가족』, 문학동네, 2010. - P72

미국의 소설가 폴 오스터는 돈이 없어 겪는 궁핍 중 가장 처참한 것은 "하루 종일 돈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는 것"이라고썼다. 그렇다. 가난, 곧 돈이 없어 겪는 궁핍의 본질은 몸과 마음 모두 돈에 얽매인다는 것이다. 필요한 재화와 용역을 구입하지 못하는 건 그저 궁핍 때문에 겪는 불편함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깟 불편쯤이야 아무렇지 않다면서 가난을 자청하는 사람들도있다지만, 글쎄 내 눈엔 그들이 가난하기는커녕 누구보다 넉넉한 사람들로 보일 뿐이다. 정말 가난한 사람은 돈 몇 푼 때문에하루에도 몇 번씩 치사해지는 경험을 반복하는 사람이며, 그 트라우마 때문에 자기를 위해서는 함부로 돈을 쓰지도 못하는 사람이니까. 머릿속에서 늘 빠듯한 생활비를 이리저리 계산해야하는 사람, 돈이 없을 때는 물론 여윳돈이 생겼을 때도 즐겁기보다 머릿속이 더 복잡해지기만 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이다. 돈에 얽매여 자유를 잃은 사람. 그러니 자신이 가난하다고 쉽게 드러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어쩌면 가난 속에서헤매는 사람이 아닌지도 모른다. 적어도 가난 때문에 오그라들대로 오그라든 것은 아니니까. - P73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김훈, 『칼의 노래』, 
생각의나무, 2001. - P90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가 출간되고 얼마 안 되었을 무렵. 하루는 시내에 나갔다가 밤늦은 시각에 버스를 탄 적이 있다. 버스 안에는 승객이 많지 않았다. 더러는 멀거니 차창 밖을 내다보고 더러는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았다. 나는 하차 문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신촌에서였던가.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 둘이 버스에오르더니 맨 뒷좌석에 가 앉았다. 몇 분쯤 흘렀을까. 뒤쪽에서조곤조곤 글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읽는 게 아니라 마치시를 암송하듯 감정을 담아 낭송하는 소리였다. 여학생 둘이 한문장씩 돌아가며 읽고 있었다. 시집을 읽는구나 했더랬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슬쩍 뒷좌석을 보니 여학생들 손에 들린책은 시집이 아니라 『칼의 노래』였다. 내가 시의 한 구절이려니여겼던 문장이 바로 소설의 첫 문장,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였다. - P91

"완벽한 문장 같은건 존재하지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라카미 하루키, 윤성원 옮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문학사상사, 2003.
- P96

형용사 ‘완벽하다‘와 ‘순수하다‘가 수식하는 것들은 모두 실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완벽한 문장이나 완벽한 절망은 물론 완벽한 삶이며 완벽한 죽음, 완벽한 행복, 완벽한 불행, 완벽한 거짓말, 완벽한 사랑, 완벽한 논리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완벽조차 완벽하지 않은데 (그러니 완벽한 완벽도 존재하지 않는셈이다) 다른 것이야 말해 무엇하랴. 같은 의미에서 순수한 사랑이며 순수한 마음, 순수한 몸, 순수한 의도 따위도 허상에 불과하다. 순수조차 순수하지 않은데 다른 걸 말해서 뭐하랴.
가끔은 ‘완벽하다‘나 ‘순수하다‘ 같은 형용사가 언어의 마개역할을 하는 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언어라는 수조 밖으로의미들이 새 나가지 않도록 언어 스스로 만든 마개, 가장 극단에 존재해야 하니 의미도 극단적이어야 하고 사용도 극단적이어야 하지만, 의미에서나 사용에서나 형식만 가질 뿐 내용은 갖지 않는 마개, 그러니 ‘완벽한‘이나 ‘순수한‘이라고 쓸 때 우리가경험하는 건 단지 의미의 극단까지 밀려갔다 되돌아오는 것뿐이다. 아무 의미 없이… - P97

숲에서 그림자를 보았다.

황정은, 『백의 그림자』, 
민음사, 2010.



남자는 깜깜한 숲에서 잠을 깼다.

코맥 매카시, 정영목 옮김, 『로드』, 
문학동네, 2008.



뻔뻔스러운 여자의 쌓이고 쌓인
한이 이 울창한 숲에 그득하다.

마루야마 겐지, 김난주 옮김, 『천년 동안에』,
문학동네, 1999. - P110

숲만큼 문학적인 낱말이 또 있을까. 그냥 숲이라고만 써 놓아도 이야기가 저절로 이어질 것만 같다. 무언가 원초적이면서도음험하고, 따듯하면서도 서늘하고, 조용하면서도 요란하기 그지없고, 삶과 죽음이 동시에 존재할 것 같은 그런 이야기……….
그래서인지 숲이 들어간 말 중에 가장 이상하면서도 그럴듯한 말이 내겐 ‘빌딩 숲‘이다. 서로를 추문으로 만드는 것을하나로 묶었다는 점에서 이상하지만, 그 이상함이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것만 같다는 점에서는 그럴듯하달까. 적어도 내겐그렇다. 숲을 갈아엎고 들어선 빌딩이 다시 숲을 이루었다는 말이니 숲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참으로 잔인한 말이 되겠지만.
아무려나 뒤틀어진 이야기를 하나 가득 담고 있을 것 같은 빌딩이 숲을 이루었으니, 말만 놓고 보면 이야기의 숲이 따로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저 첫 문장들에 등장하는 ‘숲‘ 앞에 ‘빌딩‘을 붙여 보면 어떨까. 음, 그냥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는데, 막상 붙여 보니말이 된다. 서늘하다. 정체 모를 숲에 들어온 것처럼. - P111

지금보다 어리고 민감하던 시절아버지가 충고를 한마디 했는데아직도 그 말이 기억난다.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김영하 옮김, 『위대한개츠비』, 
문학동네, 2009. - P124

소설의 첫 문장으로 이만한 문장이 또 있을까. 적어도 내겐그렇다. 말 그대로 현실과는 전혀 다른 소설의 세계 속으로 한발 들어서게 만드는 문장이라는 의미에서, 그렇잖은가. 어리고민감하던 사춘기 시절 아버지가 삶에 대해 충고를 해 주는 것이야말로 소설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니까. 적어도 내겐……….
아버지는 삶에 대한 충고는커녕 자전거를 타는 법이나 여자에게 매너를 지키는 법 같은 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아니 무엇보다 아버지가 나를 앞에 앉혀 놓고 진지한 이야기를 들려준기억조차 없다. 오죽하면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해서도 친척들 모임에서 주워들은 말로 겨우 알게 되었을까.
그러니 이 소설의 첫 문장이 적어도 내겐 소설의 세계로 들어서는 입국장처럼 여겨질 수밖에. - P125

러시아에서의 죽음은
아프리카에서의 죽음과는
다른냄새를 풍겼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장희창 옮김,
『사랑할 때와 죽을 때』, 
민음사, 2010. - P142

언뜻 죽음에 대한 추상적인 내용을 담은 문장인 듯싶지만 이어지는 문장들을 읽어 보면 사정이 전혀 다르다는 걸 알게 된다.
전장에서 맞닥뜨리는 시체들의 이야기이니까.
요컨대 저 문장에서 말하는 죽음의 냄새는 말 그대로 시체들이 풍기는 냄새다.
아프리카와 러시아의 가장 큰 차이는 아무래도 날씨가 아닐까. 강렬한 태양, 건조한 바람, 서늘한 밤이 아프리카 쪽이라면폭설, 강추위, 습기는 러시아 쪽이겠다. 그러니 아프리카에서는전사한 군인의 시체가 태양과 바람 속에서 건조한 냄새를 풍긴다면 러시아에서는 습기 때문에 악취를 풍긴다는 것.
흥미로운 건 아프리카에서는 낮 동안의 열기 때문에 가스가찬 시체들이 밤이 되면 부풀어 올라 마치 다시 한 번 전투에 나서기 위해 일어서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다 아침이 오면 다시 오그라들어 군복이 헐렁해 보일 지경이라고. - P143

우리 아버지의 성姓은 피립이고 내 세례명은필립이었는데, 어린아이 적 내 짧은 혀는이 이름과 성을 ‘핍‘ 이상으로 길게도분명하게도 발음하지 못했다.

찰스 디킨스, 이인규 옮김, 『위대한 유산』, 민음사, 2009.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

허먼 멜빌, 김석희 옮김, 『모비딕』, 
작가정신, 2011. - P194

두 번째 책부터는 내 이름을 되찾았다. 그런데 이번엔 성별이문제였다.
김정선, 여자 이름 같은 모양이다.
『 동사의 맛』은 물론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의 독자평에 저자를 여자로 착각하는 내용이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강연을 의뢰받고 강연장에 가서도 ‘어머, 남자분이네요‘ 하는 반응과 자주 맞닥뜨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출판사 대표에게 메일을 받았다. 젊은 만화가가 동사의 맛을 만화로 그려 보고 싶다고 연락해 왔다는 내용이었다. 샘플 만화를 파일로 첨부했다기에 열어 보았더니 책의화자로 등장하는 내가 쉰 살의 귀여운 아줌마로 그려져 있었다. - P195

찌는 듯이 무더운 7월초의 어느 날
해 질 무렵.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끼,
홍대화 옮김, 『죄와 벌』, 
열린책들, 2009.



무더운 어느 봄날 해질 무렵
파트리아르흐 연못가에 두 시민이
나타났다.

미하일 불가코프, 김혜란 옮김, 『거장과마르가리타』, 
문학과지성사, 2008. - P242

두 편의 러시아 소설이 모두 어느 무더운 날의 해 질 무렵 묘사로 시작하는 게 흥미롭다. 닮은꼴이랄까. 소설을 다 읽고 나면그 흥미가 배가되는 것까지 닮았다.
별 뜻 없이 끼적댄 어느 글에서 "러시아 소설의 시점은 ‘지평선 시점‘이 아닐까"라고 쓴 적이 있는데, 해 질 무렵이야말로 지평선의 시간인 듯싶어 두 소설의 저 첫 문장이 예사롭지 않다.
러시아 소설의 시점을 ‘지평선 시점‘이라고 이름 붙였던 이유는, 곰팡내 풍기는 지하 창고 안에서 누군가의 구차한 인생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은데 정신 차려 보면 어느덧 인간의 보편적인 삶의 이야기들이 우렁우렁 들려오는 광야에서 저 멀리지평선 너머로 해가 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듯해서였다.
그런 점에서라면 이 두 소설이야말로 해질녘 ‘지평선 시점‘
으로 쓴 소설이라고 할 만하지 않을까. - P243

댈러웨이 부인은 자기가 직접 가서
꽃을 사오겠다고 했다.

버지니아 울프, 이태동 옮김, 『댈러웨이 부인』,
시공사, 2012. - P274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마음이 편안했다. 화자의 시점이 들쑥날쑥해서 읽기에 불편해야 마땅한데 웬일인지 편했다. 각각의 인물들에게 부여된 시간이 마치 제 나름으로 피었다가 지는 꽃들처럼, 혹은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밀물과 썰물처럼 ‘어쩔 수 없는것‘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심지어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커다란 시계 빅벤의 종소리마저도 소설의 등장인물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피고 지고, 밀려오고 밀려가고, 뛰어오르고 뛰어내리는삶 가운데로 스며들 듯 울려 퍼지며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 - P275

이런 문장들에 밑줄을 그었다.
"어쩜 이렇게 화창하지! 바깥으로 뛰어들고 싶어!" (7쪽), "그녀는 굴뚝 같기도 하고, 녹슨 펌프 같기도 하고, 바람에 꺾여 부러져 더 이상 새로운 나뭇잎을 나게 할 수 없는 고목 같기도 했다." (118쪽), "몸속에서 밀물과 썰물이, 오전과 오후가 교차되고있었다."(165쪽), "그 궁극적인 신비는 아주 단순한 사실 안에 담겨 있었다. 여기에 방 하나가 있고, 저기에는 또 다른 방이 있다는 것. 종교가, 또는 사랑이 그 문제를 푼다고?"(186쪽), "또 졌군.
반복되는 인생처럼." (236쪽), "어둑어둑해진 하늘은, 아름다운한쪽 뺨을 돌리듯 저물어가고 있었다." (271쪽). - P275

그리고 첫 문장으로 돌아와 다시 읽고 나서야 알았다. 그래꽃을 사러 나갔었지. 거리를 돌아다니다 꽃을 사가지고는 파티가 열릴 집으로 돌아왔고, 나갔다 돌아오는 것, 그게 삶이었구나, 파티를 여는 댈러웨이 부인도 하염없이 솟구칠 수만은 없고,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는 셉티머스도 하염없이 떨어져내릴 수만은 없다는 것. 어쨌든 다들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것. 제 몫의 꽃을 들고서……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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