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라틴아메리카의 혁명가 아르헨티나-쿠바 1928. 6. 14~1967. 10. 9
새로운 인간을 향하여
1965년 4월, 새로운 혁명전쟁을 위한 출격을 앞둔 게바라ErnestoChe Guevara는 아르헨티나에 사는 부모에게 장차 자신의 유서가될 한 통의 편지를 쓴다.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지. 다시 발뒤꿈치 아래에 로시난테의 늑골을느낍니다. (……) 10년쯤 전에도 이별의 편지를 썼었지요. 제 기억으로는, 그때 저는 훌륭한 군인도 의사도 될 수 없는 자신을 한탄했었습니다. 이제 의사가 되는 데는 관심이 없지만, 군인으로서는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 많은 사람들이 저를 가리켜 모험가라고들 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다만 다른 종류의 모험가이지요. 진실을 증명하기 위해 사지로 뛰어드는 모험가 말입니다. 이번에는죽음을 피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제마지막 포옹을 전합니다. (…) 예술가와 같은 희열로 갈고닦아온 - P100
제 의지가 약해진 다리와 지친 마음을 이제부터 지탱해주겠지요.
질풍과도 같은 10년이었다. 그 10년 동안, 방랑의 길을 떠난 스물일곱 살의 청년 의사는 게릴라전의 탁월한 사령관이 되었고, 혁명에서 승리를 거둔 후에는 공업부장관이 되었으며, 마침내는 전 세계 반제투쟁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10년 뒤, 서른일곱 살의 게바라는 스스로를 돈키호테에 비유하며 쿠바 정부 지도부의 지위와 가족들과의 생활을 버리고 또다시 혁명전쟁을 향한 긴 여정에 나섰다. - P101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방문하고 귀국한 1965년 3월, 게바라는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 일은 세인들의 온갖 소문과 억측을 불러왔고, 한때는 그가 카스트로에게 숙청당했다는 설까지 나돌았다. 그러나 사실은 카스트로 역시 ‘제2, 제3의, 더 많은 베트남을!‘이라는 자신의 호소를 몸소 실천하려는 게바라의 간절한 소망을 이해하고 지원했던 것이다. 1965년 10월 3일, 카스트로는 쿠바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게바라가 쓴 이별의 편지를 낭독했다.
나는 당 지도부에서 맡은 직무, 장관이라는 지위, 소령이라는 계급, 쿠바인의 신분을정식으로 버리네. 법적으로 나를 쿠바에 붙들어놓을 수 있는 것은 없네. 그저 사령처럼 파기할 수 없는 인연만이 남아 있을 뿐이네. (......) 세계 도처에서 보잘것없는 나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네. 쿠바에 대한 책임 때문에 자네에게 금지된 일이 나에게는 가능하다네. 이제 이별의 시간이 찾아온 것이네. - P103
라이게라라는 마을로 송치되어 10월 9일 사살된다. 남겨진 사진에서 그의시신은 유난히 맑은 두 눈을 뜨고 있다. 게바라의 많은 글 중에서도 쿠바의 사회주의와 인간 socialismo y el hombreen Cuba(1965)은 특히 인상적이다.
우리 모두,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은 의무를 수행했다는 만족감으로 보상을 받음을자각하고, 지평선 너머로 보이는 새로운 인간을 목표로 모두가 함께 전진하고 있음을 자각하며, 자신에게 부여된 희생을 완수하려 한다.
소련과 동구권의 사회주의체제가 붕괴하고 과거 소련의 수정주의를 격렬하게 공격했던 중국마저도 ‘사회주의 시장경제‘에 휩쓸린 오늘, 게바라가 보여준 이상주의는 어느덧 냉소와 망각의 대상으로 변해버린 듯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빈곤과 소외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가 보여준 ‘새로운 인간‘이라는 이상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되살아날 것이 분명하다. - P104
카스트로 1926~
쿠바의 정치가, 혁명가. 1926년 쿠바 오리엔테 주 출생. 1945년 아바나대학 법학과 입학, 졸업 후 변호사로 활동했다. 1947년 도미니카공화국의 트루히요 독재정권 타도 활동, 1948년 콜롬비아 보고타의 도시 동에 참여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바티스타 정권 전복을 위해 1953년 156명과 함께 몬카다 병영을 습격했으나 실패 후 체포되어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 재판에서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 라는 유명한 자기 변론을 남겼다. 1955년 특사로 풀려난 후 멕시코로 망명했다가 1956년 동지 80여 명과 돌아와 시에라마에스트라 산맥에서 게릴라전을 펼쳐 정부군의 수십 분의 일에 불과한전력으로 1959년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렸다. 총리 취임 후 토지개혁과 외국자본몰수를 단행하고 40여 년 동안 미국의 턱밑에서 반미·반제를 주창했다. CIA에서여러 차례 암살 공작을 폈으나 실패했다. 1976년 신헌법을 제정해 국가평의회 의장에 취임했으며, 2006년 7월 건강 악화로 친동생 라울 카스트로에게 임시로 권력을 이양했다. - P106
폴 니장 작가 프랑스 1905. 2. 7~1940.5.23
반격하는 앙가주망
1968년 5월 파리, 학생혁명의 와중에 어느 학생 그룹이 유인물을 뿌렸다. "우리는 ‘파수견‘이 되는 미래를 거부한다." 이어 ‘장Paul Nizan의 반격‘을 논하는 글들이 신문지상에 등장했다. "만일 니장이 살아 있다면, 사람들이 이쪽으로 가라고 가르치는 생활에 양처럼 온순하게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수천 명의 학생들 편에 섰을 것이다." 1930년대를 헤쳐나간 코뮤니스트 지식인, 전쟁으로 인한죽음과 정치적 묵살로 땅속 깊이 묻혀 있던 폴 니장의 초상은장 폴 사르트르가 서문을 쓴 『아덴 아라비아』 Aden Arabie(1931)가1960년에 재출간되고, 이듬해에는 『파수견들』Les Chiens degarde(1932)이 다시 출간되면서 문학적으로는 이미 부활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1968년의 분노한 젊은이들의 눈앞에 ‘앙가주망의 시대‘의 상징으로서 정치적으로 부활한 것이다. - P107
나는 스무 살이었다. 그것이 인간의 일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이라는 말은 누구도하지 못하게 하리라.
‘아덴 아라비아‘의 첫머리이다. 프랑스 최고의 지적 엘리트의 지위가 약속되어 있던 니장은 "오직 관념에만 관계하는 것에 대한 혐오‘ 때문에 혁명의물결이 지나간 유럽을 뒤로하고 아덴을 향한 여정에 나선다. 1926년, 스물한살 때의 일이다.
한 발만 헛디디면 모든 것이 젊은이들을 쓸모없게 만들어버린다. 연애도 사상도 가족을 잃는 것도, 어른들의 세상으로 들어서는 것도 세상에서 자신이 어떤 역할을맡고 있는지를 안다는 것은 쓰라린 일이다. (......) 이제는 그저 증오로만 타인들과관계 맺는 두 종류의 인간밖에 없다. 남을 짓밟는 인간과 밟히기를 거부하는 인간이다. - P108
‘뻔뻔함‘과 ‘거짓말‘은 니장의 기대와는 반대의 형태로 나타났다. 공산당은 루이 아라공 Louis Aragon과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를 선두에 내세워 니장이 ‘경찰의 스파이‘였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죽은 니장을 한 번 더 말살하려했던 것이다. ‘니장의 반격‘은 1960년대를 기다려야만 했다. 지금은 그 1960년대의 뜨겁던 열정도 멀리 사라져갔고, 지난날 니장이 ‘현대의 그리스라고 불렸던 소련마저도 지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20세기를 ‘앙가주망‘의 시대였다고 해도 될까? 아니면 20세기의 어느 한 시기에 ‘앙가주망의 시대가 있었다고써야 할 것인가…………? 어느 쪽이건, ‘앙가주망‘의 작가 폴 니장의 망령은 앞으로도 거듭해서 ‘반격‘ 해올 것이 분명하다.
시와 여인들은 언젠가 사라져가지만, 그러나 혁명이 지나갔던 적은 과거에도 없었다. (아덴 아라비아) - P111
engagement 앙가주망
본래 구속, 계약 등의 뜻으로 쓰였으나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사르트르 이후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사르트르는『존재와 무』, 『문학이란 무엇인가』 등을 통해 쓴다는 것의 전통적인 의미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문학을 통해 현실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것을 주창했다. 또한 1945년 창간한 잡지 『현대를 통해 세계의 불의를고발하고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이 지식인의 도덕적 책임이라고 강조하며 ‘행동하는 지식인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사르트르 자신도 알제리 독립전쟁과 베트남 전쟁당시 적극적으로 반전운동과 평화재판 등의 활동을 펼쳤다.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를 비판하고 노동자계급에게 관심을 기울인 빅토르 위고, 드레퓌스 사건 때 권력에 항거했던 에밀 졸라 등은 이 말의 의미가 확장되기 전에 활동했지만 역사적맥락에서 앙가주망 전통에 서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 지식인의 앙가주망 전통은 20세기 후반 파업 현장을 찾아 노동자와 연대했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등으로 이어졌다. - P113
프란츠 파농 혁명가·사상가·의사 프랑스 1925. 7. 20~1961. 12. 6
인간에게 절망하지 않기 위하여
"어젯밤 놈들은 나를 세탁기 속에 처넣었다." 백혈병에 걸려죽음을 앞둔 프란츠 파농Frantz Fanon 이 마지막 말은 실로『검은 피부, 하얀 가면』Peau noire, masques blancs(1952)의 저자답다. 백인들의 병원에서 자신의 피가 하얗게 변해버리는 환각과 공포가 낳은 표현으로도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그보다는 파농 특유의 신랄한 유머 감각과 불굴의 투쟁 정신이 마지막으로 분출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61년 12월 6일, 프란츠 파농은 미국 워싱턴의 베데스다 국립병원에서 사망했다. 서른여섯 살이었다. 그의 유지에 따라 시신은 튀니지로 공수된 뒤 민족해방군ALN 전사들의 손에 의해 국경을 넘어 알제리영내에 매장되었다. - P114
"그를 가리켜 사람들은 폭력의 사도라고 말한다. 분명 파놓은 식민주의적야만에 항거하는 식민지 원주민의 유일한 무기인 폭력의 이론가였다. 그러나그의 폭력은 역설이 아닌, 비폭력자의 폭력이었다"라고 같은 마르티니크 출신의 시인 에메 세제르Aimé Césaire는 말한다.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의민족해방투쟁은 물론, 미국의 블랙파워 운동, 프랑스 등 ‘선진국의 학생운동에이르기까지 파농의 사상이 끼친 영향은 말 그대로 전 세계적이었다. 한국의 민주화투쟁 과정에서도 파놓은 예민한 공감을 일으키며 받아들여졌다. 일본에서는 어떠했던가. 학원투쟁의 한 시기에 파농의 저작이 읽히기는 했지만 소화되지 않은 채로 토해내지고 배설되기만 했을 뿐이 아닌가"라고 농을 소개한 사람 가운데 하나인 에비사카 다케시 씁쓸하게 술회한다. - P115
자유·평등·박애라는 보편적 이념이 적어도 프랑스에서만큼은 체현되고있다고 소박하게 믿고 있던 10대의 파놓은 그 지고한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전장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미사여구에 감추어진 백인 문명의 차별 구조를 직접몸으로 겪고, 진정한 보편주의 이념의 실현이라는 그의 전 생애에 걸친 사상적도전을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뒤 파놓은 일단 마르티니크로 돌아왔다가 1946년 가을 다시프랑스로 건너가 리옹 대학에서 정신의학을 전공했다. 리옹에서 보낸 5년 동안백인 문명과 심각한 갈등을 경험한 파놓은 ‘흑인으로서 실존한다는 것에 대한정신병리적, 철학적 해명을 시도한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완성한다. - P116
1954년 11월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의 봉기를 시작으로 알제리 혁명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하자 파농은 그 협력자가 되었고, 1956년 말경에는 알제리 주재 장관을 향해 알제리인의 독립 요구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요구"라고 선언하면서 병원을 사직했다. "인간에게, 다시 말해 나 자신에게 절망하지 않기 위해서." 파농은 그 사직서를 이렇게 끝맺는다. 1957년 1월 말 알제리에서 튀니지로 탈출한 파동은 정식으로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의 멤버가 되어 대변인으로서 정보선전활동과 기관지 『엘 무쟈히드의 편집과 집필을 담당했고, 이듬해 9월에 임시정부가 성립한 뒤로는기니 주재 대사 등의 격무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파놓은 알제리의 독립만이아니라 아프리카의 통일을 꿈꾸고 있었다. 그가 너무도 이른 죽음을 맞이한 이듬해 알제리는 독립을 달성했지만, 그후 알제리와 아프리카의 현실은 그가 그리던 꿈과는 너무도 달랐다.
유럽은 유럽의 모든 거리에서, 전 세계 곳곳에서 인간을 만날 때마다 인간을 살육하면서도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런 유럽과 결별하자. - P117
사람 한 사람이 인간의 조건에 뒤따르는 보편주의를 지향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전인적 인간의 창조를 호소했다. ‘전인적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근육과 두뇌를 분리하지 않고 노동 속에서 양자를 통일하는 인간", "도구나기술에 지배당하기를 거부하고 오직 자신이 받아들인 목적에 따라 도구와 기술을 활용하는 인간", "타자와 타민족에 대한 착취와 지배를 거부하고, 타자와타민족과의 공생을 원리로 삼는 인간", "자율적 공동체의 자율적인 성원"이다. 이 같은 파농의 호소는 이제 더 이상 무용한 것일까? 백과 흑, 주인과 노예, 제1세계와 제3세계, 제국과 식민지…… 그 대립과 분열이 전례 없는 수준에 이른 20세기. 파농처럼 20세기의 분열을 자신의 내부에 가장 격렬하게 떠안고 있는 존재들이야말로, 어둠이건 희미한 빛이건 인류사의 진정한 미래를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 P118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
1954년 결성된 알제리의 독립운동단체·정당 식민지 시기에는 급진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독립투쟁을 벌였으며, 독립 후에는 오랫동안 유일합법정당으로 기능했다. 1955년 민족해방군ALN을 결성, 알제리와 프랑스에서 폭탄테러와 게릴라 전술로 독립전쟁을 벌여 8년 동안의 전쟁 끝에1962년 7월 5일 독립을 쟁취했다. 그러나 독립 후 민족해방군의 분열로 알제리는한때 내전 상태로까지 치달았으며, 알제리를 프랑스의 ‘또 다른 영토‘로 간주하고적극적으로 프랑스화 정책을 폈던 132년의 식민지 역사를 반영하듯, 15만 명의 아르키Harki(프랑스 쪽에 가담한 알제리 출신 군인·관료)가 프랑스의 보호를 받지 못한채 FLN의 보복에 의해 희생되었다. 한편 알제리 전쟁을 치안유지활동‘으로 폄하하던 프랑스는 1999년에야 이를 전쟁으로 공식 인정했으며, 1961년 알제리인 시위대에 대한 유혈진압사건인 ‘파리 대학살‘도 1998년에 와서야 인정되었다. 알제리 전쟁 시기의 포로 학대와 아르키 처리 문제는 지금도 프랑스와 알제리의 ‘뜨거운 감자‘이다. - P119
프리모 레비 작가 이탈리아 1919. 7. 31~1987. 4. 11
미래를 위한 증인
1987년 4월 11일, 예순일곱의 프리모 레비 Primo Levi는 토리노에 있는 아파트의 현관 난간에서 계단 아래로 몸을 던졌다. 프리모 레비는 1919년 토리노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토리노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격화되고 독일군이 이탈리아 북부지역을 점령하자 정의와 자유‘ 라는 레지스탕스에 참가하여 싸우다 1943년 12월 13일 체포되어 아우슈비츠로 보내졌다. 일반적으로 ‘아우슈비츠‘라 할 때는 1940년 4월부터 폴란드 남서부의 오슈비엥침에 나치 독일군이 건설을 시작하여 점차 주변 지역으로 확장한 일군의 수용소를 가리킨다. 처음에는 폴란드인 정치범이 수용되었다가, 이어 대규모의 소련군 포로들이 수용되었다. 1941년 10월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 Endlosung을 위해 가스실을 갖춘 비르케나우 수용소가 건설되 - P120
고, 1942년 7월 네덜란드를 필두로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 이송이 개시되었다. 가축용 화차에 실려 나흘 동안의 여정 끝에 레비가 도착한 곳은 통칭 ‘부나‘Buna 라고 불리는 모노비츠의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 합성고무공장에 부속된강제노동시설이었다. 그는 도착하기가 무섭게 "여인들과 아이들이 무를 향해떠나는 것"을 보고, 집, 자신의 습관, 옷, 다시 말해 말 그대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빼앗겨 버렸으며, 왼팔에 새겨진 ‘174517‘이라는 문신으로 자신의이름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곳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에 대한 소모전"을강요당하는 전장이자 인간을 파괴하는 거대한 공장이었다. 그곳에서는 "생각하는 것 자체가 죽음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 P121
우리는 노예가 되어, 이름 없는 죽음을 맞기 훨씬 전에 먼저 영혼이 죽어, 수백 번 행진하고 말없이 중노동을 했다. 우리는 돌아가지 못하리라. 아무도 여기서 나가선 안된다. 팔뚝에 새겨진 숫자를 들이대며, 아우슈비츠에서는 인간이 인간으로 하여금 무슨 짓이든 하게 만들 수 있다는 불길한 소식을 세상에 전해서는 안 된다.
아우슈비츠에서 나치에 의해 학살된 희생자의 수는 대략 110만에서 150만 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 90퍼센트는 유대인이었다. 트레블린카, 마이다네크 등 모든 수용소를 합하면 희생자 수는 약 300만 명에 이른다. 다양한 국적의 정치범과 전쟁포로, ‘집시‘로 불리며 차별당하고 있던 신티sinti, 로마Roma 민족 사람들, 동성애자, ‘여호와의증인 신자 등의 이른바 ‘반사회적 인물‘들도 - P121
거기에 포함된다. 1945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가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었을때 100만 벌 이상의 옷과 7톤의 머리카락, 셀수도없을만큼의 신발과 안경이발견되었다. 살아남은 수용자 가운데 5만 8,000명은 철수하는 나치에 의해 ‘죽음의 행진‘으로 끌려갔고, 해방된 수용자는 약 7,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화학자였다는 등등의 몇 가지 행운이 겹쳐 프리모 레비는 살아남았다. 그는 1945년 10월 토리노로 돌아와 곧바로 『이것이 인간인가 se questo èun womo를 집필했다. 그것은 수용소에서 철저하게 부정당한 자신의 인간성을회복하기 위한 시도였으며, 동시에 "위험을 알리는 불길한 경종을 울리기 위한 행위이기도 했다. 1947년에 출간된 이 책의 초판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1958년에 출판사를 바꾸어 재출간되면서 높은 평가를 받아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국과 미국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일본에서는 1980년에 출간되었다(다케야마 히로히데아사히선서朝日). 그후로도 레비는 『휴전』la옮김, tregua(1963), 『주기율표II sisterna periodico(1975), 『지금이 아니면 언제 Sequando?(1982) 등의 작품을 발표하여 "일종의 문화적 영웅" 으로 떠오른다. - P122
만일 레비가 자살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단순명쾌했을 것이라고 말한이는 불가리아 출신의 프랑스 사상가 츠베탕 토도로프Tzvetan Todorov였다(『극한에 맞서』 Face à extréme). 토도로프는 수용소 생존자들에게서 자주 보이는 수치심‘을 실마리로 삼아 레비의 죽음을 고찰하고 있다. 첫째, 기억으로서의 수치심. 자신의 의사에 대한 전면적인 포기와 자기 붕괴에 빠진 희생자의 수치심은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흡사 강간당한 여성의 수치심처럼, 수치심을 느껴야 - P122
하는 것은 강간을 저지른 자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도리어 희생당한 사람이 수치스러워하는 것이다. 둘째, 살아남았다는 수치심. 레비는 만년에도 이렇게 쓰고 있다. ‘누구나 자신의 형을 죽인 카인이라는 의혹, 누구나 자신의 이옷을 밀어내고 그를 대신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의혹이 마음을 갉아들고 구멍을 뚫는다‘고. 그리고 셋째, 인간이라는 수치심. ‘인간이 아우슈비츠를 건설했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것 자체가 죄이다. 저들에게 죄가 있다면 같은 인간인 나역시 유죄가 아닌가‘ 하는 의식이다. 토도로프의 결론적인 이야기는 이렇다. 레비는 장대를 너무 높이 올려놓았다. 인류는 선할 수가 없었다. 이미저 지극히 가까운 과거마저도 왜곡하고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변함없이 무고한 자들은 죄를 의식하고, 죄 있는 자들은 자신이 무죄라고 생각한다. 인류는 아우슈비츠의 교훈을 들으려고하지 않는다." - P123
인류의 역사는 20세기에 이르러 절멸수용소라는 인공 지옥을 출연시켰고, 그 역설적인 부산물로서 ‘생존자문학‘이라고 불러야 할 장르를 탄생시켰다. 『삶의 의미를 찾아서...trotzdem Ja zum Leben sagen의 저자 빅토르 프랑클 Viktor Frankl이나 3부작 『밤, 새벽, 낮』 Night, Dawn, The Accident의 작가 엘리비젤Elie Wiesel과더불어 프리모 레비는 ‘생존자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였다. "지옥은 이제 종교적인 신념이나 몽상이 아니라 집이나 돌, 그리고 나무들처럼 현실적인 존재라고 말해보아도 어느 누구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생존자들은 이미 수용소에 있을 때부터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외면하고 말 - P123
없이 떠나가버리는 악몽으로 온밤 내내 괴로워했다고 레비는 쓰고 있다. 그럼에도 레비는 고뇌를 이야기했다. 설령 이제 아무도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을지라도, ‘생존자문학‘이란 단순히 살아남은 자들의 문학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경험을 이해하고, 묘사할 수 없는 상황을 묘사하고, 전달할 수 없는상념을 전달하도록 운명 지워진 문학, 태생적으로 갈가리 찢긴 문학이다. 아우슈비츠 이후, 인류의 역사는 생환을 기약하기 힘든 ‘오디세우스의 항해‘에 내던져졌다. 바다는 어두컴컴하고, 항해는 목적지도 정하지 못한 채 계속되고 있다.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고, 레비는 결국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생각하는 것 자체가 죽음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레비의 자살은 인류 자체의 자살 과정을 상징하고 있는 것일까. - P124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와 이게파르벤
1942년에 세워진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 자리에는 이게파르벤I. G. Farben이라는 기업의 화학공장이 들어서 있었다. 수용자들은 이곳에서 ‘부나‘라는 합성고무를 만드는 데 동원되었고, 그래서 제3수용소를 ‘부나‘라고 부르기도 한다. 2차대전으로 수요가 폭증해 사세를 빠르게 확장한 이게파르벤은 헤르만 괴링과 하인리히 힘러의전폭적인 지원 아래 충분한 공장 부지를 확보하고 노동력을 제공받았으며(이를 위해 공장에서 일할 폴란드인을 제외한 모든 민간인들이 아우슈비츠 시 밖으로 소개되었다), 노동력 관리에서도 나치 친위대와 긴밀하게 협조했다. 이게파르벤은 다른 기업과 공동 출자해 데게슈 사를 만들고 학살에 쓰인 살인 가스 ‘치클론 B‘를 개발하기도 했다. 부나 공장을 거쳐간 3만 5,000명의 노동자 가운데 2만 5,000명이 죽었다. 전쟁이 끝난 뒤 이게파르벤의 고위 경영진과 기술자들은 뉘른베르크 재판에회부되어 5명이 각각 6~8년형을 선고받았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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