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하우스 Bauhaus

1919년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가 독일 바이마르에 세운 조형학교, ‘집을 짓는다‘는 뜻의 하우스바우 Hausbau 를 도치한 이름으로, 순수예술과 공예는 동일한 것의 두 변형이라는 생각 아래미술학교와 공예학교를 병합한 것이다. 바로크 이후 상실된 총체예술 이념의 복구, 기술과 장인성의 가치에 대한 재평가, 실용성을 근간으로 한예술과 테크놀로지의 통합이라는 세 가지 목표를 지향했으며, 위계적인 교수법 대신 상호협동과 공동체 정신을 강조하고 협동 워크숍 체제를 지향했다. 1925년 정부의 재정 지원 취소 등으로 폐쇄 위기에 처했으나, 데사우 시에서 시립 바우하우스로 재출발했다. 1932년 나치의 탄압으로 데사우에서 쫓겨난 후 베를린에 사립바우하우스가 설립되었으나, 1933년에 나치에 의해 완전히 폐쇄되었다. 조형 디자인의 기능과 효율성에 초점을 둔 바우하우스의 교육 이념은 전 세계적으로 보급되어 현대 조형예술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 P66

에리히 케스트너
작가·시인  독일  
1899. 2. 23~1974. 7. 29

잔혹한 시대의 증인이 되어

‘절대로 울지 말자!‘
하늘을 나는 교실』Das fliegende Klassenzimmer의 주인공 마르틴 탈러가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말이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급비생인 마르틴의 부모는 크리스마스 휴가가 다가오는데도 아들에게 고작 5 마르크밖에 송금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섣달그믐까지 갚기로 약속하고 양복점 주인에게 빌린 돈이었다.
그러나 마르틴이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8마르크의 여비가 필요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편지를 쓴다. 집에 오지 말고보내준 돈으로 초콜릿이라도 사먹으라고, 가끔은 썰매라도 타면서 놀라고, 그리고 절대 울지 않기로 서로 약속하자고. "어머니, 다정하신 어머니!" 그렇게 중얼거린 마르틴은 한 번은울어버리고 말지만, 이내 ‘절대로 울지 말자! 고 다짐한다. - P67

토마스 만 Thomas Mann을 비롯하여 그의 형 하인리히 만Heinrich Mann, 베르톨트 브레히트 등 수많은 문학가들이 망명했다. 쿠르트 투홀스키kurt Tucholsky는1935년 스웨덴에서 자살했다. 에른스트 톨러는 1939년에 뉴욕에서 자살했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1940년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국경을 넘어가던도중 붙잡혀 자살했다.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는 1942년 브라질에서 자살했다. 그러나 케스트너는 위험을 무릅쓰고 독일에 머물렀다. 독일을 떠나는 친구 헤르만 케스텐Hermann Kesten에게 그는 "어머니를 위해서 이곳에 머물 생각일세. 그래서 언젠가 찾아올 잔혹함의 증인이 되겠어. 나치의 독재를 다룬 장편을 쓸 계획이네. 미래의 고발자로 꼭 남아 있고 싶네"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케스트너는 자신의 책들이 불태워지는 현장을 일부러 보러 갔다. - P70

고난의 시대를 살아남은 케스트너는 전후에도 『두 명의 로테』Das doppelteLottchen(1949), 『동물회의』Die Konferenz der Tiere(1949), 『내가 아이였을 때A‘s ich einpleiner Junge war(1957) 등의 작품을 남기고 1974년 7월 29일 뮌헨에서 식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독일문학가 이케다 히로시池田浩의 표현을 빌리면, 케스트너는 "도덕이 무너져버린 시대"에 모럴리스트가 되려 했던 인물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의 인물상은 단순한 것일 수 없다. 헤르만 케스텐은 이렇게 묘사한다.

정치적으로는 제한 없는 자유주의자이고 세계관에서는 과격한 휴머니스트이며, 천성적으로 이성적이고, 조심스러우면서도 돈 씀씀이가 헤프고, 내성적이면서도 결단력이 뛰어나며, 온화하면서도 반항적이고, 친절하면서도 신경질적이며, 신랄하면서도섬세한 인물이 바로 케스트너이다. - P71

바이마르공화국1919-1933

1차대전으로 독일제국이 붕괴한 후 군부, 관료, 대자본가 등보수 세력과 사회민주당의 타협에 의해 성립한 민주공화국.
1919년 1월 총선에서 승리한 사회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민주공화파가 연립내각을 구성하고 그해 8월 헌법을 반포하면서출범했다. 베르사유 조약 체결 후 극우 세력의 카프 반란, 좌파의 루르 봉기 등 반대파의 거센 반발에 시달렸고, 막대한 전쟁배상금 지불과1923년 프랑스·벨기에 연합군의 루르 점령으로 심한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1920년대 중반 배상 문제를 일단락하고 다시 선진공업국으로 변모하면서 짧은 안정기를 누렸다. 그러나 국력이 회복됨에 따라 강대한 독일 건설을 꿈꾸는 우익의 권력이 강화되고, 1929년 대공황에 휘말리면서 공화국은 급격히 쇠락했다. 실업자가급증하고 경제가 파탄 지경에 이르면서 극좌와 극우 세력이 강해졌는데, 분열한 좌파와 달리 우파는 군부, 관료, 자본가뿐 아니라 중산층까지 나치를 중심으로 결집했다. 1933년 1월 나치 정권이 수립되면서 바이마르공화국은 14년 만에 무너졌다. - P73

숄 남매

한스 숄
반나치 저항자 독일  
1918. 9. 22~1943. 2. 22

조피 숄
반나치 저항자  독일 
1921. 5. 9~1943. 2. 22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강제수용소가 주는 짓눌린 듯한 공포감, 게슈타포 등 그물망 같은 치안 조직,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민이 서로 감시하고 밀고하는 메커니즘, 그 한복판에서 처음으로 저항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고 또 얼마나 "한없이고독" (잉게 숄inge Scholl)한 작업이었을까? 그러나 여기 그런 목소리를 드높인 이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백장미통신은 1942년 7월 초에 제4호까지, 그리고1943년 1월과 2월에 제5호와 제6호가 제작되어 독일 남부 각 도시에서 무작위로 선정된 개인들에게까지 송달되었다.
1943년 2월 18일, 뮌헨 대학에서 함께 공부하던 한스 숄Hans Scholl과 조피Sophie Scholl 남매는 이제까지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일을 했다. 백주 대낮에 아무런 위장도 하지 않고 예방책도 세우지 않은 채 대학 본관에서 팸플릿을 뿌린것이다. 그것이 마지막 호가 된 『백장미통신』 제6호였다. 거기에는 "청산의 날이 왔다. 독일 청년들이 그렇게도 증오하는 독재체제를 청산할 바로 그날이" 라고 씌어 있었다. - P75

한스와 조피의 마지막 모습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들의 태도를 증언한다. 특히 조피는 조사를 받은 뒤에도 편안히잠을 자고, 사형 직전의 면회에서도 부모가 가져온 음식을 보고 "저, 아직 점심을 먹지 못했어요" 하고 입맛을 다시며 꾸러미를 펼쳐보았다고 한다. 언니잉게의 회상에 따르면, 조피는 짙은 갈색 머리에 크고 거무스레한 눈동자를 가졌으며, 아직 천진난만한 앳된 표정에 "무엇에건 킁킁거리며 코를 들이대는 어린 동물 같은 호기심"과 "대단히 진지한 태도를 함께 간직하고 있었다. 남겨진 사진이 그녀의 이런 인상을 뒷받침해준다. 그러나 어떤 교사는 조피의 "섣불리 자신의 자주성을 관철하는 태도를 가리켜 "경망스럽다"라고 표현하기도했다. 실제로 민족재판소에서 그녀는 재판관에게 "비록 우리들의 머리는 오늘떨어지지만, 여러분들의 머리도 우리 뒤를 이어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녀의 이런 ‘경망스러운‘ 태도는 잔다르크나 막달라 마리아를연상케 한다. 그러나 이 ‘경망스러운 이들에게는 국가권력이 휘두르는 죽음의위협도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 P77

조피와 같은 감방에 있었던 엘제 게벨lse Gebel에 따르면, 그녀는 마지막순간을 앞두고 "이렇게 아름답고 멋진 햇살이 비치는 날에 이제 난 떠나가야만해. 내겐 죽음 따윈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의 행동이 수천 명의 마음을 흔들어깨울 테니까. 분명 학생들이 저항하며 일어날 거야"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게벨은 대답했다. "조피, 넌 아직 몰라. 인간이 얼마나 겁 많은 짐승인지를."실제로 조피가 기대했던 학생들의 저항은 일어나지 않았다. 저항은커녕, 숄남매와 프롭스트가 처형되고 사흘 뒤 대학 강당에 모인 학생중대는 ‘백장미‘를 매도하는 나치 학생지도자의 연설에 환성을 지르고, 숄 남매를 게슈타포에게 인계한 대학 직원에게 갈채를 보냈다. ‘백장미‘의 다른 동료들 역시 이해 2월과 3월에 연이어 체포되었고, 알렉산더 슈모렐과 쿠르트 후버는 1943년 7월 13일에, 빌리 그라프는 같은 해 10월 12일에 처형되었다.
‘백장미‘는 ‘시민적, 그리스도교적 저항이며, 그런 한계 때문에 좌절한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날의 세계는 다시 그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 P78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과 한국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은 1970년대 말 한국에 번역되어 군사독재에 저항하던 학생들 사이에서 필독서처럼 읽히며 한국 학생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나치의 ‘긴급명령‘과 유신정권이 발동한
‘긴급조치‘, 전두환 군사독재의 철권통치가 일체의 비판을 봉쇄했다는점에서 일맥상통해 이 책의 상황과 당시 한국의 상황을 유사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긴급조치 9호 세대들은 이 책에서 영감을 얻어 ‘반정부 페인트 낙서‘라는 저항 방식을 착안하기도 했는데, 1978년 5월 1일 서울대 강의실 벽 곳곳을 장식한 반체제 페인트 낙서, 1979년 2학기 개강 직후 연세대 독수리상 기둥에서 발견된 ‘유신철폐‘, ‘독재타도‘라는 붉은 페인트 낙서 등이 그 예이다. - P79

그 글을 읽는 우리는 안네의 그런 모습에서어떤 ‘희망‘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무고한 소녀는 똑같이 무고한수백만 명의 사람들과 더불어 아무런 희망도 없는 죽음을 향해 걸어가야 했다.
안네의 가족 8명이 25개월 동안 생활한 ‘은신처‘는 1944년 8월 4일 누군가의 밀고를 받은 나치 친위대와 비밀경찰에 의해 급습당한다. 그리고 9월 3일그들 가족은 네덜란드의 베스테르보르크 수용소에서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절멸수용소로 이송되는데, 그것이 네덜란드에서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마지막이송열차가 되었다. 연합군이 이미 그곳에서 겨우 200킬로미터 떨어진 브뤼셀까지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이 열차에는 총 1,019명의 희생자들이 타고 있었는데, 그중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남자 45 명과 여자 82명에 지나지 않았다.  - P83

안네의 여덟 가족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아버지 오토 단 한 명이었다. 딸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에 남겨진 어머니 에디트Edith는 1945년 1월 6일 그곳에서 사망했다. 『안네의 일기에 판단이라는성으로 등장하는 헤르만 판 펠스Hermann van Pels는 1944년 10월 또는 11월에아우슈비츠에서 가스실로 보내져 사망했다. 그의 아내 아우구스테Auguste는 몇몇 수용소를 전전했지만 사망일시와 장소는 분명하지 않다. 안네가 사랑했던페터는 오스트리아의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에서 1945년 5월 5일에 사망했다.
치과의사 뒤셀, 즉 프리츠 페퍼Fritz Plefter는 노이엔가 수용소에서 1944년 12월 20일 사망했다. - P83

이렇게 쓴 안네는 우리들 ‘일반 사람들‘의 책임을 계속 묻고 있다. 설령 세상 사람들 수백만 명이 안네의 일기』를 읽고 동정의 눈물을 흘릴지라도, 그것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지는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만들어진시오니스트 국가는 피해자가 가해자로 둔갑하는 역설을 저질러왔으며, 한편으로 세계는 소련과 동구권의 사회주의체제 붕괴 이후 또다시 대두하는 배외주의를 눈앞에 두고 있다. 오늘날의 세계는 안네의 죽음을 더더욱 희망 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 P84

살바도르 아옌데
정치가  칠레  
1908. 7. 26~1973. 9. 11

칠레의 길을 위한 싸움

드브레는 앞의 인터뷰에 붙인 서문에서 아옌데를 이렇게 규정한다. "박사‘ 이면서 동시에 ‘동지‘이고, 프리메이슨 단원인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자이며,전 공화국 상원의원이면서 사회주의 전사이고, 부르주아로 성장했으면서도 혁명적 확신을 지니고 있으며, 그 나라의 수도보다) 지방적 현실에 깊이 뿌리를내리고 있으면서도 철저한 국제주의자이다." 이런 아옌데 자신이 ‘칠레 역사의변증법‘에 각인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치의 여러 형태와 광범한 프롤레타리아 사회운동의 결합‘의 ‘살아 있는 예이자 ‘화신‘이라고 드브레는 쓰고 있다.
따라서 아옌데가 현재의 사회 위에 "과거의 사회와 미래의 사회를 이어주는 교랑을 놓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 P88

인민연합 정부는 구리광산 등의 기간산업 및 유통·금융 부문의 국유화와철저한 농지개혁을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국내의 인플레이션과 구리의 국제가격 하락, 미국의 원조 삭감, 국제금융기관의 대출 정지 등으로 말미암아 칠레의 경제는 급속하게 악화되었다. 인민연합 내부에서도 여러 세력 간의 대립이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러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미국 중앙정보국 CIA 과 거대기업 아이티티 IT 사의 후원을 받은 우파의 정권 전복 공작이 격심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군부 쿠데타의 징후가 분명해진 시점에서도 아옌데는이상주의자다운 완고함으로 끝까지 ‘혁명적 폭력의 선제적 행사‘를 배격하고
‘입헌적 틀‘을 고집했다. 군부 쿠데타 소식을 접한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집필중이던 회상록에 서둘러 마지막 몇행을 적어넣었다. - P89

칠레에는 오랜 문민정치의 역사가 있다. 그 역사에서는 혁명은 드물었고, 보수적이고 평범하며 안정적인 정부가 많았다. 대부분의 대통령은 그릇이 작았지만, 두 명은큰 인물이었다. 발마세다José Manuel Balmaceda (19세기 말의 자유주의자)와 아옌데가 그 - P89

들이다. (………) 발마세다는 초석으로 얻는 부를 외국에 넘겨주지 않으려 저항했기 때문에 자살로 내몰렸다. 아옌데는 칠레의 또 다른 지하자원인 구리를 국유화했기 때문에 암살당했다. 두 경우 모두 칠레의 과두제가 유혈혁명을 조직했다. 두 경우모두 군인들이 사냥개 역할을 맡았다. 이들 군인들을 사주하고 자금을 제공한 세력은발마세다 때는 영국의 회사, 아옌데 때는 북아메리카의 회사였다. (네루다 회상록』) - P90

‘사회주의를 향한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길‘을 목표로 한 칠레 인민연합의개혁 프로그램은 당시 ‘아옌데 실험‘으로 불리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으며, 특히 유럽 각국과 일본 등 선진자본주의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사회주의 분파의전략 구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복수정당제‘ 개념을 포함하여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아 ‘아옌데 실험‘은 사회주의 자체를 구하려는 시도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바라는 아옌데에게 선물한 자신의 책에 "다른 길을 선택해 같은곳에 도달하려는 살바도르 아옌데에게"라는 헌사를 썼다고 한다. 다른 길을택한 두 사람은 모두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장렬하게 전사했다. - P90

빅토르 하라
연극인 싱어송라이터  칠레 ㅡ 
1938. 9. 28~1973. 9. 16

두 손이 으깨어지더라도

두 손이 으깨어진 빅토르 하라 Victor Jara………… 그의 이름은 16세기 독일의 조각가 틸만 리멘슈나이더Tilman Riemenschneider 를떠올리게 한다. 리멘슈나이더는 농민군에 가담했다는 이유로두 번 다시 작품을 만들 수 없도록 양손을 못 쓰게 되었다. 칠레의 음악가 빅토르 하라 역시 ‘칠레 사회주의의 길‘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똑같은 일을 당했다.
1973년 9월 11일, 군사 쿠데타가 발발하자 빅토르 하라는 "시민들은 각자의 일에 충실히 임해주십시오"라는 아옌데대통령의 라디오 방송을 듣고 국립공과대학으로 향하던 도중체포되었다. 임시 정치범 수용소로 변해버린 칠레 스타디움으로 연행된 하라는 일주일 후인 9월 18일 시체 공시소에서 그 - P92

의 아내 요안 하라 Joan Jara에 의해 확인되었다.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한 모습이었다.

빅토르 하라는 스타디움에 연행된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해 기타를 집어들고 인민연합 찬가 〈벤세레모스〉venceremas (우리 승리하리라)를 부르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화를내며 그의 기타를 빼앗았다.
하라는 손뼉을 치며 노래를 계속 이어갔다. 화가 치밀어오른 군인들은 소총 개머리판으로 그의 두 팔을 짓이겼다. 그래도 하라는 일어서서 노래를 부르려 했다. 그러자군인들이 그를 향해 총을 쏘았다. 마치 그가 되살아날까 두려워하기라도 하듯, 수십발의 총탄이 그의 몸 곳곳을 파고들었다.
그때 한 군인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디 한번 계속 불러봐. 이래도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 (야기 히로요八代 금지된 노래」 - P93

쿠바의 뮤지션 실비오 로드리게스silvio Rodriguez"는 이렇게 말한다. "박물관에 들어가서는 안 될 전통문화와 민속음악이 있다. 절대로 흥미를 잃지 않고한 세대에서 또 한 세대로 이어져야 하는 것, 역사의 한 순간 한 순간마다 그본질이 존재할 수 있도록 형태를 바꾸어가야 하는 것이 존재한다. 이것이 빅토르 하라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 가운데 하나이다. 노래가 현실의 뼈와 살과 혈관에 형태를 만드는 것일 때, 그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저 살육자들이 그 - P96

에게 퍼부은 증오야말로 진정 그것을 보여준다. 그의 최후는 그 당연한 귀결이며, 그가 스스로 바란 일임에 틀림없다."
빅토르 하라와 함께 ‘새로운 노래‘ 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던 앙헬 파라Angel Parra는 쿠데타 때 체포되었으나 반년 만에 석방되어 멕시코로 망명, 훗날파리로 이주했다. 1987년 크리스마스, 피노체트 정권의 사면 조치로 추방령이해제되었다는 사실을 안 그는 「빅토르 하라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 P97

그러나 무엇을 용서한단 말인가?
용서받지 않으면 안 될 그 어떤 일을 내가 저질렀단 말인가?
그대의 등에 박힌 40발의 총탄이 나를 용서해주는 것인가?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내 아버지가?
저 3만 명의 죽은 자들과 피로 물든 마포초 강이 나를 용서한단 말인가?
(.....)
‘너는 리스트에 올라 있어."
무슨 리스트? 웃고, 생각하고, 자유로이 돌아다니고, 사랑하고, 죽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리스트?
(.....)
그리고 또 하나 자네에게 전하고 싶은 이별의 말이 있네.
올 겨울의 파리는 너무 멋졌지. 그래서 내게 베풀어준 사면을 받지 않기로 했어.
나는 한 방울 눈물 속에 조국을 꼭 안고 싶어.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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