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영국 여행에서는 초겨울의 고요한 호수 지방을 찾아가기도했다. 또 다른 해에는 글래스고에서 스카이 섬까지 북상해 하이랜드를 드라이브하며 그곳의 풍광에 마음을 빼앗겼다. ‘저세상‘이 바로 곁인 듯 느껴져 ‘죽는다면 이런 곳이 좋겠다.‘라고 몇 번이나 생각했던일이 잊히지 않는다. 다만 하이랜드는 잉글랜드가 아니라 스코틀랜드에 속한다. ‘영국‘이라고 일괄해서 말할수는 없다. - P5
영국을 찾아갈 때마다 이 땅은 나에게 동경과 반감, 경의와 경멸이 한데 뒤섞인 복잡한 상념을 불러일으켰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오스카 와일드, 조지 오웰 등 나에게는 우상이라고도 할 법한 수많은문학가들을 낳은 곳. 언젠가 셰익스피어의 고향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서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의 연극 ‘베니스의 상인을 본 적이 있다. 악역임에 마땅한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의 깊은 비애를 부각한 연출에 감탄했다. 물론 연출의 힘이 뒷받침했겠지만, 그러한 연출을 가능케 한 원작의 깊이와 다면성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이 점을 포함해 셰익스피어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이번책에서는 미처 펜이 닿지 못했음을 밝혀둔다.) 문학계의 수많은 ‘우상‘들이 이 땅에서 탄생했던 것에 비해 음악계와 미술계에서는 빛나는 인물을 그리 많이 볼수없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운 주제다. - P5
어쨌든 나는 젊은 시절부터 영국의 문화와 예술에 매혹되어 왔다. 이와 동시에 이 나라가 대제국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발휘해왔던, 두려울 정도로 냉혹하고 교활했던 측면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19세기 이후의 근대소설에는 해외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이자와 배당금으로 아무런 부족함 없이 생활하는 부유층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 이면에 현지인이나 노예에 대한 지배와 착취가 자행됐다는점은 쉽게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 책에서 잉카쇼니바레의 미술에 주목하는 까닭이다. 이렇게 모순으로 가득 찬 양면성이 이 나라 사람들의 문화에도암울한 아이러니를 움트게 하여 그들의 작품은 복잡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 생산된 대중적 미스터리 작품을 다른나라의 것과 비교해보는 것만으로도 쉽게 깨달을수 있을 것이다. - P6
런던에서 케임브리지로 가던 도중 F가 놀라워하며 말했다. "어? 냄새가 안나!" 그녀는 2001년 12월 이후로는 영국에 온 적이없었다. 2001년에 배기가스로 인한 악취 때문에 고생했던 기억이꽤 강렬했던 듯하다. 오랜만에 방문한 런던은 획기적이라고 할 만큼 매연이 줄어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번 런던 여행에서가장 먼저 느낀 감각이었다. 2001년은 뉴욕 세계무역센터 등이 동시에 표적이 된 자살폭탄 공격, 이른바 ‘9·11테러‘가 일어난 해였다. 당시 우리는 계엄 태세였던 미국대사관 바로 옆에 위치한 호텔에서 묵고 있었다. 꽤 - P11
낡은 호텔의 11층 객실 창가에 멍하니 서서 ‘나는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죽을까………‘ 같은 생각을 했다. 그때로부터 거의 14년이흘렀다. 나는 아직 살아 있으며 예전과 똑같은 생각을 반복한다. 9.11 테러 이후 2년이 지난 2003년에는 미국과 영국이 이라크전쟁을 일으켜 한사회가 완전히 파괴됐다. 시리아에서는 내전이 격화되어 수많은 난민이 생겨났다. 런던의 배기가스는 개선되었지만, 세계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 P13
어렸을 때 나의 애독서였던 『플랜더스의 개』는 영국 작가 위다Ouida, Maria Louise Ramé (1839~1908)가 19세기에 쓴 아동문학이다. 주인공인 가난한 소년 넬로는 늙은 개 파트라슈와 함께 우유를배달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넬로는 온갖불행에 시달린 끝에, 한 번만이라도 보기를 고대했던 안트베르펜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제단화 앞에서 파트라슈를 끌어안고서 숨을 거둔다. 이 제단화가 바로 루벤스가 그린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다. 나는 옛날 이 제단화를 보기 위해 안트베르펜을찾은 적이 있다. - P21
다음 날에는 아침부터 케임브리지 대학의 식물원을 산책했다. 나는 여행지에서 미술관 못지않게 동물원이나 식물원을 즐겨 찾는다. 그러니 영국에 와서도 평소 습관대로 여행한 셈이다. 식물원에 다녀와서는 피츠윌리엄 박물관을 찾았다. 케임브리지 대학의부설 박물관으로 1816 년에 창립한 곳이다. 당당한 외관의 건물안에는 티치아노, 베로네제, 루벤스, 반다이크부터 드가, 르누아르, 세잔, 피카소에 이르는 명작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실로 호화로운 컬렉션이다. 하나하나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특히 기억에 강하게 남은 그림은 프란스 할스 Frans Hals (1582경~1666)의 이름 모를남자의 초상」이었다. - P23
문학계에서는 훨씬 이전인 16세기부터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더욱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17세기 영국이 혁명과 동란의 시대였음을 고려한다고해도, 같은 시기에 플랑드르 역시 기나긴 전란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점을 생각해보면 여전히 잘 설명되지 않는다. 거꾸로 생각하면이 시대에 어째서 유독 플랑드르(네덜란드)에서 미술이 집중적으로 융성할 수 있었을까? 동인도회사의 설립과 경영으로 인한 부의 축적, 그리고 부유한 시민계급의 형성이라는 이유로 설명이 가능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왠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 P27
시인이자 영문학자인 오타 미와씨가 꼭한번 찾아가보라고 권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피츠윌리엄 박물관과는 달리 매우 평범한 민가와 같은 외양을 하고 있었다. 런던에서 테이트 갤러리 학예사로 오래 일했던 짐 에드와 그의 부인 헬렌이 1956년 케임브리지로 와서 낡고 오래된 작은 집을 개축하여 미술관을 열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방문객이 자유롭고 편한 마음으로 예술작품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목표로 삼아 이 미술관을만들었다. 콘스탄틴 브랑쿠시 Constantin Brancusi(1876~1957), 바버라헵워스 Barbara Hepworth (1903~1975), 헨리 무어lenry Moore (1898~1986), 베니콜슨Ben Nicholson (1894~1982), 호안 미로Joan Miro (1893~1983) 등의 작품을 편안하게 배치해두었는데 정말 훌륭한 취향을 보여주는 미술관이었다. 에드 부부는 케임브리지를 떠날 때 이곳을 대학에 기증했고, 이후 케임브리지 대학이 관리를 맡고 있다. - P29
나는 교토에서 태어난 재일조선인이다. 나의 어린 시절, 낮은신분에서 입신하여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도요토미히데요시는 두말할 것 없이 서민층 아이들 사이에서 영웅이었다. 문학이나 영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는 집요할 만큼 영웅담이반복되었다. 그런 한편 교토의 도요쿠니신사豊國神社앞에는 ‘귀무덤‘이 있다. ‘코 무덤‘이라고도 부른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도요토미 히데요시 군대가 공적을 세운 증거로 조선과 명나라 병사의 귀와 코를 베어와묻어놓은 무덤이다. 2만명에 달하는 사람의 귀와 코가 묻혀 있다고 한다. - P37
많은 일본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히데요시를 영웅이라고생각하면서 자랐던 나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그런 내 자신에게위화감과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다. 히데요시가 나의 영웅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으며 묵살되어온 소수자나 패배자의 존재에 눈을떴던 셈이다. 나 자신이 그런 패자들쪽에 속해 있다는사실 역시. 그러한 ‘불편함이야말로 내 인생의 귀중한 자산이다. 만약 그자각이 없었더라면 내 정신세계는 언제까지나 일면적이고 천박했으리라. 아일랜드 사람이라면 크롬웰을 어떻게 생각할지를 상상해보는 일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 P39
버지니아 울프는 1928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안의 여자 대학에서 펼쳤던 강연을 기초로 하여 이듬해 자기만의 방』을 출간했다. 당시 46세였던 울프가 후배 여성들에게 보낸 격려의 메시지를 담은 ‘자기만의 방』은 지금까지도 페미니즘 고전이라고 할 법한 책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집요할 정도로 성별을 의식하게끔만들었던 시대"에 여성은 어떻게 살아야 했을까. 울프는 강연장에서 "와인을 마시며 ‘자기만의 방‘을 가지라고 확실히 말했다."라고 일기에 남겼다. ‘자기만의 방‘이라고 하는 상징적인 비유를 통해 남편이나 가정에서의 자립, 가부장제로부터 독립할 각오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 P49
그리고 먼저 실제로 ‘자기만의 방‘을 확보하고,마침내 한국 여성 미술을 대표하는 아티스트가 됐다. 그 무렵 윤석남은 평소 반복해서 읽었던 버지니아울프의 『자기만의 방』을염두에 두었다고 말했다.(『나의 조선미술순례』, 반비, 2014년) 1920년대 영국의 여성 작가가 들려준 이야기가 시공을 넘어 1970년대한국 여성의 등을 힘껏 밀어주었던 것이다. 울프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P51
여기저기서 물밀 듯 요동치는 ‘생각‘에 마음을 빼앗겼기때문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던 나는 빠르게 잔디를 가로질러 걷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어떤 남자가 튀어나와 갑작스레 나를 가로막았습니다. 와이셔츠에 모닝코트를 걸친 기묘해 보이는 그 물체의 몸짓이 나를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엔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의 얼굴은 경악과 분노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나를 도운 건 이성보다는 본능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의례를 담당하는 교구 관리원이었고 나는 여자였습니다. 이곳은 잔디밭이고 인도는 저쪽에 있었습니다. 잔디밭은 대학의 특별연구원(펠로)이나 학자 (스칼라) 만들어갈 수 있게끔 허용되었고 저쪽 자갈길이 내가 걸어야 할 장소였습니다. - P51
이 소동 덕에 울프가 사색의 강아래에서 건져 올리려 했던 ‘물고기‘, 즉 귀중한 ‘아이디어‘는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학교를 다니던 때의 ‘전통‘이 아직 여전히 살아 있는것이다. 여기서 잔디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며, 정원을 꾸미기 위한 장식도 아니다. 엄연한 ‘권위‘와 ‘위계‘의 표식인 셈이다. ‘잔디밭에 들어갈 수 있는 권리‘와 더불어 교원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특권은 무료로 제공되는 식사다. 펠로의 손님 역시 이 특권의 떡고물처럼 공짜로 밥을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애덤이 같이 밥을 먹자고 권했기에 호기심이 가득했던 우리는 기꺼이 초대를 받아들였다. - P53
실존 인물인 에릭 리델은 스코틀랜드 선교사의 아들로 1902년에 중국 톈진에서 태어났다. 1902년이라고 하면 의화단사건 직후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서구 열강과 일본은 중국에 군대를 주둔하고 다양한 요구를 내세우며 침략을 시작했다. 제국주의 열강이제3세계 지역을 잠식하고 침략하는 과정에서, 개개인의 의도가어떠했건 간에 기독교선교사들이 첨병 역할을 했다는 점은 역사적 사실이다. 에릭 리델의 생애에도 그러한 역사의 각인이 찍혀 있다고 할수 있다. - P57
이 영화는 원작자, 제작자, 감독의 의도가 어떠했건 (아마도그 의도를 뛰어넘어 많은 이야기를 전해준다. 영국 제국주의의 한자화상을 보여준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 그림자를 유대인과 스코틀랜드인이라는 주변적 존재를 통해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또한 이 영화의 제작자는 이후 다이애나비의 연인으로서 1997년파리에서 자동차사고로 함께 세상을 떠난 도디 알파예드 Dodi Al-fayed (1955~1997)다. 이집트 억만장자의 아들로 태어나 스위스에서교육을 받았던 그가 불의 전차」를 제작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면서도 흥미롭다. 영국 주류사회에 속하기 위해 영국 국가대표로 필사적으로 달렸고 결국 우승까지 했지만 공허한 마음을 금할수 없었던 유대인 헤럴드에게, 도디 알파예드는 자기 자신을 투영했던 것이 아닐까. 엄청난 부호였지만 아랍 출신이었기에 항상주변적 존재로 머물렀던 그는 황태자비를 자신의 연인으로 삼아중심으로 진입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 P59
동전 던지기 운운은 영국인다운 농담일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리 농담이라고 해도.…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온화하고도 독실한, 그리고 겸허하고 유머를 갖춘 노학자야말로 좋건 나쁘건 영국 인문학의 전통을 체현하는 인물상이지 않을까. 이 나라에는 M 선생처럼 일본 중국 그 밖의 아시아 여러 나라, 중동,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을 전공으로 하는 전문가와 석학이 매우두텁게 존재하고 있다. 옛 대영제국의 판도와도 같이 폭넓게, 유사한 지적 자원의 층이 쌓여온 것이다. 제국이 층층이 쌓아올린 지책의 퇴적이다. 그 저변에 에릭 리델과 같은 존재도 있었다. - P63
아, 얼마나 섬세하고 얼마나 애절했는지, 또 얼마나 고독한소리였는지, ‘매료된다는건 이런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1977년9월 27일에 리흐테르가 올드버러에서 열었던 작은 리사이틀 현장의 모습이었다. 영상에는 다음과 같은 자막이 붙어 있었다.
리흐테르는 원래 카메라를 너무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내는 영상 기록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카메라를 감추고 녹화하는 방법에 동의했다. 리흐테르는 연주가 끝나고이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영상 기록에 대한 아내의 열의를 받아들였다. 이 프로그램은 1997년에 세상을 떠난 위대한 피아니스트리흐테르와 같은 해에 탄생 200주년을 맞은 슈베르트를 헌정하기 위해 재편집했다. - P69
브리튼과 친밀한 사이였던 리흐테르는 종종 올드버러를 방문했다. 앞서 말했던 콘서트도 올드버러 근처의 스네이프 몰팅스 콘서트홀에서 열린 것이다. 너무나 바빴던 거장 피아니스트는 매년 아득히 먼 이곳을 찾았고, 창고 같은 자그마한 홀에서 얼마 되지 않는 청중을 상대로 이런 명연을 펼쳤다. 올드버러는 어떤 곳일까? - P69
브리튼과 파트너인 피터 피어스는 오페라의 원작이 된 조지크래브George Grabbe (1754~1832)의 시 「마을」을 읽고 이야기를 만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인 어부 그라임스의 캐릭터는 매우 복잡하게 변했다. 원작에서는 명백한 악한인 그라임스를 무자비한운명 앞에 놓인 사회적 희생자로 바꾸었던 것이다. 브리튼은 이작품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사회가 잔인해지면 사람들은 더잔인해진다." - P81
1938년 9월 30일 뮌헨회담의 결과로 영국과 프랑스 양국은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 지방이 독일로 편입되는 것을 용인했다. 약 22만 명의 난민이 병합 지역에서 체코로 피난을 가야만 했고 공산당원이나 사회민주당원은 독일로 송환되어 탄압을 받았다. 1939년 3월에 체코슬로바키아는 해체됐다. 같은 해 8월 독일은 독소불가침 조약을 맺은 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했다.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브리튼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1939년4월 피어스와 함께 영국을 뒤로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병역을 거부한다는 뜻도 담겨 있었다. - P81
반전평화주의자 벤저민 브리튼이 천황제 군국주의의 중요한 의전이었던 황기 2600년 기념제를 위해 작곡했다는 에피소드는 꽤 복잡하고 흥미롭다. 당시 브리튼은 아직 젊었고(28세), 미국에서의 타향살이로 경제적으로도 곤궁했다는 사실이 하나의 설명이 될 수 있다. 젊고 가난하며 야심이 넘쳤던 작곡가에게는 이의뢰가 큰 기회로 여겨졌으리라는 점은 이상하지 않다. 또한 아무리 반전주의자라고 하더라도 유럽에서 자랐던 젊은이에게 머나먼 극동에 위치한 일본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그래서 절박한 위기감으로 다가오는 대상은 아니었으리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게다가 이미 오랜 경력과 명성의 소유자였던 독일의 대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도 이 위촉에 응해 작곡을 맡기도 했다. - P83
자신의 곡이 채용되지 않았던 일을 두고 브리튼은《뉴욕 선》지에 게재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나는 될 수 있는 한 반전적인 곡으로 만들었습니다. ……) 부모님과의 추억에이 교향곡을 헌정했지요. 일종의 진혼곡이기 때문에, 진혼 미사곡에서 분노의 날」을 인용했습니다."(고바야시 게이코, 벤저민 브리튼의 ‘전쟁 레퀴엠‘」, 《일본대학대학원 종합사회정보연구과기요》No.13, 2012를 참고, 인용부분의 원문은 영문)의도가 어떠했든 결과적으로 브리튼은 일본 군국주의를 비판하는 악곡을 보냈던 셈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브리튼의 곡이 일본 정부에 의해 채택되지 않은 것이 그에게 행운이었다. ‘위촉에 응했다는 불명예‘ 속에서도 ‘군국주의와는 사상을 같이하지 않아 명예를 지켰다‘고 요약해볼 수 있으리라. 오늘날 이 곡은이후 탄생할 <전쟁 레퀴엠>을 예고하는 명곡으로 평가받고 있다. - P85
내가 미국에 갔을 때, 루돌프 제르킨이 아파트를 구해주겠다고 말을 꺼냈다. "돌아가지 말고 남아 있어줘"라고누구나 내게 부탁했다. (……) 그 이후 모두가 같은 질문을 했다. 왜 미국에 남지 않았지? 도대체 왜? 로스트로포비치도, 아슈케나지도…………. 다음 두 가지 이유가 없었다면 나도 고려해봤을지도 모른다. 하나는 내가 제1호가 아니었다는 점. 이건 큰 문제다. 아무리 도망치려고 해도 끔찍한 모욕이 기다리고 있다. 만약 그쪽에 남았다면 사람들이 나에게 한 말은 달라졌을 것이다. 또 하나는 ‘저항의 혼이다. 브리튼이 옳다. 내속에도 그가 있다. 악보를 펼치지 않는 한 - P91
리흐테르는 1960년 5월에야 겨우 서방에서 연주할 수 있는허가를 받고 헬싱키 콘서트에 ‘반주자‘로 파견됐다. 당시 소련의명연주자들은 서방세계로 많이 망명했다. 그중 한명이던 피아니스트 루돌프 제르킨도 그에게 미국 이주를 권유했다. 리흐테르는이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유는 이데올로기와 관련되었다기보다 브리튼이 말했던 ‘저항하는혼‘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혼‘ 이 무엇이었는지 간단히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다만 그것이 리흐테르의 (또한 브리튼의) 예술적 혼과 통해 있음은 확실하다. 리흐테르는 동서 냉전 중에도 때때로 서방세계로 순회공연을 떠났다. 그리고 브리튼과 나눴던 우정과 올드버러 음악제를 소중히 여겼다. 그는 소련의 붕괴를 내부에서 지켜보다가 1997년 8월 1일 모스크바에서 82년의 생애를 마쳤다. - P93
「전쟁 레퀴엠」은 브리튼의 대표작이다. 브리튼은 이 곡의 홍보 첫머리에 시인 윌프레드오언이 남긴 한구절을 써두었다.
나의 주제는 전쟁이며, 전쟁의 슬픔이다. 시는 그 비애 속에 있다. 오늘날 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경고를 전하는 일이전부다. - P99
브리튼은 제1차세계대전에서 전사했던 시인 윌프레드 오언의 시에 큰 감명을 받아 이 곡의 구성을 전통적인 라틴어 예배문과 오언의 시를 대비, 대위하는 방법을 택했다. 종교적 치유, 동시대 시인이 지녔던 분노와 고뇌의 언어가 교차하며 등장해 서로 격렬한 갈등을 벌인다. 브리튼은 이 곡에서 영국을 승리자로서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은 모든사람들에게 비참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이 작품은 전체 6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악장 ‘레퀴엠에테르남‘은 라틴어 예배문과 전쟁의 잔혹함과 병사의 비애를 노래한 오언의 시 부분으로 나뉜다. 테너가 "가축과 같이 죽은사람들을 애도하는 종소리인가, 누구를 위한 종인가……"라고 분노를 담아 항의한다. 오언의 시 전사할 숙명에 있는 젊은이들을 향한성가다. - P103
정말 앞으로 얼마나 지나야 할까? 제1차세계대전의 참화를경험한 후 인류는 게르니카, 난징, 코번트리, 드레스덴, 아우슈비츠, 히로시마, 나가사키… 그 밖에도 과거의 일들을 훨씬 능가하는 잔학과 무자비를 스스로 연출했다. 그 후로도 계속 이어진한국, 베트남, 구 유고슬라비아, 팔레스타인, 이라크, 우크라이나, 시리아 … 아, 여전히 세계는 피투성이다. 대체 언제까지? 제1차세계대전 때 죽은 젊은 시인의 말에 인류가 귀를 기울이기까지는앞으로 얼마나 더 시간이 흘러야할까? 브리튼의 음악에는 이 어리석은 행진을 멈추게 할 힘은 없다. 하지만 그의 음악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믿고 싶다. 그렇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지나야 할까? - P109
"피어스는 브리튼에게 참 커다란 존재였네." F가 입을 열었다. "응, 그런 생각은 별로 하지 못했어."라고 나는 대답한다. 나는아무래도 피어스가브리튼의 그림자 뒤에 조용히 숨어 있는 구로코黒子(가부키 무대에서 검은 옷을 입고 배우 뒤에서 연기를 돕는 사람)같은 존재라는 잘못된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보니 그는 뛰어난 가수였을 뿐만 아니라 당당한 지식인이자 때로는 브리튼을 이끌어주던 사람이었다. 브리튼 피어스라는 존재가 있었기에 그가 노래를 부를 것을 상정하고 수많은 명곡을 썼고, 피어스도 거기에 견실히 응했다. 고흐와 동생 테오가 그랬듯 브리튼과 피어스도 한몸인 예술가였다고 말할수 있을지도 모른다. 피어스에 대해서 더 알아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케임브리지로 돌아갈 시간이 가까워졌다. 왔을 때와 같은 루트로 거꾸로 거슬러 돌아가게 된다. 버스에 올라 마을을 떠날 때브리튼 피어스가 나란히 잠든 작은교회 옆을 다시 지나갔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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