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의 감동은 ‘피해‘ 개념의 전복성에 있다. 이 영화를 보면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거리가 생긴다. 그것이 마츠코의 선물이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크게 손해 보지만 않는다면, 타인에게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어느 정도의 이타성은 이기성이기도 하다.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선의(이 영화에서는 ‘사랑‘)가 사기와 갈취, 저질 구설 따위로 돌아온다면? 이런 배신이 반복된다면? 이때부터 우리 마음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우울과 분노에 빠진다. 기분장애 상태에 이르기 쉽다. 사람들마다 대처 방식이 다를 것이다. 우울과 은둔, 심각한 경우 자살. 다시는 사람을 믿지 못하고 마음을 닫는다. 어설픈 복수로 더 망가지기도 한다. 비일비재한 일이다. - P131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마츠코는 세상에 당한 것이 아니다. 세상과 싸웠다. 자기 방식이 옳음을 믿었다. 진정한 강인함이다. 완벽히 구조화된 가해와 피해의 양극 시대. 가해자/집단의 피해 의식이 판치는 시대에 정작 피해자인 그녀는 의연하다. 피해 의식만 가득한 사람은 마츠코처럼 타인을 걱정하지 않는다. ‘나쁜 세상‘이라는 구조. 이 구조와 개인의 관계에서 개인의 대응은 다양하다. 저항할 수도 있고, 틈새를 찾아 협상할 수도 있다. 사실 제일 ‘편한 방법은 은둔인데, 은둔도 어느정도 자원이 있어야 가능하다. - P132
어려운 일이지만 조금 힘을 내서 우리 자신을 지켜내는바람직한 방식을 찾았으면 한다. 결국 자신의 역량을 믿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신뢰는 그 다음이다. 피해도 억울한데, 자신을 미워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나쁜 사람은 타인의 자존감, 의욕, 믿음을 도둑질한다. 마츠코가 내 앞에서 그들을 가로막고 있다. 그녀의 보호를 받는 관객들이 행복한 이유다. - P133
입시제도, 경쟁은 한국 교육의 대표적 적폐다. 전 국민을망가뜨리는 시스템이다. 문제는 높은 성적을 모든 학생들에게강요하고 거짓 실력으로 위계를 만들고, 이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는다는 데 있다. 하지만 무엇인가에 몰두하고 성취하려는 학생에게 공부는 필요한 과정이다. 어느 분야든 ‘성공‘하려면, 어릴 때부터 공부하는 몸을 만들어야 한다. - P137
엄청나게 욕을 먹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 영화에서 플레처 선생의 교육법이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나주인공 같은 유형은 그런 선생을 원한다. 제발 나를 훈련시켜주세요, 뭐든 따르겠나이다, 나를 ‘때려주세요‘, 예술가가 되게도와주세요, 선생님의 방법을 알려주시면 뭐든 따르겠습니다, 무엇이든 감수하겠습니다, 버릴 수 있습니다, 분재(盆栽)처럼제 몸을 비트는 고통을 얼마든지 원합니다. 출세에 미쳤다고? 천만에 이런 종류의 인간이 원하는 것은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경지에 다다르는 것이지, 돈이나 명예가 아니다. 그것은 부수적으로 따라올 뿐이거나 무관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돈이나명예 수준의 동력으로는 이 과정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 P138
문제는 그런 ‘위플래시(채찍질)‘들의 인간성이다. 그들의인간성이 평균 정도만 되어도 괜찮을 텐데, 아주 바닥이면 사고가 난다. 예술이고 나발이고 모두가 불행해진다. 훌륭한 학생이 그들로 인해 자살하고 많은 학생들이 미래를 포기한다. 이 영화의 선생은 미친 건지 비열한 건지 꼬인 건지, 하여간최악이다. 그는 인간이라는 징그러운 생물이 고안할 수 있는, 가장 밑바닥 방식으로 학생의 등에 칼을 꽂는 유형이다. - P139
인생은 아름답다. 주인공은 선생이 그를짓밟은 지 5분 만에 트라우마를 회복하고 자기 길을 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0년, 20년, 평생 걸리는 그 시간을 말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상처 극복에 걸리는 시간에 대해 완전히다른 시각을 갖게 되었다. 나는 타인을 부러워하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주인공은 몹시 부러웠다. 그와 달리 나는 오랜 시간 상처받고 주저앉았다. 원한다면 최선을 다해 추구하면 된다. 엄마나 선생의 인정은 나의 행복보다 중요하지 않다. <위플래쉬> 역시 ‘나의 영화‘. 2만 9천 원을 주고 포스터를 사서 나의 노동 공간에 걸어두었다(책상이 있는 마루), 포스터 면적에 비해 작은 크기의 드럼 주자가 자신에게 몰두해 있다. - P141
집착과 질투가 없는 사랑은 ‘수준 높은‘ 사랑이 아니라 절실하지 않은 사랑일뿐이다. 사랑은 나의 감정이 타인의 가슴으로 옮겨 가는 것인데, 어찌 마음을 비울 수 있단 말인가. 마음을 비운다면 아마 마음이 없어지는 거겠지. 혁명적 동지애, 모성이나 부성, 조국애…… 같은 사랑도 사실은 집착과 질투덩어리다. 스물셋의 기형도처럼 (그도 늙었다면 달랐을 것이다.)타인의 사랑을 구질구질한 집착으로 몰아붙일 수 있는 자신감은, 성숙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하는 취약한 상태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 P144
질투만큼 자발적인 고통도 없다. 질투가 어리석다는 것을몰라서 질투를 멈추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질투에 대한 잠언이나 충고처럼 비현실적인 것도 없다. 나 역시 <질투는 나의 힘〉의 원상(박해일 분)과 비슷한 상태로 오랫동안 고통을 찾아다녔다. 나중에는 지쳐서 질투가 나를 지배하지 않는평온한 마음조차, 내 것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뒤로는 부대끼고 바닥에 패대기쳐진 것 같은 비참한 감정이나를 찾아오면, ‘그래, 너 왔구나‘ 하며 인사하고 받아들이게되었다. 질투에 시달리는 나를 포기하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또 다른 내가 더는 나의 목을 조르지 않도록 무릎 꿇고 빌수밖에 없다. 어차피 나는 ‘연적‘ 만큼 매력적일 수 없었다. 매력에 대한 판단은 주관적이므로, 내 매력을 찾기 전까지는 말이다. - P145
문제는 언어 없음이 아니라 세상은 언제나 잘 굴러가고있다고 스스로 안심시키는 심리, ‘고상한 삶을 추구하는 데있다. 쿠르드 출신 감독 바흐만 고바디의 <거북이도 난다>는전쟁의 고통에 대해 말함으로써, 타인의 고통에 개입하고 싶어 하지 않는 ‘쿨‘하고픈 관객들에게 살아 움직이는 ‘상처‘를준다. 이라크, 터키, 시리아 등지에 흩어져 나라 없이 살아가는 쿠르드인은 약 4천만 명, 4천만 명이다! 세계 최대의 유랑민족이다. 이들은 이라크에서 학살당하고, 미국에 배반당하고, 터키에서 억압당하는 신세다. 1988년 후세인은 생화학 무기로 쿠르드인 5천 명을 몰살했다. 당시 인종 청소로 희생된쿠르드인은 18만 명이 넘었으며, 80만명의 난민이 생겼다. - P158
‘침묵당함‘은 또 다른 폭력이다. 상처를 숨기는 대신, 거북이도 난다>에서처럼 고통에 대한 설명 불가능성을 향해 돌진하는 것, 자기 상처를 응시하는 것이 평화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전쟁이 ‘간헐적‘ 폭력이라면, 전쟁과 평화의 분리는우리 삶을 구성하는 일상적 폭력이다. 영화는 피 흘리는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타인에게 말 걸기를 시도한다. 절박하게 일상적 폭력을 평화라고 믿는, 침묵하는 모든 이들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고통스럽지만 아름다운 영화다. 참혹함과 아름다움은 양립할 수 있다. - P160
예술가는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슬픔의 강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끊임없이 흘러가지만, 그 강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다. 예술가는 이 강의 존재를 일깨운다. 이러한사고에서 ‘순수‘니 ‘참여‘니 하는 말은 아예 논외다. 이렇게 걸작은 기존 담론의 전선(戰線)을 이동시킨다. 주인공은 세상을 아는 듯 ‘비관적이다. "강을 건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지요. 배를 타는 것과 스스로 강이 되는 것. 대부분 작가들은 배를 타더군요. 작고 가볍고 날렵한 상상의배를." 나는 이 대사처럼 상상력을 정확하게 정의한 경우를알지 못한다. 상상력은 상상하는 행위가 아니다. 상상력은 다른 생각이다. 내가 서 있는 자리, 위치를 바꿀 때 새롭게 생성되는 다른 정치적 입장, 공간을 의미한다. - P165
스스로 강이 될 것인가, 배를 탈 것인가………. 어떻게 살것인가. 누가 자기 몸을 강으로 삼겠는가. 스스로 강이 되기를선택한 사람은 얼마나 외로울 것인가. 아니, 요즘 같은 세상에강이 된 경우와 배를 탄 경우를 구별이나 할 수 있겠는가. 소설을 읽고 나는 이미 탈진했기 때문에, 공연은 예방 주사를 맞고 본 셈이다. 처음 봤을 때는 원작의 발상에 놀랐고(어떻게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을까!), 두 번째 봤을 때는 20년이지난 박지일의 모습이 내내 남았다. 당연히 첫 번째 공연과 같은 몸이 아니었다. 이 작품의 등장 인물은 세 명인데, 작품의주인공인 연극배우 역에 무게가 쏠려 있을 수밖에 없다. 극의주제와 대사의 내용도 만만치 않다. 모든 대사에 몸의 기운을다 동원해야 한다. - P166
당대의 위대한 텍스트 <송환>을 비전향 장기수와 김동원 감독에 대한 존경과 감동, 분노와 질투의 이중 감정 없이 평면적으로 읽을 수 있는 페미니스트는 드물 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한국 여성‘의 위치에서만 가능하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벌어지는 남성에 의한, 남성을 위한, 남성의 역사에서, 역사의국외자이자, 지배 남성과 피지배 남성 모두에게 억압당한 피해자이며, 동시에 그들과 같은 한국인이고 싶은 여성의 관점에서 비전향 장기수를 다른 방식으로 읽으려는 시도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갈등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 P169
이 시대에 개인들은 누구나 외롭다. 국가와 사회와 가정모두 개인을 보호하지 못한다. 전통적인 젠더 이데올로기에서여성은 남성의 보호를 기대하지만, 그런 남성은 극히 드물다. 지금 남한 남성들 중 어느 누가 그토록 열심히 여성을 보호하는가, 어느 누가 그토록 애국자인가, 어느 누가 그토록 가족에게 헌신하는가…………. 남한 남성은 신자유주의 채찍질에 시달리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경험(여성들과 동등한‘ 취업 경쟁)에 노출되기 시작했다. 이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이를 ‘여혐‘으로 표출하고 있다. 게다가 젠더 의식, 인권 의식, 평화주의 개념은 ‘꽝‘이다. - P185
우리 스스로탈식민을 하지 못한다면 언제나 ‘타인의 시선‘에 우리의 미래를 저당 잡힐 것이다. 누군가 우리를 보고 있다는 시선과 평가의 강박은 우리가 만든 것이다. 우리가 누구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그것이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언어의 역사다. 언어는 인류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가의 총체적 체계다.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없는 사회는 외부의 이익에 휘둘리고 그 고통은 고스란히 민중의 것이 된다. - P192
식민지 시절 남성이 지금 남성보다 낫다. 어쩌면 나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근대의 시작이었고, 지금은 근대가 유동하는 알 수 없는 시대다. 근대에는 남자가 주인공이었다면, 지금은 부자가 주인공이다. 비행사나 야구는 근대의알레고리다. 당시 우리의 고통은 그것을 일본으로부터 배워야한다는 데 있었다. 그것을 습득하는 순간 ‘친일‘의 자장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근대 = 친일파‘. - P193
<YMCA야구단>과 <청연>. 김주혁과 장진영이 생각나는시간이다. 배우의 죽음은 특별한 슬픔이다. <소름>은 자신이없고 장진영의 <반칙왕>과 김주혁의 <프라하의 연인>을 다시보고 싶다. - P194
일본에는 세 개의 한국이 있다. 남한과 북한, 그리고 재일교포(자이니치)의 ‘조선‘. 이 세 집단은 근대 일본의 성립 조건 중하나였다. 다시 말해, 일본은 이 세 집단을 착취하고 분열시키면서 나라를 세웠다. 최근에는 재일교포들이 이름을 바꾸고 일본인과의 결혼도 흔해서 정확한 인구를 파악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자이니치에 대한 차별은 여전하다. 일본의 국민국가 건설 과정에서 이들은 최하층민으로서 일본의 타자성을 대표한다. - P195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말대로 "여성이 자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모두 아이를 낳아야 한다면, 성대가 있는 사람은 모두 오페라 가수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이 질문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여성의 출산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제도라는 사실을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 이를 이미50년 전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만들어진다."라고 명료하게 설명한 바 있다. - P215
기록 경기라고 하면 대개 스피드를 겨루는 육상, 수영, 스피드스케이팅을 떠올린다. 이 경기들은 인간의 눈으로는 구별할수 없는 세계인 0.001초 단위를 다룬다. 이 경기들에서는 기록 갱신(更新)만이 최고의 가치다. 나는 스포츠를 잘 모르지만, 내 생각에 가장 기록적인-기록 경기다운-종목은 야구다. 또한 야구는 가장 인간적인 혹은 ‘문명에 가까운‘ 운동이다. 다른 종목도 그렇겠지만, 야구만큼 복잡하고 미묘하며 섬세한 협업은 없을 것이다. - P227
인간의 몸은 법칙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선수들의 몸은훈련되어 있지만 동시에 유동적이다. 몸은 우주의 기운과 습관(기록)과 운명의 복잡한 교차로다. 이 영화는 확률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통계는 그 결과이고예측의 근거일 뿐 결정적이지 않다. 아, 이 영화에서 배울 점이 또 하나 있다. 선수를 해고하는 방식이다. 상대를 존중하면서, 정확한 자료를 건네주고 건조하게 공식적으로 간단히 말한다. 모욕하거나 언론 플레이를하지 않는다. - P23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