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과 혼자인 상태는 다르다. 혼자라고 해서 꼭 외로운 것은 아니다. 혼자라고 느낄 때는 외롭지만, 자기만의 세계에서 스스로 충만한 시간은 외롭지 않다. 인간이 외로울 때는 상대방(사회)과 대화가 통하지 않거나 외부를 지향하는 경우이다. 외로움을 잘못 해결하면 인생이 복잡해진다. 데이비드 리스먼의 《고독한 군중》은 우리가 왜 혼자 있을 때보다 여러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더 외로운지를 설명해주었다. 외로움은 나와 어떻게 만날 것인가, 즉 자기 자신과 맺는관계에 관한 질문이다. - P9
그래서 객석에서 나 혼자 본 영화가 생각보다 꽤 있다. 와타나베 켄이 주연한 〈내일의 기억〉,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타임 투 리브〉, 이 책에 꼭쓰고 싶었으나 쓰지 못한 페르난두 메이렐리스, 카티아 룬드감독의 걸작 브라질 영화 <시티 오브 갓>이 그런 경우다. 이영화는 마지막 상영일, 마지막 회차에 보았다. 늦을까 봐 광화문 ‘씨네큐브‘까지 얼마나 뛰었는지 모른다. ‘혼자서 본 영화‘가 ‘나홀로 극장에‘라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영화와 나만의 대면, 나만의 느낌, 나만의 해석이다. 나만의 해석. 여기가 방점이다. 나의 세계에 영화가 들어온 것이다. 지구상 수많은 사람들 중에 같은 몸은 없다. 그러므로 자기몸(뇌)에 자극을 준 영화에 대한 해석은 모두 다를 것이다. 한작품을 천만 명이 본다면, 그 영화는 천만 개의 영화가 되어야한다‘. 그렇게 된다면, 역설적으로 천만 영화는 사라질 것이다(물론 배급 시스템이 문제지만). 내가 원하는 사회는 각자의 해석이 가시화되고, 다양한 목소리들이 이어지는 사회다. - P13
이때부터 영화는 정말로 책이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영화 ‘보기‘가 아니라 영화 ‘읽기‘라고 표현하는데, 이미지나 음악에 무지한 내게 영화는 원래부터 읽기였다. 영화제에서 만난 영화들은 한국 사회에서는 ‘절대로‘ 생산될 수 없는지식을 제공했다. 내 경험너머 새로운 앎의 세계, 나는 고급도서관을 통째로 가진 기분이었다. 나는 이제 알기 위해 영화를 본다. ‘지식을 습득한다‘와 ‘안다‘는 것은 다르다. 안다는 것은 깨닫고, 반성하고, 다른 세계로 이동하고, 그리고 타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과정이다. 이것이 인생의 전부 아닐까. 영화는 나의 세계를 확장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인생 문제가 영화에서 ‘대부분‘ 해결되기 때문에, 나는 그다지 타인이 필요치 않게되었다. 나만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혼자있고 싶다. - P19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것은 독후감을 쓰는 것과 비슷하다. 다만, 더 어렵고 더 즐겁다. 이 책을 쓰는 시간이 행복해서 ‘쓰기를 아껴 가며‘, 하루에 20장 ~ 30장씩만 썼다. 이 책은 ‘영화 오타쿠‘의 타인에게 말 걸기이다. 나의 감상문이므로 나를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지나치게 드러냈다. 그러나 나를 드러내는 행위는 ‘사생활 문제‘가 아니라 내가 나를 알게 되는 과정이라는 의미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후회도 없다. 한 가지 확실하게 배운 점은, (모르지 않았지만) 내가 글을 못 쓴다는 사실이다. - P20
보는 영화마다 내 인생의 영화가 된다. 모든 영화에 내 사연이 있다. 나는 특히 동일시의 여왕이다. 영화를 볼 때마다나는 여러 사람의 여러 인생을 산다. 전미선의 열연이 인상적이었던 〈연애〉(2005년)는 여성으로서 ‘끔찍한‘ 영화였지만, 그녀는 바로 나였다. 외로운 여성을 이용하는 남자들…………. 조용한 남자, <콰이어트 맨>(2007년)은 직장에서 총기 난사를 꿈꾸며 늘 혼자 도시락을 먹는 외톨이 밥 맥코넬(크리스찬 슬레이터분)의 이야기인데, 이 역시 평소 나의 모습이다. 하여간, 나는 영화를 보는 ‘지‘가 없다. 나는 장률이나미하엘 하네케, 고레에다 히로카즈, 마를레인 고리스, 데이비드 크로넌버그, 두치펑의 영화를 거의다 본, 그리고 여러 번본, 이들의 광팬이다. 이들의 영화 세계는 매우 다르다. 한마디로, 나의 영화 취향과 이데올로기는 ‘문란‘하기 짝이 없다. - P21
한국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영역은 북한이나 섹슈얼리티가아니라 가족 담론이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문제적인 제도, 가장 부패한 제도, 가장 비인간적인 제도는 가족이다. 가족은 곧계급이다. 교육 문제, 부동산 문제, 성차별을 만들어내는 공장이다. 부(富)뿐만 아니라 문화 자본, 인맥, 건강, 외모, 성격까지 세습되는 도구다. 간단히 말해, 만악의 근원이다. 과장이아니다. 동성애, 트랜스젠더에 대한 시각도 가족과 연결되어있다. ("남자 며느리가 웬 말이냐!") - P27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인간관계다. 사랑은 그중에서 가장 치열한 관계다. 사랑은 모호한 개념이고, 계산할 수없는 노동이며, 돌변하는 퍼포먼스다. 지금 <하얀 궁전(whitePalace)>을 본다면, 거의 판타지다. 계급이 다르면 사는 동네도 다른 세상인데, 사랑은 무슨. - P35
<인 더 컷〉은 이 공식을 뒤집는다. 이 영화에서는 욕망으로 고통받으며 사랑에 빠질까 봐 고뇌하는 사람이 여성이고매력적이나 치명적인 유혹자는 남성이다. 여성이 유혹자가 아니라 유혹당하는 사람으로 재현되며, ‘여성‘도 갈등, 사유, 선택, 책임 같은 인간의 행위를 하는 살아 움직이는, 변화하는존재가 된다. 행위자로서 여성, 역사적 주체로서 여성, 그리고여성의 성적인 욕망은 남성 사회를 위협한다. 여성이 원하는것은 언제나 그 사회의 경계와 만나고, 결국 정치적 갈등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라고말로이가 불평하자, 프래니는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원하게될까 봐 두려워."라고 말한다. - P50
‘여성이 원하는 것‘은 남성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정의되지도 않고 알 수도 없는 ‘여성이 원하는 것‘은 남성에게무기력과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 프로이트뿐만 아니라 대개의남성들에게 여성은 ‘검은 대륙‘이다. ‘검은 대륙‘에 접근하지못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남성들이 짜증스럽고 히스테리컬하게 말한다. "도대체 요점이 뭐야! 원하는 게 뭐야!" - P50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변화시킨 사람을 사랑한다. 영원한사랑 - 일부일처제, 배타적인 낭만적 사랑- 을 믿고 실천하는 자의 고통은 상대가 자신을 변화시킨 그 순간을 영원한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 순간을 지속시키기 위해,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고통은 필연적이다. 조증()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대개 사랑의 황홀감은 몇 개월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 인생의매 순간을 혁신하며 ‘나날이 새롭게(日) 사는 사람은매우 드물기 때문에 영원한 사랑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중단없는 상호 발전을 통해 관계의 질이 진화하지 않는다면, 그 뒤시간은 ‘아주 오래된 연인들‘의 권태와 제도를 통한 감정의 구속만이 남을 뿐이다. - P68
사랑은 유기체다. 그래서 모든 사랑은 부패한다. 문제는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에게 변치 않아야 하는 사랑의 의미는 무엇인가이다. <디 아워스>는 이 오래된 질문을 성찰적인 남성(감독 혹은 게이인 리처드)의 시선으로 새롭게 던진다. 클라리사는 30년 전 연애의 판타지에 평생 동안 매달린다. 레즈비언 파트너가 있는데도, 아니, 심지어 파트너의 격려와 위로, 노동까지 동원하여 리처드를 돌본다. 이에 대한 리처드의답변은, "이제 나를 그만 주체로 만들고 네가 주체가 되어라." 라고 말하며, 사랑의 대상이 되어줌으로써 ‘그녀를 위해 살았던 생을 마감한다. 그녀 눈앞에서 실행한 그의 자살은 그녀에대한 복수이다. - P69
몇 년 전 나는, 오랫동안 몰두해 온 어떤 관계의 상실을인정해야만 했다. 물 밖으로 내던져진 물고기처럼 숨이 가빠끊어질 것 같았고 매일 밤 흐르는 눈물로 귀에 물이 찼다. 그누구의 위로도 도움이 되지 않을 때 한 친구가 이렇게 말해주었다.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있어." 이 말이 나를 살렸다. 지금의 나는, 나의 일부분일 뿐이다. 현재 나의 감정, 고통, 기쁨, 슬픔, 지식, 업적………… 이 모든 것들은 곧 과거의 것이 된다. 그리고 과거는 돌아오지도 않고 반복되지도 않는다. "어제를 잊자." - P70
고통이 고통스러운 것은 그것이 계속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그 어떤 것도 계속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변한다. 인생무상이라는 말은 인생이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다. 인생에는 상(常)의 상태가 없다는 것, 즉 삶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을 어찌 붙잡을 수 있겠는가. 살아 있는 한, 정치적으로 발전하는 한,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한, 인간은 언제나 사랑을 한다. 다만 그 대상이 바뀔 뿐이다. 삶은 곧 움직임(movement)이고, 움직임은 변화하는 순간(moment)들의 분절적인 연속이다. 고로 영원한 사랑도 안전한 삶도 없다. - P70
여성들 간에는 차이가 있다. 여성들은 다 다르다. 그러나나는 메릴 스트립이 많은 여성들에게 인생의 롤모델이 될 만하다고 생각한다. 무슨 말을 더 보태리. 지적인 이미지가 강한배우지만 그가 젊은 날 출연했던 〈디어 헌터>(1978년),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1979년), <소피의 선택>(1982년)을 보면 메릴 스트립은 ‘미모의 배우‘다. 메릴 스트립은 다양한 영화와 드라마, 연극에 출연했지만 나는 주로 그녀의 ‘로맨스‘ 영화들을 좋아한다. 물론, 간단한 로맨스는 별로 없다. 로버트 드 니로와 <폴링 인 러브〉, 로버트 레드포드와 <아웃 오브 아프리카>, 클린트 이스트우드와<매디슨 카운티의 다리>……특히 <폴링 인 러브>의 기차 장면,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모차르트…… 사실 나 같은 ‘오타쿠에게 영화는 이런 이야기들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계 걱정 없이 혼자, 혼자 본 영화를 혼자 생각하면서 가슴 뛰다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완벽한 인생이다. - P74
"영화 평론가 김혜리 씨"다. 염치없지만 그녀의 언어를 빌리는 것이 낫겠다. "음악성은 이 배우의 특기가 아니라 연기의연장이다. 영화 속 메릴 스트립의 노래와 율동은 언제나 퍼포먼스라기보다 액팅에 가깝다. 즉, 노래 한 곡을 남부럽지 않게흡족하게 공연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대사나 표정 연기와같은 맥락에서 노래의 매너와 감정을 통해 인물의 퍼스낼리티를 표현한다는 의미다. 가무에 능한 많은 배우 가운데에서도메릴 스트립에게 유독 돋보이는 이 속성은 어디서 오는 걸까? 예전 인터뷰에서 스트립이 밝힌 음악을 듣는 방식이 힌트가될 법하다. 어린 시절부터 메릴 스트립은 노래 자체보다 가수의 들숨과 날숨, 거기 실린 감정에 귀 기울이는 습성이 있었다고 한다. 달리 표현하면 음악 너머 노래하는 인간의 상태가 주된 관심사라는 의미다."(<씨네21> 1070호) 그녀의 의견이 그대로 반영된 장면이 〈The winner takes it all> 5분이다. - P76
그리움으로 인생을 견뎌 온주인공이 드디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 별거 중인 그가 운영하는 식당은 문 닫기 직전이다. 시간은 없고 상대의 마음도확신할 수 없다. 두 사람은 어떻게 될 것인가. 먼 곳에서 온 주인공은 오늘밤 어디로 갈까, 어디서 잘까, 온 길을 되돌아갈까. 내 심장은두근거렸다. 식당 테이블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의 간격은 50cm쯤 될 것이다. 어색한 대화와 긴장………… 상대의 말 한마디, 몸짓 하나하나가 상처가 되고 불안하다. 영화는 두 사람이 손을잡으며 웅크린 듯 포옹하는 모습으로 끝난다. 그렇게 부자연스런 자세도 처음 본다. - P96
타인과 함께하는 시간이 지루하고 아까운 유형과 파트너와의 관계가 좋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는 시각은 다를 수밖에없다. 나는 내내 애달프고 쓰라리고 슬펐는데, 내 친구들은 마이애미의 해변처럼 행복하고 밝은 영화라고 했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 완전히 다른 결론이 났다. 새삼스러울 것 없는 얘기지만, 우리가 본 영화는 우리의인생과 붙어 있다. 몸으로 영화를 본다. 영화의 내용은 감독의 ‘연출 의도‘가 아니라 관객의 세계관에 달려 있다. 누구나 자기의 삶만큼 보는 것이다. - P97
나는 말세를 억지로 지속시키려는, 매사에 열심인 사람들에게 분노한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끝난 세상의 지옥도를 느끼지 못한다. 그들을 대신해, 세상이 끝난 이후의 모든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이들이 있다. 교실의 아이들은 서로를 이지메하고, 여학생을 골라 윤간한 후 ‘원조교제‘ 시장에내보낸다. 주인공의 단짝은 ‘악마‘가 되어 학교를 지배하고현실에서 이지메를 당하는 주인공은 온라인 공간에서 위안을찾는다. - P103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주체이자 타자이다. 물론 이것은 곡예다. 주체가 되는 방식은, 여성이지만 남성의 규범을 따르는 ‘주변부 남성‘이 됨으로써 가능하다. 타자 되기는 전략적선택일 수도 있고 낙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성폭력과 성매매라는 제도에 강제당함으로써 성적 타자로 만들어진 상태에서는, ‘반(反)여성‘이 되어야 한다. 남자들이 원하지 않는 여자가되어야 한다. 이 영화에서는 삭발, 즉 자원으로서 외모를 버리는 것이다. - P106
나만의 영화 분류 방식이 있다. 별다른 원칙은 아니고 그냥 주관적 느낌이다. 쓸쓸한 영화, 치열한 영화, 감독이 궁금한 영화, 깊은 영화, 처절한 영화, 기가 막힌 영화, 깨달음을 주는영화, 저우언라이 같은 영화, 트럼프 같은 영화・・・・・・ 이런 자의적인 구분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 유형이 있다. 바로 주인공을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는 영화다. 이때 등장인물은 현실이 된다. 인생의 동반자로 나는 그/그녀와 함께 산다. <타인의 삶>의 주제는 다층적이고 복잡하다. 어느 진보신문‘에서, 이 영화의 주제를 "자유의 소중함, 도청과 국가 권력의 문제"라고 쓴 기사를 읽고 한국 사회답다고 생각했다. - P108
사랑이나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쉽다‘. 그것은 동일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전엔 적대했으나 지금은 선망하게된 타인, 나는 다가갈 수 없는 다른 세계에 사는 타인을 위해희생하는 일은 경험하기 힘든 인간성이다. 한마디로 질투하는인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사람은 사상, 사랑, 권력으로 변하지 않는다. 사람은 사람만이 변화시킬 수 있다. 이작품은 타인의 삶이 나의 삶에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으며, 나는 타인을 위해 얼마만큼의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인간인가를 질문한다. - P110
이 영화가 ‘내 인생의 영화‘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혐인증인 나에게 ‘다른 인간‘이 있음을 잊지 않게 해주고, 인간도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내가 더 타락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격려해준다. 비즐러의 도움으로 생존하게 된 예술가(제바스티안 코흐분, <블랙북>에서도 멋있었다)는 비즐러를 위해 책을 쓴다. 비즐러는 서점에 전시된 자기 이야기를 펼쳐보고, 카메라는 멀리서 서점을 잡는다. 내 기억이 맞다면, 서점 이름은 ‘KarlMarx‘. 비즐러 역의 배우 울리히 뮈어 (Ulrich Mühe, 1953~2007)는이 영화로 유럽 여러 영화제의 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 이 영화가 그의 마지막 작품이며, 그는 다음 해 암으로 사망했다. - P112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일은 무엇일까? 나는 억울한 일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억울한 일에는 원인이 너무 많아서 원인이없다. 고통에는 위계도 수량도 총량도 없다. 회복할 수 없는고통을 겪고 있다면 원인을 찾을 것이 아니라 남은 시간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해야 한다. 죽지 않는다면 말이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의 원작은 이청준의 단편소설 <벌레 이야기>(1985년)이다. 이창동 감독은 1988년에 이 소설을 "광주 항쟁에 관한 이야기로 읽고 반드시 영화화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소설과 영화의 내용은 다소 다르다. - P113
자녀가 유괴되어 살해당한 어머니의 고통과 대비되는 가해자의 마음의 평화. 이 이야기에서 이창동 감독이 ‘80년 광주‘를 연상한 것은 이 작품이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부정의, 즉피해자 비난, 낙인, 고립을 상징적으로 그렸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이보다 더 억울한 일은 없다. 더구나 가해자는 피해자가 그토록 원했던 ‘하느님의 구원‘을받은 데다, 피해자를 걱정하고 가르치려 한다. - P115
문제는 이것이다. ‘선‘의 힘으로 ‘악‘을 이기려 할때, 인간은 부서지고 무너진다. 도덕적 우월감은 타락의 지름길이다. 더구나 우리에겐 이 영화처럼 ‘송강호‘도 없으며, 마지막 미용실 장면에서 만난 가해자 소녀와도 함께 살아가야한다. 나는 잠들기 전에 언제나 조용히 되뇐다. 잠들기 위해서. "구원, 해결, 복수...... 세상에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런 것은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받아들입니다……" - P118
‘악‘의 의미는 간단하다. 어린 시절, 힘이 센 아이들이 몰려다니며 몸집이 작은 아이를 왕따시킨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가방을 들게 한다. 키가 작은 아이는 자기 몸집의 몇 배가되는 여러 개의 가방을 질질 끌면서 그들의 뒤를 따른다. 자기짐을 권력(젠더, 계급, 인종…)을 이용해 희생자의 어깨 위에강제로 얹어 놓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한다. ‘여섯 살소녀‘에게 그 짐은 돌 갑옷과 쇠뭉치를 어깨에 걸친 듯, 몸이휘청일 정도로 무거운 것이다. 그런데 "내가 도와주마."라니? - P122
76분짜리 영화의 힘은 대단했다. 나는 지금도 이 영화에기대어 산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인간관계에서 갈등이 생겼을 때(내가 당했을 때) 가해자를 찾아가는 일, 대화를 시도할것인지 고민한다. 쉬운 일도 아닐뿐더러 의미가 있을까, 효과가 있을까. 밤마다 상황을 그려보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잠만못 잤을 뿐이다. 불면 때문에 무기력한 하루가 반복된다. 변호사와 같이 갈까. 기가 센 친구와같이갈까. 권투 같은 운동을배운 후 담력을 키운 다음에 찾아갈까. 자객을 보낼까. 나는 생각만 거듭하다가 결국 두 가지 이유로 포기하는데, 하나는 실제로 귀찮고 시간이 아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무서워서다. 어차피 그/그녀‘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발뺌하며 내 이야기를 부인할 것이 뻔하다. - P123
약자에게 대화는 어려운 일이고, 강자에게는 귀찮은 일이다. 가해자가 대화를 먼저 요구할 때는 자기 필요에 의해서이고, 피해자가 대화를 청할 때는 "나한테 왜 그랬나요?"라고 묻기 위해서이다. <끔찍하게 정상적인>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대면을 다루지만, 피해자는 무너지지 않고 가해자의 멱살을 잡는다. 피해자에게 도움까지 주겠다는 가해자의 팽창된 자아는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찌질하고 비겁하면서도 동시에 배려와 시혜의 주체가 되려는 이들. 이들은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자기의 잘못을 알고 있는 타인이 지치기를 바란다. 증인살해. 군 위안부 문제가 그렇고, 세월호가 그렇다. 약자의 투쟁에 시간 끌기로 대처하는 것이다. 끔찍한 정상성이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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