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파성 자체가 가치이고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편협한 책 읽기‘는 편협하지 않다.
 모든 책이 편협할 뿐 아니라편협(partiality)을 기점으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나는 매사에 호불호가 분명한 편이고, 불호의 불이익을 감수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물론 마음이 잘 다스려지지는 않는다). 선호하는 책이 있고, 즐거움을 느끼는 데에도 나만의 방식이 있다. 즐겁지않다면 왜 읽겠는가. 다행히(?) 내가 사랑하는 책은 대부분 잘팔리는 책이 아니기에, 나 혼자 열광하더라도 독점 시장의 다양화에 그다지 기여하지는 못한다. 간혹 ‘사회정의 차원에서 좋은 책을 열 권 사서 지인들에게 보내기도 한다. ˝읽을 책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산 책 중에 읽는 것˝이라는 김영하 작가의 말을내 식으로 바꾸면 책은 보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다.
p11 또 다른 창작, 서평


책과 시장나는 서평, 독후감, 추천사를 구별하지 않는다. 세 가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내가 쓰고 싶은 내용을 감추지 못한다. 텍스트와 관련한 나의 이런 글쓰기가 문제적이라는 사실을 최근에알았다. 글쓰기는 내 생각과 사회의 협상의 연속이지만 그 긴장을 유지하는 상태가 글쓰기 자체보다 힘겨울 때가 있다. 내 생각을 숨기는 데(?) 지쳤을 때 나도 모르게 지나친 감격이나 솔직한 입장이 부실한 바느질 봉합처럼 터져버린다. 내가 추천사를 쓴 책의 저자에게 팬레터까지 따로 보내는 ‘오버‘가 그런 예중 하나다. - P10

나는 좋은 책, 알려진 책, 많이 팔리는 책에 서평이 몰리는 현상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서평 (크리틱)이 가장필요한 책은 ‘바람직하지 않은 내용 혹은 별 내용이 아닌데‘ 많이 팔려서 비판으로 판매량을 줄여야 하는 책이다. 물론 이런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나는 희망한다. 서평이 많이 쓰이고 비평서가 많이 출간되어야 하는 이유다.
나는 전압이 높은 책, 나를 소생시키는 책을 좋아하지만 여기에 실린 책이 모두 나를 살린 책, 가장 도움이 되었던 책은 아니다. 어쩌다가 나와 인연이 닿은 책이다.  - P11

내게 글쓰기는 입장과 표현이 가장 중요하다. 장르가 곧 내용인 것은 분명하지만 입장 없는 글쓰기는 어느 장르나 불가능하다. 창작으로서 비평, 예술로서 비평을 지향하는 나는 서평과그 외 글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개는 서평, 독후감에 형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 P15

정성일이나 김현의 평론을 읽을 때, 우리는 그들이 읽은 텍스트 내용보다 그들의 생각에 더 관심이 많다. 내가 쓴 서평을 구매하는 독자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기대한다. 책을 읽든 안 읽 - P16

든 그 책에 대한 나의 생각을 구입하는 게 아닐까. 서평 쓰기의첫 번째 훈련은 글의 서두에 한두 줄 정도로 책의 내용을 집약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이는 생각만큼 쉽지 않다. 책의 내용을 완전히 파악하고, 그것을 군더더기 없이 표현해야 한다. 육화된 책의 내용을 몸속에서 뽑아내는‘ 작업이다. - P17

독후감과 문학 평론, 영화 평론, 음악 평론 등 모든 비평은다르지 않다. 학생이 쓰면 독후감이고, ‘전문가‘나 ‘어른‘이 쓰면 서평인가. 나는 학생들에게도 창작으로서 독후감 교육을 희망한다. 이것은 우리가 왜 서평을 읽는가와 중요한 관련이 있다. 서평에 드러난 줄거리로 독서를 대신할 것이 아니라면, 서평이라는 창작 장르가 따로 있을 이유가 없다. 비평 역시 창작이자 새로운 이야기여야 한다. ‘콘텐츠‘, ‘스토리텔링‘이 타령이된 세상이다. 소프트웨어, 아이디어를 내놓으라는 후기 자본주의의 아우성이 요란하다. 문제는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아닐까. 콘텐츠는 새로운 생각이며 스토리텔링 능력은 문제의식에서 나온다. 그것이 ‘우리의 무기‘가 되도록 해야 한다. - P17

모든 글쓴이들도 나와 같다고 생각한다. 쉬운 글은 있을지몰라도 쉽게 쓰인 글은 없다. 글쓰기는 체력, 재능, 돈, 정치, 좌절과의 싸움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글을 존중하고, 책을 쓰고만든 이들을 존경한다. (특히 내게 번역은 어려운 일이다. 번역은 우리말 능력을 시험하는 과정이다.) 비평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 타인의 글을 다루려면 자신의 윤리와 정치적 판단에 관한 여러 번의 점검이 필요하다. 이것이 여성학자사라 러덕이 말한 "비판이 실천적인 개입" 인 이유다. - P18

 엄청난 지성과 노동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어느 누가 그런 ‘무임금 노고를 하겠는가. 내게 그런 능력과 시간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알려지지 않는 책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비평을 전문으로 공부하는 인문학 독립 연구자의 양성이 절실하다. (다른 사회 정책 분야에 비하면 말할 수 없이 ‘적은 돈‘으로할 수 있는 일이다.) - P19

혼신을 다했고 깊이 있지만 안 팔리는 책, 안 읽히는 글, 보상 없는 글,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권력자를 비판하는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삶일까. 인생사에 이만한 외로움이 있겠는가.
그렇다고 모두가 궁형(宮刑, 거세형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기》를 썼던 사마천이 될 수도 없다. 아니, 어쩌면 이 시대 궁형은 빈곤일 것이다. 한편 이러한 고통을 극복한 글이라면 얼마나
‘위대한 글이겠는가. 나는 평생을 ‘사랑도 명예도 권력도 돈도포기하고 오로지 언어에 영혼을 판 채 글쓰기에 인생을 건 이들을 몇몇 알고 있다. 그들이 사투한 책엔 별점 테러조차 없다.
알려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책이 그런 글쓴이들에게 전해지기를 희망한다. - P21

내가 가장 경계하는 사람은 강하고 대담한 악인이다. 이런이들은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어디에서나 잘 살고 있다. 선과악은 ‘사실‘이 아니라 강한 사람의 뻔뻔함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잉그리드 버그먼처럼 폭력, 악, 비행을 분명히목격하고 다른 이들과 함께 피해자를 돕는 일에 조금 개입한 적이 있다. 그러나 피해자는 가해자를 두려워했고 나는 사법처리를 포함한 여러 방식의 문제 제기를 생각했으나 모든 이들의 만류로 실패했다. 이유는 상대방이 나의 ‘예민한 성격을 문제 삼아, 자신을 ‘불안증 환자‘ (나)의 피해자라고 주장할 것이 뻔하다는 것이다. 나는 성폭력 피해 상담을 오래 해 왔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많이 겪었다. 결국 사건은 당당한 자(가해자)의 ‘승리‘로 마무리된다. - P26

여전한 논쟁거리는 당사자가 자기의 정체성이나 질병에 대해쓸 때 우리를 괴롭히는 방법론이다. 특히 사회 자체가 지극히병리적이고 이중적이면서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인식 체계는 없는한국이라면 말이다. 나는 "절대 상처를 드러내지 마라." (44쪽)는 말에 동의한다. 나에게도 드러내야만 하고, 드러내고 싶은문제가 있다. 그러나 순전히 개인적 능력 때문에) 내 시도는 여러번 실패했다. 낙인과 민폐, 자학만 얻었다.
사회의 ‘크기‘는 고통에 대한 태도와 그것을 품을 용량(capacity)으로 가늠할 수 있다. 나를 비롯해 한글판 제목대로
"피할 수 없는 모든 고통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의목소리는, 우리 자신의 그릇에 온전히 담길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불안하지 않은‘ 이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한다. - P28

가장 논쟁적인 부분은 ‘통증은 무엇인가?‘ (331~337쪽)이다.
나는 통증을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러한 시도와 접근 방식이 전제하는 사유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인간관계의 줄임말이지만, 동시에 인간은 각기 다른 몸들이다. 통증은개인의 몸에서 일어나는 주관적인 현상일 수밖에 없다. 통증의개념을 정의하는 것보다 이를 둘러싼 물리적 권력 관계, 권력과지식, 인식과 치유과정의 사회성, 정치학, 언어가 ‘통증학‘의 핵심 주제가 아닐까. - P32

시몬 드 보부아르나 도나 해러웨이 같은 여성주의자들은 백인 남성이 여성은 자연과 인간의 중간으로, 흑인은 동물과 인간의 중간으로 간주해 왔다고 비판한다. 그러므로 ‘완전한 인간‘
인 백인 남성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무관하게 앞에서 언급한경찰관처럼 흑인과 여성의 몸을 구타하거나 살해할 수 있는 통제권을 지닐 수 있다. 타인에 대한 통제권을 지닌다는 것. 흑인에 대한 백인의 지배가 문화적으로 합의된 사회에서 흑인의 몸은 백인의 것이다. 백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강간, 고문, 살인, 감금이든 모두 합법적‘이다. 압도적 폭력을 마음으로, 평화로, 정신력으로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P36

문제는 몸이다. 다시 말해 피부색과 사람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물론 인간의 몸을 이루는 어떤 부분도인간의 범주와 관련이 없다. 차이를 만드는 것은 생물학이 아니라 권력이다. 피부색은 좀처럼 희석되지 않는다.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트랜스젠더는 흑인과 다르다. 이들은 다른 방식으로몸이 부여한 정체성의 지도를 찢을 수 있다‘. 백인/남성/이성애자/비장애인과 다른 이들의 몸은 계급, 퀴어링, 의료 규범으로
‘혼란‘시킬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러나 흑인의 몸은 있는 그대로의 표식이다. 근대 자본주의가 부여한 영원한 화인(火印)이다. 쉽게 뜯어내고 그냥 버릴 수 있는 라벨이 아닌 것이다. - P38

몸은 사회적 (social/mindful body)이다. 몸은 기억이다. 있는그대로의 몸은 없다(영어 body는 그냥 ‘시체‘라는 뜻이다). 몸은언제나 해석이다. 같은 흑인이라도 힘과 스피드를 상징하는 운동 선수 우사인 볼트나 ‘흑진주‘로 불리는 뛰어난 미모의 여성들은 흑인이라기보다 뛰어나지만 특이한 인간의 범주로 다시구분된다. 이들의 예외성은 해석의 힘을 보여준다. 한편 책에도나오는 ‘one drop rule‘, 즉 선조 중에 흑인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이면 ‘인간‘이 될 수 없다는 해석이 존재한다. 영화화되기도 한 미국 소설가 필립 로스의 작품 《휴먼 스테인》(2000년)은 흑인의 피가 인생의 얼룩이자 오점(스테인stain)의 상징임을보여준다. 검은색, 그것은 없애야 하지만 없앨 수 없는 것이다. - P39

몸, 즉 나자신을 향한 적대감, 분노, 좌절, 비참함, 세상을향한 원망, 기력 없음…………. 나는 이 글을 쓰기 이전에 우선 나(몸) 자신과 싸워야했다. 나에게 몸은 절실히 바꾸고 싶은 그무엇, 그러다 안 되면 버리고 싶은 것이다. 나는 이 책의 필자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어떤 필자들은 부럽고, 어떤 필자는 존경스럽고, 또 어떤 필자에게는 공감했다. 자기 몸에 ‘대해‘ 쓰는 실천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쓰고 싶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고, 쓸 수 없기도 하고, 결국 쓸 몸이 안 되기도 하고…… - P42

거듭 말하지만 "내 몸은 나의 것이다."가 아니라 "내 몸이 나다." 우리의 정신이 몸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이 바로나다. 정신은 몸에 속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몸에 대한생각은 곧 자아관이 된다. 문제는 이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자기 몸을 긍정하기 어려운 사회인데, 과학 기술의 발달로 자아만 팽창한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에 모든 ‘비극‘이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책이 절실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 P47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몸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란 혁명에준하는 발상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그러한 발상의 전환을 위해서는 몸에 대해 쓰기, 말하기, 듣기, 이런 책(《몸의 말들>을 읽고토론하는 커뮤니티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페미니즘이 낯설지않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여성은 남성 사회가 만든 몸 이미지에갇혀 있다. 남성의 존재성은 돈, 지식, 권력으로 평가되는 반면여성의 시민권은 외모에서 시작된다. 남성은 정치적, 역사적 존재이고 여성은 생물학석, 의학적 존재라는 인식, 가부장제의 전제는 변하지 않았다. 아니, 더욱 심화되어 여성은 완벽한 스펙에 더해 ‘예쁘고 날씬하고 풍만해야 한다. 그리고 부모의 자본을 바탕으로 삼은 몇몇 ‘슈퍼 걸‘들이 매스컴을 지배하고 있다. - P48

용서에 대한 나의 입장을 굳이 밝힌다면 나는 용서에 관심이없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나는 용서라는 말이 싫고 용서의 필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이들을 의심한다. 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은 용서, 화해, 대화라기보다는 부정의한 사람들과 그들의 행위가 가능한 사회적 조건이다.
고통에는 육체적, 정치적 차이가 있다. 그것은 위계이다. 모든 고통은 같지 않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자기 상처가 제일큰법이다. 나도 내 상처가 제일 크다.  - P52

나는 다음과 같은 패턴을반복하며 살고 있다. 내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 있다. → 나는 ‘사회정의‘나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돕는다는 생각에서그들의 요구에 응한다. 오해받거나 배신을 당한다. 시간,
배신감, 상처, 자책감에-돈, 평판 등에서 ‘큰 손해를 본다.
분노로 시간을 낭비한다.
복수할 방법에 골몰한다. -→ 해결 방안이 없음을 깨닫는다.→ 이 과정에서 일상생활의 붕괴가 지속된다. 어쩔 수 없이 생활 전선에 복귀한다.
몸에 부상을 입은 채 잊는다. 잊게 된다. 잊힌다. - P52

내게 용서는 저절로 잊히는 것이지, 용서를 위해 고민하거나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내겐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스트레스고 참을 수 없는 부정의다. 내가 생각하는 용서는 관련된 사건을 잊는 것이다. 사건을 무시한다(ignore), 살기 위해 나자신에게 몰두하고, 그 일을 잊는다. 물론 가해자에 대해서도생각하지 않고 다시는 접촉하지 않는다. 나의 경우가 일반 법칙이 될 수는 없다. 나의 완벽주의 성향, 결벽증, 비사회성에 상응하는 능력은 없지만, 일중독과 자기 몰입 성향이 ‘용서‘ 따위를잊게 해주는 것 같다. - P53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람들은 용서가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한다. 정작 자신이 용서할 일을 당하기 전까지는…………." 1952년은 제2차 세계대전을치른 지 불과 7년째 되는 해였는데, 사람들은 만일 루이스 자신이 폴란드인이거나 유대인이라면 게슈타포를 용서하겠냐고 물었다. 그는 즉답을 피했다. 대신 그보다 더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서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오히려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 사람은 용서할 수있겠습니까?" - P55

나는 이 책의 제목 ‘새벽 세시의 몸들‘이 특히 좋다. 실제로서도 비유로서도 적절하다. 나의 새벽 세시 역시 불면과 잡념의 시간, 하루 중 가장 많은 양의 음식을 먹는 시간이다. 자살연구에 따르면 자살이 많이 발생하는 시간대는 새벽 세 시에서다섯 시 사이이다. 이 책에도 나오듯이 새벽 세 시는 고통과 통증의 감각이 가장 선명하게 자각되는 시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일부 의학에서는 장기가 가장 예민한 시간이라고도 한다. "몸으로 사는 존재라는 사실을 놀라움으로 지각하게 되는 모멘트가 있다. 몸이 아프게 될 때, 또는 나이가 들면서 ..… 겪게 되는 격렬한 ‘몸의 지각‘은 타협 불가능한 ‘자아 탐험‘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이로써 자기 이해나 시간 이해, 타자와의 관계나 - P62

가해자와 피해자는 유동적, 맥락적 개념이므로 가해의 절대성을 전제할 수 없는데 작가는 영리하게도 이를 고문자와 피고문자의 구도로 고정해놓았다. 고문은 죽음과 고통을 매개로 한
‘영원한 관계‘의 장이기 때문이다. 고문에 대한 일반적인 접근방식은 피해자의 고통을 그린 임철우의 단편 소설 <붉은 방>이잘 보여준다. 이때 우리는 피해자를 지지하고 동일시한다. 그러나 그 동일시는 우리 자신이 가해자일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상정하기 어렵게 만드는 사유 방식이다. 피해자 포지션이 정체성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정찬은 거꾸로 간다. - P74

나는 그 연배의 한국 문단에서 어떻게 이런 독특한 남성 작가가 나올 수 있는지, 역시 인간의 경험은 구조를 넘어선다는기쁜 진리를 확인한다. 정찬의 작품에는 한국 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외세 콤플렉스, 성애 묘사(여성에 대한 타자화가 거의 없다. 자기 도취나 자의식도 없다. 그러나 그의 소설을 읽으면 잘난 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작품의 주제는 물론이고 문체와 행간의 밀도는 그의 노동을 짐작케 한다.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초기에는 광주항쟁을 집중적으로 다루었지만 나중에는 주로 언어, 권력, 몸, 구원을 테마로 한 작품을 많이 썼다. 문학 평론가 김현은 생전에 정찬이 이청준, 복거일, 최인훈의 뒤를 이을 작가라고 주목했다. - P75

삶의 모든 고통은 권력에서 온다. 물론 제일의 권력은 육체적고통이다. 이 역시 사회적 차원의 문제지만 생로병사라는 다른차원의 법이 있으므로 차치하자. 우리가 직접 개입할 수 있는문제는 자원을 둘러싼 권력에서 일어나는 배제와 소외, 착취다.
인간이 사회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것은 개인이나 특정 집단이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을 분담하기 위해서라고 믿는다. 그러나 지금 글로벌 금융 자본주의의 ‘포스트 휴먼‘들은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로 진입했고, 지배 세력은가시권에서조차 사라졌다. 한국인들의 희망은 국제 자본을 걸러줄 국가다. 당대에만 그런 것은 아니다. 역사상 민중은 언제나 선하지만 강력한 지도자를 갈망했다. 유능하지만 욕심 없는사람을 원했다. 하지만 대개 선한 사람은 약하고, 강한 사람은악하다. 심지어 악함과 강함이 구별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 P79

우리는 <얼음의 집>의 주인공처럼 권력을 정확히 사용하는예술가를 만날 확률이 거의 없다. 우리 자신이 그렇게 되어야한다. 정찬의 <얼음의 집>은 권력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고통의백신이다. 고통의 시대에 어찌 백신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 P81

나는 예전에 세월호 사건을 두고 "잊지 말자."라는 말이 누구의 관점인가에 대해 쓴 적이 있다. 이는 그 사고와 무관한 이들의 다짐이다. 유가족들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다. 당사자가아닌 이에게는 망각이 필연이고, 당사자에겐 기억이 필연이다.
"잊지 말자." 대신 유가족의 시각에서 다른 언어가 필요하다. - P84

말의 의미는 사전에 있지 않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관계에 있다. 고통의 모습은 고통의 위치, 연결 지점(location)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공감의 표현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관계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 모든 것을 의식(consciousness)하기가 쉽지 않다.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지나친 긴장도 부담스럽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들을 때 나를포함한 인간의 주된 반응은 통념과 달리 놀라움과 당황스러움,
더 정확히는 의심과 비난이 더 많다. "정말?", "설마?", "농담하지 마."……… 이에 해당하는 단어들은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다. - P85

고통받는 몸은 사회적 위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고통의 의미를자각하는 일은 곧 사회적 존재로서 투쟁의 시작이다. 그리고 이것이 문명이다. 사회, 정치, 역사다. 힘있는 사람의 고통의 목소리는 크고 이미 위대한 의미 체계가 정해져 있다. 미국인의 고통과 북한인, 이라크 난민의 고통은 같은 고통이 아니다. ‘남성‘
의 고통과 ‘여성‘의 고통은 원인도 구조도 양태도 깊이도 다르다. 20대 여성은 성차별의 사례로 성폭력과 강남역 살인 사건의공포를 이야기하고, 20대 남성은 초등학교 때 ‘우유당번‘을 예로 든다. - P88

유명해지기 위해 무슨 짓을 못하랴. 누가 그런 사람이냐고?
실명 비판을 하라고? 나는 그들을 비판한 적이 있다. 그런데그/그녀는 내가 비판하는 사람이 자신인지 모르고 있었다. 자신을 아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신자유주의의 자아 개념은사회성이 없다. 타인과 사회와의 관계가 아니라 자신이 자신을규정하고 조작하는 것이 가능한 물적 기반(예를 들어 SNS…………)이 민주주의든 과학 기술이든 진보의 이름으로 우리 몸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심리학에서 가장 위험한 심리를두 가지로 본다. 하나는 나르시시즘이고 다른 하나는 투사(남의탓으로 돌리는 폭력)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나르시시스트가 10퍼센트, 타인에게 폭력적인 사람들(갑질 행위자)이 90퍼센트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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