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 일일,
방을 옮겼는데 [그 섬에 내가 있었네]가 창가에 놓여있다. 내가 K선생님께 선물한 책인데 읽고 계셨던 모양이다. 절반쯤 읽으셨는지 ‘한라산, 내 영혼의 고향‘에 책갈피가 꽂혀있다. 흐뭇하다.

몇 번을 읽었고
많이 선물한 책인데
오랜만에 휘릭 읽는다.
그리움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억새가 손짓하는 중산간도,
향기 짙을 여린 국화들도,
두모악의 바람이 담긴 사진들도
그리움이다.
내 마음의 풍경이다.

내 마음의 풍경

들판에는 내 마음을 사로잡는 풍경이 있습니다.
마음이 불편할 때마다 찾아가 세상을 탓하고나 자신을 탓합니다. 어린아이처럼 투정도 부려봅니다.
하지만 들판은 한결같이 반갑게 맞아줄 뿐입니다.
그리고 새들을 초대해 노래 부르게 합니다.
풀벌레를 초대해 반주를 하게 합니다.
구름과 안개를 초대해 강렬한 빛을 부드럽게 만들어줍니다.
해와 달을 초대해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줍니다.
눈과 비를 초대해 춤판을 벌이게 합니다.
새로운 희망을 보여줍니다.
마음이 평온할 때면 나는 그 들판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지냅니다.
마음이 불편해져야 그 들판을 생각합니다.
그래도 들판은 즐거운 축제의 무대를 어김없이 펼쳐줍니다.
들판이 펼쳐놓는 축제의 무대를 즐기다 보면 다시 기운이 납니다.
그런 들판으로부터 받기만 할 뿐, 나는 단 한 번도되돌려주지 않았습니다. 들판은 그런 나를 나무라지 않습니다.

대신 언제나 나에게 세상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나의 모습은 들판으로 나오기 전까지와는 많이 달라져 있습니다.
들판을 만나고 오는 날에는 잠자리가 편안합니다.

풀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나무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바람이 지나가는 길목, 풀과 나무들은 온갖 시련을 홀로 견디며무성하게 자랍니다. 소, 말, 노루가 주는 시련은 그래도 괜찮습니다.
홍수가 나면 뿌리째 뽑혀나갑니다.
가뭄이 계속되면 잎들이 다 말라버립니다.
하지만 풀과 나무들은 하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가뭄이 들면 홍수를, 혹서기에는 혹한기를 떠올리며 참아냅니다.
때가 되면 태풍이 옵니다.
태풍은 온몸을 상처투성이로 만들어놓고 떠납니다.
이제는 사람들도 한몫을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풀과 나무들은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뽑혀나간 뿌리로 땅을 짚고 새 줄기와 가지를 키워 올립니다.

부러진 줄기와 가지를 추슬러 새순이 움트게 합니다.
끊임없는 비극과 고통 속에서도 풀과 나무들은비명 한번 내지르지 않고, 불평 한번 없이,
절대로 도망치는 법도 없이 묵묵히 새 삶을 준비합니다.
다가오는 비극과 고통이 그들을 오히려 더 강한 존재로 만들어줍니다.
나에게도 비극과 고통이 닥쳐올 때가 있습니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는 것입니다.
이때 들판은 나에게 가르쳐줍니다.
어떻게 하면 시련을 성장의 또 다른 기회로 만들 수 있는지를….
그래서 나는 들판의 친구로 삽니다.
들판을 친구 삼아 나의 비극과 고통을 넘어섭니다.
아픔은 한동안 머물다 떠납니다.
행복과 즐거움보다는 불행과 슬픔이 나를 더 성숙하게 만듭니다.
나의 친구, 들판은 나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가 되도록 해줍니다.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아주 고요한 몸짓으로,
그렇지만 온몸으로……

산다는 일이 싱거워지면 나는 들녘으로 바다로 나간다. 그래도 간이 맞지 않으면 섬 밖의 섬 마라도로 간다. 거기서 며칠이고 수평선을 바라본다. 마라도에선 수평선이 넘을 수 없는 철조망이다.
외로움 속에 며칠이고 나 자신을 내버려둔다. 그래도 모자라면 등대 밑절벽 끝에 차려 자세로 선다. 아래는 30미터가 넘는 수직 절벽이고, 바닥은 절벽에서 떨어진 바위 조각들이 날카로운 이를 번뜩인다. 떨어지면 죽음이다. 정신이 바짝 든다. 잡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다. 불안과 두려움이계속된다. 눈을 감고 수직 절벽을 인식하지 않는다. 마음이 편안하다. 수직 절벽임을 인식하면 다시 두려운 마음이 든다.

산다는 것이 싱겁다. 간이 맞지 않는다, 살맛이 나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것은 마음의 장난이다. 살다보면 때때로 죽고 싶다는 말이 습관처럼튀어나온다. 현실이 고달플수록 도피처를 찾는다. 그 최종 도피처는 죽음이다. 원치 않는 상황에서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나는 당황했다.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을 잊기로 했다. 죽음을 인식하지 않으면서 늘 평상심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이젠 끼니를 걱정하지 않는다. 필름값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형편이 좋아졌다. 그런데 카메라 셔터를 누를 수 없다. 병이 깊어지면서 삼 년째 사진을 찍지 못하고 있다. 끼니 걱정 필름 걱정에 우울해하던 그때를,
지금은 다만 그리워할 뿐이다. 온종일 들녘을 헤매 다니고, 새벽까지 필름을 현상하고 인화하던 춥고 배고팠던 그때가 간절히 그립다.
그때는 몰랐었다. 파랑새를 품안에 끌어안고도 나는 파랑새를 찾아 세상을 떠돌았다. 등에 업은 아기를 삼 년이나 찾아다녔다는 노파의 이야기와 다를 게 없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이 낙원이요, 내가 숨쉬고 있는현재가 이어도이다. 아직은 두 다리로 걸을 수 있고, 산소 호흡기에 의지하지 않고도 날숨과 들숨이 자유로운 지금이 행복이다.

내 사진은 ‘외로움과 평화‘ 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그동안 다양한 크기의 필름으로 작업을 했었다. 그중에서 파노라마(6×17)사진이 내 사진의 주제를 표현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이 땅에서 사진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부끄럽고서글픈 일이라고 고백했다. 사진의 홍수 속에 살아가면서도 사람들은 사진에 대해 너무 모른다. 나는 셔터를 누르기 전에 이미지를 완성한다. 한장의 사진 속에 담긴 이미지는 누구도 함부로 훼손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사용자의 목적에 따라 사진이 어이없이 재단되고 변형되는 것을 숱하게 봐왔다. 한 장의 사진에는 사진가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나의 사진을 나의 의도대로 전달할 수 있는 기회를 이십여 년 만에 얻었다. 허락해준 하응백 사장과 손현미 편집장, 정진이 디자이너 그리고출판사 식구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갤러리 두모악에서
김영갑

모두에게 인정받기보다는 나 자신에게 인정받는 게 우선이다. 나 자신이 흡족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느끼고 표현할 때까지는 사진으로 밥벌이하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않으리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다른 사람들은 속일 수 있어도 나 자신을 속일 수는 없기에 늘 자신에게 진실하려했다.
이 땅에서 자기가 원하는 사진만을 찍으며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카메라만 좋으면 근사한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편견 때문에 전업 사진가로살아가기도 힘들다. 

나는 그 심술궂은 바람을 좋아한다. 바람은 멀리서 씨앗들을 한 움큼씩 가져와 내게 잘 보이려 아양을 떤다. 나는그 바람을 품에 안고 사시사철 함께 중산간 초원을 떠돈다.
사철 억새와 함께 생활하는 나는 억새의 변화에 따라 기분도 변한다.
내 기분에 따라 정원의 분위기도 쉼 없이 변한다. 내 감정은 고여 있지 않고 주변 분위기에 따라 흐른다.
중산간 초원 억새의 아름다움은 시시각각 변한다. 어떤 이는 파란 하늘과 조화를 이루는 억새를 사랑하고, 어떤 이는 구름이 짙게 가라앉은 날아침이나 저녁, 여명에 드러나는 억새를 좋아하고, 어떤 이는 바람 부는날 너울너울 춤을 추는 억새를 으뜸으로 꼽는다. 어떤 빛에서 사물을 보았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사물이 놓인 주변 환경에 따라 우리가 느낄수 있는 아름다움은 확연히 다르다.
장마철이면 안개 짙은 날 치자꽃 향기에 취해 마시는 커피 맛은 유별나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날 보름달을 보며 마시는 차 맛은 누구도 이해할수 없는 나만의 즐거움이다.

눈으로 보아도 보이지 않고, 귀로 들어도 들리지 않고,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것. 형상도 없는데 사람을 황홀하게 하는 그 무엇이 중산간 광활한 초원에 존재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최고의 것은, 사람을 황홀하게 하는 그 무엇이다. 그것을 깨닫기 위해 나는 중산간을 떠나지 못한다.
눈에 보이지 않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영원한 것을 이곳에서 깨달으려한다. 말할 수 없으나 느낄 수 있고, 보이지 않으나 느낄 수 있는, 사람을황홀하게 하는 신비로움을 찾으려 한다. 자연 속에 묻혀 지내며 마음을씻고 닦아 모두를 사랑하려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영원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느끼고 확인하고 싶다.

초원에도, 오름에도, 바다에도 영원의 생명이 존재한다. 대자연의 신비와 경외감을 느낌으로써 나는 신명과 아름다움을 얻는다. 나는 자연을통해 풍요로운 영혼과 빛나는 영감을 얻는다. 초원과 오름과 바다를 홀로 거닐면, 나의 영혼과 기억 그리고 자연이 하나가 되어 나의 의식 속으로 스며든다. 그럴 때면 훌륭한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간절한 바람도 사라진다.

바다 사진을 찍을 때 배, 새, 바위, 비행기, 사람 그 어떤 것도 사진 안에 끼어들지 않는다. 바다는 텅 비어 있다. 구름의 양, 구름의 모양, 구름의 색 등에 따라 바다도 변한다. 필터 등을 이용한 기술적인 효과도 배제한다. 필름이나 렌즈도 하나만을 고집한다. 수평선을 프레임 중앙으로 놓고 위는 하늘, 밑은 바다다. 프레임을 결정한 나는 같은 프레임으로 계속촬영한다. 일출이나 일몰도 같은 방식이다.

그릇의 쓰임이 빈 공간에 있듯, 사진 속의 공간도 최대한 비워놓는다.
도예가가 찻잔을 만든다. 그 잔을 쓰는 사람이 물을 담으면 물잔이 되고,
술을 담으면 술잔이 된다. 옛날 옹기들이 장독대에서 이제는 방 안으로자리를 옮겼다. 꽃병이 되기도 하고, 우산꽂이가 되기도 한다. 사진도 보는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 나 자신을 위해 찍는 사진이 아니라 보는 사람을 위한 사진이다.

아름다움은 어디에도 존재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름다운 곳을 찾아 해외로 나간다고 아우성이다. 물론 경치가 빼어난 곳을 찾아가면 좋은사진을 찍게 될 확률이 높다. 하지만 어떤 바다나 강에도 큰 고기는 있기마련이다. 운이 좋아야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행운은 사진가 스스로 준비해서 맞이하는 것이다.

날마다 사진을 찍는 나는 날마다 사진만을 생각합니다.
사진 찍는 일에 몰입해 홀로 지내는 동안, 그리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내 존재가 잊혀져갈지라도 나의 사진 작업은 계속될 것입니다.
하늘의 변화에 따라 내 마음은 변화하고 마음의 변화에 따라어느 한곳을 찾아갑니다. 같은 곳을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해서찾아가지만 늘 새로움으로 다가옵니다. 같은 곳을 삼백예순다섯 날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도 갈 때마다 새롭기만 합니다.
자연은 늘 사람을 설레게 하는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으로충만해 있습니다. 나는 늘 긴장 속에서 자연 속을 맴돕니다.
자연에 묻혀 지내는 동안만은 아무리 작은 욕심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나에게 한라산은 온 산이 그대로 명상 센터입니다. 나는 어느 한곳에머물지 않고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사진을 핑계 삼아 명상을 합니다.
수행자처럼 엄숙하게 자연의 소식을 기다립니다. 깊은 생각에 잠겨내면의 소리에 몰입합니다. 내 마음은 늘 변화했고 그 변화를필름에 담습니다. 그 시간이 하루 중 제일 소중한 시간이기에

홀로 지내며 그 순간만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은 매일매일 반복됩니다.
자신이 전해주는 메시지를 통해 나의 내면도 성장했습니다.
변화를 거듭하는 동안 마음은 중심을 잡았고,
이제는 흔들리지 않는 평화를 얻었습니다.
명상을 계속하는 동안 자연의 소식은 영원으로 이어집니다.
사건에 매달려 세월을 잊고 살다보니 나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지혜를 얻었습니다. 사진을 계속할 수 있는 한나는 행복할 것입니다. 살아 있음에 끝없이 감사할 것입니다.
나의 사진 속에는 비틀거리며 흘려보낸 내 젊음의 흔적들이비늘처럼 붙어 있습니다. 기쁨과 슬픔, 좌절, 방황, 분노···내 사건은 내 삶과 영혼의 기록입니다.

동박새는 모른다. 동백꽃을 피우기까지 나무가 견뎌낸 고통의 시간을.... 동박새는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눈, 비, 바람, 가뭄, 혹한과 무더위를…. 동박새는 꽃이 떨어지면 동백꽃을 기억하지 않는다. 동박새는 다음해 동백꽃이 피어야 다시 올 것이다.

나에게 내일이란 기약할 수 없는 시간이다. 허락된 것은 오늘 하루, 그하루를 평화롭게 보낼 수 있으면 된다. 그러다 보면 아픔도 잊혀진다. 하나에 몰입해 있는 동안은 통증을 의식하지 못한다. 통증을 잊으려고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또 다른 하루가 허락되면 또 다른 일을 찾는다.
몰입할 수 있는 일은 끝이 없어서 찾으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하나에 몰입해 있는 동안은 오늘도 어제처럼 편안하다. 하루가 편안하도록 오늘도 하나에 몰입한다. 절망의 끝에 한 발로 서 있는 나를 유혹하는 것은 오직 마음의 평화이다. 평화만이 나를 설레게 한다.

점점 야위어가는 나를 보고 더러 새로운 치료법을 소개해주는 지인들도 있었다. 그러나 내 방식의 치료를 고집하자 더 이상 권유하지 않는다.
‘빵이 깊어갔고 나는 혼자가 되었다. 지인들의 발길도 전화도 뜸해졌다.
밤이 되면 갤러리는 적막하다. 적막함을 즐기며 홀로 정원을 걷는다. 몸이 피곤해지면 편안한 상태로 침대에 눕는다. 건강이 나빠지지 않았다면 밤늦도록 사진 작업에 매달렸을 테지만 이젠 한가로운 일상에 익숙해졌다. 루게릭 병이 내게 준 선물이다.
팔 힘이 없어 운전을 하기도 힘드니 혼자 몸으로는 외출도 어렵다. 온종일 갤러리에 갇혀 지내며 한적함을 즐기고 내일을 기다린다. 이제 기다림은 나의 삶이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세상과 삶을경험할 수 있는 지금이 나는 행복하다. 나의 하루는 평화롭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또 다른 길을 찾은 것이다.
내 앞에 펼쳐진 새로운 길을 볼 수 없는 이들은 나를 몹시 가여워한다.
새로운 길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슬퍼한다. 막다른 골목에서 새길을 발견했으므로 나는 절망하지 않는다. 조금 힘들고 불편해도 나에게허락된 오늘을 즐길 수 있어서 마음이 평화롭다.
구원은 멀리 있지 않다. 두려움 없이 기꺼이 기쁘게 떠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구원일 게다.

살다보면 불현듯 찾아오는 슬픔, 분노, 두려움, 절망, 그리고 힘든 상황을 극복해야 할 때마다 나는 자연에서 해답을 구했다. 그 속에 숨겨진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통해 지혜를 얻었다. 아름다움을 통해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 나는 모든 치료를 거부하고 아름다운 것만 보고, 아름다운 것만느끼고, 아름다운 것만 생각하며 자연 안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낸다. 난치병이라는 사실마저 잊고 평상심을 유지하려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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