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해전 캐나다의어느대도시 공항에 내렸을 때다. 첫눈에 인상적이었던 것은 공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피부색 밝기에 따른 노동분업이었다. 승무원, 청소부, 쓰레기 수거원, 스낵바 점원, 경찰, 세판원, 짐을 나르는 포터. 이들은 모두 자신의 피부색에 따라 다른노동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청소부 중에 백인은 한 명도 없었고 세관원 중에 흰색도 하나의 유색이지만 유색인종은 거의 없었다. 이런 식의 직종 분리는 공항 밖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직업은 인종에 따라 달랐다. 한국인들은 주로 식료품 가게를 독점하고 있었고 택시기사는 모두 인도인 차지였다. 이주 노동자에 대한 인종주의(나는 우리 사회의 인종 문제는 지역주의와 학벌이라고 보지만, 이 글에서는 논외로 한다), 장애, 성별, 성정체성(동성애/이성애), 연령주의…….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정치학으로 각광받기 시작한 소위 소수자 문제들을생각해보면, 하나같이 몸에 대한 위계적인 해석의 결과라는 것을 - P183
한국사회에서 노인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은, 나이 듦은 생물학적 문제라는 전제 아래 사회운동이나 정치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소외 계층에 대한 잔여적 복지 정책의 시혜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노인 문제를 포함한 연령주의에 대해, 편견과 차별이라는 언어는 빈곤해 보인다. 나는 연령주의를 우리 모두의 삶을 근본적으로 규율하고 있는 심각한 혹은 ‘결정적‘인 사회적 모순이라고생각한다. 또 여성의 나이 듦은 연령주의와 성차별의 결합이라기보다는, 여성에게 연령주의는 성별주의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 억압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것은 여성 노인, 중년 여성의 문제가 연령주의로 인한 것이 아니라 성차별로 인한 것이라고 보는 ‘주요 모순론‘ 주장이 아니다. - P185
나는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사회운동으로서 여성노인운동, 반(反)연령주의운동이 전개되어야 하고 정치적 주체인 여성 노인 활동가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 노인의 사회적 위치(position)와 ‘피해‘ 상황은 ‘드러난‘ 억압의 구체적 사례와 통계를제시함으로써 나타날 수 있겠지만, 이 글에서 나는 그러한 사실을알리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방식은 연령주의를 우리 자신의 문제로 정치화시키기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 노인 문제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나이 듦의 의미를살펴보는 과정의 결과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 P186
한국 사회에서 노인은 기본적으로 계급적 개념이자 범주이다. 지식인, 여성 지식인, 게이 지식인이란 말은 있지만 노인 지식인이란말은 없다. 지식인이나 정치인, 재벌 등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노인이라고 불리지 않으며 그들도 스스로를 노인으로 정체화하지 않는다. 우리는 서민에게만 노인이란 칭호를 붙인다. 노인이 되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만 문제가 된다. - P186
지식인의 사명, 청년의 사명이라는 말도 같은 착각에서 나온 언설이다. 매력, 열정, 가능성, 순수, 치열함은 젊은이만의 표상으로간주되기 때문에 나이 든 사람이 그런 모습을 보일 때는 ‘철이 없거나 주책이 된다. 사회의 주체, 즉 노동과 성과 사랑, 욕망의 주체는 젊은 사람(남성)으로 한정된다. 따라서 표준적 인간 범주에서 제외된 노인은 복지의 대상일 뿐이다. 한국 사회에서 연령주의는 두 가지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논의되고 있다). 나이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이른바 ‘생애 주기‘식의 연령주의와 나이가 차별의 근거가 되는 연소자/연장자 우선주의다. - P187
나이 듦이 적용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에게 나이 듦은 권력에 접근하는 유용한 방식으로 작동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다. 어떤 이에게 나이 듦은 돈으로 감출 수 있는개인의 힘으로 통제 가능한 문제이지, ‘어쩔 수 없는 세월의 문제가 아니다. 나이는 개인의 성별과 계급에 따른 적용 방식이 정반대가 될 정도로, 저마다 다르게 경험되는 정치적 제도이다. 여성에 대한 억압을 개선하기 두려워하는 사회는 성별 제도를 생물학적 문제로 환원하고 이를 정치화하려는 페미니스트에게 적대감을 숨기지않는다. 마찬가지로 연령주의의 문제화를 회피하는 사회는 나이 듦이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질서라는 식의 담론을 끊임없이 생산한다. - P189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 (woman)은 모든 여성(female)을 가리키는 개념이 아니다. ‘아줌마‘는 여자가 아니라 제3의 성인 것처럼 계급과 나이, 외모, 결혼 여부 등에 따라 ‘진정한 여성‘과 그렇지 않은여성이 있다. 남성 중심 사회는 여성 개인을 여성이라는 전체 집단의 속성에 귀속시키지만, 사실 남성 사회가 원하는 여성의 개념은대단히 협소하다. 정숙하고 젊고 예쁜 여성만이 여성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예를 들어 여성 흡연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이 있지만 ‘모든 여성에 대해 그런 것은 아니다. ‘술집 여자‘나 할머니 혹은 여성 지식인의 흡연은 자연스럽다. - P191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몸을 기준으로 분류된 타자이다. 남성의 몸과 다르다는 것이 여성억압의 근거가 되는 성차별 사회에서는 여성의 존재성은 언제나 몸으로 환원된다. 남성의 몸과다르다는 것이 여성의 존재 의의‘ 방식이 되기 때문이다. 가부장제사회에서 몸의 경험을 근거로 형성되는 여성의 정체성은 남성 중심사회가 ‘부여한 것이지만, 남성은 행위하는 주체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한다. 그러므로 남성은 어떠한 경우에도 몸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그들의 정체성은 몸의 기능과 상태 (나이)에 의해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에 의해 형성된다. - P193
이들이 제기하는 것은 여성주의가 차이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여성 내부의 ‘타자‘들의 목소리가 기존 여성주의를 어떠한 방식으로 수용, 해체, 재구성할 것인가라는 여성주의 ‘실천‘과 ‘이론‘의핵심적인 이슈들이다. ‘차이‘를 둘러싼 대화와 소통의 정치는, 예를 들어) 비장애 여성과 장애여성들 사이에서만 수행되는 것이 아 ‘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남성(사회)과 대화하며, 구성중인 존재로서 과거의) 자기 자신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살아간다. 소통의 정치는 여성주의 정치학의 기본 주제이다. 여성들 간의 차별과 억압을 이해하지 못하면, 남녀 간의 그것도 파악 불가능하다. 역사를 초월하여 수행되는 젠더는 없기 때문이다. - P205
20성매매는 기본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관계를 보여주는 성별 정치학의 문제이다. 그러나 성매매를 반대하는 여성들과 성매매를 통해 생계를 이어가는 ‘성판매 여성‘의 갈등과 대립은, 이 문제를 둘러싼 여성과 여성의 ‘차이‘를 질문하고 있다. 그동안 성매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관점은 ‘도덕‘ 혹은계급의 문제였다. 성매매는 가장 성별화된(gendered) 사회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몰성적 (gender blind)으로 이해되어 왔다. 성산업에 직접 종사하는 여성이든 그렇지 않은 여성이든, ‘피해‘ 집단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목소리가 가장 드러나지 않았던 영역이다. 성매매는 여성과 남성의 서로 다른 성적 실천에 의해 유지되는 가족, 국가, 자본주의 제도의 매트릭스다. 성매매는 성 정치학의핵(core)이자 성 정치학에 의존한 한국 사회 정치경제학의 주요요소인 것이다. - P221
성매매 방지법의 제정과 시행은 성매매 근절의 근거라기보다는, 이 문제를 공적인 문제로 만드는 가시화의 첫 출발점에 불과하다. 현재 전국적으로 성매매 관련 전문가(활동가)는 수십 명이 채 되지않는다. 언제나 그렇듯이 소프트웨어는 준비되지 않은 채, 하드웨어만 만들어진 셈이다. 성매매 방지법은 성급하게 추진되었지만, ‘단속‘은 잘 되고 있는 편이다. 이 법의 내용이 기존의 윤락행위방지법과 큰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업주들의 저항이 큰 것은 순전히 강력한 단속 때문이다. - P222
이름 짓기 (naming)는 정치학이다. 명명(命名)의 과정과 결과는명명하는 집단의 시각과 이해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때문에 객관적이거나 보편적 언어는 존재하지 않으며, 현재 사용되는 언어는 그언어를 둘러싼 사회적 투쟁의 연속선의 한 지점일 뿐이다. 우리 사회에서 성매매만큼 사회적 투쟁과 인식의 변화가 극명하게 반영된언어도 없을 것이다. - P226
만일 남성 사회의 주장대로 성매매가 평등한 교환이라면, 왜 유독 파는 여성만이 그토록 혐오의 대상이 되며, 성을 파는 여성에 대한 비하가 여성 집단 전체에 대한 비하와 통제로 연결되는지 설명할 수 없다. 여성이 성산업에 종사하는 것은 그녀가 가난해서라기보다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가난하지 않은 여성도 인신매매에 의해성판매 여성이 된다. 가난한 남성이라 할지라도 여성에게 성을 팔지는 않는다. 성매매는 계급의 문제가 아니라 성차별의 문제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이 파는 것은 몸이지 성이 아니다. 그러나 여성의 몸은 그 자체로 성으로 간주되며, 여성의 성은 팔거나, 팔리는 상품이 된다. 남성노동자가 파는 것은 성이 아닐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남성 노동자는 노동자일 뿐 팔리는 노예가 아니다. - P229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성판매 여성을 가부장제의 피해자로간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성판매 행위는 당사자 여성이 의도하건의도하지 않건 간에 남성의 성적 실천에 기여하게 된다고 본다. 이러한 논리에서는, ‘자율적 의지‘로 성판매를 ‘선택‘ 했다고 주장하는성판매 여성들의 주장은 남성들에게 ‘세뇌‘된 ‘허위의식‘에 불과하다. 이 점이 바로, 섹슈얼리티와 여성 종속에 대한 풍부한 이론을생산했으며 실천적으로도 헌신해 온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이 가장 많이 비판받는 부분이다. 이들의 관점은 성판매 여성의 행위성을 무시하고, 피해자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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