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폭력 그자체로 인식하지 않게 하는 다양한 문화적 구조들을 생산해 왔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종교의례, 민족 문화, 전통, 놀이따위로 정상화, 합리화, 일상 문화화되었다. 이는 여성 폭력을 은폐하고 해결을 지체시켜온 사회 구조로 작용해 왔고 특히 ‘아내 폭력‘은 가족 내에서 발생한다는 점 때문에 수천년동안 폭력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여기서는 피해 여성의 폭력 해석, 수용 방식을 통해 폭력의 발생과 지속 구조를 알아보고자 한다. 아내가 특정한 방식으로 폭력을해석하는 사회 문화적 맥락을 가족 구조와 가족 내 남성과 여성의관계 방식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폭력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없다면, 폭력당하는 현실이 부정의하다고 생각하기 힘들다. 폭력을남성의 정당한 자원으로 인정하는 한국 사회에서 피해 여성들은 남편을 제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폭력을 견딜 수밖에 없다고생각하거나, 자신의 몸이 경험하는 육체적 고통을 상대화하고 다른종류의 문제로 치환하면서 폭력을 수용한다. - P155

남편의 폭력은 아내를 훈육하려는 폭력에 그치지 않는다. 실제의많은 폭력은 이보다 훨씬 더 도구적이다. 남편은 폭력을 통해 자기이해(利害)를 실현한다. ‘맞을 짓‘에 대한 성별적 적용은 오랜 세월이 지남에 따라 남편이 ‘맞을 짓‘을 해도 아내가 맞게 된다. 어떤 남편들에게 폭력은 생활 방편이다. 가정만 유지한다면 아내의 경제력으로 평생 먹고살 수 있다. 폭력은 남편이 ‘노상(언제나 하는 일‘로서 직업이자 노동이 된다. 이때 아내는 가족을 벗어나길 바라지만,
남편은 가족 없이 살아가지 못한다. 결혼 관계에서 폭력은 남편이관계의 유지를 위해서건 청산을 위해서건,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기위해 가장 손쉽게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다. 두 사람 간의 이해 갈등 상황에서 남편은 아내보다 훨씬 쉽게 폭력을 선택할 수 있다는점에서 폭력은 남성적인 자원이다. 가정 외 폭력에서도 폭력 행위주체가 대부분 남성이라는 점에서 폭력은 성별화된 사회 현상이다. - P156

심각한 폭력의 존재는 ‘가벼운‘ 폭력을 정당화하고 이는 결국 가벼운 폭력이 심각한 폭력으로 발전할 수 있게 한다. 여성들은 폭력자체를 문제화하기보다는 ‘덜 당한‘ 사실에 안도하고 남편에게 고마워한다. 워낙 부부 관계에 폭력이 만연해 있기 때문에 아내가 폭력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면 관계를 지속하기 힘들다. 여성들은스스로 허용 기준치를 만들 수밖에 없다. 자신들이 당하는 폭력이(폭력이긴 하지만) 결혼 생활을 포기할 만큼은 아닌, 부부 관계의 일부로 생각하는 것이다. - P164

아내는 자신이 당한 폭력을 참아야 하는→ 참을 수밖에 없는 →참을 만한 폭력으로 인식한다.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이직면한 현실을 일시적, 우연적인 것으로 만들어 폭력 사건을 특수한 경험으로 축소해야 한다. 특히 남편의 폭력이 10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아내들이 나에게 가장 많이 했던 질문은 ‘보시기에 몇 퍼센트나 고쳐지나요? 우리 남편이 고쳐질 타입인가요? 그것을 어떻게하면 알 수 있나요? 시간이 흐르면 나아지겠지요? 이렇게까지 했는데 설마 또 때리지는 않겠지요?‘ 등이다. 아내는 자신이 당한 폭력을 그 자체로 인식하지 않는다. 폭력을 ‘있는 그대로‘ 해석할 수 있는 언어도 없지만, 있는 그대로 해석한다면 남편/가족을 떠나야 하는 더 큰 문제와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그들을 분열과 혼란, 끝없는 고민과 질문 속으로 밀어 넣는다. - P166

두 여성 모두 남편의 행위를 폭력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경찰에신고도 했으나, 결혼 관계를 유지하겠다고 생각한 이상 계속해서혼란을 겪는다. 남편을 미워했다가, 분노했다가, 불쌍해하다가, 폭력을 ‘술 먹으면 생기는 깊은 병‘으로 생각한다. 가족 관계를 지속하려면 자녀와 남편 사이가 나빠져서는 안 되기 때문에, ‘아빠를 미워하지 말라‘고 자녀에게 부탁한다. 폭력남편도 자신의 폭력을 질병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다. 다른 남자를 시켜 아내를 수차례 성폭행한 남편은 정신병원에 가겠다고 함으로써 처벌을 피한다. - P174

여성 폭력 피해자가 가해자를 고소하려 할 때는 사회적 압력을받게 된다. 경찰은 합의하라고 종용하고, 주변 사람들은 ‘사소한 일가지고 사내 앞길 가로막는다‘고 비난한다. 이는 피해 여성의 고통보다 가해 남성의 명예가 더 존중받아야 한다는 언설인데, ‘아내 폭력‘의 경우 가해자가 모르는 사람도 아닌 남편이기 때문에 그러한비난은 더욱 심하다. 아내가 남편을 신고할 경우 범죄 신고를 장려해야 할 경찰은 ‘남편 인생에 빨간 줄 긋고 아들을 전과자 자식으로만드는 여자‘라고 피해 여성을 비난한다. - P179

남편의 폭력을 자신이 ‘맞을 짓‘을 한 결과라고 보는 것은, 일시적으로 아내의 고통을 덜어주고 결혼 생활에 적응하게 한다. 그러나 폭력의 주체는 남편이기 때문에 폭력 행동은 남편만이 고칠 수있다. 아내가 남편의 폭력행위를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은, 남성중심의 가족 구조에서 아내의 역할에 대한 극단적인 자기 해석이다. - P183

피해 여성들은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라 사회적 주체로서 폭력이지속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한다. 또 가족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한국 사회의 성별 권력 관계는 이러한 아내의 역할을 폭력의 ‘책임‘으로 전환한다. 이리하여 폭력의 피해자인 아내는 도리어 남편의 폭력을 해결할 것을 요구받게 된다. 그러나 피해 여성이 남편과 주변의요구대로 아내 역할에 더욱 충실함으로써 폭력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과연 효과가 있을까?
한편 피해 여성들이 폭력으로부터 탈출하려는 경우 그들의 탈출의지는 언제나 아내, 어머니 역할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에 회귀함으로써 폭력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즉 여성의 가족 내 성 역할 수행이 여성의 인권보다 우선시되면서 어머니, 아내로서의 ‘도리‘는 인간의 기본권인
‘맞지 않을 권리‘를 유보하거나 사소화하였다. - P187

피해 여성들은 ‘남편의 비위를 맞추려고 해도 종잡을 수가 없다‘
고 호소한다. 이를테면 남편의 질문에 대답하면 ‘말대꾸한다‘고 때리고, 질문에 대답을 안 하면 ‘남편 말을 무시한다‘고 때린다는 것이다. 내가 면접한 어떤 폭력 남편은 대학 시절에 아내에게 좋은 담배를 구해다 줄 정도였으나 결혼 후에는 ‘여자가 담배 핀다‘고 구타하고 있었다. 또 어떤 남편은 ‘여자가 돈도 안 벌고 집에 퍼질러 앉았다‘ (한심한 아줌마가 되었다고 구타하면서도 아내가 주부 노릇을 제대로 못한다고 폭력을 행사한다. 아내의 입장에서 이처럼 매번 바뀌는 폭력의 이유는 결혼 생활이 계속되는 한 항상 새롭게 해결해야할 과제가 된다. 남편의 요구대로 자신의 모든 행동을 유보하거나제거하는 것이다. 과제를 충실하게 수행하지만 폭력은 지속된다. - P189

그녀는 어렵게 집을 나왔지만 집만큼이나 험하고 추운 세상을 만난다. 맞는 것보다 탈출이 더 고통스럽다면 여성들은 폭력을 견딜것이다. 남편을 가정폭력방지법으로, 자신과 손녀를 추행한 시아버지를 성폭력 특별법으로 고소하고 이혼 소송을 내겠다는 그녀의 계획은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무산되었다. 여성 단체도 그렇게 상처를 주었는데 세상은 더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밥 먹여주는 것을 무기로 생각하는‘ 남편과 자신을 ‘호시탐탐 노리는 시아버지가 있는 집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그 집은 이혼을 위해 통장도장 받으러 가는 것조차 무서운 집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 아내라는 직업을 가질 때 모든 여성은 다 똑같아지지만, 노점상이나 노동자가 될 때는 귀천과 차별이 있다. 그래서 그녀는 ‘길거리 장사를하느니 다시 아내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는 그녀가 노동자인 여성을 얼마나 타자화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녀는 매를 맞더라도아내의 지위가 ‘노점상‘보다는 높다고 생각한다. - P217

여성이 계약 당사자인데도 집주인은 ‘이혼하든지 해결하고 가라‘
고 한다. 이혼할 경우에는 아내가 아니게 되므로 전세 계약 주체가되지만, 아내인 이상 개별적인 경제 주체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족을 하나의 경제적 단위로 간주하는 가족 중심주의 사회에서 남편의 빚은 곧 아내의 빛이 된다. 그 ‘하나의 경제적 단위‘의 대표자는 능력과 상관없이 무조건 남성이므로, 아내는 불완전한 경제 행위자로 취급된다. 내가 이 빚은 법적으로 갚을 필요가 없다고말하자, 그녀는 매우 기뻐했지만 어떻게 동네 사람들을 설득할까를걱정했다. 여성을 아내이기 전에 개인으로 간주한다면, 그녀는 남편의 빛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아내로서 여성은 재산권이 없고 이는그녀가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방해한다. - P219

이처럼 아내는 탈출하더라도 남편이 추적하여 자신을 살해할 것이라고 믿는데, 이는 실제 사실이다. 아내가 ‘폭력을 피해 탈출한것‘이 남편에게는 ‘내게서 도망간 것‘이므로 이때 남편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남편이 아내를 살해하는 경우는 여성이 폭력을 피해서가출했을 때 가장 빈발한다. 이를테면 구타를 피해 가출한 후 대학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아내를 공무원인 남편이 학교로 찾아와 많은사람이 보는 앞에서 칼로 찔러 살해하는 식이다. 오랜 기간 폭력에 시달린 아내는 남편을 실제의 능력과 힘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남편에게 불가능이란 없다고 생각한다. - P222

법정, 경찰서, 가족 앞에서 남편은 폭력 행위를 사과함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가족의 유지를 위해 노력했는가를 증명한다. 그러한노력을 아내가 인정하지 않으면 남편의 잘못과는 상관없이 ‘가정파탄‘의 책임은 여성에게 돌아온다. 남편의 폭력 행위가 가족 유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용서 여부가 가족 유지를 결정한다. 이는 ‘아내 폭력‘ 정도로는 가정이 해체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 즉 아내가 맞고 사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을 뜻한다. 가족의 유지를 위해 남편에게 요구되는 책임 수준은 ‘때리고 사과하는 것이지만, 아내에게 요구되는 책임 수준은 ‘맞고 남편을 받아들이는 것‘
이다. - P234

아내가 겪은 죽음에 가까운 폭력과 성적 학대 경험은 가족을 해체하지 못했지만 남편의 외도는 가족을 간단하게 해체하고 재구성하였다. 이들은 오랫동안 집에는 남편이 있어야 한다고 믿으며 극한의 폭력을 견뎌왔지만, 타의에 의해 남편 없는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 경험은 이제까지의 걱정과는 달리 너무 행복한 것이었고 이를 근거로 하여 이혼 이후의 생활을 즐거운 것으로 상상할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편의 상황에 의해서탈출하게 되는 극적인 경우는 ‘남편을 위한‘ 탈출이다. ‘정상적‘ 가족 생활에 대한 추구와 좋은 아내 역할에 집착하는 여성은 대개 탈출하기 어렵지만, 폭력탈출조차도 아내 역할이라고 생각하면 탈출할 수 있다. - P241

‘아내 폭력‘에 대한 강력한 가해자 중심 담론은, 피해자로 하여금 폭력 탈출조차 ‘남편을 위해 내가 사라지겠다‘로 재현하기에 이른다. 그녀의 태도는 자신이 먼저 이혼을 제기했으므로, ‘가정을 파괴한 이기적인 여자‘라는 비난을 방어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실제생각 그대로일 수도 있다. 남편을 ‘위해‘ 이혼하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그녀는 남편을 구타자로 만들었다는 죄의식과 자기 혐오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녀의 이혼 노력은 폭력의 원인제공자‘로서 결자해지같은 것이다.
와물론 이렇게라도 폭력에서 벗어난다면 다행이지만, 이혼은 폭력탈출의 최종 해결점이 아니라 하나의 계기일 뿐이다. 그것은 그녀자신을 위해 준비된 이혼이 아니다. 이러한 태도로 살아가는 여성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또 다른 폭력에 직면하기 쉽고 자립을 위한사회적, 심리적 힘을 지니기 어렵다. - P242

여성의 탈출 의지는 아내, 어머니 역할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에 회귀함으로써 폭력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여성의 가족 내 성역할 수행이여성의 인권보다 우선시되면서 어머니, 아내로서의 ‘도리‘는 인간의기본권으로서 ‘맞지 않을 권리‘를 유보하거나 사소화하였다. 또한피해 여성의 공포심, 자기 방어, 저항 행동은 한국 사회 전반의 성별규범에 의해 인정되지 않았다. 결국 현재의 가족 제도 아래서는 남편의 폭력에 대한 아내의 순종과 저항 모두가 ‘아내 폭력‘을 재생산하였다. - P247

폭력당하는 아내가 가정에서 어머니, 아내이기 이전에 사회적 개인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이 글의 요지는, 모든 문제는 인권 문제라는 식의 당위적 선언이 아니다. ‘아내 폭력‘이 인권의 문제로 인식되려면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 사회의 기본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가 불가피하다. 국가주의, 민족주의, 가족주의 등 남성 중심의 공동체적 질서가 강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개인성, 시민성을 획득하는 문제는 곧 가족에 대한 공격으로 해석되어 왔다.
‘아내 폭력‘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필연적으로 가족에 대한 국가의개입과 중재가 요구된다. - P249

‘아내 폭력‘을 비롯한 모든 가정 폭력 현상은 가족의 성격과 기능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동성애 커플의 가정 폭력과 남편으로부터 구타당하는 여성이든 그렇지 않은 여성이든 많은 어머니들이 자녀를 구타한다는 사실은 여성주의자에게 폭력과 권력, 가족과 친밀성, 성(sexuality)과 성별(gender), 성별 제도와 결합한 다른 사회적 모순과의 관계에 대해 복잡한 질문을 던진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이 글의 초점은 가족이라기보다 폭력이다. 즉 본 연구가 밝히고자 한 것은 가족이 해체되어야 하는 이유가아니라, ‘아내 폭력‘이 재생산되는 구조에 관한 것이었다. 이 연구는가족 관계에서는 폭력이 발생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족에서는 폭력이 발생할 리가 없다‘는 담론에 대한비판이다. - P250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글은 ‘아내 폭력‘ 문제의 극히 일부분만을조망한 것이다. 특히 피해 여성의 경험을 성 역할에 초점을 맞춰 분석한 것이므로 아내의 탈출 모색을 불가능 혹은 가능하게 하는 기제중성역할 외의 다른 사회적 모순은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 피해 여성들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사회적, 경제적 조건과 기회는각자 다를 것이다. 폭력당하는 여성들이 삶에서 겪는 모든 문제의원인이 폭력 사건은 아니며, ‘피해 여성‘이 그들의 유일한 정체성도아닐 것이다. 피해 여성을 곤경에 빠뜨리는 현실은 다양한 사회적모순들이 중첩된 결과이다. - P25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