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아내 폭력‘은 강간, 성적 학대, 의처증, 남편의 경제적 통제 혹은 무능력, 집요한 협박, 알코올 남용, 시집 갈등, 유기적 성격의 외도, 폭언, 잠을 재우지 않음 따위의 언어적, 심리적, 육체적, 경제적, 성적, 정서적 폭력을 동반하기 때문에 ‘구타‘나 ‘매‘는 여성의폭력 경험을 협소한 의미로 축소하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는 아내를함부로 대하는 행동이 일반화되어 있기 때문에, 언어 폭력과 같은 ‘사소한‘ 폭력은 폭력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본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은 곧 폭력을 일상화, 정상화시키게 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여성의 경험에 근거하여 폭력의 개념을 폭넓게 정의한다는 의미에서 아내에 대한 폭력, 즉 ‘아내 폭력 ‘ 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 P45
면접 과정에서 나와 증언자의 이해(利害)가 가장 불일치하는 지점은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증언자가 말하기 두려워하거나 거부할때였다. 연구자의 관심과 증언자의 인권 문제는 늘 긴장 관계에 있다. 그들이 말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대체로 자신을 보호하는 것과관련이 있다. "나는 구타당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 편인데, 왜냐하면 실제로 그렇게 많은 폭력을 견디어냈다고 생각하면 자존감이사라지기 때문입니다." - P54
물론 모든 여성 폭력의 희생자가 저절로 생존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여성 폭력은 분명 정치적 사진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개인적인경험이다. (개인의 상처가 (정치적 사건이 되기 위해서는 정치적 투쟁이 매개되어야 한다. 고통을 겪었다고 누구나 현자가 되는 것은아니듯 희생자가 생존자가 되기 위해서는 치열하고 고통스런 자기극복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어떤 의미에서 그 과정은 지극히 개인적인 작업이다. 여성주의 연구 과정의 의미는, 이 과정에 연구자가동참하여 그녀가 자신의 경험을 ‘자기 위주로 해석할 수 있도록 힘을 주는 것일 터이다. - P56
이처럼 인간의 고통 경험은 평등하지 않다. 어떤 고통의 경험자들은 존경받지만, 어떤 고통의 경험자들은 ‘더럽다‘고 추방되고 낙인찍힌다. ‘아내 폭력‘은 인정되지 않는 고통, 믿을 수 없는 고통이다. ‘정치적‘이고 공적인 장에서 인정되는 고통과 달리 재현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지지 못한 타자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는 폭력당하는 여성들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 담론구조도 없고 청자들의 공동체도 없다. 그들의 고통은 가족의 문제가 되거나, 자녀의 고통이 강조될 때만 부수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그래서 고통을 인내하는 여성들의 능력은 지나치게 과장되어 왔고, 그들은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는 것 자체에 죄의식을 느낀다. ("나는왜 참을성이 없을까? ) - P58
여성이 폭력당한 경험이 수치심과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녀가 ‘맞을 짓‘을 했거나 늦은 밤거리를 혼자 걸어다녀서가 아니다. 그것은 남성 중심 사회가 강요하고, 희망하는 해석 체계의 산물일뿐이다. 이처럼 폭력당한 피해 여성의 고통은 개인적인 것이자) 사 - P61
회 구조의 결과이기 때문에 정치적 노력에 의해 얼마든지 재해석되고 극복될 수 있다. 일례로 한국 사회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여성 운동의 성장이 개인의 고통을 어떻게 정치적 경험으로, 역사로만드는지를 잘 보여준다. 증언자 중 몇몇은 자기와 비슷한 경험을한 여성들과 만나서 ‘계모임 같은 것‘을 하고 싶다고 했다.(여성 운동단체에는 폭력당한 여성들의 자조모임이 있다.) 이렇게 자신들의 고통을 공유하고 ‘진실‘로 믿어주는 공동체를 만들려는 노력에서부터그들의 ‘개인적‘이고 ‘사소했던 고통은 정치적인 문제가 되기 시작한다. - P62
‘아내 폭력‘은 명백히 성별화된 폭력인데도 성별의 문제는 가장쉽게 간과된다. 가정 폭력적 접근 방식은 왜 언제나 때리는 사람은 ‘남성‘이고 맞는 사람은 ‘여성‘인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남편이 스트레스 때문에 때린다면 왜 직장 상사나 길거리에 다니는 사람은 안때리는지, 술 때문에 때린다면 왜 아내들은 술을 먹고도 남편을 때리지 않는지, 분노 처리 기술이 미숙하기 때문이라면 왜 그 분노를언제나 ‘집안에서만 표출하는지, 폭력 행위가 손실(행사상 제재, 이혼)보다 보상(분노 발산, 타인을 통제)이 크기 때문에 사용된다면 왜여성들은 이 방법을 쓰지 않는지, 종교와 성격 차이 같은 부부 갈등때문에 때린다면 왜 남성들은 이혼한 이후에도 전 부인을 때리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 P91
‘아내 폭력‘처럼 남성 중심적(가해자 중심적) 시각이 가시적이고 체계적인 영역도 없다. 사회는 남성의 폭력행동자체에 대한 정치적인 분석과 비판보다는 남성이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이유에 초점을 둔다. 남편은 아내를 때릴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기 때문에 언제나 ‘아내 폭력‘ 현상은 성차별적으로 해석된다. 피해 여성과 가해 남성의 경험이 해석, 재현, 담론화되는 데 이미 그출발선이 다른 것이다. ‘아내 폭력‘은 현재의 가족 제도와 사회 구조를 지탱하고 있는 성별 관계에 의한 여성 문제들 간의 연관성을이해하지 않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아내 폭력‘에 대한 질문은 (안때릴 수도 있는데) ‘왜 때리는가보다는, ‘아내를 때릴 수 있는 권력은어디에서 나오는가‘로 전환되어야 한다. - P92
이처럼 ‘아내 폭력‘의 현실은 계급, 인종, 직업, 학력 같은 여성들간의 차이가 ‘아내 폭력‘의 발생과 대응에 별로 의미를 지니지 못함을 보여준다. 가부장제의 기본 성격은 여성의 정체성, 지위, 역할(기능)을 남성과의 관계로부터 규정하는 것인데, 그러한 과정이 ‘자연스럽게‘ 실천되는 장소가 바로 가족이기 때문이다. 가족 제도는 여성을 개별적 인격체가 아닌 (남성을 위해 존재하는 동질적, 비역사적, 자연적 집단으로 정체화한다. 가족은 여성을 ‘진정한 여성‘으로만들고, 남성을 ‘진정한 남성‘으로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장치이다. 가족은 특히 사적인 존재로 간주되는 여성에게는 더욱 ‘합당한‘ 정체성을 부여한다. - P99
가부장제 사회의 주체로서 여성과 남성은 모두 가족 내에서 자신의 성 역할에 충실함으로써 사회가 부여한 정체성을 유지하려 하며, 또 (남녀가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로부터 권력을 얻는다. 특히 여성은 성별 분업 원리에 따라 가족 내 지위가 곧 사회에서의 지위가되기 때문에, 피해 여성들은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 앞에서도 아내/어머니로서 성 역할을 좀처럼 포기하지 않게 된다. ‘아내 폭력‘은 아내가 폭력을 유발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가 성 역할에 충실하고 집착함으로써 지속된다. ‘아내 폭력‘은 가부장제의 기본 성격과 맥락을 같이 하기 때문에 성매매(매매춘)와 더불어 가부장제프로젝트의 최후 보루가 되고 있다. - P100
일상적인 가족 생활은 남성과 여성이 남편과 아내가 되어 각자 성별화된 역할(gender role))에 충실함으로써 유지된다. 개인인 남성과 여성은 가족 제도를 통해 남편과 아내라는 지위를 얻게 되고, 그 지위는 남성과 여성에게 서로 다른 내용의 노동과 규범을 요구한다. 결혼 생활을 구성하는 부부 간의 성(sexuality), 여성의 보살핌 노동과 가사 노동, 남성의 임금 노동, 가정의 대표자로서 남성가장 등 가족 생활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은 사회에 확산되어(가정은 사회의 기본적 단위) 사회적 성별 관계 전반을 규정한다. 이처럼결혼과 가족은 각 개인들에게 성별 정체성(gender identity)을 확고하게 부여하는 핵심적인 사회 장치이자 성별 관계를 생산하는 공장(gender factory)과 같다 - P103
폭력 남편들은 ‘정상적‘인 사람들이다. 아내들은 남편이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경받는 별문제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대응하기가 더 어렵다고 호소한다. 피해 여성들은 남편을 ‘아이큐가 높고 머리 회전이 빠르다. 치밀하다. 주도면밀하다. 논리정연하다. 형사 출신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행동과 판단력이 빠르고 예민하다. 잔머리가 천재다. 자존심과 자제력이 뛰어나다. 차분하고 생각이많다. 집념이 강한 엘리트, 지적(知的)이다. 용의주도하다, 인격적이고 부드러운 사람, 매사에 계획적이고 꼼꼼하다‘고 표현했다. 이는 폭력 남편들이 참을성이 없고 충동적이며 자기통제력이 부족하고 스트레스 관리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라는 기존의 ‘아내 폭력‘ 연구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기존 연구들이 이미 전제한 시각에 따라 자료를 구성하기 때문에 폭력 남편을 비정상적인 사람으로간주하는 것이다. 커스티 일로는 이 문제를 ‘보는 대로 얻는다 (whatyou see is what you get)‘라고 표현했다. - P106
한국 사회에서 가사 노동은 여성의 임금 노동 여부에 상관없이 여성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의무로 간주된다. 가사 노동은 반드시 여성에 의해 수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가사 노동과 비슷한 성격의 일을가정이나 직장에서 남성이 하는 것은 남성성의 수치이자 훼손으로여겨진다. 남성들이 결혼하는 가장 실질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가사노동 담당자를 구하기 위해서이다. 청소, 요리, 세탁, 남편과 자녀 돌보기, 시집에 대한 봉사 따위의 가사 노동은 가족 생활의 유지와 지속을 위한 여성의 가정 내 역할 중에서 아주 핵심적인 것이다. - P115
모두 폭력의 고의성 여부와 심각성 정도로 정의한 것인데 이는 ‘아내 폭력‘의 성격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아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내 폭력‘의 기본 성격과 작동기제는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의 역할 구분이다. 성 역할 구분은 ‘사소한‘ 폭력에서 범죄로 명명될 수 있는 극단적인 폭력에까지 모두 작동한다. ‘부부 싸움‘이나 가부장적 테러리즘은 결국 같은 사회 구조와 논리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이는 ‘아내 폭력‘이 부부 관계의 극단적 예외적, 일탈적 사건이 아니라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일상적인 ‘정상‘ 규범임을 말해준다. ‘맞을 짓‘이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성과 남성이 가족 제도를 통해아내와 남편이 되었을 때만 발효된다. 현재의 가족 제도에서 ‘맞을짓‘은 남녀의 역할 규범 그 자체에서 발생한다.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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