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의 시작 -성 역할, 가족, 폭력
남편은 아내의 뺨을 세차게 때렸다. 딱 한 대. 그러자 아내는 몇시간을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렀다. 고성의 욕설과 저주가 멈추지않는다. 남편과 자녀들은 귀를 막고 흩어진다. 여성학 시간 강사 시절, 한 여학생이 내게 질문했다. "선생님, 이게 우리 집이거든요. 지금 누가 가해자예요? 소리 지르는 것은 폭력이 아닌가요? 저는 솔직히 엄마가 더 폭력적이라고 생각해요." 가정 폭력이 화제에 오를 때마다 매번 등장하는 문제제기다. 여성에 대한 다양한 폭력, 이를테면 사티 (sati, 아내 순장)나 스토닝(stoning, 돌로 여성을 살해함), 신부(新婦) 불태우기, 다우리(dowry, 지참금 살인), 명예 살인(honor killing), 음핵절개, 황산테러 들과 달리 가정 폭력은 남편의 폭력 못지않게 아내의 협상과 저항도 계속되기 때문에 피해자의 정당방위도 폭력이라고 인식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국 여성 대부분은 평생에 한두 번 이상 배우자나 연인으로부터폭력 피해를 경험한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가정 폭력(정확하게는 ‘아내에 대한 폭력‘)의 경우, 그중 절반 이상은 종종‘, 3분의 1은 반복적규칙적, 일상적으로 발생한다고 추정된다. 그렇게 버티던 여성 중에어느 정도가 남편의 ‘과실‘로 사망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대개 자살이나 사고사, 실종, 자연사로 처리된다. 남성에게 맞아 죽기 위해태어난 여성은 없다. 하지만 매일 어딘가에서는 가정에서 ‘강남역사건‘이 일어난다.
폭력이 발생하지 않더라도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보다 더 근본적인 권력 관계라는 인식은, 현실의 심각함에 비추어 보면 너무나 얇고 낮고 가볍다. 우리의 일상은 젠더로부터 파생하는 정치의 연속이다. 가부장제는 공기일지도 모른다. 남성의 폭력과 권력이 "남녀상열지사", "격렬한 로맨스", "규범에 저항하는 순수한 사랑으로 읽히는 사회에서, 여성주의를 ‘남혐‘으로오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남혐‘은 나에게는 너무나 놀라운 언어였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데, 나는 "당신의 글이어떻게 읽히면 좋겠는가."라는 질문을 좋아한다. 이 책의 소재는 가정 폭력이지만 나의 궁극적인 관심은 성 역할의 비대칭성이다. 성역할 규범(norm, 남성성/여성성, 남성다움/여성다움)은 자연스러운 일상 문화에서부터 불법 행위까지 다양하다. 여성의 경우, 가부장제규범을 스스로 초과달성하려는 이들도 있고 강요받고 고통받는 이들도 있다. 같은 행동이라도 남성의 이해에 부합하느냐에 따라 보상과 처벌이 다르다.
성 역할이라는 중립적이고 기능적인 단어 속에 감추어진 역할론은 모든 위계적 사회 분업론의 모델이 되어 왔다. 강약, 우열, 보편과 특수 등등 모든 권력 관계의 법칙은 젠더 메타포(gendermetaphor) 없이 작동하지 않는다. 남성성과 여성성 개념을 정확히이해하고 이 개념을 해체하는 것은 여성주의 인식의 기초가 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가장 쉬운‘ 여성학 입문서, 인문학 교양서로읽히기를 바란다. 가정 폭력과 성매매는 가부장제의 매트릭스(母型)이기 때문에, 이에 관한 책들 대부분은 여성주의적 시각을 훈련하는데 필수적이다. 더불어 기존의 통념과는 다른 창의적 사고와 다른목소리‘를 획득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나는 대학 졸업 후 우연한 기회에 가정폭력 피해 여성을 돕는 인권 단체 ‘여성의전화‘에서 상근자로 일할 때부터 꼭 이 여성들의 목소리를 전해야겠다는 ‘사명감‘으로 살았다. 1980년대, 극도의 남성중심 사회였던 학창 시절 마르크스주의자이자 ‘명예 남성‘이었던 내가 여성주의자로 ‘변절‘하는 데는 일 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다행히나는 보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여성학 공부는 평생에 걸친엄마와의 애증, 사춘기 이후 나를 지배했던 ‘이름 모를 병‘이었던 우울과 분노를 지식으로 전환해준 세례(洗禮)였다.
모든 것이 배움의 과정이었다. 여성주의자는 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목격한 사람, 그 고통에 공감하고자 하는 사람, 피해자/운동가/연구자의 차이와 위계를 넘어 ‘당사자(actor)‘로서 나를알아 가는 과정이다. 이 책의 사례 중에는 내 주변의 여성들도 있다. 나는 이 책을 쓰면서 한 시간 쓰고, 한 시간 울고, 한 시간 자는 상태를 반복했다. 음식은 거의 먹지 못했다. 책상을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아 초콜릿과 우유를 사다놓고 책상 앞에 계속 앉아 있었다. 글을 쓰는 도중에 피해 여성에게 연락이 오면 변호사와 경찰을 만나고, 아이와 함께 폭력 남편을 탈출하려는 여성을 돕기 위해 아이의 담임선생님을 설득하러 먼 곳을 돌아다녔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피해 여성에 대한 동일시와 거리 두기 사이에서 빚어지는 방황과 죄의식이었고, 하나는 여성주의자들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과 사회로부터 받은 상처였다. 한국 사회에서 가정 폭력, 성폭력, 성매매에 대한 글은 ‘학문‘과는 거리가 먼 선정적인 글로 간주되기 쉽다. 나는 이 말도 안 되는 폭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언제나 자기 검열로 노이로제 상태였고 지금도 많이 다르지 않다. 내가 분명히 경험하고 목격한 것을 스스로 믿을 수 없었고 나 자신이 분열되는 것 같았다. 가정 폭력 같은 사회의 ‘어두운‘ 면을 모르는 것이, 마치 순수한 학자의 징표처럼 여겨지는
사회에서 ‘험한 꼴‘을 목격하고 그것을 ‘자료‘ 삼아 외울 정도로 읽고또 읽는 경험자인 나는 누구인가 페미니즘은 여성학인가 여성 운동인가, 여성주의인가. 심지어 남녀를 불문하고 내 글은 이론, 지식, 학문이 아니라 르포, 사례집, "여성 잡지 기사 같다."고 말하는 이들도있었다. 특히, 나는 "과장 아니냐"는 말에 가장 민감하게 분노하고좌절했다. 물론 그들의 반응은 무지의 산물이지만, 이 문제는 폭력과 고통을 연구하고 싶은 내가 평생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프리모 레비는 평생 ‘경험한 자아‘와 ‘말하는 자아‘ 사이의 간극에시달렸다. 홀로코스트 피해자가 그 비극을 경험하지 않은 ‘특권‘을가진 자에게 베풀어야 하는 배려와 관용 나는 이 부정의를 참을 수없다. 나는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고통, 폭력, 슬픔이 연구되기 어려운 이유라고 생각한다. 고통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고통이 언어화될 때만이 우리는 위로받을 수 있다. 내 고통이 역사의 산물이라는인식만이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그런 점에서 학문이란 무엇인가, 지식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다.
시대를 초월하여 대개 TV에서 방영되는 가정 폭력 추방 공익 광고는 가정 폭력에 대한 한국 사회의 접근 방식을 매우 상징적으로보여준다. 많은 광고가 폭력 가정에서 자란 남녀 어린이가 폭력 부부의 성 역할을 그대로 학습한다는 내용을 그리면서, 남편의 폭력이 아동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런 광고가 가장 우려하는 가정 폭력 피해는 남편에게 직접 폭력을 당하는여성이 아니라 ‘부부 싸움‘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어린 자녀이다. 물론 남편이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할 때 자녀 역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피해자임은 분명하지만, 광고의 시작과 끝에 ‘여성 인권 캠페인‘이라고 강조하는 문구가 나와도 그 광고는 여성 인권 캠페인이라기보다는 아동 인권 캠페인에 가깝다. - P21
만일 어떤 사람이 가정이 아닌 길거리에서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당했다면, 당연히 가해자를 처벌해야지 치료하거나상담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즉 ‘아내 폭력‘ 이 전쟁, 고문, 조직 폭력 같은 일반적인 폭력과 다른 것은 그것이단지 ‘가정‘에서 ‘남성이 여성에게‘ 행사한다는 점이고 그로 인해 오랫동안 은폐되었거나 지속된 점이라고 볼 수 있는데 바로 이 부분을 지적하고 비판하지 않는다면 ‘아내 폭력‘을 근절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히려 성(차)별 제도에 의한 가족내 남녀의 차별적 지위와 그에 따른 성 역할 규범은 그대로 둔 채폭력만을 방지하는 기존의 가족 중심적 접근이야말로 ‘실질적인‘ 대책이 되기 어렵다고 본다. - P31
1. 가정 내 남편과 아내의 역할과 관련하여 ‘맞을 짓‘이 어떻게 구성되는가? ‘아내 폭력‘의 근본 원인과 발생 메커니즘은 무엇인가? 2. 피해 여성과 가해 남성이 자신을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가족내 성별 정체성인 아내/남편으로 규정할 때 폭력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폭력을 폭력이 아닌 다른 것으로 인식할 때 그것은 ‘아내 폭력‘ 대응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며 그렇게 인식하게 하는 사회문화적 맥락은 무엇일까? 3. 여성에 대한 가족 내 성 역할 규범은 피해 여성의 탈출을 비롯한 다양한 대응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가? 이를 통해 현재의 가족제도 아래서 폭력당하는 아내의 순종 혹은 저항이 폭력을 예방하는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아보고, 피해 여성이 폭력 가정을 벗어나는 데 필요한 사회적 조건은 무엇인지 모색하고자 한다. - P33
부부 관계에서 신체적 폭력이 없는 언어적, 정신적 폭력은 발생할 수 있어도 언어적 폭력이 없는 신체적 폭력은 없다. 이 연구의증언자들은 특히 남편의 언어 폭력에 대한 고통을 호소했다. 언어폭력은 육체적 폭력만큼 아내를 절망케 하는데, 대체로 여성의 성(sexuality)과 관련된 것이 많고 매우 여성 혐오적이다. ‘구타할 때, 남편이 화났을 때 주로 폭언을 하느냐‘는 나의 질문에 대부분의 증언자들은 그것이 일상적인 부부간의 대화라고 말했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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