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
이산하


누군가 인생의 바닥까지 내려가봤다고 말할 때마다
누군가 인생의 바닥의 바닥을 치고 올라왔다고 말할 때마다
오래전 두 번이나 투신자살에 실패했다가
수중 인명구조원으로 변신한 어느 목수의 얘기가 떠오른다.
어떤 이유로든 사람들이 강에 투신자살하면거의 ‘99대 1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시신의 99%는 강물 속으로 가라앉다가 그대로 흘러가버리고
1%는 투신한 자리에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다는 것이다.
흘러간 시신은 강의 바닥까지 가라앉지 못한 시신이고
떠오른 시신은 강의 바닥까지 완전히 가라앉은 시신이란다.
물론 잠시 머문 뒤 떠내려가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시신들은 한결같이
반쯤 눈 감은 채 미소를 머금어 마치 불상처럼 보인다고 했다.
어떤 생이든 막다른 벼랑에서 떨어져 바닥에 이르면
그곳이 정말 더이상 떨어질 수 없는 바닥의 바닥이라면
관짝을 부수고 나온 부처의 맨발처럼 오히려 고요해질지도모른다.

고요해지면 더이상 두렵거나 더이상 취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난 바닥을 쳤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숨이 멎는다.
물론 욕망과 탐욕의 덩어리가 되어 바닥에 이르기도 전에흘러간들
바닥을 치고 다시 떠올라 잠시 세상을 애도하고 흘러간들
시신을 염하고 운구하는 강물의 숨결은 한결같을 것이다.
언젠가 내 몸도 바닥에 이르지 못한 채 흘러가겠지만
언제나 가벼운 생일수록 바닥을 쳤다고 더욱 강조하겠지만
이제는 강물의 색깔만 봐도 수심을 안다는 목수의 말만큼은
바닥의 바닥을 치고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을 믿는다.


시집[악의 평범성]중에서


[새의 시선]을 마치고 가을 광교산에 올라갔다. 책이 주는 먹먹함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던 거다. 여름내 멀리했던 산이 무거워진 다리를 밀어낸다. 땀을 쏟으며 다리를 뻗어나가며 방금 빠져나온 소설을 생각한다. 이 땅의 현대사에서 사라진 사람들이 소환되고, 세월호, 용산, 어린이집 수련회 화재로 아이를 잃는 피해자들....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설로만 생각할 수가 없다.
이 이야기들이 그럴듯한 이야기에 불과하다면 좋겠다.
그렇게 눈 감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대의 소설은
이 시대의 작가는 이런 글을 써내야한다.
지겹도록, 써내야 할 책무들이 있다.

이산하시인의 시들이 맴돈다.
‘바닥의 바닥을 치고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영혼들을 생각한다.

세상은 아름다운 가을이다.
이 아름다움이 거저 온 것이 아니라는...
그 흔한 새 한마리 만나지 못하고,
새소리 한 번 듣지 못하고 산을 내려온다.
무력하다.
부끄럽다.

‘그는 권력과 폭력을 비판하거나 혐오하기보다, 사유한다.‘
정희진은 옳았다

˝배우 자신도 그랬다지만 나 역시 영화를 보고 ‘만 가지 슬픔‘ (이라는 책이 있다)이 쏟아졌다. 인류는 폭력 피해자 가족의 이런 ‘희망과 안도‘를 개념화한 적이 있는가? 나의 무식 탓이기를 바란다. 이런 심정은 프리모 레비(Primo Levi)의 책이나 로만 폴란스키(RomanPolanski)의 영화 <죽음과 소녀 (Death and the Maiden)> 같은 ‘전형적인‘ 고문의 서사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한국 소설 중 나만의 3부작‘이 있다. <슬픔의 노래> <얼음의 집> <새>.
모두 한 작가의 작품이다. 우연이다. 우리 사회에서 인생은 생잔(生殘, 살아남기‘), 권력은 폭력, 슬픔은 실패를 의미한다. 이런 현실에서 폭력과 권력 탐구를 짊어지는 작가는 흔치 않다. 어쨌든 정찬같은 ‘캐릭터‘의 지식인이 많아야 한다고 절실히 주장한다. 내가 만일 대통령 후보라면 이런 공약을 하겠다. ˝치열하게 생각하는 인간이 대우받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내가 이해하는 ‘정치신학자‘ 정찬의 주제는, 권력과 폭력 앞에 선 인간의 선택이다. 가해자든 피해자든 그들의 모습은 작가를 통해 예술과 신학의 이유가 된다. 그는 권력과 폭력을 비판하거나 혐오하기보다, 사유한다. 그의 작품은 ‘남영동‘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윤리학이다.˝ [정희진처럼 읽기]중에서 p149, 150


새들의 길


운동화 한 켤레가 방파제 위에 놓여있다. 봄햇살을 받아눈처럼 희게 빛난다. 그녀의 눈에는 한 마리 새처럼 보인다.
운동화 옆에 비닐에 싸인 옷이 있고, 그 위에는 부모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접착테이프로 붙여져 있다.
- 사랑하는 내 아들, 넌 지금 어디 있니? 어찌 그리 못 오고 있어. 새 신발을 신어보고, 옷도 입어봐야지. 너의 여행이너무 길어. 어서 빨리 돌아와. 오늘은 약속하는 거지?
그녀의 눈자위가 금방 붉어진다. 저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우리 종우와는 얼마나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걸까? 어젯밤 꿈이 떠오른다. 종우가 바다 밑 뻘을 헤치고 무언가를찾고 있었다. 얼굴 표정과 몸짓이 간절했다.  - P111

 종우야, 깊은 바다 밑에서 무얼 그토록 애타게 찾고 있니? 함께 찾고 싶었지만 종우에게로 갈 수 없었다. 몸이 무언가에 묶여 있는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종우의 발이 보였다.
맨발이었다. 몸은 진흙투성인데 발은 하였다. 하얀 발에 눈이시렸다. 아! 그녀의 입에서 탄성이 흘렀다. 종우가 찾는 것이무엇인지 깨달은 것이다. 운동화였다. - P112

"그럼 신고 가. 외삼촌이 너에게 주는 거니까."
"가슴 깊은 곳에서 슬픔이 일렁이고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묻어둔 슬픔이었다.
"외삼촌이 주시는 거라면 받아야지."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종우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이 운동화 내 거네."
"그래, 외삼촌 운동화는 이제 우리 종우 거야."
오빠의 얼굴이 떠올랐다. 해맑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나이가 들어 얼굴이 쭈글쭈글해졌는데, 오빠의 얼굴은 여전히 스물다섯 살 청년이었다. 스물다섯 살 청년을 그리워하며 보낸 세월이 아득했다. 사무친 아득함이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 P118

진도 바닷가에서 지낸 한 달여 동안 잠을 제대로 잔 적이없다. 간신히 잠이 들면 악몽에 시달렸다. 끔찍하게 변해버린종우가 꿈에 자주 나타났다. 손톱이 다 빠진 손으로 무언가를긁고 있었다. 눈동자가 없어 휑하니 뚫린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입안에 피를 가득 머금은 채 누군가를 소리쳐 부르고 있었다. 너무 끔찍해 잠드는 것이 무서웠다.
배가 침몰하던 4월 16일 아침 그녀는 잠 속에 빠져 있었다.
마트 일이 끝난 것은 새벽 1시 40분이었다. 매출 금액과 받은 - P118

돈이 차이가 나 식은땀을 흘렸다. 적은 액수가 아니었지만 그녀 돈으로 메웠다. 팀장을 면담하고 사유서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면 끔찍했다. 집에 오니 2시 반이었다. 3시 넘어 이불을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오랫동안 뒤척이다 간신히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난 것은 성태의 전화 때문이었다. 잠결에전화를 받았다. 9시 40분경이었다. - P119

오후 2시에 구조된 승객이 368명이라고 발표한 정부는 4시30분에는 164명으로 수정 발표했다. 믿기지 않았다. 종우가구조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타들어갔다.
오후 5시 10분에 시작된 행정안전부 브리핑에서 대통령은
"학생들이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다는데, 그렇게 찾기 어려운가요?"라고 물었다고 했다. 학생들 대다수가 배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 뉴스로 알려진 지 한참 지난 뒤였다. 억장이 무너졌다. 옆에 앉은 이에게 무어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말하는 법을 잊은 것 같았다. - P122

"고래의 눈을 어떻게 보니?"
"컴퓨터 스크린에서는 볼 수 있어요."
"아, 그렇겠네."
"저도 봤는데, 눈동자가 너무 깊어요."
"눈동자가 어떻게 깊어?"
"제가 보일 만큼요."
종우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슬픈 얼굴 같기도 하고, 화난얼굴 같기도 하다. 어쩌면 자신도 명호 어머니처럼 종우에게정말 중요한 것은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종우가 고래를 좋아하게 된 건 고래 눈동자가 깊기 때문이라는 거야?"
"맞아요. 종우는 고래 눈동자 속에 다른 세상이 있다고 했어요. 여기와는 다른 세상 말이에요." - P131

"귀신고래가 1년 동안 여행하는 거리가 얼만지 아세요?"
"몰라."
"2만 킬로미터예요. 귀신고래의 수명은 40년 남짓이에요.
40년 동안 귀신고래가 여행하는 거리는 지구에서 달까지의거리예요. 귀신고래에게 북극 여행은 아주 가벼운 여행인 거지요."
"하지만 종우는 고래가 아니잖니?"
"종우는 세상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고래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어요."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온다. 종우가 부르는 소리를듣지 못하고・・・・・・ 너는 들었는데, 난 듣지 못하고・・・・・・ 그동안그녀는 종우와 통화했을 경우의 상황을 수없이 그렸다. 종우에게 갑판으로 올라가라고 말했을 것 같았다. 그 생각을 하면견디기 힘들었다.
132배 안에 있는 친구들이 부러워요."
"왜 그런 생각을 해?"
"많은 사람이 배를 탄 친구들을 생각하고………… 또・・・・・・ 보고 - P132

싶어 하잖아요."
"그건.......
목에 무엇이 턱 걸려 있는 것 같아 말을 할 수 없다.
"종우와 함께 북극에 가는 것이 꿈이었어요. 그 생각만 하면 힘이 절로 났어요. 이제 제 꿈은 산산조각이 났어요. 전 종우와 함께 배를 탔어야 했어요. 정말 탔어야 했어요."
성태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있다. - P133

지나자 경찰서를 찾았다. 치안 공무원들은 몹시 곤혹스러워했다. 담당이 아니라고 서로 미루었다. 민원실로, 수사과로,
보안과로, 정보과로 돌아다니다 수색원 서류 하나만 달랑 제출하고 쫓겨나다시피 나왔다. 그 후 경찰서에서는 어떤 연락도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오빠 주변 사람들은 물론 오빠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사람이면 수소문해서 만났다. 하지만 만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그들의 얼굴은 어두워져갔다. 어머니는 땅을 파헤쳐서라도 오빠를 찾고야 말겠다고 혼잣말하듯 중얼거리곤 했다. - P136

그녀를 바라보는 오빠의 눈은 슬펐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오빠는 간혹 그녀에게 말을 건네곤 했는데,
그녀에게 닿기도 전에 공중으로 흩어졌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새가 되고 싶었다. 새라면 공중으로 흩어지는 오빠의 말을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오빠의 말은 공중으로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들의 길을 따라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의 서른번째 생일을 맞은 그해 늦봄, 법무사인 지인의권유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법원을 찾았다. 법원행정처 공무원은 아드님이 행불돼버렸으니 보상금 받으면 부자 되겠소,
하고 말했다. 그날 이후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는 한 달도 채못 되어 세상을 떠났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던 아버지는 이듬해 겨울 어머니의 뒤를 따랐다. 아버지 시신은 공장 숙직실에서 발견되었다. 소주병들이 뒹구는 방 안에서 앉은 채로 죽어 있었다. - P137

오랜 세월 동안 오빠가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희망은 오빠를 대신하는 생명체였다. 그녀가 세상의 끔찍함을견딘 것은 희망이라는 생명체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빠의 운동화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다. 생명체의 표징이었다.
그것은 버릴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럼에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빠를 보내야 했다. 언젠가부터 오빠를 가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에게 갇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생각은 종우가 커갈수록 짙어졌다. 그녀가 오빠운동화를 새로 산 것은 종우를 통해 오빠를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빠의 오래된 운동화는 너무 낡아 신을 수 없었다.
종우 운동화 치수가 오빠 운동화 치수와 같아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작별을 연습했다. 그전처럼 두렵지 않았다.
오빠가 떠난 가슴속 빈방을 종우가 채워주리라 믿었다. 수학여행 가는 날 아침, 종우가 오빠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설 때기쁘면서도 슬펐다. - P139

종우야 가거라.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엄마도 잊어라. 엄마를 잊지 않으면 죄 많은 땅도 잊지 못할 테니. 시신으로도 돌아오지 마라. 시신으로 돌아온 아이는 시신을 통해,
시신으로도 돌아오지 않는 아이는 시신의 없음을 통해 죄 많은 땅을 비출 테니까. 네가 머나먼 여행을 하는 동안 엄마는죄 많은 땅을, 너를 사라지게 한 죄의 진창 속을 무릎으로 기어가면서 너를 그리워할 것이다. 그리움의 힘으로 너의 없음을 땅과 하늘 사이에서 쉼 없이 외칠 것이다.
그녀는 등대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 P140

등불


그가 여객선 사고 소식을 처음 들은 것은 문경새재에서였다. 부산항에서 안산 시화공단으로 화물을 싣고 가던 도중이었다. 휴게소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있을 때 가까운 식탁에서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이 들려왔다. 5백 명에 가까운 승객들이 탄 여객선이 침몰되었는데 구조가 제대로 안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승객 가운데 수학여행 가던 학생이 3백 명이 넘는다고 했다. 그는 빠르게 잊었다. 그에게 세상일은 어디론가끊임없이 흘러가는 흐린 영상 같은 것이었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 P143

뜻밖에도 식당 문이 잠겨 있었다. 창 안을 들여다보니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으로 식당 전화번호를 눌렀으나 받지 않았다. 그녀의 휴대폰 번호를 알아두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옆집 세탁소 노인에게 물어볼까 하다가 관두었다. 노인이어떻게 생각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세탁소 노인은 그녀를 모슬포댁이라고 불렀다. 그녀 고향이 제주 모슬포였다. 언젠가모슬포댁이 보기 드물게 착한 여자라고 그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그는 못 들은 척했다. 노인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봤으나 알 수 없었다. - P145

식당 문은 그전처럼 잠겨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녀가 식당을 일주일씩이나 비워둘 리 없다는 생각이들었다. 머릿속에서 희뿌연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주 낯설지가 않았다. 가슴이 조이는 듯한 불안이 일면서 발밑이 허전해졌다. 두 발을 딛고 있는 데가 땅이 아닌 듯 몸이 흐느적거렸다. 무릎 아래가 사라진 것같은 느낌이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발밑을 살피면서 식당 앞 계단에 겨우 앉았다. 그런 증상이 처음 나타난것은 시커멓게 불에 탄 채 반쯤 무너진 건물을 보고 있을 때였다. 어린이 캠프에 참가한 딸의 숙소였다.
그는 딸이 죽었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받아들이지 못했다.
겨우 여섯 살이었다. 여섯 살 아이가 그렇게 죽을 수 있다는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소풍을 간다고 했다. 하룻밤만 자고온다고 했다.  - P147

"그런데 왜 그 사람 이름이 없다고 해요?"
그의 물음에 노인은 한숨을 쉬었다.
"회사 직원 말로는 유료 승객이 아닌 승선자의 신원은 확인이 안 될 수 있다는 거야. 어떻게 무료로 탈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승무원이나 선사 관계자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더러그렇게 탄다고 하더군. 선박 회사 사람들이 모슬포댁 식당에종종 오곤 했어. 더 알아볼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진도로가보라고 해. 거기에 가면 그들이 모르는 정보를 들을 수 있올지 모른다면서…….."
노인의 주름진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 P151

아내는 숨을 쉴 수 없다면서 가슴을 자주 쥐어뜯었다. 자신에게서 역겨운 냄새가 난다고 했다. 기분이 조금이라도 좋아지면 죄스럽다고 했다. 딸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귓전을 늘 맴돌던 딸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딸이뜨거운 석탄 위에 서 있는 꿈을 자주 꾼다고 울며 말했다. 어느 날은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말했다. 처음에는 믿기가 힘들었다. 멀쩡한 눈이 안 보일까닭이 없었다. 의사는 전환장애라고 했다. 마음의 깊은 상처가 신체 이상으로 나타나는 병으로, 사람에 따라 증세가 다양하다고 했다. - P152

한 모습이었다. 아내는 유서에서 그를 혼자 두고 떠난 자신을부디 용서해달라고 하면서, 떠나는 것을 허락해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다른 말은 없었다.
아내를 화장한 후 딸의 곁에 두었다. 이제 딸이 외롭지 않을 것이란 생각과 함께 딸과 아내를 제대로 기억해줄 사람은자신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려웠다. 그가 짊어져야 할죽음의 무게를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P155

그녀는 그에게 죽은 자가 아니었다. 사라졌을 뿐이었다. 산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삶과 죽음 사이를, 그 자욱한안개 속을 떠도는 존재였다. 그의 의식도 그녀를 따라 삶과죽음 사이를 떠돌았다. 그에게는 낯선 떠돌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그렇게 떠돌았다. 트럭 안이 관처럼 느껴져도 조금도이상하지 않았다. 가속 페달을 밟고 있을 때는 백합 향기가 콧속으로 스며들곤 했다. - P165

 세탁소 노인을 만난 이후 잠자리에 들면 똑바로 누워
‘눈을 감고 양팔을 가슴에 얹은 자세를 자주 취했다. 죽은 사람의 자세였다. 외로움을 견디는 좋은 방법이었다. 그녀가 제주도에서 돌아오면 칼을 맡기려 했다. 죽음을 그녀에게 맡기고 싶었다.
달빛이 한층 밝아졌다. 달 주위에 얇게 끼어 있던 구름이걷히고 있었다. 트럭에 올랐다. 시계를 보았다. 4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진도에 도착하면 아침이 될 것이다. 그 시각에 꽃을 살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백합 다발을 가득 안고항구로 가고 싶었다. 시동을 걸었다. 길이 떠올랐다. 처음 가는 길이었다. 그녀를 만난 것은 길에서였다. 처음 가는 길에서 누구를 만나게 될지 가슴이 설렜다. 길 너머에서 누군가가손을 흔들고 있었다. 손은 빛처럼 희었다. - P169

카일라스를 찾아서 


정신이 혼미했다. 머릿속에 축축한 안개가 가득 차 있는 것같았다. 땅의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다. 공중에 뜬 상태로 걷는 듯했다. 귓속에서는 종류가 다른 소리들이 뒤섞인 채 쉼없이 윙윙거렸다. 바람 소리, 물 흐르는 소리, 얼음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의 목소리까지 들렸다.
고산병 증세가 나타난 것은 티베트 고원지대로 들어서면서였다. 해발 4천 미터가 넘는다고 했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물속에 있는 것처럼 숨이 찼고, 머리가 아팠다. 조금만 걸어도 몸이 축축 처졌다. 라사에서 카일라스 가는 길은 멀고험했다.  - P173

밤에는 꿈을 많이 꾸었다. 아내가 자주 나타났다. 아내는혼자 나타나지 않았다. 현수와 함께 왔다. 현수의 얼굴은 윤곽이 흐려 잘 보이지 않았다. 현수가 탄 승용차가 새벽 고속도로에서 중앙분리대를 들이받은 뒤 전복했다. 운전자의 부상은 가벼웠지만 조수석에 앉아 있던 현수는 병원 응급실에실려 온 지 얼마 안 돼 숨졌다. 겨우 열일곱 살이었다.
머릿속 안개가 걷히기 시작한 것은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을 때였다. 바위투성이 언덕에는 수많은 룽다와 타르초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티베트인에게 경전의 언어는 진리의표상이다. 그 표상을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 삶의 공간에 배치해놓았다. 룽다가경전의 언어가 새겨진 천을 깃대에 꽂은 한 폭의 깃발이라면,
타르초는 경전의 언어가 새겨진 오색 천들을 기다란 끈에 연결해놓은 천 다발이다. - P174

골짜기가 황량함에도 풍경은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풍경 속에는 이마를 차갑게 하면서 정신을 두드리는 무언가가있었다. 길이 꺾이는 곳에 돌탑이 보였다. 순례자들이 쌓은탑이었다. 돌 하나를 놓으며 무언가를 빌거나 누군가를 생각했을 것이다.
현수의 죽음 이후 살아 있는 이들은 그립지 않았다. 눈에보이는 것들, 살아 움직이는 것들이 그림자처럼 느껴졌다. 삶이 슬프고 무서웠다. 슬프고 무서운 삶을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삶은 버리고 싶다고 버려지는 것이 아니었다. 삶을 버리려면 먼저 삶이 내 몸에 새긴 기억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했다. 현수와 함께한 기억들이, 아내와의 추억들이 버려진다고생각하면 죽음보다 더 슬프고 무서웠다. - P189

"언젠가부터 저는 히말라야의 풍경에서 시선을 느꼈습니다. 저만이 풍경을 보는 게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풍경도저를 보고 있었습니다. 저의 시선과 풍경의 시선이 마주치는순간 신성한 존재의 숨결을 느꼈습니다. 어머니의 신성이었습니다. 풍경의 내면에서 흘러나온 어머니의 신성한 숨결이제 몸속으로 흘러들어 와 물결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라는존재의 생물학적 몸에 갇혀 있던 저의 자아가 해방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저를 감싼 희열은 자유가 불러일으킨 희열이었습니다. 그 희열 속에서 저는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사르나트의 무너진 탑 앞에서 오체투지하고 있었던 여인이 저의어머니였음을." - P201

"사랑을 한다는 것은 고통과 마주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기훈은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 고통과 마주했습니다. 기훈에게는 혹독한 고통입니다. 그 고통을 저는 옆에서 느끼고 있습니다. 티베트 속담에 부정한 카르마를 쓸어내는 빗자루가 고통이라고 했습니다. 영혼을 정화하는 고통의힘을 표현하는 말이지요. 기훈은 아드님에게서 영혼을 정화하는 마르지 않는 우물을 얻은 것입니다. 우물의 원천은 아드님의 희생입니다. 사고 당시 상황이 불러일으킨 어떤 물리학적 법칙의 결과로 기훈이는 살았고, 아드님은 숨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연 혹은 운으로 치부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현상의 거죽일 뿐입니다. 영혼의 생명 활동은 거죽에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저는 기훈의 고통을 통해 아드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아드님은......"
그는 눈을 내리깔았다.
"사무치게 아름답고 거룩한 존재입니다.그존재앞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기도뿐입니다. 저는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더 깊은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 하고."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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