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은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 하다못해 담벼락을 쳐다보고 욕이라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할 검사가 혼잣말로 욕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요. 2016년 2월 적격 심사의 파고를 넘을 때까지 낮은 포복으로 기어가되 검사게시판으로 저항을 이어가기로 결심하고,
도시락 폭탄 던지듯 글을 썼습니다.
상황은 날로 악화되었습니다. 박근혜 정부 시절은 문화계 블랙리스트, 법관 블랙리스트가 횡행하던 시절인데, 검찰은 더했습니다. 검사 블랙리스트, 수사관 블랙리스트는 검찰 구성원에게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검찰은 조직과 결을 달리하는 목소리를 내면 어떻게 되는지를 박병규 검사에 대한 부적격 판정과 퇴출, 저에 대한 공개적인 혹은 은밀한 조리돌림, 인사 불이익 등으로 일벌백계를 명확히 하니 더욱 움츠러드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 P174

연과2021년 6월 10일 오전, 법무연수원장으로 전출 예정인 조남관 대검 차장검사가 제 방을 찾았습니다. 제가 담당했던 사건처리 과정에서 생긴 갈등을 풀고 싶었나 봅니다. "혼자 말해서는 안 바뀐다. 검사들과 같이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충고를 하더군요. "검찰은 에베레스트산을 등정한 사람보다 한라산을 등정한 사람이 필요한 상황이다. 너무 멀리 혼자 가지 마라"고 저를 잡던 동료도 있었습니다. 가야 할 길이라면 주저하는 사람들의 손을 잡고 등을 떠밀며 용기를 북돋아야 하는데,
오히려 저를 말립니다. 이는 방향에 대한 견해차이자 비겁한자신에 대한 변명을 고상한 어휘로 포장한 것에 불과합니다. - P176

그때 조남관 차장에게 답했습니다. "그런 충고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목소리를 높인 게 아닙니다. 검사게시판에 글 쓰고, 대검에 감찰 요청하고, 국민권익위원회, 법제처 등에 민원 넣고, 하다 하다가 국가배상 소송과 고발까지 간 겁니다. 단계적으로 수위를 높였어요. 가야 할 길이라면 가야지, 다른 사람들이 따라오지 않는다고 멈춰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지금 제가 혼자처럼 보이지만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길게 늘어선 줄의 앞자리에 가고 있는 겁니다."
혼자라도 갈 각오입니다만, 역사의 광야에서 앞서 걸어간 분들의 발자취가 보이고, 함께 걷는 이들의 발소리도 들립니다.
하여 외로운 듯하나 외롭지 않게 검찰에서 10년째 버텨오고 있 - P176

습니다. 조남관 차장의 충고처럼 혼자 해서는 바뀌지 않지요.
검사게시판을 넘어 신문과 책을 통해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을더 많이 불러 모으고 검찰의 오늘과 내일에 대한 반성과 성찰,
비전을 불러일으켜 검찰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 P177

며들어 휘2012년 12월 28일 과거사 재심 사건 무죄 구형을 강행하기위해 서울중앙지법으로 가기 직전, 무죄 구형의 당위를 설명하는 글을 검사게시판에 올렸습니다. ‘중징계를 받아 검사직을내려놓게 되더라도, 이로써 과거사에 대한 검찰 입장이 전향적으로 재검토되는 전기가 마련된다면, 하여 검찰이 재심 사건을포함한 모든 사건에서 일관되게 죄에 상응하는 구형을 하게 된다면, 검사로서 해야 할 도리를 다한 것 같아 여한이 없을 것같다‘는 간절한 고언을 덧붙였습니다.
이에 대하 - P179

2018년 9월 저는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 과정은 늘 그랬듯 고단했지요. 어떤 검사들에게는 쉽게 허락되는인터뷰가 저에게는 감히 꿈꿀 수 없는 금단의 열매였습니다.
서글프지만 기득권은 철옹성과 같이 여전히 강고하고, 그 성에선 세상을 향한 창이 대개 닫혀 있어 신선한 바람이 창턱을 넘어서기 힘든 게 현실입니다. 검찰청 공무원 행동 강령상의 인터뷰 사전 승인제가 적법한지를 두고 수뇌부와 두 달에 걸친치열한 논쟁 끝에 겨우 승인을 받았습니다. 끝내 사전 승인제가 신고제로 바뀌어 검사게시판 글 게시로 징계받던 제가 이제언론 기고까지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부딪쳐 가다 보면, 철옹성 그 철벽에 미세한균열이 생기고, 역사의 물꼬가 결국 트이는 걸 봅니다. 과거사재심 사건에서 백지 구형이 최선인 양 주장하고 무죄판결에 불복해 온 검찰이 무죄 구형을 하는 것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습 - P180

니다. 그간 도가니 사건 등 이런저런 참혹한 사건들을 담당하며, "세상은 물시계와 같구나, 사람들의 눈물이 차올라 넘쳐야초침 하나가 겨우 움직이는구나, 사회가 함께 울어줄 때 비로소 역사가 한 발을 떼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불의를 외면하는 사람들을 깨우는 죽비 소리가 불협화음이 아니라 아름다운 합창을 위한 하모니로 인정될때, 우리 사회는 비로소 따뜻한 정의가 넘치는 사회가 되겠지요 - P181

《사기》 이사 열전 편에 이르기를 태산은 흙 한 덩이도 마다치 않기에 태산이 되고 바다는 물 한방울도 가리지 않기에바다가 된다고 하는데, 서로 다른 생각을 토로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서 어떻게 검찰의 발전을 기대하고, 소통을 통한 조직상하의 일체화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평검사에 불과한 제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나 궁리하고 또궁리하다 ‘공지 사항성 글로 도배되어 죽어가는 검사게시판을 되살려 보자‘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좋은 생각이라고 혼자 기뻐하다가 제가 검사게시판을 살릴 수 있을까 겁이더럭 납니다. 검사게시판을 살린다고 하여 불통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희망에 헛된 것이 없으므로 저는 꿈꾸어 보려고 합니다. 함께 꾸는 꿈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으므로 같은 꿈을꾸는 동료들을 모아보려고 합니다. 이에 검사게시판에 동료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현대판 셰에라자드가 되기를 결심합니다.
임은정의 천일야화를 이렇게 엽니다.
2012년 7월. - P185

부득이 저는 지면을 빌어 검찰권을 감당할 자격이 없는 검사들을 고발합니다. 저는 장영수 검사장을 고발합니다. 그는2015년 대검 감찰1과장으로 서울남부지검에서 벌어진 성폭력사건을 조사하고도 관련자를 형사 입건하지 아니한 채 범죄를덮었습니다.
저는 문찬석 검사장과 여환섭 검사장을 고발합니다. 그들은당시 서울남부지검 차장검사와 대검 대변인으로서 거짓 해명으로 국민을 속이고, 조직적 은폐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습니다.
저는 문무일 검찰총장을 고발합니다. 제가 장영수 등의 직무유기에 대한 수사와 감찰을 정식으로 요청했음에도, 처벌은커녕 징계조차 하지 아니하고 검사장 등 요직으로 발탁했습니다.
직무유기의 법리를 모른다면 그 무지로 인해 총장 자격이 없고, 알고도 그렇게 한 것이라면 직무유기입니다.
검찰권을 검찰에 위임한 주권자 국민 여러분이 고발인의 고발 내용을 판단해 주십시오. - P189

그리고 2021년 10월대법원은 검찰의 상고를 기각하여 공소권 남용을 인정한 판결이 확정되었습니다. 피해자인 유우성은 7년간 법정을 오가며 지옥을 헤매었는데, 가해자들은 여전히 안녕하고 무탈합니다. 검찰은 책임을 묻는 조직일 뿐 책임을 지는 조직이 아니니까요.
권한에는, 결정과 행위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책임 없는 권한은 없지요. 그간 검찰이 책임을 지지 않은 것은 법을 집행하는 권력기관으로 정작 자신들은 법을 지키지 않았고, 이런 검찰에 수술용 메스를 감히 들이댈 기관이 달리 없었기 때문입니다. 검찰을 비롯하여 검찰과 결탁한 힘 있는 자들이 법과 원칙에 따른 책임을 질 때, 비로소 법과 원칙이 바로 서겠지요. - P201

4·3평화기념관에는 운주사 와불臥佛처럼 누워 있는 무서백비가 있습니다. ‘4·3백비, 이름 짓지 못한 역사‘, ‘언젠가 이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란 설명문 앞에 절로 숙연해지지요. 이름을 두고 이념과 진영 간의 논쟁이끝이 없으니 아직 4·3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백비이나, 사과와화해를 통한 완전한 평화를 기다려 온 원혼들의 오랜 피눈물로적셔진 혈비지요. 사과는 가해자의 의무이고, 용서는 피해자의권리입니다. 국가 폭력의 피해자들 앞에 검찰을 포함한 가해자들과 악의 승리를 방관한 우리 사회의 진심 어린 반성문을 백비에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백비에 얼룩진 피눈물을 가해자들의 눈물로 닦아 바로 세우는 날, 비로소 4·3이 끝날 테지요. 그날까지 가해자들은 피해자들과 역사로부터 결코 용서받을 수없을 것입니다. - P206

지휘권과 인사권을 오남용한 간부들에 대해 문책을 요구하자 용서를 강권하는 충고를 많이 들었습니다. 전혀 모르는 후배에게서 관련 간부들을 용서하라는 메일을 받고 ‘생매장을 당하는 듯한 공포와 싸웠다.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내 위로 흙을 쏟는 사람들, 빠져나오지 못하게 발로 다지는 사람들,
방관하는 사람들. 많이 고통스러웠고 원망스러웠다. 우리가 사건 당사자에게는 정의와 책임을 묻지 않느냐. 용서는 피해자의권리이고, 책임을 묻는 것은 조직의 의무‘라고 답했습니다. 사법 피해자들의 고통에 비할 바 없는 사소한 제 경험으로 제주4·3 피해자들과 유족들의 통한을 어렴풋이 헤아리며 북촌 너븐숭이 애기무덤 앞에 제문을 올리는 심정으로 칼럼을 썼습니다.
가해자에게 사과를 권하지 않으면서 피해자에게 화해를 강권하는 풍토에서, 가해자들은 더욱 뻔뻔해지고, 피해자들은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의 옹졸함을 자책하게 되지요. 용서는 피해 - P208

자의 의무가 아닌 권리이고, 사과는 가해자의 선택이 아닌 의무입니다. 국가와 사회, 가해자들의 진심 어린 사과만이 피해자들의 피맺힌 통한을 풀 수 있겠지요.
화순 운주사 와불이 일어서면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전설이있습니다. 이념과 진영 논리로 비문을 정하지 못해 아직 백비로 누워 있는 4·3평화기념관의 비석이 일어서는 그날. 사과와화해를 받침돌 삼아 우리 사회에 진정한 평화가 세워지리라고저는 확신합니다. - P2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