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침대 옆 탁자에 있는 책들은?
두 권뿐이다. 라이브러리 오브 아메리카에서 나온 제임스볼드윈의 『에세이 모음집Collected Essays』과 『초기 장편 및 단편 소설들Early Novels and Stories』. 고등학교 때(1965년에 졸업했으니 오래전이다) 이후 최근까지 볼드윈은 읽지 않다가 요즘 쓰는 소설이 주로 1950년대와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해서의무적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 의무감은 금세 기쁨과 경외감, 감탄으로 바뀌었다. 볼드윈은 픽션과 논픽션양 부문에서 주목할 만한 작가이며 나는 그를 미국의 20세기 거장 반열에 올리고 싶다. 그의 대담함과 용기, 엄청난 감정의 폭(끓어오르는분노에서부터 섬세함의 극치를 이루는 다정함까지)뿐 아니라글 자체의 질, 끌로 정교하게 다듬은 듯한 우아한 문장들 때문이기도 하다. - P226
가장 최근에 읽은 위대한 작품은?
프랜 로스의 오레오Oreo』이다. 1974년 작은 출판사에서 처음 출간된 이 소설은 거의, 어쩌면 전혀 주목받지 못하고 세상에서 사라졌다가 2015년에 뉴디렉션스 출판사에서 다시 나왔다. 안타깝게도 로스가 쓴 유일한 소설이고, 더욱 안타까운 건 로스가 1985년에 5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신명 나는 작은 걸작이며, 내가 최근에 우연히 발견한 아주 유쾌하고, 웃기고, 지적인 소설 가운데 하나이다. 이 독창적인 작품은 학구적인 산문체와 흑인 속어, 이디시어가 매우 효과적으로 섞인 경이로운 혼합 언어로 쓰였다. 이책을 읽으며 백 번은 폭소를 터뜨렸는데, 2백 페이지 조금 넘는 짧은 작품이니 평균 한 페이지 건너 한 번씩 박장대소한 꼴이다. - P227
잘 알려지지 않은 책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서양의 잡초들Weeds of the West 』. 삽화가 풍부한 628페이지 분량의 안내서로 마흔 명의 잡초 전문가가 쓰고 서양 잡초 학회에서 펴냈다. 컬러 사진이 아주 화려하지만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야생화의 이름들이다. 유럽전호Bur Chervil, 파리잡이개정향풀Spreading Dogbane, 해골잎돼지풀Skeletonleaf Bursage, 끄덕이는도깨비바늘NoddingBeggarsticks, 뻣뻣한매의수염Bristly Hawskbeard, 솜방망이Tansy Ragwort, 복된밀크시슬Blessed Milkthistle, 가난뱅이풀Poverty Sumpweed, 누운땅빈대Prostrate Spurge, 영원한완두콩 - P228
덩굴Everlasting Peavine, 원추버들Panicle Willowweed, 배찢는브롬Ripgut Brome. 수많은 풀이 실려 있고, 그 이름들을 혼자소리 내어 읽는 순수한 즐거움을 누리노라면 어김없이 기분이좋아진다. 미국 땅의 시들이다. - P229
가장 들려주고 싶은 뉴욕 이야기는?
나의 뉴욕 이야기는 아주 많다. 오랜 세월 뉴욕에서 살면서수십 가지 이야기가 생겨났다. 최근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 하나가 이민자를 향해 증오를 쏟아 내고 있으니, 여기서는 이민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내가주로 이용하는 브루클린 지역의 문구점 주인은 중국 출신이다. 조수는 멕시코 출신이고, 계산대에서 일하는 여자는 자메이카에서 왔다. 몇 개월 전 어느 쌀쌀한 오후에 물건값을 치르려고 계산대 앞에 서 있는데 자메이카인 계산원이 내가 코를 흘리는 모습을 보았다(추운 날씨였으니까). 그는 못 본 척하거나콧물을 닦으라고 말해 주는 대신 클리넥스 통에서 휴지를 뽑더니 계산대 너머로 몸을 기울여 코를 닦아 주었다. 무척이나부드러운 손길이었고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가 허락도 없이 내 몸에 손을 댄 건 잘못된 행동이었을까? 분명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건 보기드문 친절이었으므로, 도와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브루클린 인민 공화국에서의 삶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사례였다. - P229
이 책에 포함된 번역자의 목록이 보여 주듯 현대영미 시인들은 프랑스 시를 많이 번역했다. 유명한 몇 명만 나열해도 파운드, 윌리엄스, 엘리엇, 스티븐스, 베케트, 맥니스, 스펜더, 시버리, 블랙번, 블라이, 키넬, 레버토브, 머원, 라이트, 톰린슨, 윌버 등이다. 이들은 프랑스 시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시를쓰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시를 쓰지 않았다면 현대 미국 시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시 선집은 프랑스 시에 관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영미 시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의 목적은 프랑스 시를 원어로 제공하면서 동시에 영미시인들이 번역한 시를 함께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선집은 우리 시사(史)의 한 장으로도 읽힐 수 있는 것이다. - P244
이 시선집은 아폴리네르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는 이책에 포함된 시인 중 가장 일찍 태어난 사람도 아니고 의식적 ‘인 현대어로 시를 쓴 최초의 시인도 아니지만, 20세기 초반의미학적 열망을 대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우아한 연애 서정시와 과감한 실험, 운문시, 자유시, <형태> 시 등 범위가 다양한 시들에서 그는 새로운 감수성을 표현했다. 과거의 시 형태에 많이 의존하면서도 동시에 자동차, 비행기, 영화의 세계에자연스럽게 적응했다. 입체파 화가들의 적극적인 옹호자였던그의 주변에는 우수한 화가와 작가가 많이 모였는데, 이를테면자코브, 상드라르, 르베르디 등이 아폴리네르 서클의 핵심 구성원들이었다. 이 세 시인과 아폴리네르의 작품을 통칭하여 입체파라고 부른다. 시의 기법이나 어조 면에서 네 사람은 커다란 차이를 보이지만, 그래도 작품의 인식론적 기반이라는 관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녔다. - P251
키스 월드롭은 이렇게 썼다. <시는 통으로 된 한 개의 작품으로, 이미지나 플롯에 따라 전개되지 않는다. (…………) 이 주장은 다음의 전제를 포함한다. 1. 일상 언어는 논리에 의존한다. 2. 허구에서는 특정 단어가 다른단어를 뒤따를 필요가 없다. 3. 따라서 자유로운 선택, 즉 욕망이 창출한 구문을 상상할 수 있다. 『국가』는 이러한 상상력이발휘된 《서사시》이다. 이러한 논증을 펼치는 것은 (・・・………) 프로젝트를 아예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제시된 것은 일련의 감정이 아니다. (・・・・・・) 시는 아주 조심스럽게 창작된다. 안마리 알비아크는 합리성을 거부하지만 그래도 명백히 높은 지성을 발휘해 가며 시를 쓴다.> - P274
프랑스를 모르는 독자들에게 축자의 정확성보다는 시의 감각을 전달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기때문이다. 시의 효과는 단어에만 있지 않고 음악, 침묵, 형태로나타나는 단어들 사이의 상호 작용에도 있다. 독자가 그러한총체적 체험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원시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시는 시인이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P278
말라르메가 스물아홉 살이던 1871년 7월 16일, 둘째 아들. 아나톨이 태어났다. 말라르메 집안은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당시 그는 아비뇽에서 파리로 근무지를 옮기는 협상을 진행하는 중이었데, 11월말에야 겨우 협상이 마무리되었다. 그의 가족은 모스쿠가 29번지에 정착했고 말라르매는 폭탄고등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말라르메 부인은 지독한 난산 끝에 아이를 낳았다. 아나톨은 생후 몇 달 동안 건강이 너무 안 좋아 살아남지 못할 것 같았다. <목요일에 그 애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습니다.) 말라르메 부인은 10월 7일 남편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애의 조그만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 같았습니다. (…...) 나는 아주 슬프고낙담했습니다. 그 애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 같은 생각도 들었어요. 의사들도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고 하니 이제하느님의 뜻에 맡겨야지요. 그렇지만 이 자그마한 아이가 회복하지 못할 것 같아 너무나 슬픕니다.> - P279
다른 편지는 몽테스키우에게 보낸 것이다. 〈엄청난 주의 덕분에, (파리로 돌아온 이래) 모든 것이 잘되어 가고 있습니다. (……) 우리 아이는 며칠 심하게 고통을 당하여 자그마한 몸의에너지가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아이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기침을 발작적으로 했고 (……) 하룻낮, 하룻밤 내내 온몸을 떨었습니다. (……) 그렇습니다.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끔찍한 바람을 끊임없이 맞고 선 사람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밤을 꼬박 새웠고, 희망과 공포의 감정이 뒤범벅되어 밤새 안정을 취할 수가 없었습니다. ・・・・・…) 나의 병든 아들은 침상에 누운 채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짓습니다. 사라져 버린 태양을 기억하는 하얀 꽃처럼.>이 두 통의 편지를 쓴 다음 말라르메는 그것들을 부치기 위해 우체국에 갔다. 아나톨은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사망했다. - P286
서리시을 때의 느낌을 전했다. 그는 한편으로는 기뻤지만 한편으로는조심스러웠다. 공책들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나 개인적인이야기를 출판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시인 말라르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귀중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이렇게 썼다. <여기 쓰인 문장들이 설사 한숨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바로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은 우리에게 귀중한 것이 된다. 공책들의 적나라함은(………) 그것들을 출판하는 일을 바람직하게 만든다. 그러한 특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증명하는 데 유용하다. 말라르메의 그 유명한 침착성은 아주 활발한 감수성의 충동, 혹은 광기와 착란에 가까울 정도의 충동에 바탕을 둔 것이다. (……) 공책들이 보여 주는 구체적인 사례 덕분에 그 몰개성, 그 객관성이 실은 인생의 가장 주관적인 충동과 연결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 P287
말라르메는 대체로 이렇게 생각한 듯하다. 아나톨을 죽음에 이르게 한 질병은 나의 책임이다. 아들에게 생의 시련을 견딜 수 있는 튼튼한 몸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도 앗아 갈수 없는, 나의 생각을 줄 수는 있을 것이다. 아나톨을 글로 바꾸어 그 애의 생명을 연장하고 싶다. 문자로 아들을 부활시키고 싶다. 시로 묘비를 세우는 작업은 죽음의 존재를 말살할 것이다. 말라르메가 볼 때 죽음이란 죽어 가는 구체적 행위가 아니라 죽음을 끊임없이 의식하는 것이었다. 아나톨은 너무 어려서 자신의 운명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이 주제는 기록 전편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아직 죽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속에서 아직 살아 있고 말라르메가 죽을때에야 비로소 함께 죽는 것이었다. 이것은 현대적인 죽음, 즉하느님이 없는 죽음, 구제의 희망이 없는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적어 놓은 감동적인 이야기로, 말라르메 미학의 은밀한 뜻을 드러낸다. 바로 예술을 종교의 지위로 격상시키는 것이다. - P289
렘브란트가 죽어가는 아들 티투스를 그린 초상화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든다. 렘브란트가 어린 시절의 활발하고 씩씩한 티투스를 여러장의 그림으로 남겼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죽어 가는 티투스의초상화를 제대로 바라보기가 무척 힘들다. 스무 살이 미처 안된 티투스는 질병으로 너무 수척해져서 노인처럼 보일 지경이다. 렘브란트가 그 초상화를 그릴 때 어떤 심정이었을지 상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죽어 가는 아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도 캔버스 위에 아들을 그리기 위해 손을 단단히 고정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 렘브란트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힘을들였을지 상상해 보라. 자연스러운 이치로 보아 부모는 자식을 땅에 묻지 않는다. 자식의 죽음은 모든 부모에게 궁극적인 고통이다. 아무리 소박할지라도 우리가 인생에 기대할 수 있다고 여긴 모든 바람을산산조각 내는 잔인한 공격이다. 자식을 잃는 것은 곧 모든 것을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벤 존슨은 말라르메가 부정(父情) 때문에 아들이 <그가 부러워할 만한 상태>에 이미 도달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탄식했다. - P290
책을 읽다 보면 머리가 어질어질해지기 시작한다. 페이지를 넘겨 다음 응모 글로 넘어가면 완전히 다른 사람, 완전히 다른 환경, 완전히 다른세계관을 마주하게 된다. 다름은 이 책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우아하고 세련된 글도 있지만 조잡하고 서툰 글도 많다. <문학>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는 글은 소수이다. 문학적 기량이 부족한 저자들의 글을 잊을 수 없는 작품으로 만드는 요소는 다른 무엇, 날것 그대로의 솔직함이다.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폭소 한 번 터뜨리지 않고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수 있는 독자를 상상하기가 어렵다. 이 이야기들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나는 개인적 체험의전선에서 보내온 특보라고 부르고 싶다. 이야기들은 개별적인미국인들의 사적 세계를 담고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 안에서 피할 수 없는 역사의 흔적을 거듭 발견하게 된다. 개인의운명은 복잡한 방식으로 사회의 지배를 받는다. - P326
소피아는 언니 엘리자베스에게 보내는 편지에 남편과헬텔(소피아가 장난스럽게 오무 씨라고 칭한)의 우정에 관해이렇게 썼다. <이 성장 중인 남자의 생각이 호손 씨의 위대하고다정하며 이해심 가득한 침묵에 거센 파도처럼 밀려드는 소리를 들으며 앉아 있는 게 나에겐 더없는 기쁨이지. (……) 그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존재하기만 하는 데도 사람들이고해 신부를 대하듯 가장 깊은 속마음까지 털어놓는 게 놀라워> 멜빌은 호손과 그의 작품들을 만나면서 인생의 근본적인전환을 이룬다. 그는 호손과 처음 만났을 때 이미 흰 고래에 관한 이야기 (전통적인 형태의 먼 바다 모험 소설로 기획된)를 쓰고 있었지만, 그 작품은 호손의 영향 아래 깊이와 넓이를 더해갔고 지칠 줄 모르는 맹렬한 영감 속에서 가장 풍성한 미국 소설들 가운데 하나인 『모비 딕 Moby-Dick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그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다 알겠지만 첫 페이지에 이렇게 쓰여 있다. <그의 천재성에 대한 경탄의 표시로 이 책을 너새니얼 호손에게 헌정한다.> 호손은 레녹스에 머무는 동안 달리 이룬 게 없다 하여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멜빌의 뮤즈 역할을 해준 것이다. - P355
이제 우나는 충분히 지쳐서 장미와 금 빛깔의 황혼에 푹 잠겼다가 잠자리에 들었어요. 그런아버지가 있고, 눈앞에 그런 풍경이 있으며, 볼 수 있는 눈이 있으니 우리가 그 아이에게 걸지 않을 희망이 무엇이 있겠어요? 일전에 그 아이와 줄리언이 아버지의 미소를 두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다른 사람의 미소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던 것같은데 아마 그 사람은 태펀 씨였을 거예요. 우나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줄리언, 그래도 우리 아버지 미소만 한 건 없어!》줄리언이 대답했어요. 《아, 그럼, 아버지 미소만 한 건 없지!》》 우나가서른셋이라는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고 여러 해가지난 1904년, 토머스 웬트워스 히긴슨이 당시 유명 잡지였던 『아웃룩The Outlook에 추도문을 실었다. 거기에 우나가 자신의 아버지에 관해 그에게 한 말이 인용되어 있다. <아버지는 내가 아는 그 어떤 사람보다 유쾌해질 수 있었어요. 마치 소년 같았죠. 세상에 아버지만큼 훌륭한 놀이 친구는 없었어요.> - P363
나는 나는 기억한다! Remember를 얼마나 여러 번 읽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이 책을 처음 발견한 건 1975년 출간직후였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35년 동안 몇 년에 한 번은 다시읽었으니 도합 일고여덟 번은 읽었을 것이다. 분량이 길지는않지만(초판이 138페이지밖에 안 된다) 놀랍게도 나는 조 브레이너드의 이 작은 걸작을 그토록 여러 번 읽었음에도 다시책을 펼칠 때마다 처음 만나는 듯한 이상한 기분을 느낀다. 뇌리에 깊이 박혀 지워지지 않는 몇몇 구절을 제외하면 나는 기억한다』에 기록된 거의 모든 기억이 내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것이다. 장기간 기억에 담아 두기엔 내용이 너무 많다. 너무 많은 삶이 소용돌이치며 변하는 회고의 콜라주에 꽉 들어차 있어서 누구라도 전체를 다 기억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내가 다시 그 책을 읽기 시작하는 순간 많은 부분을 기억한다 하여도기억하지 못하는 내용이 많다. 나는 기억한다』는 늘 새롭고기이하며 놀라운 책으로 남아 있다. - P383
이상이 나는 기억한다』를 이루는 다양한 주제들이다. 이 책의 많은 미덕들 가운데 하나는, 육체적 삶의 상세한 감각들에강한 초점을 맞추고(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을 때의 기분, <똑바로 설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빠르게 맴을 도는> 기분, 난생처음배 속에서 물이 출렁거리는 소리를 듣고 암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 1940년대와 1950년대, 1960년대 미국 풍경의 지극히평범하고 사소한 세부 사항들을 아름답게 기록한 동시에 특정한 남자 - 겸손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젊은 조 브레이너드-의 초상을 너무도 정확하고 거리낌 없는 화법으로 제시하여 우리 독자들이 그 초상 속에서 자신의 삶을 보기 시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의 기억들은 끊임없이, 시간이나 장소의 제한 없이 잇따라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는한순간 뉴욕에 있다가 다음 순간 털사나 보스턴에 있고, 20년전에 대한 회고가 지난주의 기억과 나란히 선다. - P392
브레이너드의 책에 담기지 않은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는것도 흥미롭다. 우리가 책상에 앉아 자신의 나는 기억한다』를쓴다면 대부분넣게될내용들 말이다. 브레이너드의 책에는형제자매와의 갈등, 잔혹 행위나 신체적 폭력, 분노의 폭발, 복수충동, 비통함이 없다. 지나가는 말로 케네디 암살 사건, <한국>(인용 부호를 붙여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선거 운동의 슬로건 <나는 아이젠하워를 좋아한다 I Like Ike>를 언급한 부분을 제외하면 정치적이거나 공적인 문제, 국가 행사에 관한 기억은 없다. 몬드리안, 피카소, 반 고흐는 언급하지만 브레이너드 자신이 시각 예술가로서 이룬 발전에 관한 내용은 전혀 없으며, 보스턴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전부 읽었다는 말은 있지만 그가 소설의 열렬한 독자였음에도 그 외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관한 기억은 없다. 슬픔도, 분노도 없고 눈물도 거의 없다. 감정적 고통이나 심오한 내적 혼란을 암시하는 내용은 하나뿐이다 - P393
오늘 아침 글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았을 때, 내가 맨 처음한 일은 살만 루슈디를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침마다 루슈디를 생각한 지도 벌써 4년 반이 되어 갑니다. 이제 그것은 나에게 빼놓을 수 없는 일과가 되었습니다. 펜을 들고 글을 쓰기시작하기 전에 바다 건너편에 있는 동료 소설가를 생각하는것입니다. 나는 그가 또다시 24시간 동안 살아남기를 기도합니다. 영국의 보호자들이 그를 죽이려 드는 자들 - 벌써 그의번역자를 한 사람 죽였고 또 다른 번역자에게 상처를 입힌 자들의 눈을 피해 그를 꽁꽁 숨겨 놓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나는 이런 기도가 더는 필요 없는 날이 오기를 기도합니다. 살만 루슈디가 나처럼 세계 어디서나 자유롭게 길거리를 걸어다닐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도합니다. - P409
우리는 그것을 좋아할 필요도 없고 그것이 훌륭하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전시될 권리를 옹호하고 나서지 말아야 하는 건 아닙니다. 이건 검열이나 예술적 자유에 관한 논쟁이 아닙니다. 공적기금의 사용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 예술가들에게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작품을 만들어선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브루클린 박물관 큐레이터들은 작품들이 불쾌감을준다는 이유로 그것들을 전시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박물관 운용 기금을 대는 시 정부는 불쾌한 예술을 홍보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 P422
열네 살 된 딸아이가 오늘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아이는 난생처음 브루클린에서 맨해튼까지 지하철을 타고 갔다 - 혼자서, 딸아이는 오늘 밤 집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현재 뉴욕에는 지하철이 운행되지 않으며, 아내와 나는 어퍼웨스트사이드에 사는 친구들에게 딸아이를 재워 달라고 부탁해 놓았다. 딸아이가 세계 무역 센터 지하를 지나간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쌍둥이 빌딩이 폭삭 주저앉았다. 우리 집 꼭대기 층에서 보면 연기가 도시의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다. 오늘은 바람이 브루클린 쪽으로 불어와서 화재현장의 냄새들이 집의 모든 방으로 들어왔다. 화염에 휩싸인플라스틱, 전선, 건축자재, 시체들의 고약한 냄새, 코를 찌르는그 악취, - P430
내 머리를 잘라주는 이발사가 고통스러운 얼굴로빈이발소 앞에 서 있어서걸음을 멈추고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의 말이 몇 시간 전에옆 골동품점 주인이 사위와 통화했는데 사위가 세계 무역 센터107층사무실에 갇혀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통화가 끝나고 한시간도 안 되어 그 건물은 무너졌다. 나는 온종일 텔레비전 화면 속 끔찍한 영상들을 지켜보고 창밖의 연기를 내다보면서, 세계 무역 센터 완공 직후인1974년 8월 쌍둥이 빌딩 사이를 건넜던 내 친구, 고공 줄타기예술가 필리프 프티를 생각했다. 지상 460미터 높이의 줄 위에서 춤추는 작은 남자, 그 아름다움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오늘 바로 그곳이 죽음의 장소로 변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지 생각하니 섬뜩하다. 우리 모두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수년 전부터 그 가능성을 이야기해 왔지만, 막상 비 - P431
극이 터지고 보니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정도로 끔찍하다. 미국 땅에서 마지막으로 외국인의 공격이 벌어진 때는 1812년이었다. 오늘 발생한 사건은 전례가 없으며 이 공격의 결과는분명 끔찍할 것이다. 더 많은 폭력, 더 많은 죽음, 그리고 더 많은 고통이 따를 것이다. 마침내 21세기가 시작되었다.
2001년 9월 11일 - P432
작년 9월 세계 무역 센터에 가해진 잔인무도한 공격을 미국에 대한 공격으로 이해하는 건 온당한 일이다. 뉴요커들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폭격을 맞은 건 우리 시였다. 우리는 3천 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가증스러운 광신주의를 이해해 보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한편, 그날 우리가 겪은 경험을 가족적 비극으로 받아들였다. 대부분이 깊은 애도 상태에 빠져 몇 날, 몇달을 집단적 슬픔에 사로잡힌 채 무거운 걸음으로 천천히 걸어 다녔다. 그만큼 우리 모두와 밀접한 사건이었으며, 뉴요커중에 그 공격으로 친구나 친척을 잃지 않은 사람을 직접, 혹은한 다리 건너서라도 아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 수를 계산해 보면 충격적인 결과가 나온다. 희생자 3천 명에 그들의 직계 가족, 확대 가족, 친구들, 이웃들, 직장 동료들을 더하면 갑자기 수백만이라는 숫자로 불어나는 것이다. - P437
저는 제가 하는 일을 왜 하는지 모릅니다. 만일 그걸 안다면아마도 그 일을 할 욕구를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할 수있는 말은 사춘기가 되면서부터 그 욕구를 느끼기 시작했다는것이 전부이지만, 그 점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저는 지금 글쓰기, 특히 이야기하기 수단으로서의 글쓰기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 세계라고 부르는 곳에서 일어난 적이 없는 상상 속 이야기들 말입니다. 확실히 그건 이상한삶입니다. 몇 시간, 몇 날, 몇 해를 홀로 방에 틀어박혀 펜을 들고 자신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것들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종이 위에 글을 적으려고 분투하는 삶이니까요. 도대체 왜 그런 일을 하고 싶은 걸까요? 제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이것뿐입니다. 그래야만 하니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까. - P447
다시 말해, 예술은 무용합니다. 적어도 배관공이나 의사나 철도 엔지니어가 하는 일에 비하면 말입니다. 하지만 무용함은 나쁜 것일까요? 실용적 목적이 결여됐다고 해서 책이나 그림, 현악 사중주는 단순한 시간 낭비일 뿐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예술의 가치가 바로 무용함에 있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는 행위는 우리를 이 행성에 거주하는 다른 모든 생명체와 차별화하는 동시에근본적으로 우리를 인간으로 정의해 줍니다. 그저 최대한 잘해내는 것 외엔 아무 목적도 없이, 그 행위의 순수한 기쁨과 아름다움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것. 뛰어난 피아니스트 댄서가되는 데 요구되는 노력을, 그 장시간의 연습과 훈련을 생각해 - P448
보십시오. 지극히도, 그리고 장엄하게도 무용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그 모든 고통과 노력, 그 모든 희생을 바치는 것이지요. 그러나 소설은 여타의 예술과 조금은 다른 영역에 존재합니다. 소설의 매개체는 언어이며, 언어는 우리가 타인들과 공유하는 것, 우리 모두의 공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하기를 배우는 순간부터 이야기를 향한 갈망을 키워 갑니다. 어린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잠들기 전 듣는 이야기를 얼마나열렬히 즐겼는지 알 테지요. 어머니나 아버지가 어둑어둑한 방에서 곁에 앉아 동화책을 읽어 주던 순간을 말입니다. 자녀를둔 사람은 동화책을 읽어 줄 때 넋을 잃고 듣는 아이의 눈빛을떠올리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우리의 갈망은 왜 이토록 강렬한 것일까요? 동화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경우가 많으며 참수, 식인, 기괴한 변신, 사악한 마법 따위의 요소가 등장합니다. 그런 소재들이 어린아이에겐 너무 충격적이리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야기가 제공하는 체험은 아이가 완벽히 안전하게 보호받는 환경에서 자신의공포들과 마음의 고통들을 대면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것이이야기의 마법입니다. 이야기는 우리를 지옥 밑바닥까지 끌고내려갈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무해합니다. - P449
그렇지만 저는 소설의 현 상태, 그리고 미래를 낙관적으로봅니다. 책에 관련해서는 숫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늘 언제나 독자는 오직 한 명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소설은특별한 힘을 지니며, 제 견해로는, 그래서 소설이라는 형식은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소설은 작가와 독자가동등하게 기여한 협업의 결과물이며, 낯선 두 사람이 지극히친밀한 만남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저는 단 한번도 본적이 없고 영원히 아는 사이가 되지 못할 사람들과 평생대화를 나눠 왔으며, 앞으로도, 숨이 멎는 날까지 계속해서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제가 하고 싶었던 일입니다. - P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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