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숙을 만나려면 영도 다리를 건너야 했다. 그러나 건너지못했다. 경찰의 막강한 저지로, 남포동 비프광장에 머물 수밖에없었던 희망버스 소풍 모임은 거기서 밤을 새웠다. 노숙을 했다. 준비해온 침낭과 담요를 길바닥에 착착 깔고 누워 잠이 들었다. 잠들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을 위해서 세 명의 시인‘이 조용히 천막을 쳤다. 광목천에 크레용으로 ‘문학천막‘이라고 쓴 간판을 내걸었다. 안에는 촛불 두 개, 집에서 싸 들고 온 책 몇십 권그리고 공책 몇 권과 볼펜 몇 자루, 누군가 군중을 벗어나 조용히 있고 싶다면, 누군가 이 소풍길에서 느낀 소회를 어딘가 풀어놓고 싶다면 여기에 있어보라는 뜻에서였다. 작고 허름한 둥지속에 쪼그리고 앉아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 문학은 그런 거다. 소풍간의 대오에서 불현듯 내가 왜 여기에있지? 저 혼자 질문하고 대답하기 위해 잠시 대오를 이탈하는 - P111
일. 혼자만의 방에서 정연해지지 못하는 생각들을 기록해보는일, 잠들지 못한 몇몇 사람들이 문학천막 속에 들어가서 오래 앉아 있다가 나왔다. 바깥에서 셋은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새벽을보냈다. 사람마다 여기에 온 이유가 다 다르겠지? 라든가, 모두가다 내몰린 자들이겠지, 김진숙처럼. 그럼 네 이유는 뭐야? 우리는 대화를 천천히 이어갔다. 내 이유는 시간마다 변했다. 맨 처음 이유는 약속 때문이었다. - P112
3차 희망버스가 부산으로 집결하던 밤에, 트위터로 중계되던 시시각각의 위험한 상황을 내 방 컴퓨터 앞에서 겪었다. 너무 애가 타서 현장에 있는 친구와 통화도 했다. 혼자 앉아 상황을 전해 듣는 게 현장에 있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불편했다. 그 마음을 트위터에 적었다. 현장에 있던 어떤 분이 나의 한마디에 힘이난다며 실시간 답글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희망버스를 꼭 타보라고 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답했다. 그게 첫 번째 이유였다. 5차희망버스엔 꼭 함께하겠다고 말했더니, 심보선은 문학천막을 제안했다. 배낭 속에 간식 대신 책 열권을, 공책과 볼펜을, 광목천과 크레파스를 챙겨 넣었다. 무슨 일이든 함께하면 신이 나는 친 - P112
구 덕분에 두 번째 이유가 보태졌다. 비프광장에서 집회를 마치고 영도 다리 진입을 다시 시도하기위해 우리는 행진을 했다. 경찰이 강경하게 길을 막고 물대포를쏘아댔다. 우리는 뒤로 돌아 다급히 뛰었다. 내가 도망치는 사이에, 맨 앞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연행되기 시작했다. 도망치며 친구를 챙기려고 주변을 둘러볼 때였다. 그 순간, 사람들의 표정을보았다. 모두가 잔뜩 겁에 질린 얼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노래를부르고 춤을 추고 구호를 외치며 흥겹던 얼굴들. 삽시간에 두려움에 떠는 얼굴로 변해 있었다. 나는 이 두려움의 얼굴이 우리의본래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공포와 두려움, 이게 우리 삶의 진짜얼굴임을 그때 나는 보고 말았다. 그때 우리는 공포와 두려움을나눈 사이가 되고 말았다. 각자의 두려움을 서로 보여준 사이가되었다. 그런 사이끼리는 맨 처음 이유가 다를지라도, 같은 희망을 공유하게 된다. 그 희망은 희망을 희망할 권리였다. - P113
지금 여기, 우리가 하필 같이 있을 때, 우리가 같이 있는 이유가 만들어진다. 이유는 변한다. 세밀해지고 증식된다. 절망과 두려움은 이겨내는 게 아니라 밥처럼 마주 앉아 나누는 것이다. 나누는 사이로 희망이 끼어들어 이유를 완성한다. 희망을 싣고 달리기 때문에 희망버스가 아니었다. 달리다 보면 희망이 실리기때문에 희망버스였다. 김진숙을 못 보고 돌아왔지만 소풍은 좋았다. 하나의 이유가 너무 많은 이유를 만나고 돌아왔다. 빈 도시락을 들고 갔다가 꽉 찬 도시락을 챙겨 들고 돌아온 소풍이었다. - P115
한밤중에, 등불조차 켜지 않은 채로, 어디로 흘러가는지 노늘쪽배 위에 누워 별자리를 바라보며, 창세기부터 지금까지의 우주만물의 역사에 대해 가만히 혼자 헤아리는 사람이 있다 합시다. 그의 뼈에 연보라색 불이 켜집니다. 밤하늘을 날던 반딧불이들은 그가 거대한 동족인 줄 착각합니다. 그는 손가락을 길게 뻗어밤하늘의 별 하나에 갖다 됩니다. 별 하나가 그렇게 이 지구 위의한 사람과 연결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를 대신해서 그는 밤하늘의 별에게 말합니다. 바로 여기에 있을게. 그는 수천 년 전부터그렇게 누워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 시대의 미라, 시인입니다. - P122
내 시에 눈물이라는 시어가 많아졌다. 그게 타자의 눈물이었다는 건 다행한 일이다. 타인이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나는울음을 듣는다. 누군가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릴 때, 나는 나의 무용합을 직시한다. 그 눈물을 고스란히 뒤집어쓴 채 방면한다. 위로하지 못한다. 아니, 위로의 무능함에 나 또한 울고 싶어진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시를 쓴다. 이것도 다행한 일이다. 눈물을 기록하다 보니 눈물을 오해 없이 이해하게 되었다. 어떤 눈물은 목적이 따로 있었고, 어떤 눈물은 맹목이었다. 어떤 눈물은 가뭄에쏟아진 소나기였고, 어떤 눈물은 골절되어 살갗 바깥으로 삐져나온 뼈였다. 그렇게 눈물의 맛을, 눈물의 너머를 감지하는 게 내가 한 일의 전부였을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내 앞에서 울었다. 많은 사람들이 내 앞에서 눈물겨운 사연을 털어놓곤 했다. 흘리는 건 눈물이었지만, 내 눈에 보이는 건 손짓이었다. 누군가를 향한, 누군가를 찾는. - P125
발화한다는 것. 그 발화를 입증하고 실천한다는 것. 그빤한 거짓말에도 절실함은 절절하다. 그 거짓말과 절실함의 모순과 균열 속에서 인간은 속절없이 명멸한다. 시인이라면, 말의 본질과 발화된 말 사이에서 더더욱 처참하게 방황할 수밖에 없다. 그 사이를 접착하는 불가능함을 순진하게 욕망한다. 그 불가능한 접착을 모든 인류를 대신해서 욕망하는 자, 그자가 바로 시인이다. 사람의 말로 사람의 일을 기록해야 하는 시는, 그러므로 불가능성을 향해서 간다. 불가능한 줄 알고도 간다. 개의치 않는다. 그 불가능성이 시의 토양이고, 불구의 자리에서 영원히 서성이는자, 그자가 시인이다. - P128
가장 안락한 자리는 언제나 당신들의 눈물 자리였다. 가지 끝에매달린 것들을 눈물이라고 생각할지 이슬이라고 생각할지는 순전한 내 몫이었다. 눈물을 매단 가지를 나는 뼈라고 생각했다. 뼈를 손짓이라고 여겼다.
나는 계속 덧나기만 했어요. 덧난 자리마다 부끄러운 길을 만들고 그 길은 또다른 길들로 무수히 갈라졌어요. 갈라져서 돌아오지 못했어요. 이제 가느다란 가지들로 남아 나는 아무것도 붙잡을 수가 없어요. 내 산책은 당신을 붙잡을 수 없어요. 다만 이렇게, 흔들리기 위해 이렇게 오래 흩어졌던 거예요. 내 생의 이렇게많은, 다른 가지들을 만들었던 거예요. 당신이 손짓하는 것이 보였어요.
이수명, 「생의 다른 가지」에서 - P129
그해 여름에, 그해 겨울에, 나는 혼자서 혹은 누군가와 함께길을 걸었고 무언가를 주웠다. 사소했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보물로 가져와 간직하며 지냈다. 어떤 것은 추억을 직조해주었고어떤 것은 계속해서 마음을 아프게 했다. 마음 아픈 것들은 내내 마음을 아프게만 했다. 내가 그 사물과 만난 것은 너무나 사소한 일이지만 사소한 일들은 마음 아픈 일일수록 운명처럼 커다래진다. 주워 온 사소한 사물들을 내가 간직하는 것은 추억이소중해서가 아니라, 사소함이 이토록 커져간다는 것을 잊지 않고 싶어서다. - P144
인간은 고통에 관한 한 무력하다. 나쁜 말은 육체에 새겨진 통점을 아주 쉽게 건드리고 상승작용을 한다. 육체에 내장된통점은 나쁜 말에 순발력 있게 반응한다. 인간이 고통을 잊을 수 있다면, 그것은 고통을 망각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고통의 숙주가 되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잊기보다는 익숙해지기. 고통의 숙주가 되어간다는 것은, 통증의 수위만큼을 인내심으로 제방을 쌓아두는 행위이다. 인내심이라는 제방은 한꺼번에무너져버리거나 혹은 서서히 균열이 간다. 결국 인내심은 거짓말의 또 다른 얼굴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 언젠가는 그렇게 된다. 사랑 가득했던 과거완료형의 말들이 오히려 기억하기조차 끔찍한 거짓말과 같아지는 순간. - P164
쉽게 전화를 걸고 쉽게 전화를 받고, 쉽게 한숨을 섞고 쉽게걱정을 하고, 쉽게 위로를 하고 쉽게 눈물이 난다고 말하는 오래된 벗처럼, 나는 쉬운 얼굴이 되었으면 한다. 쉽게 읽히는 글처럼쉬운 얼굴이 되었으면 한다. 바라보는 것에도, 듣는 것에도, 입술을 떼는 것에도, 헤아림도 없고 헷갈림도 없고 헤맴도 없었으면한다. 쉽게 불러내어 만날 수 있는 벗처럼 쉽게 드는 잠처럼. 행복 같은 게 저 멀리 있는 듯하여 부지런히 그쪽으로 달려가야 할 것 같은 피로함. 저쪽으로 달려가다 매번 넘어져버리는 삶. 넘어져, 흰 셔츠호주머니에 고이 넣어둔 버찌, 양손 가득 소중하게 들고 있던 토마토가 뭉개져버리는 이번 가을은 호주머니가비어 있었으면 한다. 양손 모두 허전한 채로 비어 있었으면 한다. 달려갈 곳도 없이 그냥 텅 비었으면 한다. - P171
히말라야에 갔을 때였다. 지금보다 세상이 좀 더 녹록해 보이던 때였다. 세상에는 일말의 가능성이 새벽녘 희미한 빛처럼 푸르게 존재했고, 내 영혼에도 그 정도의 푸름이 있던 때였다. 길고긴 밤엔 할 일이 없어 지루할 테니 두꺼운 책을 들고 가라는 누군가의 충고를 듣고서, 쉼브르스카의 시집을 배낭에 넣어 갔다. 밤마다 몇 편씩 읽었다. 몇 편 읽으면 스르르 잠이 왔다. 지루해서였다. 그녀의 시를 읽으며 나는 결핍감을 느꼈다. 아름다운 이미지와 매혹적인 시어가 부재했기 때문이다. 멋이 있지 않았다. 말맛의 쾌락도 잘 모르는 고지식하고 답답한 한 시인의 목소리가 잔소리하는 교감 선생처럼 거드름을 피우며 배어 있었다. - P173
쉼브르스카의 시집에도 성공하지 못한 히말라야 원정에 대한기록이라는 시가 있었다. 모닥불을 앞에 두고 나는 이 시를 친구에게 읽어주었다. 히말라야 원정에 실패했기 때문에 쓰인 시덕분에, 무언가에 실패했기 때문에 태어난 지상의 아름다운 예술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배낭을 끌러 시집을 책꽂이에 다시 꽂고, 나는 쉼브르스카를 잊었다. - P174
어느 날, 나도 모르게 일기에 이런 문장을 적게 됐다. 사실은모든 시에는 가짜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나는 시의 진실됨에대해 비관하는 사람에 속한다. 시의 미묘한 나약함에 대해서 어떤 때는 눈물겹고 어떤 때는 지겹고 어떤 때는 그게 진짜 가능성같지만, 사실은 대체로 그게 참 치욕스럽다. 그 치욕이 내 발가락에서 발아하여 허벅지를 타고 허리를 감고 가슴을 스쳐 목덜미즈음으로 스멀스멀 기어오르기 시작할 때에, 위의 문장을 무심고 적었다. 적어두고 보니 기시감이 들었다. 쉼보르스카의 시집을 펼쳐보았다. 사실상 모든 시에는 ‘순간‘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있다 ‘사실상 모든 시에는」라는 문장을 발견했다. 어느 날은 새벽 네시에 10cm의 〈새벽 네시〉라는 노래를 들으며, 새벽 네시의 가능성에 대하여 글을 쓰고 있었다. 새벽 네시는 하루가 얼마가 남았는지를 생각할 수 없는 곤란한 시간이지만, 하루가 시작되려면얼마나 남았는지를 생각하게 되는 설레는 시간이다. 하루 24시간중에 그나마 일말의 가능성이 있는 미묘한 시간인 것이다. 얼마나 남았는지와 일말의 가능성, 이것 역시도 쉼브르스카 시 [선택의 가능성]에서 본 문장이었다. - P175
의 가능성」에서다시, 쉼보르스카를 읽었다. 오후 네 시쯤 책상에 앉아서 읽기시작하여 새벽 네 시까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로, 단숨에 읽었다. 연필을 들고 얼마나 많은 밑줄을 그었는지 모른다. 페이지 귀퉁이를 얼마나 많이 접었는지 모른다. 그 히말라야에서 나는 대체 쉼보르스카의 무엇을 읽은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아름다운이미지와 매혹적인 시어에 대한 결핍감을 왜 느꼈는지, 내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 지루한 논문에서나 나올 법한 어떤 단어들이, 아버지의 입술을 통해서나 들었을 법한 고루한 단어들이 내가 좋아하던 시들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었던 무미건조한 플롯들이 페이지마다 소신에 찬 어조 위에 얹어져 있었다. 처음 느꼈던 결핍감은 그 결핍을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내고야 마는 소신으로 다가왔다. - P176
나의 육체에도 푸른 빛이 점등되고 있었다. 물속에 풀려나가는 푸른 잉크 한 방울처럼, 푸른 멍 하나가 온몸에 번져갔다. 나는 푸른 멍이 든, 불길한 사람이 되어갔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누군가 내게 편지로 물었다. 이것은 내가 다른 이들에게 묻고 싶었던 바로 그 질문이었다.
또다시, 늘 그래왔던 것처럼, 앞에서 내내 말했듯이, 이 순진하기 짝이 없는 질문보다 더 절박한 질문은 없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20세기의 마지막 문턱에서」에서 - P178
우리는 알고 있다. 봄날에 내렸던 어이없는 폭설도 극렬한 투쟁임을, 아스팔트 균열 사이를 비집고 나온 잡풀도 투쟁하는중임을 엉뚱한 행동, 기괴한 상상력, 불편한 공간, 까칠한 성격등도 실은 투쟁의 산물이다. 우울하고 슬프며, 서럽고 괴로워 흐물대는 우리의 실상도 실은 투쟁의 산물이다. 이 기괴한 모습을지닌 텍스트, 이 우울한 모습으로 무장된 사람을 극구 옹호하는 것도 우리에겐 투쟁의 일부다. 여기엔 싸우고 이겨서 쟁취해낼 거란 의지 따위는 없다. 낙오를 각오한다는 의지 또한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이렇게밖에는 할 수 없다는 천성과 이렇게 해야만 내가 조금은 행복해진다는 진심이 있을 뿐이다. 내팽개쳐진, 인간의 천성과 인간의 진심을 사모하기 위해 삶을 낭비해도 괜찮다는, 투쟁이 있을 뿐이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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