木馬와 淑女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生涯와

  木馬를 타고 떠난 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木馬는 主人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像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少女는

  庭園의 草木 옆에서 자라고

  文學이 죽고 人生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孤立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女流作家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燈臺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未來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木馬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意識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靑春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人生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雜誌의 表紙처럼 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木馬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박인환 시집[목마와 숙녀 <槿域書齋 1976>]중에서


그러나 결국 하룻밤이 무엇이란 말일까? 짧은 시간에 불과하다. 특히 어둠이 빨리 옅어지고, 그렇게나 일찍 새가 노래하고, 수탉이 울고, 혹은 파도의 희미한 녹색 골이, 색깔이 변하는 이파리처럼 생기를 띨 때는 그러하다. 하지만 밤은 밤으로이어진다. 겨울은 밤들을 한 묶음 움켜쥐고는, 지칠 줄 모르는손가락으로 똑같이 공평하게 나눠 준다. 밤들이 길어진다. 밤들이 어두워진다. 어떤 밤들은 밝은 행성을, 환히 빛나는 금속판을 높이 치켜든다. 비록 황량해졌지만 가을 나무들은 차가운 성당 어두운 구석에서 환히 빛나는, 갈가리 찢어진 전승 깃발처럼 섬광을 띤다. 그 구석의 대리석에 황금으로 새긴 글자들은 전장에서의 죽음과 멀리 인도의 모래 속에서 하얗게 변색되고 바싹 마른 뼈들을 묘사한다. 가을 나무들은 추수철 노란 달빛 속에서 어렴풋이 빛나고, 그 빛은 노동의 에너지를 숙 - P206

성시키고, 그루터기를 매만지고, 파도를 몰아와서 새파랗게해안에 철썩이게 한다.
이제 인간의 참회와 그 온갖 노고에 감동을 받은 듯, 성스러운 선(善)이 커튼을 열고 그 너머에 홀로 우뚝 곧추선 토끼 같은 형체, 부서지는 파도, 흔들리는 배를 드러내는 듯하다. 우리에게 자격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은 언제나 우리 것이어야 하리라. 하지만 슬프게도, 신성한 선은 끈을 홱 잡아당겨 커튼을닫아 버린다. 그 광경은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쏟아지는 우박으로 자기 보물을 덮어서 부수고 뒤죽박죽으로 해 놓아서, 보물이 혹시라도 무사히 돌아오거나 우리가 그 파편들로완전한 전체를 만들어 내거나 혹은 어수선하게 흩어진 조각들에서 진실의 명료한 글자들을 읽는 일은 있을 수 없어 보인다.
우리의 참회는 그저 흘끗 봐줄 만한 가치밖에 없으니까. 우리의 노고는 그저 잠시 유예해 줄 만한 가치밖에 없으니까.
- P207

그렇게 아름다움이 그리고 정적이 지배했고, 더불어 아름다움 그 자체의 형상을 만들었다. 삶이 떠나 버린 형상이었다.
그것은 기차 창문에서 내다보인, 멀리 떨어져 있는 저녁나절의 연못처럼 고적했다. 저녁 무렵 어슴푸레한 그 연못은 너무나 빨리 사라져 버려서 비록 한 번 보였을 뿐이지만 그 고적감을 잃지 않았다. 아름다움과 정적이 침실에서 손을 맞잡았고,
엿보기 좋아하는 바람과 끈적끈적한 바닷바람의 부드러운 코가, 덮개를 씌운 주전자들과 시트에 덮인 의자들 사이를 문지르고 킁킁거리면서 거듭 질문("이 색깔이 바랠까? 부서져 버릴까?")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그 질문에 우리는 계속 남아 있을거라고 대답할 필요가 거의 없는 듯, 그 평화로움과 무심함,
순수히 응집된 공기는 거의 방해받지 않았다. - P210

 그런 거울들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구름들이 끊임없이 바뀌고 그림자가 생기는 불안정한 물웅덩이들에, 꿈들은끈질기게 남아 있었다. 갈매기, 꽃, 나무, 남자와 여자, 그리고흰 대지가 스스로 선언하는 것 같았던(그러나 의문을 제기하면즉시 철회하는 듯했던) 선이 승리하고, 행복이 만연하고, 질서가 지배하리라는 기이한 암시에 도무지 저항할 수 없었다. 혹은 어떤 절대적인 선이나 수정 같은 강렬함을 찾아서, 익히 아는 쾌락이나 미덕과는 무관하고 가정생활의 일상적인 과정과도 동떨어진 것, 소유한 사람에게 안정감을 줄 모래 속 다이아몬드처럼 홀로 확고하고 밝게 빛나는 것을 찾아서 이리저리방랑하려는 특이한 충동에도 도무지 저항할 수 없었다. 더욱이, 부드럽게 다가온 봄은 벌들이 윙윙거리고 각다귀들이 춤추는 가운데 온몸을 망토로 휘감고 눈을 베일로 가리고는 고개를 돌렸고, 지나가는 그림자들과 흩날리는 빗줄기 속에서인간의 슬픔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 P216

하지만 혼수상태에서 잠을 자고 있어도 그 여름의 후반이되자 망치를 펠트 위에 규칙적으로 내리치는 듯이 무디고도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반복되는 충격으로 숄이 더 풀렸고 찻잔들에 금이 갔다. 마치 어떤 거인이 고뇌에 차서 큰 비명을 질러 대는 바람에 찬장 안에 늘어선 컵들이 흔들리는 듯이 이따금 찬장 속에서 유리잔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러고 나면 다시 정적이 감돌았고, 그런 다음에는 밤마다, 때로는 장미들이 화려하게 피어 있고 햇빛이 벽 위에 선명한 형체를 드러내는 평범한 대낮에도, 무언가 떨어지는 쿵 소리가 이정적 속으로, 이 무심함 속으로, 이 완전무결함 속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 P217

그 계절에 바닷가로 내려가 거닐면서 바다와 하늘에게 어떤 전갈을 알려 주었느냐고 혹은 어떤 환영을 확인했느냐고물었던 사람들은 흔히 드러나는 신의 은총들(바다 위 석양, 새벽의 어슴푸레한 빛, 떠오르는 달, 달을 배경으로 떠 있는 고기잡이배들, 풀을 한 움큼씩 쥐고 서로에게 던지는 아이들) 가운데서 이명랑함이나 평온함과 어울리지 않는 것을 주시해야 했다. 가령 잿빛 배가 고요한 유령처럼 왔다가 떠나갔다. 바다의 잔잔한 표면에는 그 밑에서 뭔가 보이지 않게 끓어오르다가 피를흘린 듯이 자줏빛 얼룩이 져 있었다. 더없이 숭고한 사색을 유도하고 더없이 안온한 결론으로 이끌어 가리라고 기대되는풍경에 이처럼 침입해 들어온 것들 때문에 그들은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덤덤하게 보아 넘기거나, 그것들의 의미를 그 풍경에서 지워 버리는 건 어려웠다. 바닷가를 산책하면서 외부의 아름다움이 내면의 아름다움을 반영하고 있다고 계속 경이를 느끼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 P218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여자 혼자서 하기에는 일이 너무 많았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기는 아이들 방이었지. 아, 너무 축축해서 회반죽이 떨어져 나가고 있구나. 그런데 대체 무엇 때문에 저기에 짐승의 두개골을 걸어 놓은 것일까? 그 두개골에도 곰팡이가 슬었다. 다락방마다 쥐들이 들꿇고, 빗물이 새어 들어왔다. 하지만 램지 가족은 사람을 보내지도 않았고, 직접 와보지도 않았다. 자물쇠 몇 개가 떨어져나가서 문들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녀는 어스름 속에서그 집에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여자 혼자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나치게 할 일이 많았다. 움직일 때마다 다리가 삐걱거렸고, 신음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녀는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고는 열쇠를 자물쇠에 넣고 돌렸고, 그 집을 닫히고 잠긴채로 내버려 두었다. - P225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그 소리는 귓전에 닿았다가 잦아들었다. 개 짖는 소리와 양 울음소리는 산발적으로 들렸지만 어쩐지 서로 연결되었고, 곤충이 윙윙거리는 소리와 잘린 풀들이떨리는 소리도 서로 제각각이었지만 어쩐지 조화를 이루었으며, 귀에 거슬리는 풍뎅이의 붕붕 소리와 삐걱거리는 바퀴 소리도 시끄럽고 나지막하지만 신비롭게 결합되었다. 귀를 기울여 모아 들을 때, 늘 조화를 이룰 듯한 이 소리들은 분명히들리는 법도 없고, 결코 완전한 조화를 이루지도 않는다. 이윽고 저녁이 되어 하나씩 둘씩 소리들이 사라지고, 조화는 비틀거리며 스러지고, 정적이 드리운다. 해가 지면서 선명한 윤곽이 사라지고, 피어오르는 안개처럼 정적이 솟아오르고 고요함이 퍼져 나가고 바람이 잦아들었다. 나뭇잎들 사이에 가득퍼진 녹색과 창가에 핀 흰 꽃들에 어린 어슴푸레한 색을 제외하면 여기 빛 한 줄기 없는 어두운 곳에서 세상은 느즈러지게몸을 흔들고는 잠이 든다. - P232

그렇다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이 모두가 무엇을 뜻할수 있을까? 릴리 브리스코는 혼자 남겨진 후 커피 한 잔을 더가지러 부엌에 가야 할지 아니면 그곳에서 기다려야 할지를생각하면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어느 책에선가 보았던 이 말이 그녀의 생각을 막연히 드러냈다. 램지 가족과 함께 지내게 된 첫날 아침에 그녀는 자신의감정을 간결하게 정리할 수 없었고, 그저 공허한 망상들이 잦아들 때까지, 텅 빈 마음을 감추도록 그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없었다. 실로 긴 세월이 지나고, 램지 부인이 죽은 후에 돌아와서 그녀가 느끼는 것이 무엇일까?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었다. - P239

 왜 느끼지도 않는감정을 끌어내려고 늘 애써야 할까? 불경스러운 일이야. 고작해야 메마르고, 시들어 빠지고, 소진되어 버릴 뿐이야. 이들이나를 초대하지 않았어야 했어. 나는 오지 않았어야 했어. 마흔네 살이나 되어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는 일이야.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는 체하는 것을 혐오했다. 투쟁과파멸, 혼돈의 세계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붓밖에 없으므로, 일부러라도 붓을 들고 장난을 쳐서는 안 된다. 그녀는그런 일을 몹시 싫어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당신이 줄 때까지는 당신의 캔버스에 손을 댈 수 없소, 그녀에게 접근하며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제 그가 다시 탐욕스럽고도 얼빠진 듯한 얼굴로 다가왔다. 자, 그렇다면 그 일을 끝내는 편이 차라리 더 수월하겠군, 릴리는 오른손을 툭 떨어뜨리며 절망적으로 생각했다.  - P246

 그는 삼켜 버릴 대상을 찾는 사자 같았으며, 그의 얼굴에는 절박한 기색, 과장하는 기색이 어려 있어서그녀를 놀라게 했고 치맛자락을 그러모으게 했다. 그러고 나면 갑자기 그의 활력이 살아났고, 갑자기 빛이 타올랐으며 (그녀가 그의 구두를 칭찬했을 때) 일상적인 인간사에 대한 활기와관심이 되살아났다. 이런 상태도 지나가고 변하면서(그는 늘변하고 있고,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으므로) 마지막 단계로 나아갔다. 그 단계는 그녀로서는 처음 보는 새로운 것이었으며 자신의 과민한 반응을 부끄러워하게 만들었다고 그녀는 인정했다. 그는 근심이나 야망을 다 떨쳐 버린 것 같았고, 공감에 대한 기대와 칭찬에 대한 욕구는 다른 영역에 들어섰으며, 손에닿지 않는 그 작은 행렬의 선두에 서서 마치 호기심에 이끌린듯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과 말없이 나누는 대화에 빠져든것 같았다. 얼마나 특별한 얼굴인가! 대문이 큰소리를 내며닫혔다. - P256

그래, 그들이 갔어. 이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안도와 실망의한숨을 쉬었다. 휘어졌던 가시나무가 다시 튕겨서 그녀의 얼굴에 부딪히듯이 그녀의 공감이 자기 얼굴로 되돌아온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자신이 분열된 느낌이었다. 그녀의 한 부분은 저기로 이끌려 간 것 같았다. 안개가 낀 고요한 날이었고,
오늘 아침 등대는 무한히 멀게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다른 부분은 집요하게, 확고하게 여기 잔디밭에 붙어 있었다. 그녀는마치 캔버스가 둥실 떠올라 비타협적인 하얀 화폭을 눈앞에펼쳐 놓은 듯이 캔버스를 보았다. 그것은 냉정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온갖 조급함과 동요, 어리석음과 감정낭비에 대해서 꾸짖는 듯했다.  - P257

 죽을 때까지 폭정에 저항하기로 약속했음을. 그들은 불만감에 짓눌렸다. 그들은 강요받고, 명령을 받았다. 아버지는자신의 침울한 분위기와 권위로 또다시 자식들을 짓눌렀고,
자기가 원했기에 이맑은아침에 자신의 명령에 따라서 이 꾸러미를 들고 등대에 가도록 강요했고, 자기 나름의 만족감을위해서 죽은 사람을 기념하는 의식에 동참하도록 했다. 그들은 이것이 싫었기에 그의 뒤에서 꾸물거렸다. 그날의 즐거움은 이미 다 망가지고 말았다.
산들바람이 기분을 상쾌하게 해 주고 있었다. 보트는 한쪽으로 쏠리고 물결은 예리하게 갈라지면서 작은 녹색 폭포와물거품, 큰 폭포를 일으키며 멀어져 갔다. 캠은 물거품을 내려다보았고, 온갖 보물을 간직한 바닷속을 들여다보았다. 그 속도에 그녀는 매료되었다. 그녀와 제임스의 유대가 조금 약해졌다. 약간 느슨해졌다. 그녀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무척 빨리가는구나. 우리는 어디를 가는 걸까? 캠이 움직임에 매료되어있는 동안, 제임스는 돛과 수평선에 눈을 고정한 채 꿈쩍도 않고 키를 조종했다. - P270

 누군가 그에게 손을 내밀던 것을. 여자들이란늘 이렇다고 그는 생각했다. 여자들의 흐리멍덩한 마음은구제 불능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그녀 (자기 아내)도 그랬었다. 여자들은 그 무엇에 대해서도 명료하게 생각하지 못한다. 하지만 캠에게 화를 낸 것은 잘못이었다. 게다가 자신은 여자들의 이런 모호함을 다소좋아하지 않았던가? 이는 여자들이 지닌 특이한 매력의 한 부분이었다. 그는 이 아이가 자신에게 미소를 짓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딸은 겁에 질려 보였고,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는 손가락들을 꽉 움켜쥐고, 이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동정과 찬사를 이끌어 내도록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었던 자신의목소리와 얼굴, 표현이 풍부한 신속한 몸짓을 차분히 가다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아이가 나를 보고 미소를 짓게 할 것이다. 딸에게 건넬 단순하고 편안한 이야깃거리를 찾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야깃거리가 있을까?  - P273

 그래서 그녀는 지금도 한밤중에 분노로 몸을 떨면서 잠에서 깨었고, "이걸 해라.", "저걸 해라." 하는 그의 명령과 오만, "내게 복종해라." 하는 그의 지배를 기억했다.
그래서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평화의 망토에 감긴해안을 슬픈 눈으로 끈질기게 바라보았다. 마치 해안가 사람들이 모두 잠들어서 연기처럼 자유롭게, 유령처럼 자유롭게오갈 수 있는 것 같았다. 저기서는 사람들이 고통을 겪지 않아. 그녀는 생각했다. - P277

 그래, 그녀의 저런 모습을 틀림없이 본 적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는 회색 옷이 아니었고, 그렇게 고요하지도, 그렇게 젊지도, 그렇게 평화롭지도 않았다. 그 모습은 쉽사리 떠올랐다.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월리엄이 말했다. 하지만 아름다움이 전부는 아니었다. 아름다움에는 이런 형벌이 있다. 아름다움은 너무 쉽사리 다가오고,
송두리째 고스란히 다가온다. 그것은 삶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얼어붙게 한다. 붉게 물들거나 창백하게 질린 얼굴빛, 기묘한 찡그림, 스쳐 가는 빛이나 그림자 같은 동요된 기색은 잊히고 만다. 한순간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하지만 이후에는 언제나 보이는 독특한 면모를 이루는 것들. 이 모든 것을 아름다움으로 덮어 숨기는 일은 훨씬 더 간단했다. 그러나 그녀가 사냥 모자를 홱 눌러썼을 때, 혹은 잔디밭을 가로질러 달려갔을때, 혹은 정원사 케네디를 꾸짖었을 때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릴리는 궁금했다. 누가 내게 말해 줄 수 있을까? 누가나를 도와줄 수 있을까? - P289

여기저기서 이는 실오라기 같은 바람을 제외하면 너무나맑은 아침이어서 바다와 하늘이 온통 한 폭의 천을 펼쳐 놓은것처럼 보였다. 돛들은 하늘 높이 꽂혀 있고 구름들은 바닷속으로 내려앉은 듯했다. 바다 저 멀리에서 기선 한 척이 거대하게 소용돌이치는 연기를 공중에 뿜어대자, 연기는 장식적인곡선을 그리고 빙빙 돌면서 공중에 머물렀다. 마치 올이 고운망사천처럼 공기가 무언가를 붙잡아서 망사 안에 포근히 간직하다가 이리저리 살살 흔들어 대는 듯이. - P297

그러나그 순간 돛이 서서히 빙 돌더니 점차 부풀었고, 배는 몸을 흔들며 잠에 취한 상태에서 반쯤 깨어나 출발하려는 듯하더니그런 다음에는 완전히 정신을 차리고 파도를 가르며 내달렸다. 그 순간의 안도감은 엄청났다. 그들 모두 서로에게서 다시떨어져 나와 편안해진 것 같았고 낚싯대들이 팽팽히 뱃전 너머로 기울어졌다. 그러나 아버지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저 남몰래 교향곡을 지휘하듯이 신비스럽게도 오른손을 공중 높이 치켜들었다가 다시 무릎 위에 떨어뜨렸다. - P306

 그의 주머니 속에서 모서리들이 말려 올라간 그 책에 무슨 내용이 쓰여 있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들은 알지못했다. 그러나 그는 책에 몰두해 있었다. 그래서 그가 지금그러듯이 잠시 올려다보아도, 그 행동은 무엇을 보려는 것이아니라, 어떤 생각을 더욱 명확히 정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고 나면 그의 마음은 다시 날아서 책으로 돌아갔고 독서에빠져들었다. 그는 무언가를 인도하는 듯이, 혹은 많은 양 떼를얼러서 몰아가듯이, 혹은 좁은 오솔길에서 밀어제치면서 올라가듯이 책을 읽는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때로 그는 곧바로덤불에 뛰어들어 재빨리 헤치고 나아갔고, 때로는 나뭇가지에 찔리거나 가시나무에 눈이 멀 것 같았지만, 그런 것 때문에패배를 자인하지는 않으리라. 그는 이어지는 낱장들 너머로흔들리면서 계속 나아갔다. 그리고 그녀는 침몰하는 배에서탈출하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갔다.  - P311

그녀는 다시 바다를, 섬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나뭇잎 같은섬의 뚜렷한 윤곽이 사라지고 있었다. 섬은 무척 작았고, 무척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제는 바다가 해안보다 더 중요했다. 그들 주위에는 온통 일었다 가라앉는 파도뿐이었고, 어느 파도에 실려 온 통나무가 뒹굴었으며, 갈매기 한 마리가 다른 파도를 타고 있었다. 이 근방에서 배 한 척이 침몰했다고 그녀는손가락으로 물을 튀기면서 생각했고, 몽롱한 상태로 꿈꾸듯이 중얼거렸다. 우리는 각자 홀로 죽어 갔지. - P312

하지만 그럼에도 그에게서 뭔가 달라진 것을 느꼈다. 그들은 층계에서 마주치거나 하면 하늘을올려다보고 날이 맑겠다든가 하고 서로 중얼거렸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도 사람들을 아는 한 가지 방식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세부적인 것들이 아니라 윤곽을 아는 것. 정원에 앉아서 멀리 히스가 만발한 풀밭으로 흘러내리는 자줏빛 언덕 비탈들을 바라보는 것. 그녀는 이런 식으로 그를 알았다. 그가어딘지 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그의 시를 단 한 줄도 읽은 적이 없었지만, 천천히 낭랑한 시구로 이어지고 있음을 안다고 생각했다. 그의 시는 감미롭고 부드러웠다. 사막과낙타, 종려나무와 석양에 대한 시였다. 그의 시는 개인적 감정을 극도로 억제했다. 죽음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했지만, 사랑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초연한 면이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거의 필요로하지 않았다.  - P318

창문도 선명하게 보였다.
하얗게 칠해진 창문 하나와 바위 위 작은 녹색 덤불도 볼 수있었다. 어떤 남자가 나와서 안경 너머로 그들을 바라보다가안으로 들어갔다. 그래, 등대가 저런 거였군. 제임스는 생각했다. 이 긴 세월 동안 만 건너편에서 보아 온 등대, 그것은 살풍경한 바위 위에 서 있는 견고한 탑이었다. 그는 그것에 만족했다. 그 모습은 자신의 성격에 대한 모호한 감정을 확인해 주었다. 노부인들이 정원에서 자기들 의자를 끌고 다녔지. 그는 집의 정원을 생각하면서 생각했다. 예컨대 늙은 벡위스 부인은인생이 매우 멋있고 무척 감미로우며 그들은 무척 자랑스러워하고 무척 행복해야 한다고 늘 말했다. 하지만 사실 제임스는 바위 위에 서 있는 등대를 보면서 인생이 저 등대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는 다리를 꼭 웅크린 채 맹렬하게 책을 읽고 있는 아버지를 보았다. 그들 두 사람은 그것을 알았다. "돌풍 앞에서 질주하고 있다. 우리는 틀림없이 침몰할 것이다."
아버지가 이 말을 했을 때와 똑같이 그도 반쯤 소리 내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 P331

거기 있는 무언가에 의해 불현듯 생각이 난 듯 그녀는 재빨리 캔버스로 몸을 돌렸다. 거기 그녀의 그림이 있었다. 그래,
초록색과 푸른색 선들이 올라가고 가로지르면서 무언가를 시도했지. 이건 다락방에 걸릴 거야. 그녀는 생각했다. 결국은파괴되고 말겠지. 하지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녀는 붓을다시 잡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녀는 층계를 바라보았다.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캔버스를 보았다. 흐릿했다. 갑자기강렬하게, 마치 찰나의 순간 그것이 선명히 보인 듯이, 그녀는그 한가운데 선을 하나 그었다. 완성했어. 끝났어. 그래, 그녀는 극도의 피로감이 밀려오는 가운데 붓을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이제 그것을 보았어. - P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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