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물론이지. 내일 날이 맑으면 말이야." 램지 부인이말했다. "하지만 종달새가 지저귈 때 일어나야 할걸." 그녀가덧붙였다.
원정을 가는 것이 확정되기라도 한 듯, 어머니의 말은 아들에게 특별한 기쁨을 안겨 주었다. 어두운 밤을 보내고 한나절배를 타고 가기만 하면, 몇 년이나 지난 듯 오랜 시간 바라 마지않았던 그 놀라운 곳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섯 살 나이에도 그 아이에겐 이런저런 감정들을 서로 떼어 놓지 않고가까이 있는 현실에, 기쁘거나 슬픈 미래에 대한 예감을 덧씌우는 대단한 인간들의 속성이 있었고, 그런 사람들에겐 매우어린 시절에도 감정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어둠이나 광휘가발산되는 순간을 응결시켜 마음에 새겨 두는 능력이 있으므로, 마룻바닥에 앉아 아미 앤드 네이비 잡화점 상품 목록에 - P9

서 냉장고 사진을 오려 내고 있던 제임스 램지는 어머니의 말을 들은 순간 더없는 기쁨을 그 사진에 쏟아부었다. 그 사진에환희의 테두리가 둘러졌다. 손수레며 잔디 깎는 기계, 포플러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비 내리기 전에 하얗게 변하는 이파리들, 까악까악 울어 대는 떼까마귀, 부딪히는 빗자루, 사각거리는 드레스, 이 모든 것들이 마음속에 또렷이 채색되고 각인되어 그 아이는 이미 내밀한 암호와 은밀한 언어를 만들어 냈다.
그렇지만 인간의 나약함이 드러난 광경에 절로 찌푸려지는넓은 이마와 한없이 정직하고 티 없이 맑은 푸른 눈 때문에 그아이는 타협할 줄 모르는 엄격함의 화신처럼 보였다. 그래서그의 어머니는 냉장고 사진을 가위로 말끔하게 오려 내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붉은 옷에 담비 가운을 두르고 판사석에 앉아 재판하거나 국사가 위기에 처했을 때 엄중하고 중대한 기획을 지휘하는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 P10

어느 모로 보아도 자신보다 만 배나 더 나은(제임스의 생각에는) 아내를 조롱하면서 즐거워하고, 또 자신의 정확한 판단력에 은밀히 자부심을 느끼면서 신랄하게 웃을 때 말이다. 램지 씨의 말은 옳았다. 그의 말은 언제나 옳았다. 그는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느 누구(특히 자기 자식들)의 기쁨이나 편의를 봐주려고 사실을 임의대로 고치지도 않았고 불쾌한 말을 바꾸지도 않았다. 자기갈빗대에서 생겨난 자식들은 모름지기 삶이란 힘겨운 것이고, 사실이란 타협할 수 없는 것이며, 가장 빛나던 우리의 희망이 꺼지고, 부서지기 쉬운 우리의 배가 어둠 속에서 버둥거리며 전설적인 땅으로 나아가는 여정에는 (이 부분에서 램지 씨는 등을 똑바로 펴고, 작고 푸른 눈을 가늘게 뜨며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무엇보다도 용기와 진실, 인내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어린 시절부터 알아야 한다. - P11

존재의 결, 그 속으로 뒤얽혀 들어가는 분쟁과 분열, 이견,
편견 들. 아, 그런 것들이 이렇게나 일찍부터 싹트다니. 램지부인은 탄식했다. 그녀의 아이들은 너무나 비판적이었다. 그들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형제자매들과 함께 가지 않으려 했던 제임스의 손을 잡고 식당에서 나왔다. 맹세코, 그러지 않아도 사람들은 이미 서로 다른데, 그런데도 차이를 더 만들어내려는 것은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같았다. 지금 존재하는 차이들만으로도 차고 넘칠 지경이라고 그녀는 응접실 창가에 서서 생각했다. 이 순간 그녀가 떠올린 것은 부자들과 빈자들, 지체가 높은 자들과 낮은 자들의 차이였다. 혈통에 대해 생각해보자면 그녀는 내키지는 않더라도 혈통이 좋은 사람들을 존중하기는 했다. 자신의 핏줄에도약간 전설적이기는 하지만 대단히 고귀한 이탈리아 가문의피가 흐르고 있지 않았던가. 그 가문의 딸들은 19세기 영국의여러 응접실들에 흩어져서 매력적인 혀짤배기 소리를 냈고매우 자유분방하게 행동했다. 그녀의 재치와 몸가짐,  - P17

별안간 그는 깨달았다. 바로 이것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지금까지 본사람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것이다.
별빛이 빛나는 눈, 베일을 두른 머리칼에 꽂힌 시클라멘과야생 제비꽃…………. 이 무슨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부인은 적어도 쉰 살은 되었다. 자식이 여덟 명이나 있었다. 꽃들이 만발한 들판을 걸으면서 움튼 봉오리들과 갓 태어난 새끼 양들을 가슴에 품고, 별빛이 총총한 눈, 머리카락 사이로 지나는 바람………. 그는 그녀의 가방을 들었다.
"잘 있어요, 엘시." 그녀가 말했다. 그들은 거리를 따라 올라갔다. 그녀가 양산을 똑바로 들고 마치 모퉁이를 돌면 누군가를 만나리라고 기대하는 듯 걷는 동안, 찰스 탠슬리는 난생처음으로 유난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하수구에서 땅을 파던 남자가 일을 멈추고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팔을 늘어뜨린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찰스탠슬리는 특별한 자부심을 느꼈다. 바람과 시클라멘과 제비꽃이 느껴졌다. 난생처음 아름다운 여자와 걷고 있었으니까. 그는 그녀의 가방을 꼭 잡았다. - P25

그러고 보면 9월이었고, 그것도 중순이었으며, 저녁 6시가 지난 시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평소에 다니던 대로 천천히 정원을지났고 테니스 코트를 지나 억새밭을 지나서는 울창한 산울타리가 갈라진 틈새로 갔다. 활활 타오르는 석탄 화로처럼 붉은 트리토마가 호위하고 서 있는 산울타리 틈새로 만의 푸른 물결은 전보다 더 파랗게 보였다.
그들은 어떤 필요에 이끌려 저녁마다 늘 그곳으로 산책을나갔다. 마치만의 물결이 마른 땅 위에서는 정체되어 있던 생각들을 띄워서 출항시키고, 그들의 몸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같았다. 처음에는 고동치는 푸른색이 만에 넘쳐흘렀고 그와더불어 마음이 확장되고 몸이유영했지만, 다음 순간에는 주름진 파도 위에 내려앉은 가시처럼 뾰족한 어둠으로 억제되고 냉각되었다. 그러고 나면 거대한 검은 바위 뒤에서 거의 저녁마다 하얀 물이 분수처럼 간헐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 P35

 배나무 옆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는지금, 이 두 남자에 대한 인상들이 강렬하게 밀려왔고, 그녀의생각은 너무 빨라서 연필로 받아 적기 힘든 목소리를 따르듯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자신의 목소리였다. 그것은부정할 수 없고, 지속적이며, 상반되는 것들을 누가 일러 주지 않아도 줄줄이 늘어놓았으며, 그래서 배나무 껍질의 갈라진 틈과 옹이들마저 그 자리에서 돌이킬 수 없이 영원히 마음에 새겨졌다. 당신은 위대해요. 그녀는 속으로 그에게 말했다.
하지만 램지 씨는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는 마음이 좁고, 이기적이고, 허영심이 강하고, 자기중심적이에요. 그는 응석받이고, 폭군이에요. 그는 램지 부인을 죽도록 지치게 해요. 하지만 그에게는 당신에게 없는 것이 있어요 - P42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면서, 살아 있다는 것에 대체로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공감과 위스키, 자신의 고통스러운 모험담을 들어 줄 사람을 원한다 한들, 누가 그를 비난할 것인가? 누가 그를 탓할 것인가?
그 영웅이 갑옷을 벗고 창가에 멈춰 서서 자기 아내와 아들을쳐다본다면, 어느 누가 속으로 기뻐하지 않을 것인가? 처음에는 아득히 멀리 있지만 조금씩 가까워지고 마침내 입술과 책,
머리가 눈앞에 선명히 드러날 때까지, 자신의 치열한 고독과세월의 폐허와 별들의 소멸과 동떨어져 있지만 여전히 사랑스러운 그 모습을 바라본다면. 그리고 마침내 파이프를 주머니에 넣고 자신의 당당한 머리를 그녀 앞에 숙이면서 세계의 아름다움에 경의를 표한다면, 누가 그를 비난할 것인가? - P61

다가하지만 그의 아들은 그를 미워했다. 아버지가 가까이왔기에, 걸음을 멈추고 내려다보았기에, 그를 미워했다. 자신과 어머니를 방해했기에 그를 미워했다. 그의 의기양양하고숭고한 몸짓 때문에, 그의 당당한 머리 때문에, 그의 가혹함과 자기중심적인 면모 때문에 (그가 서서 자기에게 관심을 기울이도록 명령했기에) 그를 미워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버지가자신의 들떠 있는 감정을 울리는 소리를 미워했다. 그 소리는그들 주위에서 진동하면서 그와 어머니의 더없이 소박하고평온한 관계를 어지럽혔다. 제임스는 책을 뚫어지게 바라봄으로써 아버지를 다른 곳으로 걸어가게 하고 싶었다. 손가락으로 글자를 가리키면서 어머니의 관심을 되돌리고 싶었다.
아버지가 걸음을 멈춘 순간 어머니의 관심이 흩어지는 것을느끼고 화가 났던 것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어떻게 해도 램지 - P62

씨는 꼼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거기에 서서 공감을 요구하고 있었다.
아들을 팔로 감싸고 느긋하게 앉아 있던 램지 부인은 마음을 다잡고 반쯤 몸을 돌려 애써 일어나며, 빗발치는 에너지를,
한 줄기 물보라를 공중에 곧바로 쏟아 내는 것 같았다. 동시에 자신의 온 에너지가 응집되어 환히 타오르는 힘이 솟아난듯(그녀는 다시 양말을 집어 들고 조용히 앉아 있었지만) 생기 있고 활기차게 보였다. 그리고 이 감미로운 풍요로움에, 이 생명의 샘과 물보라에, 남성의 치명적인 불모성이 메마르고 적나라한 놋쇠 부리처럼 파고들었다. 그는 공감을 원했다. 그는 실패작이라고 말했다. 램지 부인은 바늘을 반짝이며 뜨개질을계속했다. 램지 씨는 그녀의 얼굴에서 조금도 눈을 떼지 않고자신이 실패작이라고 거듭 말했다. 그녀는 상대하지 않았다. - P63

그 즉시 램지 부인은 꽃잎 하나가 다른 꽃잎 속에 포개지듯온몸이 접히는 것 같았다. 기진맥진하여 무너져 내리면서 그녀는 극도의 피로감에 절묘하게 몸을 내맡겼고, 그림 형제의동화책28)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일 힘밖에 남지 않았다. 그동안 창조를 이루어냈다는 황홀감이, 완전히 늘어났다가 이내부드럽게 멈춘 스프링의 진동처럼 그녀의 몸속에서 고동치며지나갔다.
그가 걸어가는 동안, 이진동이 울릴 때마다 그녀와 남편을 감싸고 그 두 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것 같았다. 함께 울리는 높고 낮은 서로 다른 두 음조가 결합하면서 서로에게 주는 위안. - P65

자기들의 기호에 대해 품는 사랑이나 시인들이 자신들의 시구에 품는 사랑처럼 온세상에 퍼져 나가 인간을 향상하는 한부분이 될 수 있는 사랑이었다. 진정 그러했다. 그 부인이 왜그렇게 기쁨을 주었는지, 그녀가 아들에게 동화를 읽어 주는광경이 왜 과학 문제를 풀었을 때와 똑같은 희열을 자신에게주었는지를 뱅크스 씨가 말할 수 있었더라면, 그래서 그가 차분히 숙고해 보고 자신이 식물 소화기관에 관해서 확고한 사실을 입증해 보였을 때처럼 야만성을 순화하고 혼돈의 지배를 억제한 듯이 느꼈다고 말할 수 있었더라면, 세계는 틀림없이 그 기쁨을 공유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환희(달리 어떤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인가?) 때문에릴리 브리스코는 자기가 말하려던 것을 송두리째 잊어버렸다. 램지 부인에 대한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는 이 환희, 이 말 없는 응시 옆에서 무색해졌고, 그 응시에 대해 그녀는 깊이 고마워했다. 그녀에게 이 숭고한 힘.
이 절묘한 선물은 그 무엇보다도 큰 위안을 주었고, 삶의 당혹스러움을 덜어 주었으며, 기적처럼 삶의 무거운 짐을 들어 주었다. 그 응시가 지속되는 한 그것을 방해하지 않으리라. 바닥을 가로질러 수평으로 내려앉은 한 줄기 햇살을 끊고 싶지 않듯이,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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