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한순간 우리가 되는 데 실패했지만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온전한 인간이 우리들 사이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될수도 있었을 모든 것, 우리가 놓친 모든 것을 보았다. 그래서 한순간 다른 사람의 몫을 아까워했다. 마치 케이크를 자를 때처럼,
단 하나뿐인 케이크를 자를 때 자신의 몫이 작아지는 것을 지켜보는 아이들처럼.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파도The Waves』

부자가 되어서 행복해졌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미국 가수닐 다이아몬드 Neil Diamond는 돈 때문에 자신의 삶에 달라진 점은 별로 없다고 답했다. "돈을 쓰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뭘더 하겠어요? 점심을 두 번 먹을까요?"

남에게 나를 소개하면서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선생 또는 작가라거나, 습관이나 외모를 설명하거나, 가족이나 내가 사는동네, 고향에 관해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을 선택하건 그런 것들은 내가 누군지를 알려준다. 그러나 나는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나 자신을 보기도 한다. 그럴 때나는 내가 누구인지가 아니라 내가 누가 아닌지로 시선을 돌린다. 만약 과거에 뭔가가 달랐더라면 내가 살았을 삶들에 대해, 내가 될 수도 있었을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누구에게나 그런 과거의 순간들이 있다.  - P6

내가 현재 살고 있지 않은 삶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런데 나는 왜 내가 살지 않은 이 삶 또는 저 삶에 유독 집착하는 걸까? 또 왜 이 삶이 내 삶이 아니라는 사실은 전혀 개의치않는 걸까? 나는 발치료 전문의도 아니고, 조경사도 아니고, 플루트를 연주할 줄 모르고, 캐나다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다. 나는캔자스주에 살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내 영혼을 갉아먹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내가 아내만큼 너그럽지 않다는 것, 친구만큼 영리하지 않다는 것, 동생만큼 유머 감각이 없다는 것, 그리고 내가 젊지 않다는 것・・・. 이런생각들은 나와 함께 살아가고, 내가 집을 나설 때마다 따라나선다. 내가 어떤 사람이 아닌지 말할 때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이다. - P8

철학자 버나드 윌리엄스Bernard Williams는 내가 다른 사람이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매우 원초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기본적이고 지극히 본질적인 차원의 생각, 애초에 한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관한 생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그런 생각이 워낙 기본적이다 보니 우리는 여기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 위에 다른 것들이 쌓이고 그 생각은 감춰진다. 윌리엄스가 그런 생각이 막연한 것이 아니라 "매우 현실적"이라고 말할 때지나치게 강조하는 듯한 느낌이다. 오히려 그것이 윌리엄스가 스스로에게 애써 일깨워 줘야 하는 사실인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이렇듯 살지 않은 삶이 자연적이면서도 애매한 관념이다 보니 글로쓰기가 쉽지 않다. 때로는 내 생각들이 말로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멀리 그리고 깊이 나아간다. 때로는 너무나 진부해서 차마글로 옮길 수가 없다. 이런 어려움을 감안하면 내가 문학으로 눈을 돌린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심리학자와 철학자도 살지 않은 삶을 연구하지만, 작가들이야말로 살지 않은 삶의전문가다. 살지 않은 삶은 언어의 일반적인 관행을 혼란에 빠뜨린다.  - P9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L‘insoutenable légèreté de l‘étre』에서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는 이렇게 말한다. "내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나의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들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인물을 똑같이 사랑하고, 또 모든 인물을 똑같이 두려워한다. 모든 인물은 각각 내가넘지 않고 돌아섰던 경계 너머로 나아간다. 내가 가장 끌리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 넘어선 경계다(그 경계에서 ‘나‘는 끝난다). 왜나면 소설이 파헤치는 비밀은 그 경계 너머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소설의 실제 이야기가 펼쳐지면, 그 이야기가 펼쳐지는 페이지마다 실제 이야기와는 다른, 그렇게 되지는 않았지만 될 수도있었을 이야기를 전하는 여백도 함께 생겨난다. 그것은 희곡, 영화, 시도 마찬가지다. 허구는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현실을 담고있으면서도 우리의 것과는 조금씩 다른 현실을 보여준다. - P10

살지 않은 삶에 대한 이야기에는 여행이 많이 나온다. 등장인물이 집을 떠나거나, 하천을 따라 내려가거나, 기차를 타거나, 택시에 합승하거나, 낯선 대륙으로 날아간다. 이렇게 여행을 하는것이 놀랍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길에 관한 이야기들이지 않은가.
그러나 의아한 모티프들도 있었다. 처음 살지 않은 삶에 관한 이야기들을 살펴볼 때는 다양한 신들이 자꾸 등장하는 것이 눈에띄었다. 무대에 직접 나서지는 않더라도 날개를 펄럭이며 계속 맴돌았다. 도대체 왜일까?  - P11

살지 않은 삶에 대한 책을 쓰다 보면 당연히 쓰지 않은 책에관해 생각하게 된다. 다룰 수 있었던 모든 주장들, 갈 수 있었던모든 방향들, 다시는 열어보지 않을 게 뻔한 컴퓨터 폴더에 남겨진 모든 자료들. 나는 다른 나라 문학에서는 이 주제를 어떻게다루는지 살펴보지 않았다. 미국이나 유럽 문학에 비해 영국 문학에서 더 흔히 접할 수 있는 주제라고 생각하지만 확실하지는않다. 내가 계획했던것만큼 영화를 많이 살펴보지는 않았다.  - P15

내 삶에 시작과 끝이 있다는 생각에 나는 기꺼이는 아니더라도 그럭저럭 익숙해졌다. 나는 길을 따라 걷는 중이다. 어느 날길을 걷기 시작했고, 어느 날 멈출 것이다. 그러나 책의 페이지처럼 길에도 여백이 있고, 페이지의 여백처럼 길의 여백도 한계를 표시하는 역할을 한다. 내 삶에 끝이 있고 언젠가는 끝난다는 미래의 한계만이 아니라 지금 이순간에도 내 삶에 한계가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나는 하나의 삶, 이 삶을 산다. 이 삶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삶 이외의 다른 삶도 없다. 나는 나 자신일 수밖에 없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왜 내게는 이것이 아주 큰 깨달음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내가 갈 수 있었던 길이 너무나 많았고,  - P17

내가 살 수 있었던 삶이 너무도 많았다. 그런데도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6월의 어느 화창한 날,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 거주하는 중년 남자로, 폭이 좁은 이 책상 앞에 앉아 산딸나무가보도에 드리운 그늘에서 노는 두 아이를 내다보면서 미지의 독자에게 이 글을 쓰고 있다. 확률적으로 따져본다면 정말 기막힌우연 아닌가?
나는 나 자신과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친밀하고, 그 친밀함 안에서 나는 혼자다. 내 기억은 나만의 것이다. 그해 초봄 어느 저녁에 리치먼드가의 들판을 가로질러 막 꽃망울을 터뜨린개나리들을 헤치고 달렸고, 친구가 바로 등 뒤까지 바짝 따라붙었고, 종아리가 터질 것 같았고, 휘어진 가지가 날아들어 온몸을 때렸고, 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굴렀고・・・ 나 이외에는 그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은 기억들이다. 그런 경험들이 곧 나다. 그렇게말하고 싶다.  - P18

 그리고 시 전체의 마지막 행의 첫 단어로 돌아온다. 매번 새로운 "그리고"가 나올 때마다 나는 시가 이끄는 길을 따라 또 한 걸음을 내딛는다. 그런데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내 귀는 앞서 나왔던 모든 "그리고"를 떠올린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이미 읽은 것들을 품고 간다.
나는 화자와 마찬가지로 미래로 발걸음을 내디디면서도 과거를완벽하게 떨치지는 못한다.
그런 반전이 운문의 일이다. 시는 반복적으로 회귀하면서 완성된다. 그런데 갈림길에서 두 길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으로 시작한 시가 왜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걸까?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들과 우리가 하는 이야기들은 어떻게 연결되는 걸까? 이런 것들이 프로스트의 시구 사이에서 내가 찾은 질문들이다. - P24

 하루를 보내는 동안 어떤 식으로든 잠시멈추고 성찰할 시간을 낼수있다. 우리는 잠시 멈추고, 그 자리에서 시선을 밖으로 돌려 우리가 없는 곳을 본다. 물론 책을 읽는다는 것도 이와 같다. 우리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확실하게 가늠할 수 없는 곳에서 허구의 인물들은 조용히 우리 자신을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살지 않은 삶에 대한 이야기들은 특정 유형의 사고와 감정을부추기고, 특정 유형의 사고와 감정을 차단한다. 어떤 질문들은제기하고, 어떤 질문들은 감춘다. 어떤 경험들은 증폭하고, 어떤경험들은 덮어버린다. 우리가 굳이 이런 식으로 삶에 대해 생각할 이유는 없으며, 대개는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잠시 당신의 삶이 갈림길이 아닌 포커게임이라고 생각해보자. 다른 플레이어들이 어떻게 했는가에 따라 당신에게 이런저런 기회가 생겼을 것이고 게임이 잘 풀렸을 수도, 잘 풀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 P29

이런 말을 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살지 않은 삶은 중년의 관심사다. 살지 않은 삶이 있으려면 먼저 삶을 어느 정도 살아야만한다. 미래에 다른 삶을 살 가능성들이 거의 사라졌다고 느낄 때면 어김없이 과거에 선택하지 않은 길들을 떠올리게 된다. 존 치버John Cheever가 어두운 숲 속에서,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몰라 잠시 멈춰 선 것은 그가 인생의 중반에 다다랐을 때였다. - P47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여기 당신이 있다.
누구나 알듯이 현대 문화는 흥미롭게도, 그리고 진부하게도젊음에 열광한다. 지난 수십 년간 로맨틱 코미디, 청소년 소설, 성장소설 등이 성행했다. 그래서 청년기가 이야기가 되기에 최적인 시기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현대인이 푹 빠진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는 대개 노인이다. 젊음에 관한 노래를 작곡하는 것은 중년들이고, 그들은 그 노래를 부르면서 젊은이들을 바라본다. 우리는 삶의 경로가 확정되기 전 주어진 선택지들을 비교하고 위험을 가늠하던 그 시절을 어떤 식으로든 되돌아본다. 청년기는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아서 선택이 의미가 없는 유년 시절도 아니면서 모든 것이 확정되어서 선택지가 사라진중년도 아닌, 다양하고 새로운 가능성들로 넘치는 세계다. 버지니아 울프의 『파도』에서는 한 등장인물이 이렇게 논평한다. 젊은시절에는 "모든 것이 부글부글 끓고 요동쳤다. 우리는 무엇이든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변화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 우리는 묶였다…. 우리는 지금을 선택했다. 때로는 누군가 우리를 대신해서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떤 집게 같은 게 목 아래쪽을 꽉 잡고 있는 게 느껴진다." - P49

우리는 이미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은 살펴보았다. 우리가 다룬 이야기들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우리가 내다볼 수 있는 길, 선로, 경로, 물길로 연결된다. 그래서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처럼 우리가 과거를 확실하게, 즉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처럼느껴지게 한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우리는 과거를 실제로 볼 수없고, 내가 아는 과거가 진짜 과거인지 확신할 수 없을 때가 더많다. 과거는 때로는 색과 모양이 제각각으로 비치는 어지러운만화경으로, 때로는 흑백사진으로, 때로는 냄새로, 때로는 피부를 따라 흐르다 마음을 옥죄는, 어디서 밀려왔는지 모를 감정의파도로, 때로는 얼굴에 번지는 작은 미소로 다가온다. 역광을 받은 텅 빈 도로처럼 아주 선명하게 다가오는 경우는 드물다. 이것이 신이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을 등장시킨 덕에 당신은자신이 살아온 삶에 비현실적인 확신을 갖고, 당신이 살지 않은삶에 그보다 더 비현실적인 확신을 가질 수 있다. - P56

 모두 격식을 차리지 않은, 꾸밈없는 일상의 목소리를 만들어낸다. 어찌 보면 아예 시 같지 않기도 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때로는 데니스가 질 좋은스카치 위스키 한 잔을 손에 들고 의자에 편안히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자신이 쓴 시를 되돌아보면서도 그 시의 모든 구석구석이 의미로 충만한지, 그렇지 않은지를걱정하지 않는다. 그는 만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끔은 그런 예술성의 부재가 이 시가 올린 진정한 성과라는 생각이 든다.
순응함으로써 권위를 얻는 경우도 있다. 아마도 이 시는 그런 무심한 가벼움을 통해 순응의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이 시의 미덕일 것이다. 그것이 이 시의 의도라고치자. 이 시에 얼마나 만족하는가? 지금 이대로가 아닌 다른 시를 원하는가? - P64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물론 우리는 서로서로 분리되어 있다. 여기에 한 사람이 있고, 여기에 또 한 사람이 있다. 여기에 내가 있고, 거기에 당신이 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다면 이 당혹감에 휩싸인 화가에게 주어진 과제하나는 그런 당혹감을 우리도 똑같이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다.
우리도 화가처럼 그 수수께끼를 탐구하게 하려면 우리 안에 그런 분리되었다는 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그것은 시인과 소설가의 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인과 소설가의 매체는 공간적인것이 아니어서 화가처럼 물리적인 거리를 만들어내기 어렵다. 그런 거리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쉽게 묘사할 수도 없다. 이는 한계로 작용하지만 동시에 기회이기도 하다. 글 쓰는 작가에게도 나름의 자원이, 도구와 재료가 있고 작가는 그 자원을 활용해 비공간적인 거리를 잰다. 공간이 빠지면 거리는 비교의 문제가 된다.
유사성과 차이점을 찾아내는 것이다. - P73

나는 지금까지 화가와 시인이 인간의 보편적 특성인 단독성,
즉 우리가 서로서로 분리된 존재라는 사실에서, 그리고 그런 단독성을 이해하고 때로는 탈출하려는 인간의 시도에서 영감을 얻는다고 말했다. 물론 이런 단독성에 매료되는 건 화가와 시인만은 아니다. 소설가와 영화감독도 단독성에서 영감을 얻는다. 앞으로 더 살펴보겠지만 심리학자도 다른 삶을 테마로 하나의 산업을 일궈냈고, 철학자도 처음부터 다른 삶에 집착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모든 좋은 것을 다 갖춘 삶(마치 신처럼 좋은 것을 완벽하게 갖춘 삶)이라 할지라도 다른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면 그 삶을 선택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여전히 자신으로서 그 삶을 누릴 수 있어야만 그런 삶을 선택할 것이다." 아리스텔레스가 이런 주장을 한근거는 심리적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기를 포기하고 싶어 하지않는다. 그로부터 훨씬 뒤에 라이프니츠 Leibniz 는 같은 주장을 논리적으로 도출한다. "당신이 누구였는지를 모두 잊어야만 한다는조건이 붙는다면 중국의 왕이 되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것은 마치 신이 중국의 왕을 창조하면서 당신이라는 사람을 제거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 P78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할 때 나는 진정 무엇을 원하는걸까? 내가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일 리는 없다. 그것은 교체이지 변화가 아니다. 마침내 내가 망토를 펼력이며 왕좌에 앉고 왕관이 내 눈썹에 닿을 때, 그런 왕위 수여식을즐기는 나도 나의 일부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어느 부분인가? 나 자신에게 애착을 느낄 때 나는 나의 어느 부분에 애착을 느끼는 것일까? - P80

 엠프슨의 시선은 마르셀 프루스트『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의 한 구절에 닿는다. 소설의 화자가 우리 인간은 현재 다른 장소에 살면서도 특정 장소에서 우리가 살았던 삶을 기억하는 능력이 있다고지적하는 부분이다. 엠프슨은 프루스트가 매듭짓지 않은 질문을계속 이어간다. "한 장소(환경, 정신상태)에서의 삶은 언제나 견딜 수 없는 것이 된다. 두 장소에서의 삶은 환희가 된다. 그렇다면 이런 바람직한 전환은 둘이라는 숫자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믿어야 할까? n+1개의 장소에서 사는 것은 n개의 장소에서 사는것보다 무조건 더 가치가 있을까?" 엠프슨의 글은 우리가 어디에서 사는가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그는 우리가 말하고 쓰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왜 의미로 흘러넘치는 단어들을좋아하는 걸까? 왜 어떤 사람들은 평생 그런 단어들을 발굴하는가? 엠프슨은 이렇게 결론 내린다. "프루스트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그는 스타일에서 얻는 즐거움을 바로 그렇게 풀면서묶는 이중성으로 계속해서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통합된 것들은 구문에서 하나로 묶인다.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가치 이론을 제외하면 n+1 이 n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믿어야만 한다." - P83

 그는 은유를 설명하기 위해 은유를 만들어낸다. 그의 구문은 그가 논리적으로 통합한 것들을 하나로 묶는다. 나는 그가 이런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논리적 주장의결혼식에 은유의 밀월이 축복을 내리면 그 결과로 태어난 후손은 우리를 묶는 동시에 풀어준다. 구속하는 동시에 해방한다. 단어가 그러하듯이, 자녀가 그러하듯이. - P84

집에 있으면서 학교에도 있다. 두 장소, 환희. 아이는 자신의말 속에서 자신에게 없는 모든 것을 가진다. 모든 것을 다 한다! 아이의 말을 들은 필립스는 아이가 하지 않은 모든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만 전부 따라갈 수가 없다. 필립스는 의미와공존하고 있지만 이를 소유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래서 아주짜릿하다.

내가 갈 수도 있었던 다른 길들을 상상하는 것은 나를 위한더 많은 삶들을 상상하는 것이다. 이것 저것, n+1. 나는 이 세계 안에서 또 다른 세계, 내가 거의 만질 수 있고 거의 맛볼 수있는 세계를 본다. 그 다른 세계는 이 세계의 일부다. 그림자가 사물의 일부이듯, 기억이 인식의 일부이듯, 꿈이 일상의 일부이듯. - P85

나는 아무도 아니면서 특별하다. 흔하지만 고립되어 있다. 나는 내가 유일하고 분리된 존재라고, 그리고 아마도 구속되고 갇혀 있는 존재라고 느낄지 몰라도, 나는 또한 여러 집단에 속한구성원이기도 하다. 나와 유사한 사람들, 그리고 내 삶과 유사한 삶, 나의 삶일 수도 있었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집단을 이룬다. 아마도 그 집단은 재럴과 재럴의 단짝 친구만으로이루어진 작은 집단일 수도, 모든 사람으로 이루어진 큰 집단일수도, 모든 살아 있는 생명으로 이루어진 엄청나게 큰 집단일수도 있다. 대개 우리가 속한 집단들은 그 중간 어디쯤에 해당하는 집단일 것이다. 우리는 형제자매 또는 이복형제자매, 급우또는 동료, 한 여자의 연인, 같은 도시의 거주민일 수 있다.  - P88

초반에 나는 시가 의미의 직전까지 가는 한껏 고조된 경험을제공한다고 말했다. 이제 나는 시가 흔하면서도 고립된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절정의 경험도 제공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시를 이해하면서 경험하게 되는 한 가지(유일한 한 가지는 아니다)는 고립으로부터의 탈출이다. 난해한 시를 읽으면서 정신적폐소공포증에 빠진다. 조각난 생각들이 머릿속을 꽉 채운다. 그러나 시를 이해하기 시작하면 공간이 열리고, 빛이 들어오고, 빛과 함께 다른 사람들이 들어온다. - P89

소설을 읽는 행위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느끼는 애착을 탐색하는 방식 중 하나이다. 앤절라는 처음에는 스스로에게 만족했고, 다음에는 동네사람들을 내려다보면서 절망한다. 물론 사람이 스스로를 대하는 태도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스스로를 웃기다고 생각할 수도, 진지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무모하다, 실험적이다, 거만하다, 호기심이 많다, 편견이 많다. 가끔은지루하다 등 그 목록은 길다. 소설은 그런 태도에 대한 비전형적인 분류체계를 제공한다. 더 나아가 소설은 자신에게 충실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탐구한다. 소설 읽기에 충실하다는것은 우리 자신으로 있기에 충실하게 임하는 것의 알레고리가된다. - P93

참여한다는 것은 일부가 된다는 것이다. 다만 오직 일부만을경험한다. 나는 온전히 아우스터리츠에 있지 않고, 이각모를 쓰고 있지도 않으며, 결코 키가 작지도 않다. 나폴레옹의 입장이되어도 여전히 나인 채로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마치 참여가 의도적으로, 의식적으로 일어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가 소설을 읽는 동안 참여는 무의식중에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에마가 베이츠 양에게 무례하게 굴 때 나는 부끄러움을 느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내가 그런 감정을 인식하기 이전에 그런 감정을느낀다. 이런 참여를 나타내는 또 다른 단어는 공감이다. 공감은 이미 오래전부터 소설의 윤리적·미학적 덕목의 본질로 꼽혔다. 조지 엘리엇은 "예술은 삶에 가장 가까운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만 삶 자체가 아니라 삶에 가장 가까운 것이다. "경험을 증폭하는 방법이자 개인의 운명이라는 한계를 넘어 동지인 인간과의 접점을 늘리는 방법이다."  - P96

당신이 가장 외롭고도 외로운 때 악마가 그 틈을 파고들어 이렇게 말한다.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삶과 살았던삶, 이 삶을 당신은 한 번 더, 그리고 수도 없이 반복해서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삶에 새로운 건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당신이 이 삶에서 경험한 모든 고통과 모든 즐거움과 모든 생각과 한숨, 모든 형언할 수 없는 삶의 크고작은 것들이 당신에게 고스란히 되돌아온다. 그것도 같은순서와 속도로-이 거미와 나무들 사이로 비치는 이 달빛조차도. 그리고 이 순간과 나조차도 존재의 영원한 모래시계를 반복해서 뒤집고 또 뒤집는다. 그리고 그렇게 당신도, 그저 하나의 모래알이 될 것이다!" - P113

이런 말을 들으면 이렇게 말한 악마에게 달려들어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저주하지 않겠는가? 과연 한 번이라도 이런끔찍한 순간에 그에게 이렇게 답할 수 있을까? "당신은 신이요, 나는 이보다 더 성스럽고 황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고.

이 삶 이후의 새로운 삶도, 이 삶 이후의 다른 삶도 아니다. 오직 이 삶을 늘 똑같이 거듭해서 산다. 이 거미와 나무들 사이로 - P113

비치는 달빛까지, 모든 점에서 동일한 삶을.
아무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이 위협이라면, 오직 한 사람이 되는 것이 성과라면, 두 사람이 되는 것은 (심지어 그중 한 사람은캐리 그랜트) 꿈만 같은 일일 수 있다. 우리가 영화배우들을 보면서 환희를 느끼는 것은 그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쉽고자연스럽게 우리 인간의 능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의 능력을 발견했고, 그것은 바로 우리를 발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카벨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우리가 여전히 발견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허세와 비겁함의 가면 뒤에 숨은 우리를 누군가,
아마도 우리의 자기파괴를 파괴할 수 있는 신이 발견해줄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영화배우들을 보면서 환희를 느끼는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우리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된다는 것은 단독성에서 벗어나는 것을의미한다.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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