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말

내가 여성성을 맞닥뜨린 건 결혼 이후다. 낯선 생활 세계가 열렸다. 해주는 밥만 먹다가 밥을 해먹어야 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나는 집안일에 솔선하는 아내가, 그는 잘 도와주는 남편이 되었다.
그도 나도 똑같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으로 살다가 결혼을 했는데 가부장제 가족 제도에 편입되는 순간, 여자인 나는 계속 뭔가 불리했다. 자식의 배우자를 대하는 양가 부모의 태도도 달랐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울컥 치밀어 이불 뒤집어쓰고 울다 잠들곤 했다.
싸움보다 교화를 택했다. 여의도에서 잠실로 남편과 같이 출퇴근하면서 차 안에서 여성주의 책들과 고정희의 시집을 소리내 읽어주었다. 일상의 불평등 구조는 해소되지 않았다. 이론의 주입은 가능하나 감각의 세팅은 불가능했다. 두 아이를 낳았고 엄마가 되었다. 그때부터 공중 삼회전 난이도가 따르는 삼인분의 삶을 살았다. 밥도세 그릇, 빨래도 세 판, 청소도 세 번, 고민도 세 가지. 물론 남편은아이들과 놀이터에 나갔고 설거지를 자처했으며 배우자의 사적 생활을 지지했다. - P5

나는 싸움하는 사람으로 변했다. 공격 대상이 모호했다. 날마다 가슴에서 전쟁이 벌어졌고 혼자 치르는 전투에서 나는 매일 전사했고꿈처럼 깨어나 오늘을 살았다. 시가 무기였다. 둥그런 바가지 머리일 때부터 방바닥에 누워 주섬주섬 먹던 시 이전처럼 한갓 유희로 시를 읽을 수 없었다. 생이 고달플수록 시가 절실했다. 일을 마치고 늦은 밤 귀가하면 식구들은 잠들고 집은 난장판이 되어 있곤 했다. 식탁 위에는 라면 국물이 반쯤 남은 냄비와 뚜껑도 닫지 않은 김치보시기와 고춧가루 묻은 젓가락이 엑스자로 놓여 있었다. 남편과아이들이 벗은 양말은 발아래 낙엽처럼 채였다. 텔레비전은 저혼자 무심하게 떠들고 있었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 아무것도 손댈 수가 없을 때면, 나는 책꽂이 앞으로 가서 주저앉았다. 손에 잡 - P6

히는 시집을 빼서 시를 읽었다. 정신의 우물가에 앉아한 30분씩 시를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왜 그랬을까. 나는 기계적으로 일하는노예가 아니라 사유하는 인간임을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시를 읽으면서 나는 나를 연민하고 생을 회의했다. 생이 가하는 폭력과 혼란에 질서를 부여하는 시. 고통스러운 감정은 정확하게 묘사하는 순간 멈춘다고 했던가. 마치 혈관주사처럼 피로 직진하는 시 덕분에 기력을 챙겼다. 꿈같은 피안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남루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힘이 났다. 시가 주는 묘한 해방감의 정체가 무언지는 몰랐다. 그런데 친구가 소설에서 봤다며 조선조사대부 여인에게는 시가 짓기를 금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책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결혼은 항상 숙명과 같은 엄숙한 얼굴로 가시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아내는 그 울타리 안에서 순치된 가축처럼 고분고분 살아갈 뿐이다. 이것이 남권 사회의 순리다. 가장 무난한 방도는 회의하지 않는 일이다. 남권 사회에 있어서 여인의 회의는 독약이나 같다. 조선조 사대부 여인들에게 시가 짓기를 금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문학에 눈뜨는 것은 회의에 눈뜨는 일이 아닌가.
- 이영희의 소설 《달아 높이곰 돋아사(1권)》 - P7

문학에 눈뜨는 일은 회의에 눈뜨는 일이고, 회의에 눈뜨는 일은존재에 눈뜨는 일이었다. 시를 읽는 동안 나 역시 생각에서 생각으로 돌아눕고 곱씹고 되씹고 뒤척이기를 반복했다. 흔한 기대처럼 시 - P7

는 삶을 위로하지도 치유하지도 않는다. 백석 시인이 노래했듯이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할 뿐이다.
시는 일이 만족스러운 사람은 굳이 삶을 탐구하지 않을 것이다.
시가 내게 알려준 것도 삶의 치유불가능성이다. 니체가 말했듯 "상투어로 자신을 위로하는 끔찍한 재능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바닥까지 시는 깊게 내려간다. 옥타비오 파스의 말대로 시는 존재의 심층에 거주한다. 시를 통해 나는 고통과 폐허의 자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법을 고통과의 연결고리를 간직하는 법을 배웠다.
일명 진실과의 대면 작업. 어디가 아픈지만 정확히 알아도 한결 수월한 게 삶이라는 것을,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 오늘의 확실한절망을 믿는 게 낫다는 것을, 시는 귀띔해주었다. "인간은 자기가 어떻게 절망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알면 그 절망속에 살아갈 수 있다"는 벤야민의 말을 나는 시를 통해 이해했다. 시를 읽는다고 불행이 행복으로 뚝딱 바뀌지는 않지만 불행한 채로 행복하게 살 수는있다. 불행에 삶의 자리를 선뜻 내어주자 나는 싸움하지 아니하는사람이 되었다. 황동규 시인의 말대로 "시는 행복 없이 사는 훈련"
인 것이다. - P8

생에 울컥한 순간 일상을 추스르며 적어간 글 중 아직 어느 책에도실리지 않은 기록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학보와 《한겨레》에 가장최근까지 연재한 칼럼을 모은 것이다. 이 책은 서른다섯부터 마흔다섯을 경유하는 한 여자의 투쟁의 기록이다. 모성을 수행하는 엄마이자 존재를 이행하는 자아라는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삶의 조건 속에서 나는 분열했고 분투했다. "존재하는 한 이야기하라"는 페미니즘의 명제대로 말하기를 시도했고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싸움은 불가피했다. 팸 모리스 말대로 "모든 재현은 이데올로기적 갈등의 장또는 상반되는 관점들이 서로를 지배하기 위해 투쟁을 벌이고 있는언어학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언어와 현실의 투쟁을 거치며 자기언어를 더듬더듬 찾아갔고 그러는 사이 삼인분의 인격은 각자 분화했다. 딸아이 꽃수레는 미취학 아동에서 중학생이 되었고, 잠꾸러기아들은 군에 입대했고, 나는 글 쓰는 사람 은유가 되었다. - P11

싸울 때마다 질문은 탄생했다. 집안일부터 세상일까지 나의 울컥은 생의 질문이 되었다. 끝도 없고 두서없는 물음의 연쇄는 사람이사람답게 사는 세상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되었다. 내가 구상하는 좋은 세상은 고통이 없는 세상이 아니라 고통이 고통을 알아보는 세상이다. 이는 아주 일상적으로는 끼니마다 밥 차리는 엄마의 고단함을 남편과 아들이 알아보는 것이고, 음식점이나 경비실에서 일하는사람과 눈을 마주하는 것이다. 혹서기도 혹한기도 예외 없이 캐리어위에 방석 하나 깔고 앉아 깐 마늘을 파는 할머니의 다 닳아빠진 엄지손톱을 보면서 그의 삶을 가만히 헤아리는 일이다. 세월호에서 아직 나오지 못한 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문득 걸음을 멈추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2014년 4월 16일보다 세상이 느리게 돌아가는 것이다.
고통이 고통을 알아보고 존재가 존재를 닦달하지 않는 세상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 물음을 내려놓지 않는 한, 나는 계속 무언가와 싸우며 글을 쓰고 있을 것 같다. - P12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자아가 있다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아무런 이익도 추구하지 않고 스스로를 달고유화할 수 있는 능력일 것"이라고 엘렌 식수가 말했던가. 엄마가 내어준 부드러운 자아의 토양에 삶에서 길어낸 언어의 씨앗을 뿌렸더니, 그것이 신기하게도 책으로 자랐다. 내 거친 생각에 빛과 물을 부어준 귀한 인연들,
같이 시를 읽고 글을 쓰고 말을 나눠준 도반들, 이 책에는 그들의 체온과 지분이 들어 있음을 말하고 싶다. 싸울 때마다 투명해지는 모든 존재들의 ‘탈고유화‘의 여정 위에 이 책을 내려놓는다. - P13

다른 듯 같은 삶. 할머니와 어머니 세대에는 그 질곡이 더 심했으며, 주로 딸들이 목격자이자 피해자로서 그 원한을 간직한다. 약자에게 원한은 단 하나의 기억의 장소다. 대를 거듭해 매일 되풀이되는 어머니의 넋두리가 그의 입에서 나오다니, 뜨끔했다. 나는 사과했다. 너무 지랄해서 미안하다고. 그랬더니 선배는 그날의 대화로전시의 방향을 잡았다며 외려 고맙다고 했다. 큰언니가 듣고 있다가쓴소리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발전한다고 거들었다. 덜 민망했다. 집요하게, 치열하게, 고민하다가 가길 얼마나 잘했는지, 소주에 맥주를연거푸 마셔도 취하지 않은 밤이 얼마 만인지. - P29

결혼도 이혼도 인연을 쓰는 한 방편일 뿐이다. 플라톤의 말대로무엇이든 그 자체 단독으로 아름답거나 추하지는 않다. 그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실천의 미이고, 그것을 추하게 만드는 것은 실천의 비열함이다. 이혼도 그런 것 같다. 비열한 이혼도 아름다운 이혼도 있다. 그러니 권장할 일도 배척할 일도 아니다. 삶 전체를 위한 합리적인 골격을 짜는 하나의 과정으로 아픈 선택일 뿐이다. 삶의 어느국면에서 생을 담은 물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 단지 그것뿐이다.

이별은 언제나 예고 없이 온다는 것을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어 잊고 산다
어리석어 내 생을 담은 한 잔 물이
잠시 흔들렸을 뿐이다단지 그것뿐이다- 
정일근의 시 <그 후> 부분 - P24

- 김기택의 시 <풀인간적 성숙은 낯선 대상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혼란과 갈등을겪으며 자기와 세상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때 일어나는 것이다. 엄마라는 생태적 지위는 성숙에 이르는 여러 기회 가운데 하나일 뿐저절로 성불하는 코스가 아니다. 그나마 출산과 육아로 인한 고통의자산화가 가능하려면 어느 정도 문화적 자원이 있어야 한다. 애키우고 먹고사느라 하루하루 허덕이는 여성은 그럴 겨를조차 없다.
요즘은 소신 있게 출산을 거부하는 이들도 많다. 불임 여성도 느는 추세다. 그래서 애 낳은 여자, 애 안 (못) 낳는 여자의 일상의 구체적 고통을 외면한 ‘모성의 이상화‘는 참 나쁜 관념이다.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고 윤리적으로도 옳지 않다.
박 대통령이 세월호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애를 안 낳아봐서가 아니라 해결하지 않아도 권력을 유지하는 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권력을 떠받치는 것은 온갖 나쁜 관념에 휩싸여주변의 여린 소리를 듣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 주변 사람들이다. - P32

 자기 욕망을 일인칭 시점에서 구사할 수 있는 언어는 여전히 모자라다. 착한 여자는 천당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는 말대로, 일상의 금기는 넘나들지만 몸에 그은 선은 제자리다. 올여름‘그래도 될까‘를 되묻고 검열하다가 점잖지 못한 핫팬츠 두 개는 버렸고, 머리는 기장만 짧게 손질했다. 내 인생의 두발 자율화가 시행된 지가 언제인데 머리 모양은 중고등학생 때 그대로, 단발에서 어깨까지 길이를 무료하게 오간다. 꼭 한 번 빨간 머리를 원했지만 어느새 흰머리가 정수리부터 증식하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명동성당 첨탑이 보이는 2층 술집에서, 그날 우리는 늙기 전에 오프숄더 드레스 입고 송년 파티를 열어볼까 호기롭게 떠들었다. 술단지가 비는 동안 ‘남들이 뭐라든 입는‘ 장단지가 드러나는 반바지에서 ‘우리가 입어보고 싶은‘ 어깨가 내보이는 드레스로 논의가 진척됐다. 이게 어딘가 자못 대견하다. 저무는 여름밤, 여자들은 매미처럼 시끌벅적 ‘생의 언어‘를 배양했다. 오규원 시인의 시구처럼 "욕망의 성기이며 육체의 현실인 말"을 - P36

<본분 금메달>이 열렸던 설 연휴에 차례를 지낸 후 나는 제주도로 떠났다. 기름 냄새에 찌든 메스꺼운 기분에서 벗어나 옥빛 바다의 찬 공기를 쐬며 맑은 정신으로 명절을 보냈다. 결혼 후 처음 누리는 호사다. 며느리, 딸, 엄마, 아내의 본분을 벗어나 존재의 오롯함을즐겼다. 바닷가 마을 작은 서점에 들렀다가 스무 살의 나로 돌아가전혜린의 에세이 《목마른 계절》을 집어들었고, 그 책에서 "여성의가장 본질적인 약점으로 나는 생 전반에 대한 비본연적 태도를 들고싶다"는 문장에 아프게 밑줄을 그었다.
비본연적 태도로 살아가길 강요받는 이 땅의 모든 <본분 금메달>의 출전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전혜린은 이렇게 글을 매듭짓는다. "남녀를 막론하고 인간이라는 무서운 조건하에 놓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근본적인 생감정에 지배된 생활이어야 한다"고 - P49

역할 역할의 꽃, 엄마 역할. 역시 ‘역할‘은 생각을 요구하지 않는다. 영혼 없이도 가능하다. 현관에 들어서면 나는 엄마가 되어 기차가 레일을 지나가듯 현관에서 부엌으로, 부엌에서 식탁으로, 식탁에서 냉장고로 자동 왕복하는 거다. 사고하지 않아도 그냥 습관대로하던 대로 막힘없이 수행한다. 이런 걸 무슨 숭고한 모성이라고 말하겠는가. 자기 손에 물 묻히기 싫은 사람들이 지어낸 말일 뿐. 누추하고 번거로운 집안일이다. 내가 엄마라는 사실이 싫은 건 아니다.
엄마 역할로 주어지는 과다한 몫들이 싫다. 엄마 역할을 하는 동안은 내가 나 같지 않다. 그냥 밥순이, 그냥 아줌마다. - P52

가족들이랑 캐리비언 베이 가는 거 말고, 내가 정말 가고 싶은 데는 여수 밤바다다. 혼자서 가고프다.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여수행우등고속을 끊고 떠났다가 여수에서 며칠 묵고 또, 백석이 "자다가도 바다가 보러 나가고 싶다"고 한 통영에도 가고 민박집에서 하루종일 방 끝에서 방 끝으로 뒹굴면서 책 보고 밤이면 파도 소리 들으면서 글 쓰고.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붙박이 인생 청산하고 떠돌이처럼 살면 내가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사는 일이 덜 지겨울까 역할에서 빠져나오면 나비처럼 자유로울까. 여섯 시간째 뱃속이 텅 비었다고 전화하는 딸내미에게 즉시 달려가지 않아도 되면 나의 인생이 더 고상해질까.
밥에 묶인 삶. 늘 떠남의 욕망에 시달린다. 먼곳에 대한 그리움이 바다 되어 출렁이고 마음만은 지중지중 물가를 거닌다. - P56

열 번 잘하다가도 어느 순간 남처럼 등 돌리는 남자들.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와서 씻지도 못하고 이틀째 널려 있는 빨래를 걷는데도 꼼짝 않고 누워 있는 남편 결혼 전에 아빠를 볼 때면 좀 궁금했다. 옆 사람 힘든 게 왜 안 보일까………. 나중에 알고 보니 못 본 척하는 게 아니라 아예 안 보이는 거다. 대대손손 소통불능의 장애를 겪는 남성들. 그렇게 살아도 삶이 유지됐으므로 타인의 심정을 헤아리는 능력이 퇴화한 것이다. 무심함이 무뚝뚝함, 남자다움으로 미화된데다가 학교나 학원에서 안 가르쳐주니까 관 뚜껑 닫힐 때까지 모른다. 모르고 편하게 살다가 죽는 남자들이 많으니까 그만큼 한평생고생만 하다가 죽는 여자들도 많다. - P58

요즘 집밥이 화제가 되는 걸 보면서 나는 오래 전 저 어머니와 밥의 삽화들이 떠올랐다. 지금 나는 아침 안 먹는 아이로 키우는 소설가 엄마보다는 밥 차려주는 어머니에 해당하는 순응적 일상을 겉으로는 살고 있다. 허나 속으로는 끼니마다 회의한다. 나에게 밥은 집밥이냐 외식이냐, 레시피가 간단하냐 복잡하냐, 맛이 있냐 없냐가아니다. 그 밥을 대체 ‘누가‘ 차리느냐의 문제다. 최승자 시인의 시구대로 우리는 "채워져야 할 밥통을 가진 밥통적 존재이고, 누군가차리지 않은 그냥 밥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엄마들은 어디 효도관광이라도 가서야 내가 아무것도 안 했는데 매 끼니밥이 나오는 신비를 경험한다. 그제야 맛본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누군가가 차려주는 밥을 - P67

출산은 성스럽지만은 않다. 아이는 모성의 힘으로 낳는 게 아니다.
제 스스로의 힘으로 뚫고 나온다. 그리고 낯선 존재의 출현은 공포와위험으로 다가온다. 첫 아이 키우는 엄마들은 밤잠을 설치며 아기가숨을 잘 쉬는지 코에 손가락을 대보곤 한다.
갓난아기는 신성한 생명인데 어떻게 버릴 수 있느냐는 물음은 바뀌어야 한다. 신성함은 누구에 의해 어떤 상황에서 규정되는가. 왜생물학적 아버지인 남자 친구나 부모에게도 말 못하고 ‘혼자서‘ 한생명체를 쏟아내듯 낳고 치우듯 버려야만 했을까. 왜 미혼모로 살아가는 일이 제 몸 아파 낳은 아기를 죽게 내버리는 일보다 더 공포스럽게 되었을까. 미혼모의 학습권 보장을 위해 학교에 유아원을 두는독일 같은 나라도 있다는데, 왜 우리 사회는 미혼모가 사회 안에 섞여 살아가지 못하고 양육의 짐을 몽땅 떠맡아야 할까. - P70

그간 나는 너무 쉽게 고통의 자산화와 운명애를 말한 건 아닐까.
고통에 대한 분석적 언어는 때로 현실의 구체적 고통을 소거시킨다.
이데올로기 이전의 삶은 이리도 난폭하고 섬뜩하다. 그러니 여자로태어나서 미친년으로 진화한다는 말은 여자의 연대기에 관한 핵심적 진술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를 읽다가 밑줄그었던 부분, "미친년 널뛴다는 말은 폭력적이다. 미친년을 미치게만든 미친놈들의 존재가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새삼 궁금했다. 그길고 오랜 세월 동안 미친놈들의 존재는 어떻게 생략이 가능했을까.
미혼모는 있어도 미혼부는 없지 않은가. 세상은 어째서 여전한가.
느닷없는 물음에 붙들린 2012년 2월 29일.
늦된 엄마는 오늘도 딸을 낳고 앳된 딸은 매일매일 학교에 간다. - P75

나는 아직도 미안하다. 성폭력 피해 사실을 내게 터놓은 그 친구에게 가해자가 친족이었고 아홉 살에 일어난 일이라고 했다. 나는너무 놀라 "그랬구나………" 말끝을 흐리며 어정쩡하게 다른 얘기로넘어갔다. 그 친구는 더 말하고 싶었을 텐데 난 듣는 법이 서툴렀다.
세월이 흐르고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인터뷰할 때 물었다. 피해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 상대가 무어라고 말해주면 가장 좋은지. 그들은이렇게 답했다. "힘들었겠구나. 나한테 얘기해줘서 고마워."
진실은 말하는 데 있는 게 아니다. 듣는 데 있는 것이다. 말할 권리the right to speak 와 들릴 권리the right to be heard는 영어로 같은 표현이라고 하지 않나. 그러니 집집마다 당도해야 할 것은 가해자의신상 명세가 아닌, 피해자의 들릴 권리가 담긴 서툰 말이다. - P81

첫아이 키울 때는 전화기 건너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억장이 무너졌다. 그 눈물이 긴 시간의 강물로 보자면 돌멩이 하나 던져진 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한참 후다. 늘 입으로는 엄마도 엄마 인생이 있단다를 주장해왔지만 뜻대로 살기 힘들었다. 자기중심적인 엄마라는 죄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고작 일곱 살아이 혼자 두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랑 소주잔 기울이는 나를 스스로도 좀 심한 엄마로 규정하게 된다. 정말로 아이 키우는 일은 순간순간이 어려운 시험이다. 노사 협상처럼 하나 양보하고 하나 받아내는 거래를 해보기도 한다. 나의 좋음과 아이의 좋음의 접점을 찾아
‘윤리적 선택‘을 고민해보기도 한다. 그게 가능한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한 가지는 알겠다. 아이가 다양한 상황에 놓여보는 것이 아이의 감성을 일깨우는 것 같다. 늘 살던 패턴대로 익숙하게 사는 사람은 생각할 일이 없다. 열차 시간처럼 정확히 도착하던 엄마가 늦을수도 있음을 유년시절 윗목에서 체험한 아이는 적어도 상실감, 외로움, 쓸쓸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울다가 웃다가 하면서 감정의 결이 생기고 마음의 살이 포동포동 오르겠지. - P90

엄마의 죽음으로 나는 한 차례 변이를 경험했다.
세상을 감각하는 신체가 달라졌다.
삶이라는 것, 그냥 살아감 정도였는데,
엄마를 통해 죽음을 가까이서 보고 나니까
‘삶‘이라는 추상명사가 만져지는 느낌이었다.
삶은 이미 죽음과 배반을 안고 시작된다. - P97

왜 엄마들에게 행복은 늘 충족유예 상태로만 존재해야 하는가. 내일을 위해 오늘을 인내하는 삶 자식을 위해 당신은 포기하는삶………. 워낙 가난한 시대에 태어나서 그러신 줄은 안다. 그래도 난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았는데, 엄마가 호강 한번 제대로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결심이 더 확고해졌다. 나의 일신의호강은 주체적으로 ‘지금 여기서 챙겨야 한다는 것. 그 엄정한 사실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늙고 아프고 죽는다는 차가운 명제를 상기한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자식에게 의지해야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고 내가 부모님을 봉양해야 할지도 모른다. 닥치면 살겠지 한다. 미리 걱정하면서 고통을 가불하고 싶지 않다.
늙음, 그 존재의 무너짐을 삶의 과제로 의연히 받아들이고 싶다.
내가 늙은 부모를 봉양하든 내가 늙어 자식에게 의탁하든, 비참하고비루한 생이 지겨워 눈물 바람 할 테고 태어난 걸 후회하다가도 또어떤 날은 살 만해서 콧노래를 부르기도 하겠지.  - P101

육아가 힘들 때 아이들이 족쇄 같아 괜히 낳았다고 원망했던 것처럼 더러는 괜히 죄없는 부모님을 탓하기도 하겠지. 하지만 나는 안다. 힘든 일 포기하고 떠난다고 자유롭지 않다. 그건 자유에 대한 환영이고 망상이다.
넘지 못할 것 같은 산도 한 걸음 내디디면서 다리 힘이 길러지고 그러면 다음 봉우리는 더 쉽게 건널 수 있다. 근육이 튼튼해지고 체력이 길러지면 삶의 어느 고비에서도 성큼성큼 문제 안으로 들어가는궁극적인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런데 문제를 회피하고 도망가면 걸린 데서 또 걸린다. 살아보니 그랬다. 아무런 상처도 주지 않고 좋기만 한 관계는 가짜이고, 아무런 사건도 생기지 않은 무탈한 일상이행복은 아니었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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