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석공 일을 배우다가 제1차 세계대전 때 전쟁포로가 되기도 했던 너지 임레는 공산주의자였다. 사회주의 정부를 세우는 데 참여했고 국제공산주의조직 코민테른의 헝가리 대표를 지냈다. 그러나 그는 농민과 노동자들이 식량 부족에 신음하는 현실을 보고 정책 노선의 전환을 결심했다. 강제 수용소를 폐쇄하고 집단농장을 해체하는 한편 서방국가와 관계를 개선하고 자율과 창의를존중하는 사회를 만들려고 했다. 내가 만난 동상은 그의 사람됨을 보여주고 있었다. 얼마 전 헝가리 정부가 너지 총리의 동상을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의사당 북쪽의 한적한 광장으로 이전했다는 뉴스를보았다. 푸틴과 친밀하다고 알려진 오르반 빅토르 총리가 너지 후손들이 반대하는데도 동상을 이전함으로써 그를 정치적으로 격하했다는 논평이 뒤따랐다. 그러나 너지 총리는 그곳에서도 변함없이 헝가리 국민의 사랑을 받으며 다뉴브를 지켜볼 것이라 나는 믿는다. - P142

국회의사당의 언드라시 기마상 근처에서 강변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가 세체니 다리 쪽으로 걸었다. 강변에 금속으로 만든 남녀노소의 신발 수십 켤레가 놓여 있었다. 그 신발의 주인들은 총을 맞고 강에 버려졌다. 그곳에 그게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갔는데도 눈물이났다. 그저 무섭기만 했던 테러하우스와는 달랐다. 그렇게 작은 조형 - P142

이고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줄은 몰랐다. 빗물이 깨끗하게 고인 구두 너머로 도나우의 탁류가 거칠게 흐르고 있었다.
합스부르크제국이 유대인을 너그럽게 대했기 때문에 헝가리유대인이 많았고 부다페스트에 큰 게토가 있었다. 나치는 80만 명 넘었던 유대인 가운데 60만 명을 죽였다. 43만여 명을 열차에 태워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수용소로 보낸 1944년 5월부터 7월까지가 학의 절정기였다. 나치는 유대인들을 상대로 생체실험을 하고강제노역을 시켰으며 빼앗은 돈과 귀금속을 소위 ‘황금열차‘에 실어 베를린으로 가져갔다. 독립할 때 루마니아와 체코슬로바키아 등이 영토와 인구를 절반 넘게 빼앗겼던 헝가리 정부는 그것을 되찾으려고 나치와 협력했다가 소련군에게 점령당했다. 권력을 잡은 헝가리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의 간섭과 지배를 받아들였지만 민중은 그렇지 않았다. 오스만제국과 합스부르크제국뿐 아니라 나치 독일과 소도 민족의 자주권을 억압하는 외세로 여겼다. 너지 임레 총리의 개혁정책과 시민들의 반소 무장투쟁의 동력은 그런 정서였다.
강변의 구두는 유대인들의 가슴 미어지는 참극과 헝가리 사람들의 지워버리고 싶은 범죄행위를 되살린다. 거기서 유대인을 학살한범인은 독일이 아니라 헝가리 사람들이었다.  - P143

부다페스트는 아름다웠다. 그렇지만 슬픈 건 또 그대로 슬펐다.
단것을 먹으면 슬픔이 덜어질까 해서 구도심의 유명한 카페에 들렀다. 19세기 부다페스트의 예술가들이 즐겨 찾았고 시씨의 단골집이기도 했다는 그 카페에서 카라멜 프라페와 카푸치노를 마시고 산딸기 요구르트 케이크를 먹었다. 시씨는 그 집을 ‘부다페스트의 보석‘이라고 했다지만 너무 달아 내 취향에는 맞지 않았다. 벽에 창업자로보이는 커다란 남자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는데 독일어로 써놓은 안내문을 보니 이름이 ‘쿠글러 (Kugler)‘였다. 유럽의 성씨는 직업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쿠글러는 공이나 총알을 가리키는 명사 쿠겔(Kugel)에서 파생했다. 총알과 대포알이 아니라 동그란 아이스크림과 과자를 만든 그 남자는 넥타이까지 맨 양복 차림으로 카페 고객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P145

일부러 그랬던 건 아니지만 부다페스트 마지막 일정은 도나우야경 감상이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 같다. 좋은 감정만 느끼면서 작별할수 있어서다. 해가 넘어가자 부다페스트는 더 밝고 더 아름다워졌다.
부다의 겔레르트 언덕과 왕궁단지에 조명이 들어왔고 국회의사당과바실리카를 비롯한 페스트의 공공건물도 화사한 빛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국회의사당 첨탑 위 아스라이 높은 밤하늘에 빛을 받아 하얗게반짝이는 갈매기들이 박힌 듯 떠 있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시각을 제외한 모든 신경세포가 작동을 멈추었다.
며칠 동안 시내 곳곳에서 목격했던 역사의 비극에 대한 기억이사라졌다. 머저르 독립운동의 순교자도, 홀로코스트의 상처도, 소련군 탱크에 짓밟힌 소녀도 생각나지 않았다.
다음 날 오전 잠깐 시내를 산책한 후에 김포공항보다 작고 소박한 리스트 페렌츠 공항에서 부다페스트를 떠났다. 부다페스트는 철도 · 자동차 · 유람선 등 들어오는 경로가 많아서 큰 공항을 만들지 않은 듯했다. 나는 부다페스트를 다른 어떤 도시보다 좋아한다. 그 도시는 스스로를 믿으며 시련을 이겨내고 가고자 하는 곳으로 꿋꿋하게나아가는 사람 같았다. 1천 년 전 말을 타고 거기 왔던 머저르의 후예들이 지난 150여 년 동안 무엇을 성취했는지 보여주었다. 나는 부다 - P162

페스트에서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보면서 느끼는 것과 비슷한 감정을맛보았다. 부다페스트는 슬프면서 명랑한 도시였다. 별로 가진 게 없는데도 대단한 자신감을 내뿜었다. 오늘의 만족보다 내일에 대한 기대거른 도시였다. 나는 그런 사람 그런 도시가 좋다. - P163

프라하, 뭘 해도 괜찮을 듯한
비행기는 해가 저물고 한참이 지나서 프라하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프라하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나는 얀 후스, 밀란 쿤데라 프라하의 봄, 바츨라프 하벨과 벨벳혁명이 떠올랐다. 하지만 백탑의 도시,중세의 향기, 동유럽 문화수도, 보헤미안의 낭만 같은 말도 모르지 않았다. 아무데서나 아무렇게나 사진을 찌기어도 화보가 된다는 소문도들었다. 도대체 얼마나 예쁜 도시기에 그런 말이 있는지 궁금했다. 소감을 미리 말하자면, 터무니없는 과장은 아니었다. 프라하는 밝고 예뺐다. 걱정 없는 소년 같았다. 여행자에게 친절하고 너그러웠다.
호텔에 짐을 풀고 나니 잠자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유럽에 가면 첫날 저녁을 잘 버텨야 한다. 시차가 일곱 시간 안팎이라 평소라면 깊이 잠들어 있을 시간에 저녁밥을 먹게 되고, 배가 부른 만큼 눈꺼풀도 더 무거워진다. 그 순간을 견디지 못해 잠들었다가는 몇시간 지나지 않아 눈을 뜨고, 뜬눈으로 아침을 맞으며 후회하게 된다.
자정을 넘겨 잠든다 해서 날이 밝을 때까지 잘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P169

나무 그늘에 앉아 틴 마당을 보며 5백 년 전 모습을 상상해 보았.
다. 동유럽 슬라브족 거주 지역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던 틴은 밤낮없이 사람으로 북적였다. 아랍인을 포함한 원거리 무역상들이 금·은·구리 · 주석 • 보석 · 소금 · 공구 · 옷감 · 양모 · 말린 과일과 훈제 생선을 사고팔았다. 울타리와 출입문, 창고, 마구간이 있었고 저렴한 숙박업소와 술집 · 식당이 즐비했으며 병원도 있었다. 수공업자들의 작업장은 밤낮없이 분주하게 돌아갔고 무역으로 한몫을 잡은 신흥 부자들이 앞다투어 저택을 지었다. 정부는 세무서를 설치해 상품을 등록하게 하고 세금을 징수했다. 턴 일대는 그 자체가 하나의 도시였다.
중세 프라하는 거기서 태어났다. 한적한 공터에서 이런 생각을 하다니! 나 혼자 뿌듯해했다. - P180

나는 얀 후스를 존경한다. 후스를 모른다고 해서 프라하 여행에 지장이 생기진 않지만 알면 프라하의 공간과 체코 사람들의 정서를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 고등학생 시절 세계사 교과서에서 얀 후스(te is, 1572-1415)라는 종교개혁가‘의 이름을 처음 보았다. 그렇지만후스가 그저 종교개혁가로서 프라하의 광장에 서 있는 건 아니다. 후스의 동상은 보헤미아 민족주의의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민중의 열망을 담고 있다. 그는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았고 죽음 앞에서도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럴 의도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의 삶과 죽음은 보헤미아와 유럽의 역사를 바꾸었다. - P181

베스트팔렌 조약은 종교 선택의 자유를 인정했다. 루터파와 칼뱅파를 비롯한 개신교가 국제적 공인을 받았고 신성로마제국에 속했던국가들이 저마다 영토주권과 외교권을 확보했다. 독일의 패권이 무너져 프랑스가 알자스 지방을 차지했고, 스웨덴은 발트해 연안 지역을 획득했으며, 네덜란드와 스위스가 독립했다. 유럽에 국민국가의시대가 열린 것이다. 보헤미아 민족주의에 불을 질렀던 얀 후스의 사상은 공화국의 시대가 된 지금도 보헤미아 민중의 가슴에 흐르고 있다. 눈길 주는 이가 별로 없는 얀 후스의 동상 앞에서 나는 잠시 옷깃을 여미고 예를 갖추었다. 부당한 특권을 누리며 민중을 억압하고 부패를 저질렀던 종교권력을 향해 날 선 비판을 퍼부었고 민중과 소통하려고 체코 말로 설교했던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광장을 사이에 두고 틴 성당을 마주 보는 옛 시청사 앞은 카렐교다음으로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었다. 14세기 중반 제한적 권한을 가진 시의회가 탄생했을 때 지었던 시청사는 여러 차례 확장 공사를 거쳐 지금의 복합 양식 건물이 되었다. 후스전쟁의 진원지였던 시청사자체는 르네상스 양식이지만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시계탑은 고딕 양식이다. 내부에는 예배당과 갤러리, 시계탑 올라가는 승강기가 있지만 여행자들은 대부분 밖에서 시계탑을 본다. 탑 전면에 있는 ‘천문시계‘ 때문이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 P185

보헤미안은 사회의 지배적인 규범과 관습을 추종하지 않았다. 스스로 옳고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열정을 표현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일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다. 생계 불안과 사회적편견에 굴복하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였다. 1960년대 서구사회에 강력한 문화적 충격을 주었던 히피(hippie)는 긴 머리카락과제멋대로 기른 수염, 미니스커트, 맨발, 샌들, 대마초 같은 것으로 자신의 내면을 드러냈다. 다음 세대인 여피(yuppie, Young Urban Professionalhippie)는 고학력 고소득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명품과 사치품을 과시적으로 소비했다. 디지털혁명 시대를 선도해 엄청난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색 바랜 청바지와 낡은 가방을 들고 다녔던 이들은 보보스(bobos, Bourgeois Bohemians)라고 한다. 모두가 보헤미안의 새로운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 P189

중세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독일 로텐부르크의 고문 박물관에멋모르고 들어갔다가 끔찍한 공포를 맛본 기억이 있어서 고문도구박물관은 못 본 척하고 지나쳤다. 성기구 박물관도 들어가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남녀가 둘씩이라 서로 민망할 것 같았다. 그 박물관들은히피, 여피, 보보스로 이어진 보헤미안의 문화 유전자가 프라하에서탄생한 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인간은 본성이 ‘속‘되기에 ‘성스러운 것만으로는 삶을 채우지 못한다. 그러나 ‘속‘된 욕망을 좇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게 또 사람이다. "성과 속둘 모두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존중하지 않으면 삶도 세상도 온전해질 수 없다. 나는 여기 사는 사람들에게 거룩함이라는 족쇄를 채우지 않았다." 프라하 구시가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프라하는 품이 너른 도시다. - P189

다리 건너면 카페에서 커피와 보드카를 마시며 해가 넘어갈 때를 구시가 쪽으로 다시 넘어왔다. 입장료를 내고 구시가 쪽 다리 초입의 교 옥상에 올랐다. 카렌교와 블타바강 건너편 왕궁과 구시가까지 낮과 밤의 풍경을 한꺼번에 사진에 담기 위해서였다. 프라하의6월은 낮이 길다. 오후 9시 해가 진 뒤에도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밝았다. 그런데 프라하성이 보이는 강쪽 옥상은 포신만 한 망원렌즈와카메라로 무장한 사람들이 다 차지하고 있었다. 아내는 중국 말을 하는 젊은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겨우 자리를 잡았다. 나는 조그만미러리스 카메라를 들고 사람이 없는 반대편으로 가서 구시가를 내려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어둠이 깔리자 도시 전체가 한순간에 얼굴을 바꾸었다. 틴 성당을 비롯한 구시가의 역사적 건축물과 블타바강 다리에 야간 조명이들어왔고 자동차와 노면전차가 전조등 불빛을 내쏘기 시작했다. 상가와 식당과 카페의 전등이 빛을 뿜었고 가로등도 일시에 눈을 떴다.
어디선가 사람들이 몰려나와 햇살이 사라진 광장과 거리를 메웠고그들이 내는 온갖 소리가 어두운 밤하늘을 타고 올랐다. 교탑 위에서내려다보니 도시 전체가 천천히 위로 떠올라 허공에 걸리는 것 같았다. 프라하는 거대한 야간개장 테마파크로 변신했다. 프라하의 랜드마크 1번은 틴 성당도 바츨라프 광장도 아니었다. 교탑 위에서 본, 해가 넘어간 직후의 프라하 그 자체였다. - P200

체코 사람들은 성 바츨라프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를 주인공으로 삼은 시·소설 · 영화 · 연극 · 노래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많다. 그가 죽은 지 1천 년이 된 1929년 9월 28일부터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 정부가 개최한 축제를 보려고 75만 명의 시민들이 프라하에 몰려들었다. 지금도 해마다 그날에는 성당마다 대대적인 추모 미사를 연다. 카렐 4세가 실제적 국가 창설자라면 성 바츨라프는 정신적 국가 창설자이다. 생일이 확실치 않아서 사망한 날을 정신적인 국경일로 삼았다. 통치자로서 거론할 만한 업적도 없고 재위 기간도 짧았지만 도덕적 정치적 비난을 받을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게 중요하다.
게다가 보헤미아의 자존을 지키려고 외세에 대항하다가 사악한 동생의 손에 목숨을 빼앗겼다. 긴 세월 외세와 종교권력의 억압과 핍박을받으며 자존과 독립을 갈구했던 보헤미아 민중이 역사에서 그를 불러냈다. 영웅은 탄생하는 게 아니다. 민중이 찾아내고 만든다 - P209

‘프라하의 봄‘은 1956년 가을에 일어났던 헝가리 반소 민주주의혁명과 거의 같은 사건이었다. 1968년 봄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의 투쟁과 민중의 지지에 힘입어 체코슬로바키아공산당 서기장이 된 슬로바키아 태생의 반나치 전사 출신 두브체크(Alexander Dubček, 1921-1992)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구호를 내세워 중앙집권적 관료주의적 경제체제를 자유화하고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화 개혁을 추진했다. 소련 정부는 이러한 흐름이 동유럽 전체로 퍼져나가는 사태를 막으려고 1968년 8월 21일 군사개입을 감행했다. 동독과 루마니아를 제외한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 등 바르샤바조약기구의 50만 병력이 탱크를 앞세우고 체코슬로바키아를 침락해 주요 도시를 점령했다. 체코 사람들은 헝가리 사람들과 달랐다.
그들은 프라하 시내에서 격렬한 전투를 한 적이 없다. 싸울 만하다싶으면 후스전쟁 때처럼 외곽에 나가서 싸웠고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면 씩씩하게 항복했다.  - P210

내친김에 성 이르지 성당에도 잠깐 시간을 들였다. 체코에서 가장 오래된 이 성당은 룩셈부르크 가문으로 왕권이 넘어간 14세기 초까지 보헤미아를 지배했던 프르셰미슬 왕가의 영묘였다. 920년에 신축한 최초의 건물은 화재 사고로 무너졌고 12세기에 재건축한 것이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다. 원래는 소박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로마네스크 양식이었는데 룩셈부르크 가문이 왕권을 차지한 직후 고딕스타일로 증축했고 17세기에는 전면부를 화려한 바로크 스타일로 개조하고 얀 네포무츠키 예배당을 만들었다. 성 이르지 성당의 실내 공간은 곡선을 살린 로마네스크 양식이 남아 있어서 마음이 편했다. - P217

카프카는 문학과 예술에 마음이 끌렸지만 아버지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 법학을 공부했다. 낮에는 보험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글을썼다. 몇몇 여인과 사귀었으나 누구와도 혼인하지 못했다. 독일인은유대인이라고 유대인은 시온주의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그를 배척했다. 몇 작품을 출간했지만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했고 책이 팔리지도않았다. 편두통·불면증 · 우울증을 달고 살다가 결핵에 걸렸고, 빈근교의 요양원에서 외롭게 죽었다. 몸은 프라하 유대인 묘지에 묻혔다. 한때 연인이었던 도라 디아만트에게 맡긴 원고와 편지는 나치 비밀경찰이 빼앗아 없애버렸다. 전기작가이자 절친이었던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의 글을 출간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 P221

자신의 의도를 초지일관 밀고 갔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위대한 작품을 남겼으나 외로움과 고통으로 얼룩진 인생을 살았던 사람, 그 사람이 머물렀다는 것 말고는 아무 특별함도 없는 곳에서 지구 곳곳에서은 관광객들이 해맑게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카프카가 옳았다. 우리의 삶과 우리가 만든 세상은 역설과 부조리로 가득하다. - P223

프라하는 아름다웠다. 왕궁과 교회, 거리와 강, 카페와 박물관, 모든 것이 아기자기하게 예뻤다. 그 무엇도 대단하다고 할 수 없었지만 - P239

프라하 자체는 대단했다. 프라하는 역사의 상처를 감추지 않았고, 그상처 때문에 고통스러워하지도 않았다. 지난날의 상흔은 지난 일로정리하고 오늘은 오늘의 즐거움을 추구한다. 그렇게 하려고 성과 속의 공존을 허락한다. 프라하의 공기는 자유와 관용의 정신을 품고 있는 듯했다. ‘심하게 지나치지만 않다면 뭘 해도 괜찮아. 사람들이 프라하를 좋아하는 것은 이렇게 말하는 도시여서가 아닌가 싶었다. - P241

드레스덴, 부활의 기적을 이룬


드레스덴은 한국에 널리 알려진 도시가 아니었다. 2014년 3월 박근혜 대통령이 드레스덴 공대에서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구상>이라는 강연을 했을 때 이름을 처음 들은 이가 많을 것이다. 그 선언의 내용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달리 할 수 있겠으나 장소 선정만큼은 이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좋았다고 생각한다. 전쟁을 종식하고평화를 이루자는 호소를 하기에 드레스덴만큼 적절한 도시를 찾기는어렵기 때문이다.

드레스덴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던 날을 기억한다.
1995년 2월 13일이었다. 독일 유학 중이던 나는 그날 아침 신문에서
‘드레스덴 폭격‘ 관련 보도를 처음 보았다. 눈에 잘 띄지 않는 면에 실린 그리 크지도 않은 기사였다. 그 폭격의 표적이 독일군과 군사시설이 아니라 드레스덴이라는 도시 자체였다는 사실에 나는 크게 놀랐다. 연합국 공군은 전쟁 막바지에 인구 10만이 넘는 독일 도시의 군사시설과 철도역, 군수공장 등을 폭격했는데 조준이 빗나가 주택이나 교회 건물에 폭탄이 떨어진 일은 많았다.  - P247

 전쟁이 끝나고 여러 해가 지난 뒤에도 무너진 건물에서 시신이 나왔고 지하 방공호 한군데서 1천여 명의 시신을 찾은 일도 있었다. 체코 접경지 수데텐란트(Sudetenland, 보헤미아의 독일 국경 인접 지역)에서 쫓겨나 드레스덴에임시 거처를 마련했던 피난민들은 거주자 통계에 잡히지도 않았다.
당시 시신을 수습한 사망자만 3만5천 명이 넘었다. 독일이 ‘엘베의 피렌체‘라고 자랑했던 드레스덴에는 공장 몇 개 말고는 전쟁과 관계있는 시설이 없었는데도 연합국 공군은 엄청난 양의 폭탄을 투하했다.
드레스덴 폭격 50주년인데도 독일 정부는 희생자 추모 행사를하지 않았고 텔레비전 방송은 짤막한 뉴스만 내보냈다. 기사를 보여주며 물어보았더니 독일 친구가 나지막이 말했다.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내놓고 말하지 않는 사건이야. 우린 그보다 더 못된 짓을 훨씬많이 했거든. 홀로코스트만 있었던 게 아니야. 코번트리(Coventry) 같은 곳도 한두 군데가 아니었어. 혹시라도 그 사건 가지고 막 떠드는사람 만나면 조심해야 해. 올드나치거나 네오나치일지 모르니까." 코 - P248

번트리는 잉글랜드 내륙의 작은 도시다. 재규어를 비롯한 고급 승용차 공장이 있어서 전쟁 때 군수물자를 생산했다. 1940년 11월 14일밤 독일 공군이 코번트리를 폭격해 수천 명의 민간인을 살상했다. 코번트리 시민들은 그때 완전히 무너진 중세 성당을 그 상태로 보존하고 바로 옆에 새 성당을 지었다. 드레스덴은 ‘가해자의 몸에 남은 상흔‘이었다. 독일 사람들은 그 상흔을 남몰래 만질 뿐 드러내 보이지않으려 했다. - P249

1945년 2월의 참극을 모르면 오늘의 드레스덴이 왜 지금 같은모습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성모교회를 포함해 구시가의건축물과 광장과 공간은 모두 복원하거나 신축한 것이다. 복원과 신 - P249

축의 주체와 시기는 건물마다 다르지만 부서지고 불타 무너진 시점은 모두 같다. ‘바로크 도시‘ 드레스덴은 그때 영원히 사라졌다. 수많은 건축물을 복원했지만 예전의 도시로는 돌아가지 못한다. 그러나오늘의 드레스덴이 예전만 못하다고 할 수는 없다. 드레스덴은 과거와는 다른 면에서 세상에 하나뿐인 도시가 되었다. 추하면서 아름답고 슬프지만 평화로운, 어딘가 크게 어긋나 있는데도 편안하고 정감있는 도시. 나는 그렇게 느꼈다. - P252

 길은 사람과 상품과정보와 문화를 옮기고 뒤섞는다. 길이 있어서 우리는 풍요로운 삶을살고 낯선 사람을 만나며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폭과 깊이를 더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오로지 좋은 것만 오간 길은 없었다. 길 위에는 삶만 있는 게 아니었다. 죽음도 함께 있었다. 인간은 길을 따라무기와 세균을 옮겼고 약탈과 살상을 저질렀다.
엘베계곡의 길도 다르지 않았다. 절망과 희망, 야만과 환희가 교차했다. 수많은 독일 유대인들이 이 길을 따라 프라하로 피신했다. 나치 군대도 그 길을 따라 보헤미아에 들어가 그들을 학살했다. 전쟁막바지 수세에 빠진 독일군이 본토로 퇴각하자 체코 사람들은 3 백만명의 수데텐란트 독일인들을 강제 추방했다. 그들도 모든 것을 빼앗기고 화물열차에 실려 엘베계곡을 지났다. 1989년에는 특별열차가동베를린 체코대사관에 들어간 동독 시민들을 싣고 그 길을 달렸다.
길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길은 그저 거기 있었을 뿐, 모든 악은사람이 저질렀다. - P254

문화궁전의 외벽에는 사회주의체제의 유산임을 바로 알아볼 수있는 초대형 벽화가 있었다. 1969년 동독의 저명한 예술가들과 드레스덴 미술대학 학생들이 그린 벽화의 제목은 <1849-1969: 드레스덴혁명 세력의 진보와 사회주의를 향한 120년의 투쟁>인데,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스스로만 할 수 있다"든가 "우리가 역사의 승자"
라는 등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암송하던 문장을 적어두었다. 사회주의집단창작 작품이라 특별한 감흥은 느끼지 못했지만, 내부 공간을 멋진 현대적 공연장으로 개조하면서도 그 벽화를 ‘역사를 증언하는 문화재‘로 지정 보호하는 드레스덴 시민들의 문화 역량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 P271

원래는 16세기에 만든 방어용 군사시설이었다. 그런데 19세기중반 내각 총리였던 브륄(Heinrich von Brühl, 1700-1763) 백작이 테라스를갤러리, 도서관, 궁전, 정원 등과 연결했다. 따라서 하부의 방어용 시설이 아무 쓸모가 없어졌고, 민간인의 출입을 막을 명분도 사라졌다.
나폴레옹전쟁 이후 시정부는 출입 통제를 폐지하고 테라스를 레저시설로 바꾸었다. 곳곳에 조각상을 세우고 출입구와 계단을 만드는 한편 작은 광장을 조성해 해가림 시설과 나무 의자를 설치했다. 군용시설에서 왕과 귀족 전용 테라스를 거쳐 시민공원으로, 브륄의 테라스는 유럽 역사의 궤적을 따라 진화했다.
저녁밥을 배불리 먹고 호텔로 돌아가기 전에 한적한 테라스를 느리게 걸었다. 구시가는 크지 않았고 조명도 소박했다. 강건너 신시가지도 마찬가지였다. 부다페스트나 프라하의 밤 풍경에 비하면 드레스덴의 야경은 야경이라 할 수도 없었다. 오래 비가 내리지 않아 엘베의 수면은 멀리 내려갔고 유람선들은 선착장에 묶여 있었다. 습도가 낮아서인지 밤바람이 서늘했다. 엘베를 따라 테라스를 걷는 밤 산책, 단 하루라도 드레스덴에 머문다면 놓치지 말아야 할 즐거움이 아닌가 싶었다. - P286

두 번째 밤을 지내고 드레스덴을 떠나왔다. 빈·부다페스트 프라하처럼 아름답거나 볼거리가 많지 않았는데도 드레스덴은 오래 마음에 남았다. 독일 변방의 작은 도시지만 문명사의 여러 시대와 그시대를 이끌었던 열망, 그 열망이 부른 참혹한 비극, 그 참극을 딛고이루어낸 성취를 품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보면드레스덴은 작지 않다. 어마어마하게 크다.
‘바로크 도시 드레스덴‘의 창조주는 ‘정력왕 아우구스트‘였다. 그는 유럽의 봉건 영주가 자신의 능력과 중세적 특권으로 무엇을 이룰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루터파 신교도들은 성모교회를 포함한 드레스덴의 역사적 구시가를 중세와 다른 모습으로 바꾸었다. 성모교회는 종교적 신념과 열정이 삶의 동력이 되었던 시대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자유를 허락받았던 바이마르공화국 시대의 드레스덴은 문화예술을 꽃피웠지만 나치의 전체주의 폭력에 숨이 막혀 쓰러졌고연합군의 폭격에 생명이 끊어졌다. 공산주의자들이 그 폐허 위에 세운 공동주택과 문화궁전은 신념의 무모함과 열정의 허망함을 증언하고 있었다. 재통일을 이루어 독일연방공화국 작센주의 수도가 된 드레스덴 시민들은 성모교회를 재건함으로써 부활의 서사를 완성했다.
성모교회의 부활은 인간의 두 얼굴과 인류의 두 미래에 관한 이 - P312

야기인지 모른다. 성모교회는 우리 모두가 저마다의 내면에 지킬과하이드를 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이기성 · 배타성·공격성 · 잔인함. 독선 · 맹목성에 사로잡혀 드레스덴을 죽였고 이타심 . 너그러움 · 동정심 · 관용의 정신을 회복해 되살렸다. 성모교회의부활은 루터파 기독교인들끼리 이루어낸 종교적 사건이 아니다. 드레스덴을 폭격했던 미국과 영국의 시민들, 기업, 참전군인의 가족들,
희생자의 후손과 이웃, 세계의 시민들이 자유와 다양성과 관용의 정신이 깃든 평화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투사해 이룬 문명사적 사건이다. 나는 부활한 성모교회에서 촛불을 올리고 기도하는 사람들을보면서 그들의 소원이 실현되기를 기도했다.
성모교회는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을 믿지마. 너희는 완전한 진리를 알 수 없어. 너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관용뿐이야. 나와 다른 사람, 나와 다른 생각, 나와 다른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것이지. 그러면 모두가 자유로워질 거야.‘
다시 가면 또 촛불하나 켜고 기도하고 싶다. 인간의 부족 본능이 과학과 손잡고 저질렀던 야만의 상처가 다 아물기를 관용의 정신이 더욱 널리 퍼져 인간은 더 자유롭고 세상은 더 평화로워지기를! - 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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