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사 박물관이 더러 오아시스를 만날 수 있는 광활한 사막이었다면 제체시온은 풀과 나무가 제 성정대로 자란 오솔길 같았다. 예술사 박물관에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공간이었지만, 어느 작품도다른 것과 같지 않아서 그런지 내가 느낀 감정은 훨씬 더 풍성했다.
예술사 박물관에서 수백 년 동안 빈을 지배했던 낡은 문화를 보았고,
제체시온에서는 19세기 후반 등장한 새로운 예술과 사상을 만났다.
왕가의 수집품은 대부분 작품을 발주한 사람의 요구와 취향에 맞추어 제작하거나 매입한 예술품이다. 반면 제체시온의 전시품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내적 지향과 감정을 표현해 세상에 내놓은 것이었다. 군주정과 공화정, 중세의 귀족과 신흥 시민계급, 정치적 종교적인습과 자유로운 예술정신, 세기말 빈에서는 이런 것들이 뒤섞이면서 충돌했다. 만약 빈에서 단 하나의 미술관에만 갈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제체시온을 선택할 것이다. 그곳에서 만난 작품들은 크든 작든 창조자인 예술가의 상상력과 철학과 개성을 보여주었고 내 마음에 저마다 다른 감정을 일으켰다.  - P53

시대 전시실의 실내장식 · 가구 · 공예품 · 그림을 보면서 그것을만든 이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영원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지나간다. 반동의 시간도 예외가 아니다. 좌절감이 옅어지고,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분노가 쌓이고, 대중의 이성이 눈 뜨고, 보통 사람들의 마음에 용기가 번지면, 어느 날 갑자기 역사의 물결이 밀려와진보의 모든 배를 한꺼번에 띄워 올린다. 그런 때가 오기까지 작고확실한 즐거움에 몸을 맡기고 삶을 이어가는 것이 무슨 잘못이겠는가. 비더마이어 시대 전시실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퇴행과 압제의어둠 속에도 빛이 완전히 꺼지는 법은 없다. 그렇게 믿으며 삶을 이어가면 새로운 시대를 볼 수 있다. 내가 거기서 본 것은 좌절과 도피가 아니었다. 질긴 희망과 포기하지 않는 기다림이었다.
응용예술 박물관은 꼼꼼하게 보려면 하루를 통째로 써도 부족할만큼 크고 전시품이 많았다. 건축가 호프만(Josef Hoffirmann)의 가구 설계도와 스케치를 보여주는 전시실은 미술관을 방불케 했다. 취사도구와 식기 컵 · 의자 · 안경 등을 포함한 생필품, 통신장비와 운송기계를 비롯한 산업설비, 글자꼴과 책, 의상 • 보석 · 장신구 등 기호품 디자인이 어떤 아이디어를 통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보여주는 2층의디자인 공방(Design Labor)은 설렁설렁 보았는데도 시간이 무척 걸렸다.
내가 디자인 분야 종사자라면 응용예술 박물관 하나를 보기 위해서라도 빈에 올 것 같았다. - P59

시씨의 생애는 상실의 고통과 외로움으로 얼룩졌고 참혹한 비극으로 끝났다. 1889년 외동아들이자 황태자였던 루돌프가 자살했다.
교회를 싫어하고 계급제도를 경멸하는 등 제국의 황태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자유주의 성향을 보였고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정했던 루돌프는 사냥터의 별장에서 나이 어린 애인과 함께 권총으로 목숨을끊음으로써 시씨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언드라시 백작도 세상을 떠났다. 시씨는 공식 활동에서 완전히 물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 · 독일 · 스위스·이탈리아 · 발칸반도 등유럽 각지를 여행하다가 스위스 제네바의 호수에서 이탈리아 출신아나키스트가 휘두른 칼에 찔려 목숨을 잃었다.

사람들은 비운의 주인공에게 끌리는 경향이 있다지만, 빈 사람들이 시씨를 사랑하는 것이 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운명에 의해 ‘권력형 셀럽‘이 되었지만 시씨는 ‘자기다운 삶‘을 추구했다. 그녀는 남 - P66

편이 황제여서가 아니라 사랑해서 혼인했다. 황후의 권력과 화려한궁정 생활에서 의미와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 남편이 다른 여인을 사랑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빈을 떠나 여행자의 삶을 영위했다. 아름다운 몸과 맑은 정신을 유지하려고 처절한 노력을 쏟았고 신분의 차이를 넘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려 했다. 운명을 거부하거나 극복하지는 않았으나 운명에 갇히지도 않았다. 운명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이 의미를 느끼는 인생을 살아나가려고 번민하고 도전했다. 그리고그런 끝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비극적 죽음을 맞았다. 역사의 위인은 아니었으나 사랑할 만한 미덕을 지닌 황후였음에는 분명하다. 그러니 시씨의 사진과 초상화를 마케팅 수단으로 쓰는 빈의 상인들을욕하지 마시라. 그들은 시씨를 정말 사랑해서 그러는 것이다. - P67

쇤브룬 궁전(Schloss Schönbrunn)과 벨베데레 궁전은 호프부르크의
‘별책부록‘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셋을 묶어 보면 합스부르크제국 지배층의 존재 양식과 문화적 취향을 알 수 있다. 쇤브룬은 전철(U4)로손쉽게 갈 수 있지만 내부에 들어가려면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이나로마의 바티칸 박물관 못지않게 긴 줄을 서야 한다. 금요일을 포함한주말에는 입장하는 데만 두 시간이 걸릴 수 있다. 매표소 직원은 10시 전에 도착하면 바로 들어갈 수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 P67

라트하우스만을 올려다보며 역사를 되짚어 보았다. 1914년 6월28일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가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죽였다. 복수심에 사로잡힌 요제프 황제는 한 달 후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자 슬라브족의 맹주를 자처한 러시아제국이 세르비아를 편들었고 독일이 오스트리아와 손을 잡았다.
독일과 견원지간인 프랑스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었고 전쟁의 불길은 영국과 유럽 대륙 전체로 번져나갔다. 나중에는 오스만제국이오스트리아 진영에 가담했고 독립을 원한 중동의 아랍 민족이 영국을 지원했으며 일본과 미국까지 전쟁에 뛰어들거나 휘말렸다. 인류역사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글로벌전쟁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거대 제국들을 무너뜨렸다. 합스부르크제국과 오스만제국의 폐허 위에 각각 오스트리아공화국과 터키공화국이라는 조그만 신생국이 탄생했고 러시아제국에서는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나 최초의 사회주의체제가 들어섰으며 동유럽과 발칸반도, 중동 등에는 수많은 민족국가 또는 국민국가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났다. 러시아 동전을 녹여만든 라트하우스만의 껍데기는 그 모든 비극을 예고한 시대의 징후였는지도 모른다. - P85

훈데르트바서 박물관을 보니 훈데르트바서하우스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앞뒤를 바꾸어 보았다면 더 좋았을 뻔했다. 훈데르트바서는 자연의 곡선과 자연의 색을 존중했고 흙, 숯, 돌, 벽돌과 같은자연의 재료를 사용해 예술적 감정을 표현했다. 인간이 만든 직선의경계를 버리고 자연의 곡선에 녹아들도록 집을 지었으며 지붕에 숲을 만들고 발코니에 나무가 자라게 했다. 그가 만든 미래형 주택단지미니어처는 스머프의 움집과 비슷했다. 호모사피엔스 개체 수가 지금의 1/100 정도로 줄어든다면 그런 집을 짓고 살게 될지도 모르겠다. 숲 살리기 운동, 반핵 운동, 고래 보호 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식물을 이용한 정수 시스템을 개발하기도 했던 훈데르트바서는 2000년 2월 항해 중이던 배에서 세상을 떠났고 뉴질랜드에 만들어 두었던 ‘죽은 자들의 행복한 정원‘ 나무 아래 묻혔다.
훈데르트바서하우스와 박물관은 ‘뜻밖의 발견‘이었고, 시립예술회관 기획전시장에서 마틴 파(Martin Parr) 사진전을 본 것은 덤이었다.
카메라를 든 아내는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마틴 파는 평범한사람들의 일상을 찍는다. 그리 멋지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그의 사진들은 밑도 끝도 없는 상념을 불러일으켰다. 인생이란 원래 이리도 뒤죽박죽인 것인가?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인가?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은 형태만 달라질 뿐 사라지지 않는 게 아닐까?  - P91

오래된 도시들은 저마다 역사의 상처를 지니고 있다. 아테네는의도와 무관하게 상흔이 드러나고 부다페스트는 일부러 드러내며 파리는 감추었지만 보인다. 그런데 빈에서는 그런 것을 찾으려고 해도찾을 수가 없었다. 사람으로 치면 ‘사기 캐릭터‘였다. 부잣집에서 태어난 수재인데 잘생겼고 키도 크다. 손꼽는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가족 기업을 넘겨받아 성공적으로 경영한다. 예술적 감각을 지닌 교양인에다 성격마저 원만해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산다. 약점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 빈은 그런 사람 같았다. 부러워하거나 시샘할 수는 있지만 흉보기는 어려웠다.
여행에도 ‘상대성원리‘가 적용되는 게 아닌가 싶다. 빈만큼 또는빈보다 더 대단한 도시에서 온 여행자라면 모든 게 좋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빈틈이라고는 보이지 않아서, 너무 완벽해서, 내게 편하지만은 않았다. 오스트리아는 한국보다 부유하고 빈은 지구 행성에서가장 호화로운 도시다. 건물도 거리도 사람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노점상이나 거리 음식은 아예 없었고, 치안도 완벽해서 소매치기 걱정 따위는 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비가 내릴 때는 모두 실내에 머무는지 거 - P92

리가 텅 비었다. 우산을 들고 걷는 이조차 드물어서 우리도 준비한비옷을 꺼내지 않고 카페와 박물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빈이라고 상처가 없는 건 아니다. 수많은 역사의 상흔을덮어버리는 데 완벽하게 성공해서 보이지 않을 뿐이다. 합스부르크제국의 정치적 후진성은 시씨 황후의 아름다움과 바로크 궁전의 화려함으로 가렸다. 독일과 합병해 자의 반 타의 반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질러 놓고서도 나치 잔재 청산 작업은 하지 않은 채 영세중립국으로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았다. 유엔 사무총장을 연임한 쿠르트 발트하임은 나치 돌격대 가입과 독일군 중위 복무 사실이 드러나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지만 무난히 대통령에 뽑혔다. 독일은 모든 도시모든 장소에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되새기는 공간과 시설을 만들어두었지만 빈에서는 일부러 찾아다니지 않으면 볼 수 없다. 그라벤의삼위일체상도 페스트의 참극을 모르는 여행자에게는 그저 멋지게 금박을 두른 종교적 조형물일 따름이다. - P93

내겐 너무 완벽한 도시였지만 조그만 빈틈도 없는 건 아니었다.
해 질 무렵에 본 바그너 기차역 (Wagner Stadtbahn-Pavillons)은 내가 본 유일한 빈틈이었다. 그래, 완벽하게 잘나 보이는 사람도 쓸쓸한 얼굴을할 때가 있지. 빈의 운하 · 철도역 ·터널·교량 건설 사업을 주도했고미술아카데미 건축과 교수로서 분리파에 참여했던 오토 바그너 (OttoWagner, 1841-1918) 가 1899 년에 지은 카를스플라츠(Karlsplatz) 기차역은수명을 다해 카페와 전시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빈에서 본 모든 역사적 건축물 중에서 낡고 쓸쓸해 보인 것은 그곳뿐이었다. 나는 그 집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 표정이 하나라도 있어서, 완벽하게 잘나지 않은 면이 하나라도 있어서, 빈에 정을 붙일 수 있었다. 기차가 중앙역을 벗어났는데도 빈과 작별하는 것 같지 않았다. 다시 돌아오려고 잠시 떠나는 기분이었다. 나만 이런 느낌을 안고 돌아온 건 아닐 것이다. - P95

부다페스트, 슬픈데도 명랑한


빈 중앙역에서 부다페스트 동역까지 기차로 세 시간이 채 걸리지않았다. 비행기보다 빠르고 간편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 의미가 깊은길이라서 일부러 기차를 탔다. 완만한 구릉이 이어지는 차창 밖 풍경을 보면서 세계사의 변곡점이었던 1989년을 생각했다. 그해 여름, 늘그랬던 것처럼 많은 동독 시민이 헝가리로 가족 휴가를 떠났다. 가을이 되자 동독의 공장과 학교와 병원이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엔지니어 · 교수·교사·의사·간호사를 비롯한 전문직 종사자 수십만 명이 휴가에서 복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에 들어갔다.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동유럽 사회주의국가의 내정에 간섭하지않겠다고 하자 헝가리 정부가 오스트리아 쪽 국경의 철조망을 걷어냈다. 친지 방문과 방송 교류를 통해 서독이 풍요롭고 자유로운 사회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동독 시민들은 열차와 자동차를 타거나걸어서 국경을 넘었고 오스트리아 정부는 그들의 입국을 허락했다.
동독 정부가 서독 여행 자유화 조처를 공식 발표하자 동베를린 시민 - P99

100유럽 노시 기행 2들은 서베를린으로 가는 브란덴부르크 문에 몰려들었고 경비부대의지휘관은 발포 금지 명령을 내렸다. 반세기 동안 서베를린을 차단했던 장벽이 무너졌고 분단의 형벌을 받았던 패전국 독일은 통일을 이루었다. 우리는 그때 동독 시민들이 갔던 길을 거슬러 빈에서 부다페스트로 이동했다. 이스탄불의 포구에서 보았던 글귀가 떠올랐다. ‘길위에 삶이 있다.‘ - P100

며칠 동안 비가 내린 탓인지 도시를 가로지르는 도나우강은 거센탁류였다. ‘다뉴브강의 잔물결‘도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도 존재하지않았다. 다뉴브(Danube), 도나우(Donau), 두너(Duna)는 모두 같은 강을가리키는 영어 독일어 · 헝가리어 이름이다. ‘푸르고 잔잔한 도나우의 물결‘이라는 나의 관념은 아마도 음악 때문에 생긴 것이었으리라.
19세기 루마니아 작곡가 이바노비치의 왈츠곡 ‘다뉴브강의 잔물결‘ - P100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곡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같은 것이다. 특히 이바노비치의 곡은 1926년 현해탄에 몸을 던진 조선 최초 소프라노 윤심덕의 <사의 찬미> 원곡이어서 한국에 널리 알려졌다.
도나우강은 알프스 남쪽 경계를 타고 동쪽으로 흐르면서 빈을 지난 다음 부다페스트 근처에서 직각으로 몸을 틀어 남쪽으로 내려간다. 헝가리를 벗어날 때 다시 동으로 전향해 카르파티아산맥과 발칸산맥 사이의 협곡을 따라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등 발칸반도 북부를 가로지른 후 루마니아 남부 평원과 우크라이나 저지대를 거쳐 흑해에 들어간다. 숱한 지류를 끌어안으며 알프스의 발원지에서 흑해까지 3천 킬로미터를 달리는 도나우의 품에서 빈, 부다페스트, 베오그라드 등 크고 작은 도시들이 자라났다. 1990년대에 라인강과 연결하는 운하가 개통되어 이제 도나우 물길은 흑해에서 북해까지 통하게 되었다. 하류의 도나우는 잔물결이 흐르는 푸른 강이지만 빈과 부다페스트 구간의 도나우 상류는 그렇지 않다. 탁류가 빠르게 흐르는위험한 강이다 - P101

헝가리왕국은 슬라브족의 바다에 뜬 머저르족의 배였다. 이슈트반이 헝가리왕국을 세웠을 때 게르만족은 로마 가톨릭, 슬라브족은콘스탄티노플에 본부를 둔 그리스정교회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역사·언어·문화 등 모든 면에서 딴판인 머저르족이 종교마저 다른 상태로 살았다면 더 혹독한 시련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역사의시간 속에서 민족이 흩어지고 사라져 버렸을 수도 있다. 이슈트반은국가의 통치자로서 민족의 문화적 고립을 완화하는 방책으로 로마가톨릭을 받아들인 게 아니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1천여 년이 지나부다페스트의 바실리카에 자신의 이름이 붙여지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그렸던 큰 그림이 맞아떨어졌다며 어깨를 으쓱할지도 모를 일이다. - P108

부다페스트의 화려함은 헝가리 사람들이 지니고 있었던 열등감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역사의 상처를 감쪽같이 지워버린 빈과달리 부다페스트는 그 모든 것을 내놓고 보여줌으로써 여행자를 불편하게 만든다.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증언하는 초대형 기억 공간을조성한 베를린 말고는 부다페스트만큼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을적극 홍보하는 도시를 찾아보기 어렵다. 부다페스트에서 반드시 그런 것을 챙겨야 하는 건 아니지만, 사연을 알면 부다페스트가 더 정겹게 안겨 오는 느낌이 들 것이다.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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