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대해 글을 쓰는 일, 사진에 대해 글을 쓰려고 사진을 보는 일은 지난 20여 년 동안 나의 중요하고 즐거운 부업이었다. 부업이라고는 하지만, 실은 본업도 없었다. 여러 부엌이 모인 것이 곧 본업이었다. 하지만 사진은 본업이 될 정도로나의 비평적 열정을 계속 사로잡았다. 이 책을 쓰기 위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원고를 정리하던 중 찾아보아야 할 글의 편수에 놀라면서, 그렇게 된 것을 알았다.
당연히 내게는 뾰족한 방법이 없다. 그저 보고, 본 것에대해 생각한 후, 보고 생각한 것을 글로 정확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보고 생각한 것을 통해 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을알아차리게 되고, 글을 쓰기 전에는 갖지 못했던 사고事故를갖게 된다. p13


이렇게 방법이 없다고 선언한 것은, 방법의 결여가 어떻게나름의 전통과 이념적 토대를 갖춘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의식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나는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했으며, 사진에 대한 글쓰기는 내가 옥스퍼드에서배운 실천적 비평의 연장일 수도 있다. 시나 산문 한 편을 읽고 운율과 단어 선택 등이 특정한 효과를 자아내는 방식을검토하는 일 말이다. 아마도 그 요령을 터득하는 것이 시험을통과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기술일 것이다(이렇게 대학교시절을 떠올리는 것은 좀 유치하지만, 글쓰기는 내가 스스로 비용을 조달한, 늘 진행 중인 교육 프로젝트의 일부였다). 나는 글대신 사진을 읽는 것을, 자세히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실천적 비평이 역사적 뿌리에서 개인의 전기적 이야기라는먼지를 털어 버리고 텍스트를 뽑아내는 반면, 시와 그 저자가처한 문화적·역사적 상황에 대한 감각, 즉 전통에 대한 감각은텍스트의 내용뿐 아니라 텍스트 자체가 무엇인지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이는 내가 사진을 배우면서, 점점 늘어 가는 다양한 전통 안에 있는 역사를 바라보려고 시도하면서 얻는 이득 중 하나였다. 이런 시도는 세잔에 관한 릴케의 편지에가장 잘 요약되어 있다. "좀 더 잘 알아볼 수 있게 그림 앞에"‘
서 있으려는 시도 말이다.
- P14

‘서‘있다기보다 ‘앉아‘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갤러리의 벽이나 인터넷에서도 사진을 보지만, 집에서 소파에 앉아 다리를 올리고 책 속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버릇은 조만간 바뀔 것이다. - P14

게리 위노그랜드는 항상 사진에 서사 능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나의 이미지로는 사람이 모자를 벗는지 쓰는지 알수 없다고 말이다. 한편 스티븐 쇼어는 대형 카메라의 ‘묘사하는 힘‘에 매료되었다. 서사 능력의 부재와 정지된 상태에 대한 풍부한 묘사가 합쳐지면, 사진은 묘사라는 뒷받침 없이도리듬의 강력한 추진력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음악보다 언어에내재한 서사의 잠재력을 훨씬 더 쉽게 이끌어 낼 수 있게 된다(사실 음악에서 운명이 문을 두드리는 것 같은 생생한 소리를들을 수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래서 사진은 내게 비평적전문 분야이기도 하지만 묘사적 서사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 P15

사진에 관해 글을 쓰는 것은 음악에 관해 글을 쓰는 것에비해 대체로 쉬울 수 있다. 그런데 당연한 일이지만 어떤 사진은 다른 사진보다 이해하기 어렵다. 어려운 사진이나 음악, 시에 대해 글을 쓸 때는 처음의 또는 지속되는 혼란이나 당혹감을 잊거나 부정하거나 또는 숨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비평은 어떤 작품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해명하는 기회가 아니라, 작품 안에 내재한 진실이 표현되기를 바라며 그 반응을명확하게 표현하고 기록하고 보존하는 기회다. - P15

사진에 대해 글을 쓴 작가들에 관한 세 편의 글을 묶은3부 중 마지막 글은 존 버거의 글 모음집에 서문으로 쓴 글로,
이 모음집에서는 일종의 ‘뒤에 실린 서문‘처럼 이중으로 기능한다. 존에 대한 사랑과 존경, 그리고 그가 나에게 준 영감과가르침에 대한 감사함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도록이나 논문에 실을 글을 나에게 부탁한 많은 사진가와 큐레이터들에게도 감사한다. 사랑하는 작가나 예술가의 책에 서문을 쓰는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스물세 살의 내가 언젠가 내 글이 롤랑바르트의 『밝은 방』의 표지 사이에 끼어있게 될 것을 알았더라면, 행복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거의 4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행복해서 정신을차리지 못하고 있다. - P17

깊이 존경을 받고 말그대로 많이 보인다 해도 거의 익명으로남는 것이 사진가의 이상想이다. 혹은 그런 것이 이상이었던 적이 있다. 외젠 아제라는 사람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일지나 일기도 없다. 그의 작품에 대한 책에서도 생애와 관련된 사실이 두 단락 이상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똑같은일화 몇 가지가 항상 인용되는데, 가장 잘 알려진 일화는 만레이가 초현실주의 혁명 La Révolution surréaliste』의 표지에 사용한 사진을 자신이 촬영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일이다. 베레니스 애버트가 찍은 그의 사진이 남아 있으나, 그가 어떻게 보이는지를 제외하고는 그 무엇도 입증하거나 추정할 수 없다.
아제는 자신의 물리적 부재를 통해 사진의 실천적인 수호성인이 되었다. 사진가의 흐릿한 모습과 카메라 장비가 가게유리창에 비치는 몇장의 사진을 제외하면, 그는 형체 없이오로지 자신이 본 것과 다른 이들에게 보여 준 것으로 존재한다.  - P23

배은망덕하게 보일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아제의작품들 중 어떤 작품에 집중할 것인지 결정할 때는 그 방대한작업량 때문에 사치스러울 만큼 까다롭게 구는 것이 가능하다. 온갖 종류의 이미지들을 버려도 여전히 작품이 넘쳐난다.
나는 발자크, 플로베르, 디킨스의 책에서 19세기의 실내 장식에 관해 읽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그러나 아제가 촬영한 것들은 차마 다 볼 수가 없다. 그 사진들은 너무 억압적이고, 가구와 소품 때문에 무거워 보이고, 빅토리아 양식이라는 짐을 지고 있다. "가구 없는 생명은 없다"고 말한 조지프 브로드스키가 옳았다. 하지만 종종 그 가구는 생명 없이 죽은 것처럼보인다. 아제의 사진에서 그런 실내를 보면 밀실 공포증이 느껴지고 숨이 막힌다. 물론 이 말은 사진에 대한 찬사다. 마치속이 꽉 찬 쿠션처럼, 묘사 대상으로 가득 채운 방식에 대한찬사 말이다. - P26

아제의 작품 규모가 발자크를 연상시킨다면, 그의작품들은 인간이 거의 없는 ‘인간 희극comédie humaine‘이다.
이 비유는 적절해 보인다. 자신의 부재를 통해 존재를 인정받는 사진가가 인간의 부재를 통해 인간이 어디든 존재하는 사진을 찍은 것이다. 혹은 그저 구경꾼인 관객들은 사진의 질문던지는 방식에 호응하면서 ‘모두들 어디로 갔을까?‘ 하는, 우리와 같은 호기심을 느낀다. 발터 벤야민은 "아제의 사진은범죄 현장의 사진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의 사진에서 범죄의 진실은 불분명하지만, 간혹 목격자가 등장해 교차심문에서 효력을 발휘하는 증언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내가 개인적으로 선택한 아제의 작품에는 실내장식이나 가구가 없을뿐더러, 보통은 사람이 별로 없거나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그 사진 자체가 지닌 본질적 중력에 동의하거나 그것을 지지하지 않는다면(심지어 그 중력에 영향을받지 않는다면), 누구도 나의 변덕과 선호에 관심을 가져야 할이유는 없다. 나는 아제가 찍은 텅 빈 거리와 인적 드문 공원의 야외 사진을 좋아한다. 아제의 아제스러움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진이기 때문이다. - P27

호수는 흐르지 않는다. 호수는 변하지 않는 채로 주변의사물이 변하는 모습을 반사한다. 좀 더 확장해서 말하자면,
그들은 시계 앞면의 고정된 중심부 같다. 베르사유와 생클루,
소 공원의 호수와 연못을 촬영한 아제의 사진들은 깊고 인간적이지 않은 느낌을 자아낸다. 이는 북적이는 인간들의 시간이 그 자체를 공허하게 만드는 것과 반대다. - P31

아제는 순수 다큐멘터리 양식의 대부다. 자코우스키에게아제는 "사진의 필수적 목표이자 미학인 사실에 대한 정확하고 명쾌한 묘사"15를 확립한 사람이다. 이는 조각상을 스스로감금된 무언의 목격자로 만드는 사진의 마술이다. 즉 아제는이 마술을 통해 조각상이 스스로 감각할 수 있게 만든다. 마치 거울을 바라보는 것처럼 조각상이 자신의 관점으로 스스로를 묘사할 수 있게 말이다. - P32

카르티에 브레송은 "관객이 머리를 1,000분의 1인치만 움직이면"16 사진에 나타난 세계가 재구성될 거라고 말했다. 눈알을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조각상에게는 그런 자유가 없다.
조각상은 공간에 대해 느끼지 못한 채로 오로지 시간과 관련해서 존재한다. 그들의 의식은 오로지 시간에 국한되어 있다.
조각상의 의식의 틈으로 들어가면서, 우리는 가까운 곳에 앉아 있거나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덧없는 인간의 시간을 느낄 수 있다. 비록 사진에 사람이 보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 P33

필연적으로 조각상과 물이 함께 등장하는 사진이 몇 장있다. 시간에 대한 중층적 개념 그리고 자의식을 가진 이미지,
또는 가장 최선으로는 그 자체로 가득 차 있는 이미지에 대한 감각을 동시에 간직한 사진이다. 호수란 그것을 둘러싸고 틀로가두는 장면들로 가득한 일종의 작은 사진이다(벤야민에 따르면 호수는 사진의 발명을 통해 밝혀진 "광학적 무의식"의 저수지로 여겨질 수도 있다). 노출 시간은 바람에 흔들리는 수면을 종종 고요하게 만들고, 변치않는 나무나 언덕 등이 반사된장면조차 일시적인 것으로 보이게끔 흐릿하게 만든다. 소공원의 조각상은 잎이 떨어진 겨울 나무 줄기에 둘러싸인 채로 불과 몇 피트 떨어진 곳에 있는 말라 버린 연못의 이미지,
물을 생각하고 있다.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 P33

예술적 감성을 풍부하게 보여 주면서 그 과정에서 사진의 지위를 산업보다는 예술로 공고히 하는 한 가지 방법은 사진을 회화처럼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코번의 경우에는 제임스 맥닐 휘슬러의 회화처럼 보이게 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템스강을 바라보는 그의 사진적 시선은 마치 한낮의 야상곡 같다. 사진으로 도시를 묘사하는 새로운 방법이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면, 즉 낡은 매체인 회화가 이룩한 당대 최신의 혁신이었던 인상주의의 일부를 받아들였다면, 이 시도는 모두시각화된 기억의 감각, 과거의 시각 매체(가장 분명하게는 휘슬러의 회화에 대한 기억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 P38

"그가 사진에서 안개를 걷어 낸28 순간, 사진은 폴 스트랜드가 만든 ‘추상‘ 작품을 예측하는 확실히 혁명적인 것이 되었다. 코번의 자화자찬은 차치하더라도 스물세 살 때 ‘사기꾼‘
이라는 별명을 얻은 이 예술가는 자화자찬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는 실제로 그 사진의 혁명적 작품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이 책은 그가 기억하는 것보다 3년 빠른 1909년에처음 출판되었다. 그러므로 미래는 『뉴욕』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코번의 뉴욕에 있었다. 보이는 것 속에 보이지 않는것이 형성되고 있었고, 그 너머를 가리키고 있었다. - P45

1962년, 다이앤 아버스는 뉴욕 현대미술관의 사진 담당 디렉터인 존 자코우스키에게 아우구스트 잔더의 주소를 문의했다.
"그에게 편지로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서 말이다. 이는 몇가지 이유에서 주목할 만하다. 첫째, 잔더(1876~1964)와 아버스(1923~1971)는 오랫동안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사실이다.
둘째, 이 문의는 마치 신인 작곡가가 밥 딜런의 이메일 주소를물어본 것과 같은 약간 주제넘은 행동이었다는 점이고, 마지막으로 아버스의 그런 주제넘은 행동이 타당했다는 점이다. 잔더의 작품 세계는 아버스의 사진이 무르익을 정도로 발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결국 관객들은 아버스의 작품을통해 잔더의 작품을 알게 되었다. 아버스는 자신이 카메라를손에 쥐기도 전에 촬영된 잔더의 작품들에서 영향을 받았으므로, 이는 일종의 역전이라고 할 수 있다. - P46

묘사된 개인들은 하나의 유형에 속했다. 그러니 방대한야심 탓에 실패한 전형적인 프로젝트였던 『미들마치」와 「모든 신화의 열쇠를 발견하고 그에 대해 쓰려 했던 카조봉 목사의 노력이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럽다. 사진에 대해 말하자면 W. 유진 스미스를 떠올릴 수 있다. 그는 1950년대 중반 피츠버그 프로젝트를 통해 그 도시의 면면을 1만 장이나 촬영했으나, 그 후 몇 년 동안 그 덩어리 자료를 어떤 형태로든 편집하는 데 실패했고, 결국 "신념의 거대한 통합" 33 을 제대로이루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함에 직면하게 되었다.
잔더 역시 자기 몫의 좌절감을 경험했다. 롤랑 바르트가말했듯이, 그가 촬영한 얼굴이 " 나치의 인종 원형과 일치하지않았기 때문에"34 검열을 당한 것이다. 쾰른에 있던 그의 스튜디오는 연합군의 폭격을 받았다. 2만 5,000장의 네거티브 필름이 1946년 지하실 화재로 소실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놀라운 임무‘에 한결같은 다짐으로 매달렸다.  - P49

1926년 오토 브뤼에스의 초상을 예로 들어 보자. ‘작가‘
포트폴리오에 속한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브뤼에스의 작품과 이름은 오늘날 거의 완전히 잊혔다. 내가 아는 것은 그가이렇게 생겼고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는 점뿐이다. 불행의 원인은 무엇일까? 맞다. 동그랗게 반짝이는 안경과 결혼반지는 둘 다 빛을 받고 있지만, 여기에는 분명히 더 무거운 것이 흐르고 있다. 무엇의 무게일까? 만약 절망의 무게라면 너무 멜로드라마 같을 것이므로, 절망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바로 시대와 소명의 무게다. (잔더의 작가 초상이 언제나 그렇듯이) 배경에 책이 없고, 그는 책상 앞에 앉아 있지 않다. 왜일까?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바지는 마치 뒤에 있는 매끄러운 책상 같고, 그는 바지 위에 손을 올리고 있다. 내게 아무 의미도 없는 이름인 잔더의 브뤼에스는 "나는 이름이 되었다‘라는 테니슨의 율리시스」를 읊조리며 스스로 책상이 되었다. 마틴 에이미스의 『정보』에서 무명 소설가 리처드 툴은 자신의 삶을 반추한다. "리처드는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의 삶은 책상이었다. 인생은 변했다. 하지만 인생은 여전히 책상이었다. 항상 그의 앞에 있는, 책상이었다. 첫 학교, 그 후 20년. - P53

여러 직업들, 그리고 20년, 그리고 항상,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에, 더 많은 책상이 있다. 숙제: 40년 동안의 책상.37이것이 작가의 삶, 숙제의 삶이다. 그 사진을 계속 보면 마치 책상보다 더 어두운 다리의 덩어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조각상을 받쳐 주는 일종의 받침대나 혹은………… 무명용사를추모하는 기념비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여기서 보이는것은 무명작가에 대한 사진적 기념비일지도 모른다. 이렇게더 밀어붙인다면 다리가 지질학적 지층 같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기준으로도 긴 노출 시간인 수백만 년 동안,
늪지대 전체의 진흙이 압축되고 지능을 가진 생명체가 출현한 묵직한 증거로서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글을 사용하는 능력에서 궁극적인 문학성까지 이어지는 깊은 계보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 작품과 저자가 잊혔다면? 잔더의 많은 사진이 이 질문을 다양하게 변형해서 제기하고 동시에 기록한다. 이 사진들은 사회에서 식별이 가능하도록 한 증거가 실존의 영원한 휴식, 즉 존재론의 텅 빈 미스터리에 자리를 내주는 순간에 찍은 것이다.  - P54

폭격을 맞은 그의 스튜디오 잔해 사진은 그가 사람들의 얼굴과 옷의 밀도에서 벗어나길 얼마나간절히 갈망했는지 보여 주는 상징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 같은 갈망은 마이클 소모로프의 심오하게 아름다운『대상의 부재 Absence of Subject』(Buchhandlung Walther König,
2011)에 의해 미묘하게 충족된다. 소모로프는 잔더의 가장 잘알려진 사진 중 일부에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사람들을 제거한다. 마침내 시간이 손아귀를 풀고 사람들을 놓아준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자신의 주변으로 스며들었고, 부재는 완전한 존재가 되었다. 한때 제빵사, 피아니스트, 또는 9인 가족이있던 곳에 이제는 유령이 사는 보이지 않는 고요한 부엌과 빈방, 빈의자, 잔디가 있을 뿐이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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