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내 행동의 본질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내가 한편으로는무언가를 간절히 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결코 충분히갖지 못할까 봐 겁먹었다는 사실, 음식은 그 사실을 끔찍하고 강력하게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음식을 통제하는 것은 그런갈등을 표현하는 동시에 부정하는 방법이었다. 그때 나는 내 인생의 중요한 사람들에게 화나 있었다. 나를 버린 것처럼 느껴졌던 남자친구에게, 내게 소극적이고 거리감 있는 태도를 취한다고 느껴졌던 부모님에게, 멀리 이사해버린 언니에게. 하지만 그 화를 표현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대신 그것을 몸에 걸치기로 했다. 당신 때문에 내가 어떻게 됐는지 보여? 내가 얼마나 절망적이고 불행한지보여? 나는 사람들이 겁났고, 실망할 것이 겁났다. 더 깊은 차원에서, 나는 식욕뿐 아니라 감정적 욕구와 성욕까지 모든 욕구가 겁났다. 그래서 그것들을 억압하고, 짓누르고, 의지로 없애버리기로 다짐했다. 욕구가 없다면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할 일도 없으니까. - P166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굴복하지 않는 것, 굴복하지 않는 것, 굴복하지 않는 것이 규칙이었다. 그것이 내가 삶을 꾸리고자신을 규정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나는 대신 달리러 나갔다. 그날 달리는 기분이 어땠는지 지금도 기억난다. 온몸이 아팠다. 갈비뼈와 무릎뼈가 말 그대로 피부에 쓸리는 것처럼, 온몸이팽팽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피곤했다. 그러다 한순간, 발을 헛디뎌서 인도에 엎어질 뻔했다. 그때 내 꼬락서니와 느낌이 아직도 생생히 떠오른다. 나는 꼴사납게 깡충거리듯 성큼성큼 세 걸음을 디뎠고, 쭉 뻗은 팔은 균형을 잡으려고 버둥거렸고, 눈은 부릅떴다. 겁에 질렸다. 그리고 혼자 캄캄한 밤중에 통제를 잃고 발버둥 치는내 꼴이 순간 눈앞에 그려졌다. 간신히 추스르고 계속 달렸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내가 그 부엌에서 친구들과 중국 음식을 먹고맥주를 마시기를 간절히 원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나는 친구들에게 합류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 배가아픈 척하고(때로는 두통이 있는 척했다) 내방으로 사라졌다. 내방의 바깥 창턱에는 이럴 때에 대비하여 놓아둔 큐브 치즈와 사과 봉지가 있었다. 그걸 집어와서 몰래 먹는 것이었다. 그런 순간에 나는 내가 외롭다는 사실, 내 삶이 엉망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알아도 어쩔 수가 없었다. - P167
그날 밤 나는 포도주를 잔뜩 마셨다. 그러고는 끝내 울면서 두분에게 말했다. 나한테 문제가 있는데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내가 거식증인 것 같다고. 지금 기억나는 것은 두 분의 눈뿐이다. 걱정과 약간의 두려움이 깃들어 있지만 주로 무력한 표정이었던눈 두 분은 공감하지 못했고, 나는 설명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에게 이 일이 벌어져도-어쩌면 그 경우에 더욱더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어머니가 우편으로 보낸 쪽지를 받았다. 거기에는 이렇게만 적혀 있었다. "먹어라." - P170
하지만 그런 순간은 드물었고, 대부분의 순간에 나는 모든 것을 부정했다. 나는 사철 따뜻한 날에도 추웠는데, 그 사실을 부정했다. 현기증이 잦았고 앉았다가 일어나면 눈앞이 캄캄해지곤 했는데, 그 사실도 부정했다. 스물셋, 스물넷, 스물다섯 때였는데 친한 친구가 한 명도 없다시피 했고, 사회생활은 허울뿐이었고, 성생활은 물론 없었다. 나는 이런 사실들도 부정했다. 고립되어 사는건 견딜 수 있었다. 몸무게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한없이지루하게 사는 것도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통제력을 잃고서는 살수 없었다. 나는 우울에 익숙해졌다. - P171
섭식장애에서 회복된 지인이 내게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어느시점에 그냥 결정을 내렸어요. 미치느니 뚱뚱한 게 낫겠다고." 어느 시점이 되면, 당신이 입힌 손상이 당신의 삶에 행복에, 관계에 그냥 너무 뚜렷해진다. 어느 시점이 되면, 보통 당신이 몇 년동안 치료를 받아서 그 행동의 의미와 자신이 그 행동으로 성취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머리로는 진작 알던 시점에, 그것이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전혀 없다는 사실을 어느 시점이 되면, 집착이 너무나 철저하고 깊고 지독하게 지루해진나머지, 당신은 더 이상 이럴 수 없고 다른 대처법을 찾겠다고 선택할 수밖에 없어진다. 나는 이제 몸무게가 안정적이고, 이 일은 대체로 과거가 되었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아직 대처법을 찾지 못한 여자들이무수히 있다. 나는 여름 해변에서 꼬챙이 같은 다리를 가진 그들을본다. 찰스강에서 죄수처럼 수척하고 음침한 얼굴로 강둑을 달리는 그들을 본다. 나는 그들을 붙잡아 세우고 몸을 흔들면서 말하고싶다. "당신이 어떤 상태인지 알아요. 당신이 뭘 하는지 알아요. 제발 내 말을 믿어요. 그래 봤자 소용없어요." 하지만 그들이 스스로깨우쳐야 한다는 것을 안다. 어떤 이들은 영영 깨우치지 못하리라는 것도 안다. - P173
하지만 변화가 보장된 방법이란 없다. 당신이 그냥 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굶는 일을 아주 조금씩 그만두었다. 아침에 하나만먹던 베이글을 하나하고 반 덩이 먹게 되었다. 그냥 배가 너무 주려서 그러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다. 그다음에는 크림치즈를 발랐다. 1985년에는 몸무게 재보는 일을 그만두었다.(이후 지금까지 재보지 않았다.) 1986년에는 찰스강에서 스컬 보트를 타기 시작했는데, 이 어렵고 만만찮은 스포츠는 내게 식욕 말고도 터득할 것을 안겨주었다. 역시 그해에, 나는 섭식장애를 가진 여자들의 상호 조력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각 단계마다 배우는 것이 있다. 당신은경직성을 포기한다고 해서 반드시 통제력을 잃는 건 아님을 배운다. 자신의 힘을 느끼는 방법에는 좀 더 지속가능한 다른 방법들도있다는 걸 배운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이 부담스럽고 위험하게 느껴지더라도 혼자인 것보다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나은 일이란 걸 배운다. - P174
요즘 나는 좋은 날일때도 있고, 나쁜날일 때도 있고, 그저 그런 날일 때도 있다. 그리고 아마도 최고의 날은 어떤 날인지 생각조차 해보지 않는 날일 것이다. 내가 음식을 결정의 수단으로 사용했던 것이 마지막으로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몇 시간 넘게 굶주린 것이 마지막으로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음식이나 몸무게를 절대 걱정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둘 다를 무척 의식하면서 산다. 내가 음식에 대해서 완벽하게 ‘정상‘이 되는 날이 오기나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만약 정상이라는것이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면, 오늘날의 이 문화에서 완벽하게 ‘정상‘인 여성이 한 명이라도 있을지 잘 모르겠다. - P175
나는 이 외로움과 오래도록 친밀하게 지내왔다. 가끔은 내가이 외로움을 타고난 게 아닐까, 나 자신이 남들과 다르거나 뭔가부족해서 세상과 떨어진 존재라고 강하게 느끼는 이 감정을 타고난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릴 때 어느 봄날에 내 방에 앉아서 창밖에서 살랑거리는 나뭇잎들을 보며 당시에는 너무 어려서 이름붙이지 못했던 어떤 기분을 느꼈던 일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것은세상에 참여하지 못하는 기분이었던 것 같다. 세상은 저 창밖에서나 없이 분주히 돌아가고 있는데 나는 거기 참여할 능력이 없거나의지가 없다고 여겨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친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늘 친구가 있었고 지금도 있고 그것도 많다. 하지만 내가 겪는 외로움은 현실의 상황이나 논리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내 안에 산다. 작고 끈질긴 악마 같은 그것은 가장 고요한순간에, 그러니까 계획 없는 저녁이나 일요일 아침 같은 때 활개를친다. 그것은 공허감이다. - P184
내 경우에 이 공허함은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스스로 만족스럽거나 안정적이라고 느끼기 위해서, 나 자신이 편안하게 느끼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내 머릿속에서 울리는 예의 실시간 해설을 유심히 들어보면, 그 목소리는 더 크고 무서운 질문들을 던진다. 커피를 만들고 설거지를 하는 이 사람은 누구지? 이 사람은 무엇에서 삶의쾌락과 즐거움과 기쁨을 느끼지? 두렵고 공허한 시간을 편안하고만족스러운 시간으로 바꾸려면 무엇이 필요하지? - P186
요전날 밤, 내 개와 함께 거실에 앉아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목소리가 녹음된 테이프를 틀어보았다. 무덤에서 망자의 목소리를소환하려는 것처럼 음침한 일로 들리지만, 사실 나는 이 일로 수용에 관한 작은 교훈을 하나 배웠다. 상실을 수용하는 것, 나를 떠난사람을 수용하는 것, 더 이상 내 곁에 없는 사람을 수용하는 것에대하여. 아버지는 5년 전에 뇌종양으로 돌아가셨다. 정신분석가였던아버지는 놀라운 지성의 소유자였고, 병을 진단받았을 때 막 책을쓰기 시작한 참이었다. 뇌종양은 집필을 결딴냈다. 아버지는 오른손으로 펜을 쥐는 것조차 힘들었고, 생각은 점차 산만해졌다. 하지만 투병의 첫 몇 달 동안은 병이 아버지의 의지만큼은 꺾지 못했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삶을 지탱해준 힘이었던 일을 그만두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와의 대화를 테이프에 녹음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 P188
하지만 그 테이프는 다른 것도 담아냈다. 나와 아버지, 그리고내가 이해하기로 이상하고 강렬하고 어긋난 관계였던 우리 둘의애착 관계가 거기 담겨 있었다. 아버지와 나의 관계는 심리치료를10년 이상 받도록 만들 만한 것이었고, 그런 우리의 대화를 듣고있노라니 그 옛날로 시간 여행을 하여 그 옛날의 관계를 18분 동안엿듣는 관찰자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흠모했고, 아버지를 공경하면서도 두려워했으며, 아버지의 인정을 몹시 바랐다. 내게 아버지는 신인 동시에 미친 과학자였고, 전능하고 탁월하고 곧잘 생각이 다른 곳에 가 있어서 내가 가끔씩만 가닿을 수 있고 그나마도 불완전하게 접촉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버지와의 접촉은 짧은 순간 갑자기 이뤄졌다가 끊어졌다. 평소 자신의 생각이라는 구름에 둘러싸여 있던 아버지가 잠깐 땅으로 내려와서 아주 잠시-10분, 18분-자신의 통찰력과 영민함을 내게 발휘한 뒤 다시휙 사라지는 것 같았다. 나는 그 감정적 거리감이 어디에서 연유했는지를 아버지가 투병하는 동안 더 잘 이해하게 되었는데-아버지는 우울증과 술과 내면의 어두움과 오랫동안 대체로 혼자만 아는 싸움을 벌여왔고, 그런 힘들에 떠밀려서 일로 사라졌으며, 그래서 늘 생각이 딴 데 가 있는 사람이 되었다-하지만 어렸을 때는여느 아이들이 그런 것처럼 그 관계의 결함이 내 탓이라고 여겼다. 아버지가 내게 실망했기 때문에, 내가 아버지에 비하면 무가치한사람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내게 거리를 둔다고 여겼다. - P190
‘인간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날 밤 아버지와 내가 식탁에 앉아서 테이프를 녹음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휠체어에 앉아 계셨고 나는 포도주잔을 생명줄처럼 움켜쥐고 앉아 있었다. 우리가 둘다 서툴렀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둘다 불완전하고 부자연스러운 방식으로나마 투병 기간 내내 서로에게 곁을 주려고 노력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잃어버린 기회와놓친 연결감과 이런저런 후회도 떠오르지만, 무엇보다도 크게 느끼는 것은 일종의 평온함이다.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노력했어. 마지막에는, 우리 둘 다 최선을 다했어. 이런 감상에는 슬픔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뿐만은 아니었다. 평화도 있었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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