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여름, 텅 빈 하버드 광장
마지막 햇빛 속에 우리가 있었다.
아무것도 갖지 못했던
서로에게 무엇이 될 수도 없었던
다신 돌아갈 수 없어 
아름다운 시절에 대하여 .....(뒷 표지에서)

본 수아레


그러나 우리는 우연히 손이 스칠 때 제외하고는 서로를 만진 적이 없어서 지금 그렇게 하는 게 너무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대신 나는 그의 손바닥을 만지려고 손을 뻗었다가 그의 손등을 잡았고, 처음에는 부드럽게 잡고 있다가 점점 더 힘을 주어 꽉 잡았다. 이조차 나로서는 쉽지 않은 행동이었고,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걸 보면 그에제도 쉽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뼛속 깊이 지중해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우리 두 남자보다 더 감정 표현을 할 줄 모르고자제하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어쩌면 우리 둘 다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고, 칼라지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같다. 그 순간 나는 나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했다. 나는 다시 일어서는 대신 그의 옆에 누워서 그를 바라보며 한팔로 그의 가슴을 감싸 안았다. 그러자 그도 팔을 뻗어 내 손을 잡더니 내 쪽으로 돌아누워 한 다리로 나를 휘감고 나를부드럽게 끌어안았다. 그의 숨죽인 흐느낌을 제외하고는 둘다 철저히 침묵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P275

알 수 없었다. 조명이 모두 꺼지고 다들 집으로 돌아간후 분장실에 홀로 있기를 원하는 배우처럼, 나는 천친히 화장을 지우고 가발, 의치, 속눈썹을 제거하고 천천히 나 자신이로 돌아오고 싶었다. 가면이 아닌 내 맨얼굴을 보고 싶었다.
또 가면을, 언제나 가면만을 보고 싶진 않았다. 나는 나에게프랑스어로, 나만의 프랑스어 억양으로 말하고 싶었다. 나를낳은 부모로부터 배운 그대로 말하고 싶었다. 나는 영어에 넌덜머리가 났고, 여름날의 바다 소금 맛이 나지 않는 모든 것에, 끝없이 이어질 듯했던 여름날 오후 우리 집 부엌에서 만들어지던 짭조름한 맛이 나지 않는 모든 것에 넌덜머리가 났다. 매미가 미친 듯이 울어대고, 시간이 느려지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바다가 우리를 손짓해 부르던 그 여름날 오후, 낮잠 잘 생각이 없을 때도 자장가처럼 우리를 재우던 파도 소리가 그리웠다. 나는 심지어 내 환상 속의 파리에 넌덜머리가났고, 내가 쌓은 장벽에, 내가 가면을 쓰고 있다는 생각에, 내진짜 얼굴에 대한 갈망에, 내가 불화하는 것은 가면이 아니라내 진짜 얼굴이라는 생각에 넌덜머리가 났으며, 사실은 내 진짜 얼굴이란 지금도 앞으로도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넌덜머리가 났다.  - P332

칼라지는 미국에 푹 빠져들자마자 약해졌다. 그때까진미국에 대한 혐오를 공공연히 드러냈었다. 그 혐오가 그의 떠돌이 신분을 그럴듯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는 격리된 발코니에서 이 새로운 세상을 관찰할 수는 있었지만 접하긴커녕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나 비록 하룻저녁 잠깐 들여다보는 정도에 그쳤음에도그 세계에 초대받아 들어가본 그날 이후, 그는 곧바로 개종했다. 그의 마음은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인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에게 왜 그렇게 변했느냐고 물었다. 부자들의 풍요, 호화로움, 자기만족? "사실 이게 다 햄때문이야." 그가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의 초라한 엉 돌라르뱅두가 그들의 레드 와인에는 비교도 안 된다는 사실하고."
- P339

자신은 이미 프랑스를 보았고 그곳에서 살면서 결혼도 했지만 다시는 그곳에 발을 내딛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거라니, "그러면 미쳐버릴 텐데." 내가 말했다. 불현듯 내가 알렉산드리아를 영원히 버리고 나서 다시 그곳에 던져진다면 어떤 기분일지 떠올랐다. "마치 도망치고 싶어 안달이 났던 곳에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겠네요."
"다시 태어나는 게 아니라, 다시 죽는 것 같겠죠." 모로코인 택시운전사가 말했다.
"그러게요. 그럴 것 같네요."
칼라지는 프랑스 이전과 이후의 시기에 다시 죽는 것과같은 삶을 살았다. 그는 경험은 항상 환영할 일이라고, 인생에서 필요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우리가 만나는 모든사람과 우리가 가는 모든 장소와 우리가 가진 가장 초라하고별 볼 일 없는 직업까지도 지금의 우리를 만드는 데 작은 역할이라도 했다고 말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식적인 헛소리고, 칼라지는 자신이 그런 헛소리에 빠지지 않도록 대단히 냉혹하고 엄격하게 자신을 관리했다. 그의 사전에는 새로운 기회란 없었다. 그저 자신을 축내며 살고, 먼저 죽은 사람들이 남긴 적은 유산을 물려받아 살 뿐. 그에게는 사방에 함정이 있었고, 잔인한 속임수가 있었고, 끔찍한 실수가있었다. 거기에서 벗어나기란 불가능했다.  - P360

자존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쁜 짓을 한 손을 잘라야 했고, 끝없이 자르고, 쳐내고, 찢고, 긁어내야 했다. 가장 기본적인 뼈대만 남을 때까지. 우리의 뼈는우리를 드러낸다. 뼈는 숨길 수도 없고 외면할 수도 없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모두 자르고 뼈대만 남기는 거였다. 그러면 우리가 고백할 필요도 없고 그들이 고백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잃고 마지막 지푸라기만 남았다는 사실을 부모가 알고 형제자매가 알고 애인이 알 듯이 우리 자신도 알기 때문에. 한편 용서를 모르는 그의 신은 그를 치유해줄 약도, 도와줄 사람도 보내주지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선택한 무기가 분노와 칼라슈니코프였다.
그는 내가 자신과 똑같이 빈 수통을 들고, 자신과 똑같이맹물이 아닌 다른 음료에 대한 갈증을 느껴서 같은 술집에 들른 같은 부대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를 실망시켰다. 그는내가 자신처럼 인간적이고 날것의 욕망이 가득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뉴잉글랜드에서의 삶에 환멸을 느끼고 지중해를 동경하고는 있지만, 이미 반대편으로 옮겨왔다는 사실을 상기하기 위해 칼라지 같은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 P361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 순간 참을 수 없는 수치심과 참을 수 없는 슬픔 사이를 오가는, 뭐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격통느꼈다는 것이다. 내가 이런 짓을 한 것이다. 다른 사람도아닌 내가. 그동안은 이렇게까지 비열하고 천박한 인간으로전락한 적은 없었는데, 나는 죽어가는 친구를 보러 가기를 차일피일 미루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죽어가는 사람이 전화해서 몇 분 만이라도 들렀다 가라고 부탁할 때마다. 그 아픈 사람의 사기를 북돋운다는 핑계로 그의 걱정을 무시한다. 내일 가보도록 애써볼게. "내일이 없을지도 몰라." 죽어가는 친구가 말한다. 여전하군, 자네, 두고 봐, 자네가 우리 모두보다. 오래 살 거야."
그러나 지극한 수치심으로 통증을 느낀 것과 거의 동시에, 페르시아 여자의 집에서 걸어 나온 밤 이후로 느껴보지못했던 즐겁고 가벼운 마음과 안도감이 들었다. 여러 달 동안나를 쫓아다니고, 짓누르고, 갉아먹던 불안과 걱정이 갑자기싹 사라진 것처럼, 자유와 기쁨과 해방감을 느꼈다. 내 마음은 구름 사이로 자꾸만 올라가는 연처럼 가볍게 하늘 위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 P373

칼라지 때문에 만난 모든 이들, 하비스트와 카사블랑카와 일요일 저녁의 하버드 엡워스 교회, 처음부터 우리가 만들어낸 우리만의 언어, 그 언어 때문에 꽃을 피웠던우정, 그 모두에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그가 내 삶에 가져다준 많은 새로운 것들에게, 친구들과 함께했던 저녁식사에, 우리 둘만의 저녁식사에, 해피 아워에, 내 삶에서 빠져 있었고우리의 공통점을 찾게 도와주었던 공모자 의식에, 본 수아레.
영주권에 대한 그의 걱정과 학업에 관한 내 걱정이 먹구름을드리울 땐 우리 삶 속으로 표류해 들어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었던 여자들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그 먹구름을 몰아낼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여자들보다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해준 것은 그녀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난 뒤 우리 둘이 그녀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이었다. 우리의 작은 오아시스에, 우리의 상상 속 지중해에, 우리의 작은 프랑스 마을에,
나 자신을 미국이라는 춥고 외롭고 어두운 평원에서 발목이잡혀 오도가도 못하게 된 외로운 이방인으로 생각했던 내 착각에, 본 수아레. 나는 이제 그들 중 한 명이었다.  - P379

우리 입술에 떠올랐다가 소리로 변환되기 전에 즉시 재갈이물리듯이. 어느날엔 그의 택시를 불러서 타보자고 계속 되뇌인적도 있었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 했는데, 내 형편에택시를 타는 것은 가당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차 문을열었을 때 내가 계속 찾고 있었던 것을 발견하리라는 사실을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항상 구두 가게를 연상시켰던 그낡고 갈라진 가죽 덮개의 냄새, 월든 호수에 차를 세우고 나서 두 소년을 함께 앉힌 뒤로 젖힌 보조좌석, 이제 생각해보니 영원히 그의 주위를 맴돌았던 지울 수 없는 담배 냄새, 그리고 또 그 택시를 타면 안 되는 이유는 내가 뒷좌석에 타본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차에 올랐을 때, 그가나를 집까지 태워다주었을 때, 혹은 어느 날 밤늦게 브루클린에 사는 여자와 자고 싶어 안달이 난 나를 브루클린까지 태워주었을 때, 나는 항상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언젠가는, 어쩌면 케임브리지를 떠나기 몇 주 전에라도 그의 택시를 부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는 항상 그걸 잊었다. 그리고 그 택시는사라졌다. 그리고 나도 사라졌다.
- P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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