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 바르트는 어머니가돌아가신 다음 날인 1977년 10월 25일부터 「애도 일기』를 써내려갔다. 노트를 사등분한 쪽지에 2년 동안 남긴 메모들에는 ‘어머니Metre 보다 ‘엄마 Maman" 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마망‘ 이라고 부를 때마다 그 말을 둘러싼 온기와 슬픔에 바르트는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터뜨렸다. "나의 롤랑, 나의 롤랑" 이라고 부르던 엄마의 목소리를 떠올리면서, 스물두 살의 나이에 바르트를 낳고 이듬해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어머니, 그래서 롤랑 바르트의 애도는 더욱 간절했을 것이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엄마의 다섯 살 때 사진을 책상 위에올려두고 그 순결한 소녀를 향해 한없이 빠져들었다. 애도일기』의 번역자인 김진영의 설명처럼 "사진은 말하자면 부재 속의 실재라는, 있을 수 없는 존재의 실존이 기술적으로그러나 마술적으로 구현된 이미지"다. 또한 죽었으면서도살아 있는 존재처럼 산 자에게로 귀환하는 유령 이미지다. - P120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엄마,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담고 있는 단어가 또 있던가. 이렇게 오래도록 울림을 간직한 언어가 또 있던가" 라고 썼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엄마‘는 가장 친밀한 호칭이고, 가장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르게 되는 단어일 것이다. 딸은 렌즈를 통해 엄마를 바라보면서 언제까지고 엄마 속의 엄마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엄마의 주름진 얼굴을 보며 김혜순의 시 「얼굴의 한 구절대로 자신을 부재자의 인질이라고 되뇌기도 한다. 엄마가 사라진 후의 시간을 자주 떠올리는 그녀에게 사진 찍기는 부재자의 현존을 앞당겨 불러올수 있는 제의적 행위에 가까워 보인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사진 찍기란 숙련된 기술로 피사체를 다루는 일이 아니라, 그 대상을 혼신의 힘으로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을 배워나간다. - P126
사진의 제의적 가치가 남아 있던 마지막 보루가 바로인간의 얼굴이라는 것. 기술복제시대에 사진의 아우라가사라진 것은 사람의 모습이 뒤로 물러나고 전시적 가치가강해지면서부터라는 것. 벤야민의 이 예리한 통찰이 새삼놀랍다. 우리는 과연 그 잃어버린 인간의 얼굴을 되찾을 수있을까. 롤랑 바르트가 엄마의 빛바랜 사진을 보며 애도에몰입했던 것도, 한설희 작가가 엄마의 말년 모습을 찍으며이별 연습을 했던 것도 그 사라짐에 대한 저항이자 인간의아우라를 잡으려는 안간힘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아주 드물게, 누군가는 어디선가 셔터를 누르고 있을 것이다. 사람의 얼굴, 멜랑콜리하고 그 어느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아름다움을 향해, - P132
〈로스 카프리초스) 연작의 마지막 작품인 80번의 제목은 때가 되었다‘이다. 여기에는 "동이 트면 마녀와 요정, 그리고 유령과 허깨비들은 각자 자신의 거처로 숨어든다. 이들이 밤과 어두운 때를 제외하고 우리 눈에 띄지 않는 것은참 다행스러운 일이다!"는 설명이 적혀 있다. 이 반인반수의 괴물들은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서둘러 떠날차비를 하고 있다. 이렇게 고야의 동판화에 넘쳐나는 악마의 얼굴들은 고야의 핏속에, 본능 속에 깊이 잠들어 있던 어떤 절규를 들려준다. 말년에 귀머거리가 된 고야는 생을 마칠 때까지 칩거하며 집의 벽면을 온통 검은 그림Black Painling) 연작들로 채워나갔다. 자식의 몸을 움켜쥐고 뜯어 먹는 사투르누스를비롯해 고야의 말년작들은 한층 어두운 심연에 잠겨 있다. 그 그림들을 보면서 예술의 힘이란 쾌락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 P143
마지막 전시실 밖에는 자코메티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거리의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무게가 없다. 어떤 경우든 죽은 사람보다도, 의식이 없는 사람보다도 가볍다. 내가보여주려는 건 바로 그것, 그 가벼움이다." 또 다른 벽에는이런 문장도 있다. 마침내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한 발을내디뎌 걷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끝이 어딘지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나는 걷는다. 그렇다. 나는 걸어야만 한다." 이처럼 걷는 행위를 통해서만이 중력으로부터 잠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처음에 본 자코메티의 걸어가는 사진과 걸어가는 사람의 형상이 자꾸겹쳐진다. 자코메티가 수많은 모델들 속에서 매번 발견하려고 한 것은 어쩌면 자기 자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P152
이따금 그림이 말을 하는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또는 그림 속에서 어떤 선율이 총러나오는 것 같을 때가 있다. 회화는 시각예술임이 분명하지만, 시나 음악에 한결 가까운 그림들도 있는 것이다. 예를들어 칸딘스키, 미로, 로스코 같은 화가들이 그러하다. 이들의 그림에서 말과 선율은 주어진 형상을 넘어 무한을 향해있다. 칸딘스키의 표현처럼 직선들의 차가운 긴장, 곡선들의 따뜻한 긴장, 엄격함에서 느슨함으로, 다수로부터 압축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추상적 형태에서도 아주 드라마틱하고 직접적인 느낌을 읽어낼 수 있다.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 ~ 1970 의 작품을 보았던 기억역시 내게는 강력한 청각적 체험으로 남아 있다. 화집에서만 보던 로스코의 그림을 처음 대면하게 된 것은 런던 테이트모던 갤러리에서였다. 미술관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로 북적거렸지만, 이상하게도 ‘로스코의 방‘에서는 오직 나 혼자만이 그의 그림 앞에 서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 P164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인 2004년, 그의 일기에는 한 편의 시처럼 이런 탄식이 적혀 있다. "다들 죽었다. 이일도 죽고, 한창기도 죽고, 죠셉 러브 Joseph Love 도 죽고, 도널드 저드도 죽고, 황현욱이도 죽고, 나만 지금껏 살아 있고나. 내가좋아하는 친구들은 다 죽었구나." 홀로 남은 그에게 그림을그린다는 것은 살아 있는 한 생명을 불태운 흔적으로서, 살아 있다는 근거로서, 그날그날을 기록 하는 행위와도 같았다.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더 깊고 고요해진 검은 빛을 보며떠오른 시 한 편, 김현승의 「검은 빛을 윤형근의 그림 앞에서 천천히 읊조려본다. - P178
근원 김용준1914 ~~1907 과 존 버거1926 ~ 2017. 얼핏 뜬금없는 조합인 것같지만, 찬찬히 생각해보면 두 사람에게서 적지 않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미술 이론 전공자로서 비평적인 작업과 함께 뛰어난 에세이와 그림을 남겼다는 점,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미술뿐 아니라 인문, 사회 전반에 대한 통찰력과비판적 태도를 보였다는 점, 그러면서도 특정한 이념에 매몰되기보다 뛰어난 심미안과 균형 감각을 지녔다는 점 등이그러하다. 삶의 이력 또한 이채롭기는 마찬가지다. 김용준은 경북선산 출신의 동양화가로서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교수를 지내다가 1950년 월북했다. 존 버거는 영국 런던 출신이지만 중년 이후에는 프랑스 시골 마을로 이주해 농사와 글쓰기를 병행해 왔다. 이러한 월경이나 은거로 인해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본주의적 세계와 거리를 둘 수 있었다. - P214
다른 이에게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할 수 없는 어떤 지점에 이를 때까지 그것과 동행하는 것, 이를 위해 사물을 바라보고 또 바라봄으로써 대상 자체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는 것, 사물과 사물, 또는 주체와 대상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는 것. 오로지 선생에집중하면서 밀고 당기는 힘 사이의 역동성을 잃지 않는 것. 눈에 보이는 대상뿐 아니라 계속 움직이는 어떤 외곽선을따라 조금씩 연장되는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것. 드로잉을이런 발견적 행위로 정의한다면, 근원과 존 버거가 말년까지 드로잉을 멈추지 않았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김용준과 존 버거가 그리고자 했던 것은 단순히 매화와 붓꽃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린 꽃은 동양적 미의 표상인 매화와 서양적 미의 표상인 붓꽃이라는기호적 차원에만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의 대상 앞에서 그 불가해한 어둠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맨몸의 궤적이야말로 그들이 작은 스케치북에 담고 싶었던것이 아니었을까. - P219
그런데 영화를 자세히 보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무언가 조금씩 달라지는 걸 발견할 수 있다. 매일 잠에서 깨어나는 시간이 조금씩 다르고, 침대 위에 누운 두 사람의 자제도 조금씩 다르다. 출퇴근하며 눈여겨보는 사물이나 풍경도 조금씩 다르고, 정해진 구간을 도는 23번 버스에 탄 승객들도 조금씩 다르다. 이란 여성인 아내가 매일 그려내는이국적 패턴도, 동네 바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도 조금씩 다르다. 무엇보다도 패터슨의 내면과 비밀 노트 속에 펼쳐지는시의 발걸음이 조금씩 다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시는완성을 향해 한 줄 한 줄 나아간다. 이러한 미세한 차이야말로 짐 자무시가 영화를 통해 그리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삶의 아름다움이란, 대단한 사건이 아닌 소소한 것들에 있 - P231
시작 노트를 잃고 폭포 앞에서 망연자실 앉아 있는 패더슨에게 월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고장 패터슨을 찾아온 일본인 시인이 말을 건넨다. 그 일본인의 손에는 『패터슨이라는 시집이 들려 있었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는 고향인 러더퍼드에서 평생 소아과 의사를 하면서 시를썼다. 특히 그가 뉴저지 지방의 ‘패터슨‘을 주제로 쓴 다섯권의 연작 『패터슨은 미국 시문학사의 대표적인 서사시중 하나다. 영화에서도 패터슨은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집을 자주 읽거나 그에 관해 대화를 나눈다. "때론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 일본인 시인의 이 말을 곱씹으며 패터슨이 터뜨린 감탄사는 ‘아하! 였다. 약간 진부한 결말이라는 인상을 지울 순 없지만, 이 감탄사 덕분에 패터슨은 다시 새로운 월요일을 담담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잃어버린 시들을, 또는 아직 오지 않은 시들을 새로운 노트에 적어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 P234
비즐러가 드라이만의 집에서 훔쳐 온 시집을 읽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그때 등장하는 시는 브레히트가 쓴 「마리A의 추억이다. 브레히트는 현실 비판적인 참여시를 주로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시는 드물게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연애시다. 여기서 브레히트가 추억하는 ‘마리 A‘는 고향 아우크스부르크에 살던 시절의 애인 로자 마리 아만을가리킨다. 9월 어느 날 어린 자두나무 아래서 사랑을 나누었던 두 사람. 그러나 사랑의 아름다움은 덧없고, 그 덧없음으로 인해 오히려 더 아름답다. 영원한 사랑이란 없으며 그덧없음만이 영원하다는 사실 또한 이 시는 말해준다. 세월이 흘러 이제 두 사람은 서로의 안부조차 알 수가없다. "사랑은 어떻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시적 화자인 ‘나‘ 는 "생각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그녀의 얼굴은 기억나지않고, 키스를 했다는 사실만이 어렴풋이 떠오를 뿐이다. - P243
조동진의 노래는 아주 멀리서 온다. 바람이 멀리서 불어오는 것처럼, 일몰과 여명, 비와 안개, 눈과 진눈깨비 등 대기가 가장 아름다운 때의 빛깔과 냄새와 물기를 머금고 그의 노래는 불어온다. 그의 노래는 들려온다 기보다는 ‘불어온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조동진의 노래가 일으키는 소리와 진동은 귀뿐 아니라몸 전체로 스며들어와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노래가 끝난 뒤에도 길게 이어지는 연주나 허밍은듣는 이를 암전의 여운 속에 오래 남아 있게 한다. 바슐라르는 예술가의 기질이 물, 불, 공기, 흙, 이 네 원소 중 어느 하나의 원소와 특별한 친연성을 지닌다고 했다. 이 네 가지 원소 중에서 조동진은 단연 ‘공기의 시인‘ 이다. 호프만슈탈의 말을 빌리자면 "공기처럼 투명하여 공기 속으로 경이의 말을 부지런히 전달하는 전령" 이다. - P250
일찍이 "집을 읽는다"는 표현을 쓴 것은 가스통 바슐라르였다. 그는 『공간의 시학』에서 집이란 한 영혼의 상태를잘 보여주며 집은 인간의 사상과 추억과 꿈을 한데 통합하는 가장 큰 힘의 하나라고 말했다. 그 통합에 있어서 연결의원리는 ‘몽상‘ 이다. "더할 수 없이 깊은 몽상 속에서 우리들이 태어난 집을 꿈꿀 때, 우리들은 물질적 낙원의 그 원초적인 따뜻함, 그 잘 중화된 물질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장민숙의 회화에서도 집에 대한 원초적 충족감은 과거와현재와 미래를 넘나드는 몽상을 통해 잘 구현되고 있다. - P261
그의 그림에 사람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집은 각사람의 삶을 대변하는 공간이자 오브제로서 역할을 충분히해낸다. 조금 낡고 오래된 집들은 녹록지 않은 내력과 기억을 들려준다. "나는 살아가고 있고, 삶과 함께 흘러가는 시간을 색면으로 기록한다"는 작가에게 집과 거리는 도시의공간성과 시간성, 수직성과 수평성, 기억과 풍경을 동시에아우르는 상징이자 매개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집을 읽어내고 기록하고 표현하는 행위가 바로 ‘산책‘이다. 그에게 산책은 자기만의 집, 또는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이 과정은 단독자의 내면 탐구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을 필요로 한다. 심리학을 전공한 그는 타자의 내면을 열고 들어가는 것처럼 집의 표정을 살피고 집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침착하게 귀를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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