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백인 아이들을 동물원의 동물 보듯 구경하며 머린 시절의대부분을 보냈다. 어떤 때는 친구 집을 방문하는 형식으로내부 입장이 허용됐으며, 나는 그곳에 존재하는 질서와 놀이의조화로운 균형에 감탄했다. 친구의 부모는 합리적인 어조로대화했고, 버릇없는 테리어견이 집 안으로 불쑥 들어와 비스킷을받아먹었다. 긴장감 돌고, 반려견도 없고, 퀴퀴한 냄새가 코를찌르고, 엄마는 세탁물을 진부 밖에 내다 걸고, 할머니는 폴저스커피 통에 당신의 소변을 모았다가 텃밭에 심은 파에 비료로주던 우리 집과는 전혀 달랐다. 나는 종종 밤늦게 내 이름을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 소리는 처음에는 희미하다가점점 커졌고, 그게 엄마의 목소리라는 것을 말았다. 나는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걷잡을 수 없는 부모님의 싸움을 또 한차례 말리기 위해 안방으로 뛰어갔다.
이튿날 학교에 갔을 때 11월 햇볕이 따스했던 것과석류나무에 석류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것이 유독 기억에남는다. 나는 점심시간에 거기에 앉았다. 같은 반 아이들의웃음소리가 멀찍이 들렸고, 잠을 못 자서 귀가 물 들어간것처럼 멍멍했다. 만약 현실이 하나의 부조 작품이라면, 나 말고다른 사람은 모두 양각이고 나는 다른 모든 사람을 돋보이게하는 음각처럼 느껴졌다. 어렸을 때 좋았던 기억이라고는서울에서 보낸 여름철밖에 없다. 내 손톱에 봉선화 꽃잎을 묶어주황색으로 물들여 주시던 할머니, 이모, 삼촌, 사촌들과 함께마룻바닥에서 자는 동안 습한 열기 속에 느릿느릿 돌아가던선풍기, 딱딱한 고무 슬리퍼를 신고 벌거벗은 채로 쪼그려앉으면 이모가 끼얹어주던 정신이 번쩍 들게 차가운 물.
- P99

나는 어린 시절을 뒤돌아보지 않고 항상옆으로 곁눈질했다. 어린 시절을 뒤돌아보는 일에 달콤한 영화같은 향수가 어린다면, 어린 시절을 곁눈질하는 일에는 희뿌연부러움의 실안개가 서린다. 그 부러움은 백인 친구의 집에서 그집 식구들과 저녁을 먹을 때, 온갖 광고와 TV 방송에서 아이는어떤 모습이어야 하고 어떤 가정에서 자라야 하는지 선명하게보여줄 때 내 속을 갉아먹었다.
퀴어 이론가 캐서린 본드 스톡턴은 퀴어 아동이 어떻게
"옆으로(sideways) 자라는지" 적으면서, 퀴어의 삶이 흔히 결혼과출산이라는 직선적인 시간의 흐름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라고말한다. 스톡턴은 유색 인종 아동 역시 옆으로 자라는데 그들의어린 시절도 퀴어 아동과 마찬가지로 소중한 백인 아동이라는모델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내 경우는 어린시절을 옆으로 보았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지금도 그때를돌아보면, 어린 소녀가 내 시선을 피해 숨으면서 나의 기억들을깜박거리는 환상의 그림자놀이로 유도한다.
옆으로 보는 것은 또 다른 것을 함축한다. "곁눈질"은 의심,
의혹, 심지어 경멸을 암시한다. 나는 사춘기 때 학교에서 온갖성장 소설을 잔뜩 접했다. 교사가 비타민 풍부한 채소처럼강권하던 윌리엄 셰익스피어나 너새니얼 호손의 작품과는 달리,
- P101

흑인 아동은 역사적으로 "아동기에 머물러보지못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라고 학자 로빈 번스틴은 인종적순수 : 노예제에서 민권 시대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어린이가아동기를 보낸다는 것』에서 적고 있다. 번스틴은 백인 순수를상징하는 아이콘으로 해리엇 비처 스토의 『톰 아저씨의오두막에 등장하는 어린 소녀 에바를 예로 든다. 금발의곱슬머리와 파란 눈이라는 후광에 휩싸인 에바는 톰 아저씨의눈에 고결하게 비치지만, 노예 소녀 톱시는 엄마 없는 짓궂고삐딱한 아이로 보인다. 에바가 톱시를 포옹하며 애정을 표하자비로소 톱시는 순수한 아이로 거듭난다.
어린 에바가 이상화된 아이라면, 톱시는 "문제아, 검은 피부,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스울 정도로 고통에 무감각한 상태"에의해 규정되는 그야말로 궁극의 "꼬마 검둥이" (pickaninny)이다.
스토는 톱시도 감정이 있지만 어린 에바의 손길을 통해서야비로소 아이로 변신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오로지백인 아이만 아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백인 아이와 노예 - P107

순수를 뒤집으면 수치심이 된다. 마담과하와가 순수를 잃었을 때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벗은 줄을 알고 수치심을 느꼈다. 수치심이란 원숭이의뻘건 엉덩이처럼 훤하게 노출되었다는 것을 매섭고 따갑게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낸 신경증적인 상처다.
수치심을 일으킨 공격자가 내 삶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도,
나는 계속 존재한다고 상상하고 내 그림자를 그자로 착각하여몸을 움츠린다. 수치심은 파블로프의 조건 반사 같아서, 집밖으로 잠깐 나왔다는 이유만으로도 수용체가 자극받아 나는반응한다. 체면을 잃는 것과는 다르다. 수치심은 내 얼굴을 깔고앉아버린다.
사람들은 흔히 수치심을 아시아적인 속성과 유교적인명예 체계, 그리고 그와 관련된 불가해한 수치심의 의례와 연결짓지만, 내가 말하는 수치심은 그 수치심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수치심은 문화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상호 관계에 영향을 주는 권력의 역학을 뼈아프게 인식하는것이며, 그 서열에서 내가 피해자 - 또는 가해자로서 점하는위치를 깨닫고 몸이 오그라들도록 느끼는 치욕이다. 나는 개들이목에 두르는 수치의 깔때기이다. 나는 남자 소변기에 부착하는수치의 변기 탈취제다. 이 감정이 내 정체성을 갉아먹어 결국몸은 껍데기만 남고 나는 하얗게 불타오르는 수치심 덩어리로화한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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