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퇴행중이다.
어디까지일지...



진영논리가 무엇일까요. ‘진영‘이라는 말은 영어로는 ‘캠프camp‘로 번역됩니다. 대립하는 세력의 각 편을 뜻하는 말입니다. 진영논리가 힘을 발휘한다는 말은 곧 ‘편 가르기 정치‘를 하고 있다는말입니다. 그렇다면 ‘편 가르기가 다 나쁜 일일까?‘라는 의문을 가져볼 수 있습니다. 저는 편 가르기 자체가 다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어떨 때는 선명한 입장을 추구하기 위해, 혹은정의를 위해 편을 분명히 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편이 나뉘어 싸우면 싸울수록 서로 이기기 위한 더 나은 논리와 방법이 제안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싸움 자체가 모두를 위해 이로운일이 됩니다. 제대로 편을 안 가르는 게 더 문제가 되겠죠. 상황을이해하는 내용상의 이견이 분명한데도 적당히 같이 있다가 수면아래에서 세력 다툼을 이어가다보면 무엇을 위해서 편이 갈라졌는지도 알 수 없게 되죠. 이때 편 가르기의 목적은 오직 권력에 있게됩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 시절, 토론에서 말이 막힐 때마다이렇게 말한 바 있죠. "그러니까 제가 대통령을 하려는 것 아닙니 - P138

까"진리에의 의지가 토론을 멈추게 한다는 것을 이보다 더 분명계 보여주는 장면은 없었습니다.
편 가르기의 목적이 상대방의 절멸에 있을 때 정치는 그냥 싸움판이 됩니다. 몇몇 정치인들 사이의 원한관계로 이미 편이 갈려있는 상태에서 이기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상대방을 지도록 하는데 훨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죠. 일단 대립이 격화되고 편이 확 나뉘면 각 편이 추구하는 정치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그다지 중요해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구체적인 실행기획과 청사진은 다 사라져버리고, 뼈대만 앙상하게 남게 됩니다. 조지 레이코프의 말을 빌리자면, ‘프레임화 cognitive frame‘에 갇힌정치언어가 힘을 발휘하게 되는 순간이죠. ‘종북‘이나 ‘빨갱이‘ 같은 말, 최근에는 ‘메갈‘ 같은 말이 그렇습니다. 진영이라는 것 자체가 논리의 전부가 되는 것, 이것을 저는 진영논리라고 부릅니다.
- P139

다시 과거로 좀 돌아가면, 이명박 대통령 이전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이보다 더 뜨거울 수 없는 정치인으로서의 노무현에서 어째서 가장 탈정치적인 이명박으로 이동했을까요. 이런 비약은 어떻게 가능해졌을까요. 광장을 중심으로 생각을 이어가보죠. 우리가 2016년부터 2017년에 걸쳐 1년 동안 광장의 민주주의를 통해 세계시민상도 받았지요. 누가 뭐래도 굉장한 일입니다. 무혈혁명으로 정권을 바꾸는 데 성공한 나라가 많지 않으니까요. 대단히 자부심을 느낄 만한 일이었죠. 광장에서 시민들이 모여있어도 특별한 유혈사태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집회를금지하는 독재국가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죠. 우리도 모이기 - P143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한 광장의 장이 열렸던 것이 2002년드컵부터였습니다. 월드컵 이후 한국사람들에게 광장이란 참여의 장이자 축제의 장으로 굉장히 익숙한 공간이 됩니다. 그전까지 광장이 특정한 이념적 행동을 표출하는 공간으로 상정됐다면 20년 이후부턴 조금 더 일상적 공간으로 이동하게 되었죠. 그리고 월드컵 응원 열기 속에 잊힌 비극적인 사건, 두 여중생의 참혹한 죽음이 대중들에게 알려지면서, 소위 미국에 대항하는 시위가 특전진영의 이데올로기를 넘어 대중시위로 열리게 되는 일도 가능해집니다. 그렇게 열린 광장의 힘이 노무현이라고 하는 의외의 인물을당선시키게 만드는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참여민주주의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통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된 것도 이 당시의 주요 정치적 담론이기도 했습니다. 이후 광장은 한국의 주요한 정치적 사건에서 결정적 힘을 발휘합니다. 2004년 3월 12일, 한나라당 국회의원 193명이 대통령 탄핵발의를 가결니다. 광장은 다시 움직였습니다. 같은 해 4월 15일에 열린 17대회의원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은 152석, 과반의 의석을 얻습니다.
- P144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이 계속해온 얘기지만, 1997년 경위기는 여성의 위기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남성의 위기로 재현된 .
니다. 당시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언론은 너도나도 고개 숙인지‘, 그중에서도 미취학 아동을 키우는 40대 아버지의 막막함을 중심으로 경제위기의 어려움을 그려냈습니다. 후에 통계를 보니,
로 당시 40대 남성들이 구제금융의 타격을 가장 적게 받은 세였습니다. 41~49세 남성들이 가장 영향을 덜 받았고, 그다음은31~39세 남성들의 순서였습니다.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집단은 보험 및 금융산업에 종사하던 30~49세 여성들과 자영업의 붕괴로아르바이트를 할 곳이 없어진 10대 여성들이었습니다. 386세대남성들의 행운은 이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들은 2000년대 초반 부동산시장 폭등을 이끈 주체이자 가장 큰 수혜자였습니다. 이들이집을 살 수 있는 시기, 이제 취업해서 자리를 좀 잡아가니 내 집 마련을 해볼까 하는 시기에 구제금융 여파로 폭락한 부동산이 눈앞에 왔던 거죠. 내 옆에 있는 친구는 얼마를 벌었고, 직급과 소득세수준은 상관없더라는 이야기가 일상적으로 등장하던 때였습니다.
- P150

금융자본주의의 도덕적 해이와 파행, 세계화의 어두운 그늘과 보수화의 물결 등 새로운 사회변혁의 목소리를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보수정부와 보수언론에서는 광우병 촛불시위를 거짓선동에 휩쓸린 어리석은 군중들의 소요로 몰아갔고, 시민사회단체를 전문시위꾼‘으로 폄훼했습니다. 이 와중에서도 이명박 정부 당시 사회연대의 희망에 불을 지폈던 것은 도드라지게 여성들이었습니다. 대학 청소노동자들의 파업,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강정평화마을지킴이, 홍대 ‘두리반과 명동 ‘마리‘ 등에는 언제나 젊은 20대 여성들과 예술가들이, 대학생들이, 탈학교 청소년들이 함께했습니다. 작지만 의미 있는 움직임이었고, 때로는 ‘희망버스‘처럼 커다란 사회적 반향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들과 별도로, 늘 이 판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하셨던 분들은 작고 다른 목소리를 지우고 다시 진영논리를 중심으로 한 판을까기 시작합니다.
- P154

2008년 당시 용산구청장이었던 박장규는 "구청에 와서 생떼거리를 쓰는 사람은 민주시민 대우를 받지 못하오니 제발 자제하여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플래카드를 걸어두었습니다. 이 플래카드는 2009년 1월 일어난 용산참사 이후에 떼어집니다. 재개발문제로 매일의 생계가 미래를 알 수 없어진 상황에서 시민의 항의는 생폐거리가 됩니다. 그뿐 아니라 복지는 구휼사업이 됩니다. 복지혜택을 받는 시민들은 얼마나 가난한지, 그리고 앞으로도 얼마나 가망이 없는지를 증명해야 합니다. 1만 원을 더 벌면 30만 원을 받을수 없는 상황에서, 미래를 포기하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일상적인 모욕을 견뎌내야만 복지혜택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부패와탐욕이 수치스러운 것이 되지 않고, 가난과 무기력이 가장 큰 죄악이 됩니다. 민주주의는 제한된 정부와 규제받지 않는 자본주의경제로 대체됩니다. 정부는 작아지고 규제받지 않는 자본주의경제는커집니다. 정치라는 것 자체가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이 신자유주의체제의 특징입니다. 이명박 정부 이후부터 ‘선거가 실시되니까민주주의다. 선거가 실시되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괜찮다. 우리가비정규직에 시달리고, 양극화에, 이해할 수 없는 갑질이 사회 곳곳에 있지만 이는 정치가 아니라 경제의 문제다. 정치체제는 돌아가고 있다‘는 착각이 생깁니다.  - P159

사람들은 선거가 시행되고 선거 결과에 승복하는 것을 통해민주주의가 문제없이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정치 자체는 점점 더 사라졌습니다. 쇼비즈니스 정치와 진짜 정치는 분리되어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체제가 본격화되면서 생겨난 선거의 특징중 하나는 이상할 정도로 정책들이 비슷하다는 겁니다. 정책선거라는 것이 실종되었다고들 하는데, 사실 19대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은 국방정책을 제외하고는 다른 정책상의 차이가 그렇게 크게 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겉보기에는요. 지방선거는 이보다 더해서 서로 정책집을 보고 베끼다시피 하는 일도 종종있었습니다. 정의당, 민주노동당과 같은 소수정당들은 기껏 정책을 만들어놓으면 다수당에서 가져가서 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불만을 표시하곤 했죠.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정책선거로 가야 한다‘는 말이 매우 공허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즉, 몇몇
‘프레임화된 영역을 제외하고는 이상할 정도로 정책은 유사해져갔습니다. 점점 더요. 미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 P160

이제 우리는 어떻게 경제로부터 분리된 정치를 되살려내고, 정치를 다시 정치적인 것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랑시에르는 치안으로의 정치와 규칙을 만드는 정치를 구별해서 사용하자고 제안합니다, 정치적인 것the polar과 치안 police 간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저는 치안이라는 말보다는 한국어 서는 정책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치안으로서의 정치는 몫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끼리 배분을 해주고, 각자의 몫을 지키게 만드는 기능을 합니다. 이해관계를 가진개인 및 집단 간의 정당한 분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치안으로서의 정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정치의 최소화이자, 정치가거세된 형태의 신자유주의 시대의 정치의 모습입니다. 반면, 정치적인 것의 의미를 살리는 정치는 몫이 없는 자들이 셈법을 다시 하자는 말을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장면으로 생각합니다. 정치적인 것으로서의 정치는 셈법 자체에 대한 질문을 하면서 차별을 받았던사람들이 새로운 분배의 질서를 요구하게 되고, 분배 질서에 필요한 정의에의 요구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 P162

우리는 감자 냄새를 맡는 박근혜가 실림이라곤 해보지 않은걸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박근혜 대통령은 가족정치를 전면에 내세워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갑니다. "어릴 때 살았던곳"으로 청와대를 기억하고, 돌아가신 어머니와 똑같은 헤어스타일을 하며, 아버지에 대한 큰딸의 변치 않는 존경심을 표현하는 식이죠. 박근혜의 후보 시절 슬로건은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 였,
습니다. 모두 실소를 금치 못했습니다. 박근혜의 꿈과 내 꿈은 아주 다를 것 같은데, 내 꿈을 이루게 표를 달라니 얼마나 이상해요.
가족과 행복을 내세우는 건 비단 박근혜 대통령만은 아니었습니다. 문재인 정부도 이 같은 수사를 사용합니다. "여성이 행복한 나라", "가족행복론" 같은 말이 선거에 등장했죠.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가족, 행복, 여성이 세트로 선거에 나타나게 된 거죠.
행복과 가족, 꿈, 개인적 소원성취로 정치의 언어가 바뀌기 시작한 것 자체가 하나의 경향을 보여줍니다. 조지 오웰은 감각적으로 느끼고 상상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삶의 상태인 행복을 정치의 목표로 삼으면 정치가 예언이 된다고 말합니다. 행복하다는 기분은나만의 것입니다. 내가 이 순간에 행복감을 느끼는 나만의 방식을찾아가는 것, 내가 나로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갈 수 있도록 정치는
‘조건‘을 만들어주는 것이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게 아닙니다.  - P166

"여성학 세미나를 같이 하던 남자후배가 와서는 선배가 선거 도운 후배들 데리고 당선된 다음 경찰 만나서 서로, 상견례를 하고룸살롱에 데려가주는 문화가 있다고 하더라고, 그러면서 총여에는 꼭 비밀로 하라고 했다고."
최희영, ‘전 전여대협 활동가‘

20년 전의 기억에 대한 인터뷰가 지금 현재와 너무 비슷하게 겹쳐지는 건 우리 사회가 확실하게 퇴행했다는 증거일 겁니다.
1980년대 남자운동권들과 1990년대 문화운동판에 있던 남자들이 만나, 40대 서울 남성들은 자신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새로운역사를 쓰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목소리 뒤에 지금까지 쌓아올린한국사회의 다른 목소리가 급속도로 지워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2008년에 시작된 광장의 새로운 여성단체의 가능성은 역사화되지않았고, 2015년부터 2년간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여성혐오이슈는 정치의 공론장에서 철저하게 외면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룸살롱 남성연대가 스크럼을 짜고 한국사회의 새로운 기득권이 되어 다른 사람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사회에는 사회변화를 위한 새로운 기획과 다른 목소리들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민주주의이지, 형님, 아우, 형수님의 안온한 그들만의 리그는 아니었을 텐데말입니다. 강의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P17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