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와 돈과 가문끼리의 결속, 그리고 대를 이을 후계자를 생산하기 위한... 결혼
1380년대의 노르망디 귀족들은 저랬구나.

10066 년에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은 기사단을 이끌고 도버해협을 건넜고,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왕의 군대를 무찌른후 스스로 잉글랜드 국왕으로 등극했다. 후세의 역사서에 정복왕 윌리엄으로 기록된 바로 그 인물이다. 잉글랜드왕이 된노르망디 공작의 위세는 프랑스 왕의 그것에 맞먹었다. 향후1세기 반에 걸쳐, 번창한 성읍들과 부유한 수도원들을 다수보유한 노르망디의 반은 잉글랜드 왕가의 소유로 남게 된다.
1200년대 초에 프랑스 국왕은 길고 힘든 전쟁을 치른 끝에노르망디 대부분을 잉글랜드 국왕으로부터 재탈환했다. 그러나 노르만인의 피를 물려받은 잉글랜드의 왕들은 여전히 노르망디 정복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게다가 노르망디의 대 귀족가문 다수는 프랑스화하기 전에는 노르만인이었기 때문에 잉글랜드에 대해서는 여전히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고, 변화의 징조를 찾으며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백 년 전쟁이 발발하고 잉글랜드군이 노르망디를 재정복하기 시작하자 노르만인 귀족들 다수는 프랑스 왕을 배신하고잉글랜드의 침략자들과 동맹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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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듀얼귀족들 사이의 혼인은 사랑이나 로맨스 따위가 아니라 영지와돈과 권력과 가문끼리의 결속, 그리고 대를 이을 후계자를 생산하기 위한 것이었다. 종기사인 장 드 카루주에게 이상적인신부란 귀족 출신에 부유할 뿐만 아니라 그의 재산을 늘려 주고 영지를 확장시켜 줄 지참금을 두둑히 가져올 수 있는 여성이었다. 건강한 아들을 여럿 낳아 줄 젊은 여성일 필요도 있었다. 신부가 처녀인 경우에는 반드시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말이다. 또한 결혼 후 낳는 자식들이 적통임을 보장해 주는 고결하고 정숙한 여성일 필요가 있었다. 이에 덧붙여 미인이라면 금상첨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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