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4월 14일 오후 4시 사르트르의 기일을 몇 시간 앞둔 때였다. 향년 78세였다.







1956년에 (레 망다랭)이 (제2의 성)에 이어 가톨릭 금서 목록에 올랐다.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그 무렵부터 가을은 꼭 이탈리아에서보냈고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았다. 영원한 도시 로마 중심가에 호텔 방 두 개를 나란히 잡고 조화로운 고독과 동행하면서 일과 위스키와 아이스크림의 나날을 보냈다. 문학적 리듬을 되찾은 보부아르는백지의 현기증‘ 에서 마지막 퇴고의 자질구레한 손질까지의 기간을즐겼다. 보부아르는 원고를 사르트르, 보스트, 란즈만에게 보여주고
"자르고, 늘리고, 수정하고, 폐기하고, 다시 쓰고, 품고, 결정하는 과정을 거듭했다.
그해에 보부아르는 십 년 전인 1946년부터 보류했던 프로젝트, 즉회고록 쓰기를 재개했다. 처음에 그 생각을 했던 때 이후로 너무 많은 것이 변했다. 제2의 성을 썼고, 올그런을 만났고, 괴물을 붙잡고씨름해서 《레 망다랭을 만들었고, 공쿠르상을 탔다. 미국, 중국, 그외 세계 각국을 다녔다. 그 후 특권에도 썼듯이 문화는 특권이고지식인들이 문화를 누릴 여력이 없는 사람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확신하게 됐다.
- P377

 1958년 1월에 보부아르는 쉰 살이 되었고 그 사실에 치를 떨었다.
인생이 끝나 간다고 생각할 때마다 느끼는 불편함 그 이상으로다. 알제리 전쟁은 더욱더 상황이 안 좋았고 그 전쟁 생각을 떨치기못한 나머지 자기가 프랑스인이라는 것조차 싫어졌다. 잠이 오기 ..
았고 문학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보부아르는 레탕 모데른이 알제리인과 군인의 증언을 싣는 작업을 했다. 
- P380

1960년 10월 25일에 회고록 두 번째 권 《생의 한창때가 나왔다.
이 책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여러 평론가가 보부아르는 자전적 글쓰기에서 최고의 진가를 발휘한다고 칭찬했다. 카를로 레비는 이 책을
"세기의 러브 스토리"라고 했다. 보부아르가 사르트르를 인간적으로보이게 했다는 평도 많았다.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던 사르트르의 본모습, 전설의 사르트르와는 자못 다른 한 인간을 보여주었다." 보부아르는 그게 바로 자신의 의도였다고 답했다. 사르트르는 처음에는보부아르가 자기를 등장시키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어떤 식으로 말하는지를 보고 나서는 자유롭게 쓰도록 내버려 두었다. - P402

이 대목의 영어판 번역이 곧잘 보부아르의 내면화된 성차별주의처럼 해석되곤 했기 때문에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철학자, 직함에서 배제당하는 유일한 이유가 아님을 특히 강조해야 한다. 보부아르의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읽으면 체계를 거부하는 데 깔려 있는 철학적 이유를 놓치기 쉽다. "철학자, 직함을 거부하고도 철학자로 알려진 사람은 많다. 알베르 카뮈도 철학이 이성을 과신한다고 비판했고 자크데리다도 그 직함을 거부했다. 따라서 보부아르를 여성이 될 수 있는존재, 될 수 없는 존재로만 판단해선 안 된다.  - P405

이십 년 사이에 페미니즘 제2물결이 탄력을 받았다. 1960년대까지 가족 계획은 금기시되었고 피임약 판매는 법적으로 제한되었다.
1960년에 경구 피임약이 미국에서 판매되기 시작했고 영국은 1961년부터 기혼 여성에 한해서 판매를 허가했다. 프랑스에서 피임약 판매는 1967년에야 비로소 가능해졌다(영국 미혼 여성이 피임약을 살 수 있제 된 것도 이 해부터다). 보부아르는 이 변화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제2의 성은 전 세계 여성들과 페미니스트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었다. 1963년에 베티 프리던 (BettyFriedan)은 《여성성의 신화를 발표했다. 미국에서 페미니즘 운동을일으켰다고 평가받는 이 책은 《제2의 성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 P411

수술 후 몇 주가 지나자 프랑수아즈는 통증이 심해져서 기력을 잃었다. 딸들은 의사에게 모르핀을 더 많이 놓아 달라고 부탁했다. 죽음을 앞당긴대도 그러면 고통도 빨리 사라질 터였다. 그러자 어머니는 대부분의 시간을 잠을 자며 보냈다. 어머니는 사제도, 보부아르가
"독실한 시절의 친구들"이라고 했던 이들도 불러 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 11월에 보부아르는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 이상으로 어머니와가까워졌다. 수술 다음 날 밤 보부아르는 북받치는 감정을 어찌할 바올랐다. 어머니의 죽음이 슬펐지만 어머니가 살아온 인생도 슬렀다.
어머니는 숨 막히는 관습의 구속에 갇혀 너무 많은 것을 희생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보부아르는 어머니의 마지막 여섯 주와 자신의 사랑, 양면적 감정, 사별의 아픈 경험을 담은 책 《아주 편안한죽음을 정신없이 써냈다. 그렇게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은기분, 펜으로 인생을 생각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책은 엘렌에게 헌정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 P413

보부아르는 사생활에 갇힌" 여성들이 언제든 자신을 사랑하기를관들 수 있는 누군가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해 불안정하게 살아간다.
는 것을 우려했다. 그 누군가는 경제적 수단이나 그들이 꾸려 온 삶의 의미를 남겨놓지 않은 채 여성들을 떠날 수도 있다. 보부아르는이런 유의 삶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건설하는 " "진정한 사회 생활참여 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여성들은 주부 되기라는 퇴행의 "회생양" 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다른 여성들과 비교당하는 일에 힘들어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일하는 여성들도 집에 있을 때는 주부 역할을 기대받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결과는 자기 선택에 대한 죄책감과 허탈감이다. "여성이 매일 직장에서 여덟 시간을 일하고 와서 집안일을 대여섯 시간 더 한다면 주말에는 완전히 진이 빠질 것이다.  - P428

보부아르는 자기가 늙어 가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이 기쁘지않다고 인정할 만큼 솔직했다. 하지만 노년을 감출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노년을 철학적 분석과 정치적 행동이 부족했던 주제로 보고 정면으로 돌파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노년에 대한 책을 구상 중이었다. 나중에 그 책을 《제2의 성의 대응물이라고 부르게 될것이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조사를 하고 노년에 대한 책들을 읽기 시작하면서 자료가 될 만한 책이 너무 없어서 놀랐다. 국립도서관 열람실에서 랄프 왈도 에머슨과 에밀 파게의 에세이들을 찾았고, 서서히하나의 전기를 엮어 나갔다. 프랑스 노인학회 정기 간행물도 읽었고,
영어로 된 두툼한 저작들도 시카고에서 주문했다. 전 동료 클로드레비스트로스가 콜레주 드 프랑스의 비교인류학 자료 열람을 허락해주었다. 그 덕분에 여러 사회에서 연장자가 차지하는 위치를 다룬 논문들을 참고할 수 있었다
- P436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를 출시로 삼았다. 비지니아 울프는 58세에 이렇게 일기를 썼다.
 
나는 노년의 무정함을 혐오한다. 노년이 다가옴을 느낀다. 나는 삐걱거린다. 씁쓸해진다.

발은 이슬을 밟을 만큼 빠르지 않고,
심장은 감정을 새로이 느끼기에 모자라다시 일어날 만큼 날쌔지 못한 희망을 으깨버린다.

이제 막 매튜 아널드를 펼쳐서 이 시를 필사했다.

노년에서 보부아르는 ‘노년‘이 유일한 보편적 경험을 가리키지않기 때문에 모든 노화가 가혹하거나 삐걱대거나 슬프게 다가오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여성 되기처럼 노인 되기도 개인의 신체적, 심리적, 경제적,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지리학적, 가족적 맥락에 따라서 매우 다양한 양상을 띤다. 나이 듦의 상황‘이 그 경험에 극도로 큰 영향을 준다는 얘기다.
- P444

다른 페미니스트들은 제2의 성》이 자신의 특권을 인식하지 못한 엘리트 여성이 중산층을 자료 삼아 쓴 책이라고 비판했다. 이 인터뷰에서 보부아르는 초기작에서 계급 문제를 간과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여성은 다른 계급이 아니라 다른 ‘카스트‘ 이기 때문에 계급 투쟁이 여성을 해방해주지는 않는다. 계급은 올라갈 수도 있고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카스트는 바뀌지 않는다. 여성은 남성이 될 수 없다.
여성은 경제적·정치적 · 사회적으로 열등한 카스트 취급을 당한다.)
- P457

1970년대에 보부아르는 점점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고자 자기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 〈레 탕 모데른 특별호 ‘여성의 주장‘의 도입문은 성차별 철폐 투쟁이 "우리 안의 가장 내밀하고 가장 확실한것 같았던 부분을 공격한다. 그 투쟁은 우리의 욕망, 우리의 쾌락이취하는 바로 그 형식을 건드린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페미니스트를 불편해한다. 그러나 페미니스트의 말이 실제로 힘이 없다면 조롱당하거나 성질 나쁘다는 말을 듣거나 가스라이팅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보부아르는 이 글에서 자신이 과거에 여성으로서 부딪히는 장벽을 넘어서려면 그 장벽을 아예 무시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어느 정도 "토큰 여성 역할을 했노라고 인정한다. 그리고 젊은 페미니스트들 덕분에 자신의 그런 입장이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데 일조할수도 있음을 알게 됐다고, 그래서 이제 그런 입장과 자기 자신을 성토한다고 말한다.
보부아르가 자기 문제를 인정한 것은 존경스럽다. 이전의 자기가실패한 부분을 볼 수 있는 여성이 됐으니까. 하지만 실패를 모두 보았을까? 성차별 철폐 투쟁이 "우리 안의 가장 내밀하고 가장 확실한것 같았던 부분을 공격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어떤 제약과 욕망이 철학에 대한 사랑, 사르트르 외의 다른 애인들 이야기를 털어놓지 못하게 가로막았을까?  - P464

보부아르는 늘 독자적인 이력을 원했다고 대답했다. "나에게는 환상이 아니라 꿈이 있있어요. 아주 담대한 꿈이긴 했지만요. 사르트르를 만나기 전부터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알고 있었죠! 다행히도 내 힘으로 내 삶을 성취했어요.나에게 성취는 곧 일을 의미했어요.보부아르는 이 인터뷰에서 사르트르가 돌로레스 바네티와 사릴 때 자신과 그의 관계에 회의가 들었다는 말도 했고, 자신과 사르트르의 관계에서 제3자들이 너무 고통을 받아서 유감스럽다는 고백도 했다. 또이미 공개 인터뷰에서 사르트르도 여성들에게 잘못했다고 시원하게인정했다. 그는 보부아르를 예외적 경우, 일종의 토큰으로 - 보부아르 자신도 젊었을 때 그랬듯이 만들었다. 하지만 사르트르처럼 그녀에게 힘이 되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보부아르가 자신의 잠재력을 보려고 몸부림치던 시절에 사르트르는 그 잠재력을 믿어준 사람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면 - 두 사람의 행동의 총합이 없었더라면 결코 그들 자신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보부아르의 생활은 여전히 글쓰기에 주로 할애되었다.  - P491

내가 철학자가 아니라는 말은 체계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철학을 열심히 공부해 왔고, 철학으로 학위를 받았고,
철학을 가르쳤고, 철학에 물들어 있다는 의미에서는 나도 여전히 철학자입니다. 내 책에 철학이 들어가 있다면 그 이유는 그게 내가 세상을보는 방식이고 내 책에서 그 방식을 제거하려야 제거할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보부아르보다 몇 세기 앞서 파스칼과 키르케고르도 데카트르와 해겔 같은 ‘체계적 철학자이기를 거부했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의 일부는 미래를 모르는 채, 결코 미리 알 수 없는 의미를 갈망하며사는 데 있다. 그런데 체계적 철학은 그 점을 망각한다. 보부아르의견해도 비슷하다. 삶은 미리 이해될 수 없으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과타인들이 보기에 어떻게 될지 불안해하며 살아가게 마련이다. 하지만 보부아르의 동시대인들은 파스칼과 키르케고르마저 ‘대체 철학으로 보았다. 그 철학자들은 여성은 아니었지만 신앙인이었기 때문이다. 보부아르 초기의 철학적 통찰, 그리고 이기심과 헌신 사이의 딜레마를 피해 가야 한다는 생각은 비슷한 이유로 오늘날 "철학자 칭호를 얻지 못하는 사상가들과 보부아르의 대화에도 나타나 있다.  - P494

사르트르는 인간적으로든 철학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보부아르의 비판을 피해 가지 못했다. 보부아르는 그에게 맹점이 있다고 생각했고 온 세상이 그 사실을 알 수 있도록 글로 썼다. 그렇지만 사르트르를 계속 사랑하는 것이 그녀의 선택이었다.
보부아르는 몽파르나스 묘지의 사르트르 바로 옆자리에 붉은색 터번, 붉은색 실내 가운, 올그런의 반지와 함께 묻혔다. 몽파르나스의사회당부터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그리스, 에스파냐의 대학들까지여러 단체가 보부아르를 추모했다. 장례식에 모인 군중은 페미니스트 철학자 엘리자베트 바댕테르(Elisabeth Badinter)의 선창에 따라 외쳤다. "여성들이여, 모든 것은 이 사람 덕분이다!"
- P502

보부아르는 안으로부터의 관점에서 자신을 우상"으로 바라본 적이 없다. 알리스 슈바르처와 한 인터뷰에서도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나 시몬 드 보부아르이지, 나 자신에겐 아니에요."라고 했다.2) 여성들이 본받을 만한 긍정적 모델이 부족하다는 점은 알고 있었다. 왜페미니즘의 이상을 실현하려다가 실패하는 여성들 말고 좀 더 긍정적인 여성 캐릭터를 소설에 등장시키지 않느냐는 질문도 받았다.13) 독자들이 그런 캐릭터에서 보부아르를 찾으려 하면 의문을 품게 된다.
보부아르 자신도 실패했기 때문에 이 캐릭터들도 페미니즘의 이상대로 살려다가 실패하고 마는 걸까?
- P503

보부아르가 안으로부터 바라본 자기는 절대 멈추지 않는 ‘되어 가는 자기‘였다. "모든 순간이 조화를 이루는 인생의 어느 한순간 따위는 없기에 인생의 어느 한 시점이 ‘시몬 드 보부아르‘를 보여준다고는 결코 믿지 않았다. 모든 행위는 실패할 가능성이 있고 어떤 실 - P507

패는 행위가 완료된 후에 비로소 실패임이 밝혀진다. 시간은 흐른다.
꿈은 바뀐다. 자기는 늘 다다르지 못한 지점에 있다. 보부아르 되기의 개별적 순간은 극적일 만큼 다양하다. 하지만 시몬 드 보부아르의삶에서 배울 점은 바로 이것이다. 아무도 저 홀로 자기가 되지는 않는다.
- P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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