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고 맑은 저녁이다.
푸르게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정월 대보름이 지난지 이틀째인데 달이, 쟁반같이 둥근달이 슬쩍 떠올랐다.
나는 왜 매번 보름달만 보면 혼불의 춘복이가 피가 터져라 외치는 ˝달 봤다아˝가 떠오를까?
그만큼 강렬했던, 그만큼 간절한 춘복이의 욕망이 달처럼 환해 설까?
하여 다시금 혼불 5권을 스륵스륵 펼쳐본다.
달이, 많다.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달들의 문장을 구경한다. 덕분에 언제나 나를 홀리는 초저녁 초승달을 보면 이제는 강실이가 소환될 것 같다.

어쩜 문장들을 저렇게 쓸 수 있을까? 철심을 눌러 쓴 듯한 최명희선생님의 글 앞에서 새벽 하늘에 비수같이 떠 있는 그믐달을 만난다.

달이야 어느 땐들 유정(有情) 하지 않을까.
초저녁 동산 위에 가느소롬 곱게 뜬 각시 눈썹같이 이제 막 생겨나기 시작하는 초승달이나, 무심코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그렇게 흰 살이 차 오른 반달, 그리고 참으로 온전하고 둥글어서 오직 우러러 바라보며 한동안을 그대로 서 있게 하는 보름달이며, 그 달이 한쪽부터 서운하게 이지러져 드디어는 하현(下)에 이르다가, 이제는 사윌 대로 사위어 빛을 다 깎여 버린 마지막 푸른 손톱이, 끝내 잠 못 이룬 채, 아직도 캄캄한 사경(四)의 새벽 하늘에 비수같이 떠 있는 그믐달.
우주 만물 삼라만상이 모두 한 빛으로 어둠에 잠기는 밤, 야청의 하늘에 홀로 뜬 달의 그 모양은, 때로 꿈 같고, 때로 넘치도록 충만하고,
때로는 또 처연한 신비로움을 느끼게 하여, 누구라도 달이 있는 밤에는그 달을 올려다보게 하지만,
정작으로 좋은 것은, 달의 모양이 아니라 달빛일 것이다.
- P38

해동(東)의 밭머리에 자운영 돋으면서, 건듯 스치는 바람결에도 부드러운 흙냄새가 섞여 있어, 흙이 열리는 향훈을 느낄 수가 있는 밤.
물오른 나무들이 젖은 숨을 뿜어 내어 촉촉한 대기 속 어디선가 꽃봉오리 터지는 소리가 연연하게 들릴 것만 같은데,
연분홍 살구꽃 수줍게 만개한 봄밤이나, 진분홍색 도발하는 복사꽃이 홀리듯이 피어나는 봄밤에 뜬 달은 잦아들게 애달프다. 부연 안개와 같은 기운이 구름도 아니면서 둥근 달의 낯을 가리워 감싸고 번지는 조요한 달빛은, 차라리 맑게 드러난 명월보다 묘취가 있다.
안타까운 연두빛을 머금어 포료한 그 달빛은 먼 산 봉우리를 아득히잠기게 하고, 살 속으로 습기같이 스며들어 피를 자욱하게 하니,
- P39

멍석에 둘러앉아 웃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차 오르는 달빛이 귓전에부서질 때, 괄괄괄, 촤르르르흐, 서 소리는 개울물 소리인가, 달빛 소리인가, 아니면 구슬을 파랗게 쏟는 소리인가.
이 달빛이 형광으로 찍힌 것 같던 박꽃들이 이울어 둥그렇게 달덩이로 떠오를 무렵이면, 밤 사이 뜰에는 찬 이슬이 내리고, 하늘은 물 속으로 가라앉아 가을이 깊어진다.
- P40

겨울은 사물이 살을 버리고 뼈로 돌아가는 계절이다.
그래서 제 형상을 갖지 않은 물마저도, 흐르고 흐르던 그 살을 허옇게 뒤집어 뼈다귀 드러내며 얼어붙는다.
그뿐인가, 바람 또한 결의 뼈를 날카롭게 세워 회초리로 허공을 가르며 후려치니,
날새의 자취도 그치고, 사람도 다니지 않으며, 짐승 또한 굴 속으로 들어가 몸을 사리는 혹독한 추위 속에, 사위를 둘러보아 그 무슨이나 온기 한 점 얻을 길 없는 삼동(三冬).
헐벗은 잿빛으로 앙상한 골격을 뻗치고 있는 낙목한천겨울 달은 얼음처럼 떠오른다.
그래서 그 이름을 빙륜이라 하는가.
얼음보다 차고 맑은 둥근 달은, 얼음가루가 안개같이 서린 손으로 삭막한 세상의 밤을 쓸어 내리며 푸르게 푸르게 옥물 들인다. 물든 밤은 그대로 다시 투명하게 얼어, 대낮같이 환한 달이 뜬 밤이면, 웬일인지 달 없는 밤보다 더 춥게 느껴지곤 한다.
아마 빛으로 속이 꿰뚫리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 P42


그 흰 눈도 없는 극한(極寒)의 밤에, 들여다보기 무서우리 만큼 깊고검푸른 거울이, 티 하나 없이 말갛게 씻기워 상공에 걸린 겨울 밤 하늘, 그 가슴 한복판에 얼음으로 깎은 흰 달이 부시도록 시리게 박혀 있는 빙월(水月)이야말로, 달의 정(精)이라 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강실이는 그 냉염한 달을 오래 오래 우러르며, 버선의 발등에 묻은 달빛이 속으로 얼어들어도 그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모른다.
다만 그네는 몇 번인가 고개를 돌려 희부연 댓돌 위에 뎅그마니 놓인 검은 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었다.
그 신은 얼핏 보면 달빛의 얼룩인가 싶기도 하였다.
- P43

거짓말처럼 한순간에 어두운 하늘이 트이면서, 황금 눈길이신 달의 정수리가 능선 위로 가느다랗게 비치었다.
"달 봤다아."
춘복이는 거멍굴 동산의 꼭대기 바위 날망에 올라, 두 다리를 장승마냥 뻗치고 선 채로 두 팔을 공중으로 번쩍 치켜 올리며 부르짖었다.
그 소리는 사나운 산짐승이 달을 보고 잡아먹을 듯이 응그리며운 용틀임으로 으르렁거리는 것같이 들렸다. 아니면 시퍼렇게 이들도록 오래 참고 참아 온 울음을 한 목에 터뜨리는 소리 같기도 하였다.
"달 봤다아아."
비명에 가까운 춘복이의 고함 소리가 동산을 뒤흔들며 공중에 울때, 함께 올라온 거멍굴 사람들은 달을 향해 넙죽이 큰절을 올렸다.
소원을 비는 것이다.
- P176

춘복이는 마음에 먹은 일이 있어, 힘이 되기만 한다면 풀뿌리, 바윗를 지나가는 바람한테라도 절절히 빌고 싶은 심정이었으며, 꾀를 빌릴수만 있다면 사람은 그만두고 들짐승, 날짐승한테라도 엎드리고 싶은
심정이었으니.
며칠 전부터 옴짝도 하지 않고 제 오막살이 농막에 웅크린 채, 그는오직 한 사람 강실이를 생각하며 궁리에 궁리를 기웠다가 뜯어냈다 뒤척이던 끝에 오늘, 달맞이에 일의 성패를 건 미친 사람처럼 단걸음에 내달아, 누구보다 먼저 동산 위의 날망에 올라선 심정이야.
그리고 드디어는 이렇게 달을 보고 만 것이다.
달을 차지하고 만 것이다.
춘복이는 숨이 막혀 지레 가슴이 터져 나갈 지경이었다.
"작은아씨를 내 사람 되게 해 주시요."
- P177


그것은 거대한 달이었다. 온전하게 둥그런 얼굴로, 검은 파도처럼 첩첩한 산 능선을 발 아래 치맛자락같이 거느리면서 떠오른 보름달은 놀랍게 크고 너무나 가까웠다. 무엇만이나 하다고 해야 할까. 춘복이는그렇게 큰 달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일이 없었다. 얼른 보면 커다란 방죽만 한 것 같지만 누우런 황금빛 용암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빛의 물살을 끝없이 뒤채는 이 달에는 어림없는 말이었다.
 보통 때 무심코 올려다보면 둥그렇게 눈 안에 들어오던 그 조그만 달이, 지금은 그의 두 팔을 벌린 아름으로는 당치도 않게 거대하여, 그것은 떠오른다기보다는 흥건하게 무거워서 금방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
달은 그의 머리 위에 뜬 것이 아니었다.
싯누렇다 못하여 화광을 받은 것처럼 붉은 주홍빛을 머금고 있는 그달은 바로 춘복이의 눈앞에 바짝 들이밀려와 있었다. 마치 놀라 바라보는 춘복이를 그대로 덮쳐 한 입에 삼켜 버릴 듯한 기세로.
가슴패기 맞닿게.
그는 숨이 질려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린 채 얼른 다물지를 못하였다.
달은 거대한 빛의 아가리였다.
그 아가리의 빛이 장마진 붉덕물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회오리 돌았다. 한번 빠지면 못 나오는 늪이 용틀임으로 뒤집히는 아가리.
- P183


인간의 갈피에 고인 시름과 눈물을 서럽게 위로해 주기는커녕,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고 빨아들여 빛으로 덮쳐 버릴 것 같은 그 붉누런 빛의 밀물을, 칼로 도려낸 듯 차갑게 뚜렷한 원으로 삼엄하게 가두는 달의 서슬에, 몇 낱 별빛마저 무색하게 지워져 버린 겨울 밤 하늘은 이 시린 궁청빛으로 깊어 더욱 시퍼렇다.
그 앞에 홀로 마주선 춘복이는 한 점 티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대로 달빛에 휩쓸리면 그 심연의 수렁 속으로 말려 들어가 다시는헤어나오지 못할, 아니면 그 물살에 떠밀려 곤두박질치며 떠내려 갈.
달은 무서운 기세로 점점 가까이 부딪칠 것처럼 다가왔다.
그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견고한 빛의 바위덩이 암벽 같기도 하였다.
아아, 차라리 저 달에 부딪쳐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죽고 싶다.
춘복이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달을 향하여 가슴을 내밀고 온몸으로 버티고 마주쳤다.
달은 아까보다 숨막히게 더 가까웠다.
가까이 온 달은 다시 누렇게 뒤집히어 붉덕물을 일으키면서, 거문거뭇 멍든 골짜기로 춘복이를 빨아들여 삼키려 하였다.
내가 너를 삼키리라.
- P184

춘복이는 입을 크게 벌리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달의, 싯누렇게 뒤집히며 붉덕물을 일으키는 소용돌이 달빛을 깊이깊이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목으로 빨려들어오는 달빛은 가슴을 깎으며 아프게 비집고 내려가 다시 폐장을 가득 채웠다.
이윽고 가슴이 벌어져 쪼개질 것 같은 통증에 그는 잠시 숨을 멈추었지만, 그곳에 뼈다귀처럼 걸린 달빛을 아랫배로 밀어내리고, 다시 무서운 기세로 흡월을 하였다. 머리꼭지 정수리에서 어깨뼈와 가슴팍, 그리고 단전과 손가락 발가락 끝까지 터질 만큼 차 오르도록 달빛을 들이켜는춘복이의 몸은 둥그렇게 부풀어 올랐다.
내가 너를 삼키리라.
그는 드디어 달빛에 딸려 오는 달이 덩어리째 삼켜질 때까지 그렇게사나운 짐승처럼 서서 흡월을 할 작정인 것 같았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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